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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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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프로 농구팀으로, 아메리칸 농구 협회(ABA)에 소속되었다.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1968년 창단하여 1969-70 시즌까지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더 플로리디안즈로 이름을 변경하고 플로리다주 여러 도시에서 경기를 치렀다. 짐 폴라드, 멜 다니엘스 등이 이 팀에서 활약했으며, 1972년 구단주가 팀을 해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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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구단 정보
정식 명칭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기타 명칭더 플로리디안즈
로고
창단1967년
해체1972년
이전 명칭미네소타 머스키스 (1967년–1968년)
리그ABA
디비전동부 디비전
연고지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홈 경기장마이애미비치 컨벤션 센터
베이프론트 아레나
상징색 (1968년–1970년)오랜지, 파랑
상징색 (1970년–1972년)검정, 자홍색, 오랜지
구단 관계자
구단주 (1968년–1969년)L.P. 실즈 & 프레드 제퍼슨
구단주 (1970년–1972년)네드 도일
단장데니스 머피
감독 (1968년–1969년)짐 폴라드
감독 (1969년–1970년)짐 폴라드 & 해럴드 블리트먼
마지막 감독해럴드 블리트먼
성적
리그 우승없음
디비전 우승없음
영구 결번없음

2. 역사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는 원래 미네소타 머스키스라는 이름으로 ABA 원년 시즌에 참가했던 팀이다. 1968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팀 이름을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로 변경했다.[1]

마이애미에서의 첫 두 시즌 동안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불안정한 홈 경기장 운영과 낮은 인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970년에는 새로운 구단주 아래 팀 이름을 '더 플로리디안즈'로 바꾸고 플로리다주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는 '지역 프랜차이즈' 운영을 시도했다.[1]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은 재정적인 어려움과 저조한 관중 동원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1972년 시즌 종료 후 해체되었다.[1] 이후 마이애미 히트가 창단되면서 마이애미 지역에 다시 프로 농구팀이 생겼지만, 플로리디안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2. 1.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1968-1970)

1968년, 팀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로 이름을 바꾸었다. 첫 홈 경기장은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와 그 부속 건물이었다.[1] 흰색 비키니와 고고 부츠 차림의 볼걸을 활용하는 등 홍보에 힘썼으나 많은 팬을 모으지는 못했다.

1968–69 ABA 시즌은 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스타 선수 짐 폴라드 감독의 지휘 아래 팀 역사상 최고의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플로리다에서의 첫 시즌을 43승 35패로 마쳤고, 플레이오프 동부 디비전 준결승에서는 이전 연고지 팀이자 전년도 챔피언 미네소타 파이퍼스를 7차전 접전 끝에 4승 3패로 꺾었다. 그러나 디비전 결승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1승 4패로 패했다.[1]

1969–70 ABA 시즌은 팀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홈 경기를 디너 키 오디토리움과 마이애미-데이드 주니어 칼리지 노스 캠퍼스 체육관에서 나누어 치렀다. 특히 과거 항공기 격납고였던 디너 키 오디토리움은 에어컨이 없어 실내가 매우 더웠고, 이로 인해 문을 열고 경기를 진행해야 했으며 선수들은 코트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맞춰 슛을 조절해야 하는 등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폴라드 감독이 해임되었고, 체이니 주립 대학교 출신의 할 블릿먼이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 또한, 소수 지분 파트너들이 팀 운영에 개입하여 감독 모르게 선수 트레이드를 단행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잦은 선수단 변동 속에서 팀은 23승 61패의 저조한 성적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시즌 종료 후 기존 소유주 쉴즈와 프레드 제퍼슨은 팀을 매각했다.

2. 2. 더 플로리디안즈 (1970-1972)

1969–70 시즌 이후, 새로운 구단주인 네드 도일은 팀 이름에서 "마이애미"를 빼고 플로리다주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 프랜차이즈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따라 팀 명칭은 "더 플로리디안즈"로 변경되었고, 홈 경기는 플로리다주 여러 도시에서 분산 개최되었다.[1]

도시경기장
마이애미 비치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
탬파커티스 힉슨 홀
세인트피터스버그베이프론트 아레나
잭슨빌잭슨빌 메모리얼 콜리세움
웨스트팜비치웨스트팜비치 오디토리움



도일은 코치진은 유지하면서도, 모든 선수를 새 시즌 시작 전에 트레이드하거나 방출하는 방식으로 선수단 전체를 교체하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3] 1970-71 시즌 초반 팀이 18승 30패로 부진하자, 도일은 감독을 밥 배스로 교체했다.[4] 배스 감독 부임 후 팀은 반등에 성공하여 37승 47패의 성적으로 동부 디비전 4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켄터키 커널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패배했다.

1971–72 시즌, 플로리디안스는 홈 경기를 마이애미탬파 두 도시에서만 치렀다. 이 시즌에도 팀은 36승 48패로 동부 디비전 4위를 차지하며 다시 한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게 4전 전패로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1]

특히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와의 홈 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관중 수가 매우 저조하자, 구단주 도일은 사우스 플로리다 지역에서 팀 운영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신시내티로 연고지를 이전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다른 대도시를 찾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결국 도일은 1972년 6월에 팀 해체를 결정했다. 이후 플로리다 지역에 프로 농구팀이 다시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며, NBA 확장 팀인 마이애미 히트가 1988년에, 올랜도 매직이 1989년에 창단되었다.

마이애미 히트는 NBA의 "하드우드 클래식 나이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5–06 시즌과 2011–12 시즌에 플로리디안스의 1970–71 시즌 유니폼 복제품을 착용하며 과거 플로리디안스 팀을 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마이애미라는 도시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이벤트일 뿐, 두 프랜차이즈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 고리는 없다.

3. 특징

1969–70 시즌 이후, 새로운 구단주 네드 도일은 팀 이름에서 "마이애미"를 빼고 팀을 플로리다 주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 프랜차이즈로 만들고자 했다. 이에 따라 홈 경기를 특정 도시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분산하여 개최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요 경기 장소는 다음과 같다.[1]

도시경기장
마이애미 비치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
탬파-세인트피터스버그커티스 힉슨 홀, 베이프론트 아레나
잭슨빌잭슨빌 메모리얼 콜리세움
웨스트팜비치웨스트팜비치 오디토리움



이러한 잦은 연고지 및 홈구장 변경은 안정적인 팬 기반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다. 또한, 도일 구단주는 1970-71 시즌을 앞두고 기존 선수단 전원을 트레이드하거나 방출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3]

1971–72 시즌에도 플로리디안스는 홈 경기를 마이애미와 탬파로 나누어 치렀다.[1] 그러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와의 플레이오프 홈 경기에서 관중 수가 매우 저조하자, 도일은 사우스 플로리다 지역에서 팀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1] 다른 도시로의 이전 시도가 실패하면서 결국 1972년 6월에 프랜차이즈는 해체되었다. 이후 플로리다 지역에 프로 농구팀이 다시 등장한 것은 NBA 확장 팀인 마이애미 히트(1988년)와 올랜도 매직(1989년)이 창단되면서부터였다.

마이애미 히트는 NBA의 "하드우드 클래식스 나이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5–06 시즌과 2011–12 시즌에 플로리디안스의 유니폼을 착용하며 과거 플로리디안스 팀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지만, 두 프랜차이즈는 마이애미라는 도시를 연고지로 삼았다는 점 외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4.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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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임기
짐 폴라드1968년 ~ 1969년
헤럴드 블릿먼1969년 ~ 1971년
밥 배스1971년[4]


4. 1. 짐 폴라드 (1968-1969)

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스타 선수였던 짐 폴라드는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의 초대 감독을 맡았다.[1] 폴라드 감독이 이끈 1968–69 ABA 시즌은 플로리디안즈에게 최고의 시즌이었으며, 플로리다에서의 첫 시즌을 43승 35패로 마쳤다. 당시 팀의 홈구장은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와 그 부속 건물이었다.[1] 플레이오프에서는 동부 디비전 준결승에서 미네소타 파이퍼스를 4승 3패로 꺾었으나, 디비전 결승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인 1969–70 ABA 시즌 도중 폴라드는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는 할 블릿먼이 임명되었다.[2]

4. 2. 헤럴드 블릿먼 (1969-1972)

짐 폴라드 감독의 후임으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1969–70 시즌 이후, 새로운 구단주인 네드 도일은 팀 이름에서 "마이애미"를 제외하고 "더 플로리디안즈"로 변경하며 여러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 프랜차이즈'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홈 경기는 여러 도시에서 분산되어 개최되었다.[1]

'''더 플로리디안즈 주요 경기 장소 (1970-1972)'''
도시경기장
마이애미 비치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
탬파-세인트피터스버그커티스 힉슨 홀, 베이프론트 아레나
잭슨빌잭슨빌 메모리얼 콜리세움
웨스트팜비치웨스트팜비치 오디토리움



도일 구단주는 팀의 모든 선수를 트레이드하거나 방출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헤럴드 블릿먼 감독은 유임시켰다.[3] 그러나 1970-71 시즌 초반 팀이 18승 30패로 부진하자, 구단은 블릿먼 감독을 경질하고 밥 배스를 후임 감독으로 임명했다.[4] 배스 감독 부임 이후 팀은 반등하여 37승 47패의 성적으로 동부 디비전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켄터키 커널스에게 2승 4패로 패배하여 탈락했다.

1971–72 시즌에도 플로리디안스는 홈 경기를 마이애미와 탬파에서 나누어 치렀다. 팀은 36승 48패로 다시 한번 동부 디비전 4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게 4전 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1]

특히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와의 홈 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매우 적었던 관중 수는 도일 구단주에게 사우스 플로리다 지역에서 팀 운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확신을 주었다. 신시내티로 연고지를 이전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다른 대도시를 찾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결국 도일 구단주는 1972년 6월에 프랜차이즈를 해체했다. 이후 플로리다 지역에 프로 농구팀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88년 NBA 확장 팀인 마이애미 히트가 창단되고 나서였다. 올랜도 매직은 그 다음 해에 창단되었다.

히트 프랜차이즈는 NBA의 "하드우드 클래식스 나이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5–06 시즌과 2011–12 시즌 동안 여러 경기에서 1970–71 플로리디안스의 홈 및 원정 유니폼 복제품을 착용함으로써 플로리디안스 프랜차이즈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프랜차이즈는 마이애미 시와의 연관성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4. 3. 밥 배스 (1970-1971)

1970-71 시즌 중반, 플로리디안즈는 18승 30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자 기존 감독 헤럴드 블릿먼을 경질하고 밥 배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했다.[4] 배스 감독은 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고, 플로리디안스는 정규 시즌을 37승 47패, 동부 디비전 4위로 마감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켄터키 커널스에게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5. 역대 홈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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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사용기간수용인원장소비고
마이애미비치 컨벤션 센터1968년
1970년~1972년
15,000명플로리다주 마이애미비치1968-1969 시즌 주 홈구장[1], 1970년부터 지역 순회 경기장 중 하나로 사용
디너 키 오디토리움1969년~1970년미상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코코넛 그로브에어컨 없는 옛 항공기 격납고. 실내가 매우 더워 문을 열고 경기를 했으며, 바닷바람이 경기에 영향을 미침.
마이애미 데이드 칼리지 노스 캠퍼스 체육관1969년~1970년미상플로리다주 마이애미디너 키 오디토리움과 함께 사용
웨스트팜비치 크리스천 컨벤션 센터1968년~1969년
1970년~1971년
5,000명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제2홈경기장[1] (본문에서는 웨스트팜비치 오디토리움으로도 언급됨)
잭슨빌 콜리시엄1971년~1972년10,276명플로리다주 잭슨빌제2홈경기장[1] (본문에서는 잭슨빌 메모리얼 콜리세움으로도 언급됨)
커티스 힉슨 홀7,000명플로리다주 탬파제2홈경기장[1]
베이프론트 아레나1970년~1972년7,500명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1]



플로리디안즈의 첫 시즌(1968-1969) 주 홈구장은 마이애미비치 컨벤션 센터였다.[1] 다음 시즌인 1969-1970 시즌에는 홈 경기를 디너 키 오디토리움과 마이애미-데이드 주니어 칼리지 노스 캠퍼스 체육관에서 나누어 치렀다. 특히 디너 키 오디토리움은 에어컨 시설이 없는 옛 항공기 격납고를 개조한 곳으로, 실내가 매우 더워 경기장 문을 열고 경기를 진행해야 했고, 이때 코트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선수들이 슛 정확도를 조절해야 하는 등 환경이 열악했다.

1970-1971 시즌부터 팀은 '마이애미'를 떼고 '더 플로리디안즈'로 팀명을 변경하며 특정 도시가 아닌 플로리다 지역 전체를 연고지로 삼는 '지역 프랜차이즈' 전략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홈 경기를 기존의 마이애미비치 컨벤션 센터를 포함하여, 탬파-세인트피터스버그 지역의 커티스 힉슨 홀과 베이프론트 아레나, 잭슨빌잭슨빌 콜리시엄(잭슨빌 메모리얼 콜리세움으로도 불림), 그리고 웨스트팜비치웨스트팜비치 크리스천 컨벤션 센터(웨스트팜비치 오디토리움으로도 불림)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했다.[1] 마지막 시즌인 1971-1972 시즌에는 주로 마이애미(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와 탬파(커티스 힉슨 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6.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명예의 전당 헌액자'''
선수
번호이름포지션활동 기간헌액 연도
34멜 다니엘스C1967–19682012
코치
이름포지션활동 기간헌액 연도
짐 폴라드 1헤드 코치1968–19691978



'''참고:'''


  • 1 선수 자격으로 헌액됨.

6. 1. 멜 다니엘스 (선수)

멜 다니엘스는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에서 등번호 34번을 달고 센터 포지션으로 활약했다. 2012년에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2. 짐 폴라드 (감독)

명예의 전당 헌액자 짐 폴라드는 팀의 헤드 코치였다.


전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스타 선수였던 짐 폴라드는 1968–69 ABA 시즌에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의 감독을 맡았다.[1] 이 시즌은 플로리디안즈 역사상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받으며, 팀은 43승 3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 동부 디비전 준결승에서는 미네소타 파이퍼스를 4승 3패로 꺾었으나, 디비전 결승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1]

하지만 다음 시즌인 1969–70 ABA 시즌 중 팀 성적 부진 등으로 인해 폴라드는 감독직에서 해고되었다.[2] 그는 선수 시절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1978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시즌별 성적

'''''참고:''' 승=승리, 패=패배, % = 승률''

시즌%플레이오프결과
마이애미 플로리디안즈
1968–694335.551디비전 준결승 승리
디비전 결승 패배
마이애미 4, 미네소타 3
인디애나 4, 마이애미 1
1969–702361.274진출 실패
더 플로리디안즈
1970–713747.440디비전 준결승 패배켄터키 4, 더 플로리디안즈 2
1971–723648.429디비전 준결승 패배버지니아 4, 더 플로리디안즈 0


참조

[1] 웹사이트 Remember the ABA: The Floridians http://www.remembert[...]
[2] 뉴스 Floridians Dismiss Pollard and then Lose to Pipers with Blitman as Coach; PITTSBURGH WINS AT MIAMI, 101-91 https://www.nytimes.[...] 1969-11-30
[3] 웹사이트 Daytona Beach Morning Journal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4] 웹사이트 Gettysburg Times - Google News Archive Search https://new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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