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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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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카타는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 호조 도키마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남편 도키마사와 함께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하고 자신의 사위인 히라가 토모마사를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말년에는 교토에서 딸 부부에게 의탁하여 생활했으며, 1229년 4월 22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키노카타는 '카메노마에 사건'과 '마키씨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여러 드라마와 희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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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카타
기본 정보
마키노카타의 초상화
마키노카타의 초상화
이름마키노카타
다른 이름키타노만도코로 (北政所)
코다이인 (高台院)
로마자 표기Makino Kata
생몰년1556년 ~ 1624년 10월 17일 (69세)
출생지미노국 아쓰미
사망지교토
신분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종1위
가계
아버지마키노 야스나리
어머니오가사와라 사다요리의 딸
남편도요토미 히데요시
형제자매마키노 나가요시
주요 정보
봉록3,000석
관위종1위
묘소고다이지
계명주쇼인덴게이시덴니 (壽聖院殿桂岩𩣑尼)

2. 생애

도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혼인 시기는 불분명하며,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스기하시 다카오는 헤이지의 난(1159년) 이전에 혼인했다는 설을 주장했다.[1] 그러나 『구칸쇼(愚管抄)』에 마키노카타를 "도키마사의 젊디 젊은 아내"라고 표현한 점이나, 마사노리의 탄생 시기(1189년)를 고려하면 이견이 많다.[2] 사카이 고이치는 호조 도키후사의 탄생(1175년) 후에 도키마사가 전처와 사별하고 마키노카타와 재혼했다는 설을 제시했고,[2] 호소카와 시게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1180년) 이후, 아마도 간토 제압 후로 추정한다.[3] 혼고 가즈토도 호소카와의 견해를 타당하다고 평가한다.[4]

스기하시와 호소카와는 호조 씨와 마키 씨의 관계가 이른 시기부터 밀접했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호소카와는 도키마사의 전처 소생 적남 호조 무네토키의 에보시오야가 마키 무네치카였을 가능성을 지적한다.[3]

주에이 2년(1182년) 11월, 마키노카타는 출산 후의 의붓딸 마사코에게 남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외도를 알렸다. 이로 인해 마사코는 마키노카타의 오빠 마키 무네치카에게 명해 요리토모의 애첩 가메노마에의 저택을 부수는 소동을 일으켰다.

겐큐 2년(1205년) 6월, 도키마사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도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사위이자 교토 슈고였던 히라가 토모마사가 시게타다의 아들 시게야스를 마키노카타에게 참언하고, 마키노카타가 다시 도키마사에게 참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 7월, 마키노카타는 도키마사와 공모하여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하고 토모마사를 새 쇼군으로 옹립하여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호조 마사코요시토키 남매에게 발각되었고, 윤 7월 20일에 도키마사와 함께 출가한 뒤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토모마사 역시 교토에서 추방되었다('''마키씨 사건''').

토모마사의 아내였던 딸은 곤츄나곤 후지와라노 쿠니미치에게 재가했고, 마키노카타는 도키마사 사후 교토의 딸 부부에게 의탁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가로쿠 3년(1227년) 3월, 쿠니미치의 저택에서 남편 도키마사의 13주기를 지내고 일족을 거느리고 여러 사찰에 참배하는 모습이 『메이게츠키(明月記)』에 기록되었으며, 필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마키노카타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했다.

마키노카타의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메이게츠키(明月記)』 간키 원년(1229년) 6월 11일조에 후지와라노 타메이에의 아내( 우츠노미야 요리츠나의 딸, 마키노카타의 손녀)의 비용 부담으로 49일 불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마키노카타의 불사라면, 같은 해 4월 22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

2. 1. 호조 도키마사와의 결혼

도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혼인 시기는 불분명하며,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스기하시 다카오는 헤이지의 난(1159년) 이전에 혼인했다는 설을 주장했다.[1] 그러나 『구칸쇼(愚管抄)』에 마키노카타를 "도키마사의 젊디 젊은 아내"라고 표현한 점이나, 마사노리의 탄생 시기(1189년)를 고려하면 이견이 많다.[2] 사카이 고이치는 호조 도키후사의 탄생(1175년) 후에 도키마사가 전처와 사별하고 마키노카타와 재혼했다는 설을 제시했고,[2] 호소카와 시게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1180년) 이후, 아마도 간토 제압 후로 추정한다.[3] 혼고 가즈토도 호소카와의 견해를 타당하다고 평가한다.[4]

스기하시와 호소카와는 호조 씨와 마키 씨의 관계가 이른 시기부터 밀접했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호소카와는 도키마사의 전처 소생 적남 호조 무네토키의 에보시오야가 마키 무네치카였을 가능성을 지적한다.[3]

주에이 2년(1182년) 11월, 마키노카타는 출산 후의 의붓딸 마사코에게 남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외도를 알렸다. 이로 인해 마사코는 마키노카타의 오빠 마키 무네치카에게 명해 요리토모의 애첩 가메노마에의 저택을 부수는 소동을 일으켰다.

겐큐 2년(1205년) 6월, 도키마사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도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사위이자 교토 슈고였던 히라가 토모마사가 시게타다의 아들 시게야스를 마키노카타에게 참언하고, 마키노카타가 다시 도키마사에게 참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해 7월, 마키노카타는 도키마사와 공모하여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하고 토모마사를 새 쇼군으로 옹립하여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호조 마사코요시토키 남매에게 발각되었고, 윤7월 20일에 도키마사와 함께 출가한 뒤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토모마사 역시 교토에서 추방되었다('''마키씨 사건''').

토모마사의 아내였던 딸은 곤츄나곤 후지와라노 쿠니미치에게 재가했고, 마키노카타는 도키마사 사후 교토의 딸 부부에게 의탁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가로쿠 3년(1227년) 3월, 쿠니미치의 저택에서 남편 도키마사의 13주기를 지내고 일족을 거느리고 여러 사찰에 참배하는 모습이 『메이게츠키(明月記)』에 기록되었으며, 필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마키노카타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했다.

마키노카타의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메이게츠키(明月記)』 간키 원년(1229년) 6월 11일조에 후지와라노 타메이에의 아내( 우츠노미야 요리츠나의 딸, 마키노카타의 손녀)의 비용 부담으로 49일 불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마키노카타의 불사라면, 같은 해 4월 22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

2. 2. 카메노마에 사건

주에이 2년 (1182년) 11월, 마키노카타는 출산 후의 의붓딸 마사코에게 남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외도를 알렸다. 마사코는 마키노카타의 오빠 무네치카에게 명해, 요리토모의 애첩 카메노마에의 저택을 파괴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이는 훗날 권력 투쟁으로 비화될 마키씨 사건의 전조였다.

2. 3.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과 마키씨 사건

1205년 6월, 토키마사에 의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은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의 사위이자 교토 슈고로서 교토에 체류하고 있던 히라가 토모마사가 시게타다의 아들 시게야스의 일을 마키노카타에게 참언하고, 그 말을 들은 마키노카타가 토키마사에 참소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이어, 그 해 7월, 마키노카타는 토키마사와 공모하여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하고, 사위 토모마사를 신임 쇼군으로 옹립할 계획으로 막부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호죠 마사코ㆍ요시토키 남매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윤7월 20일 토키마사와 함께 출가하였고, 이후 요시토키의 손에 의해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토모마사 역시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마키씨 사건'''이라고 한다.

마키씨 사건은 권력 남용과 족벌 정치의 폐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2. 4. 유배와 말년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는 마키씨 사건으로 이즈국에 유배되었다. 겐큐 2년(1205년) 토키마사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는 마키노카타의 참소 때문이었다.[1] 같은 해 7월, 마키노카타는 토키마사와 공모하여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폐하고 사위 토모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호죠 마사코와 요시토키 남매의 반격으로 실패했다.[1] 이 사건으로 토키마사와 함께 출가하여 이즈국으로 유배되었고, 토모마사는 교토에서 추방되었다.[1]

토키마사 사후, 마키노카타는 교토의 딸 부부에게 의탁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가로쿠 3년(1227년) 3월, 쿠니미치 저택에서 토키마사의 13주기를 지내고 여러 사찰을 참배하는 모습이 『메이게츠키(明月記)』에 기록되었으며, 필자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마키노카타의 이러한 행태를 비판했다.[1][5]

마키노카타의 사망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메이게츠키(明月記)』 간기 원년(1229년) 6월 11일조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타메이에의 아내(마키노카타의 손녀)가 비용을 부담하여 49일 불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5] 이를 근거로, 마키노카타는 1229년 4월 22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5]

3. 관련 작품


  • 희곡

쓰보우치 쇼요1896년에 쓴 희곡이다.

3. 1. 희곡

츠보우치 쇼요가 1896년에 쓴 희곡이다.

3. 2. TV 드라마


  • 호조 마사코 (1970년, TV 아사히) - 배우 이와사키 카네코
  • 신・헤이케 이야기 (1972년, NHK 대하드라마) - 배우 기타 미치에
  • 풀이 타오르다 (1979년, NHK대하드라마) - 배우 오오타니 나오코
  • 요시츠네 (2005년, NHK대하드라마) - 배우 타나카 미나코
  • 타이라노 키요모리 (2012년, NHK대하드라마) - 배우 쓰키야마 마유미
  • 가마쿠라 시대의 13인 (2022년, NHK대하드라마) - 배우 미야자와 리에 (이름은 '리쿠'로 설정)

참조

[1] 서적 牧の方の出身と政治的位置 思文閣出版 1994
[2] 서적 鎌倉殿と執権北条氏―義時はいかに朝廷を乗り越えたか NHK出版 2021
[3]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4] 서적 新・中世王権論 文芸春秋社 2017
[5] 서적 史伝 北条政子 -鎌倉幕府を導いた尼将軍- NHK出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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