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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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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지의 난은 1159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교토를 비운 틈을 타 후지와라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일으킨 반란이다.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하고 신세를 살해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기요모리의 귀환과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미나모토 씨는 몰락하고 다이라 씨가 권력을 잡았으며, 이후 겐페이 전쟁으로 이어져 다이라 씨가 멸망하고 무가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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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지의 난
분쟁 정보
분쟁헤이지의 난
일부미나모토 – 다이라 가문 분쟁 ( 헤이안 시대)
니조 천황이 황궁에서 탈출하는 모습
날짜1160년 1월 19일 – 1160년 2월 5일
장소교토 및 주변 지역
결과다이라 가문의 승리; 미나모토 지도자 추방
교전 세력 1다이라 가문, 니조 천황에게 충성하는 세력, 고시라카와 천황에게 충성하는 세력
교전 세력 2미나모토 가문
지휘관 1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시게모리
다이라노 쓰네모리
후지와라노 미치노리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지휘관 2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요시히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병력 1수천 명
병력 2수천 명
사상자 1알려지지 않음
사상자 2알려지지 않음
원인조정 영향력에 대한 가문 간 분쟁
전투 정보
전투 이름平治の乱
『평치이야기 그림두루마리』 산조 저택 습격 (보스턴 미술관 소장)
날짜헤이지 원년 12월 9일 (1160년1월 19일) - 에이랴쿠 원년 3월 11일 (1160년4월 19일)
장소헤이안쿄
결과후지와라노 쓰네무네, 고레카타 등의 니조 친정파 승리 → 니조 친정파 실각, 고시라카와 인세이 부활 → 니조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인세이파의 병립
교전 세력 112월 9일: 신제이
12월 26일: 니조 친정파
2월 20일: [[파일:Imperial Seal of Japan.svg|20px]]고시라카와 상황, 후지와라노 다다미치, 다이라노 기요모리
교전 세력 212월 9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니조 친정파
12월 26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2월 20일: 후지와라노 고레카타, 후지와라노 쓰네무네 (니조 친정파)
지휘관 112월 9일: 오에노 이에나카, 다이라노 야스다다 등의 호쿠멘 무사
12월 26일:
다이라노 기요모리
다이라노 시게모리
다이라노 쓰네모리
2월 20일: 다이라노 기요모리 가신 다다카게, 다메나가
지휘관 212월 9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12월 26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미쓰야스는 전투 중에 이탈)
2월 20일: 후지와라노 고레카타, 후지와라노 쓰네무네(체포 대상자)
병력 112월 9일: 호쿠멘 무사 불명
12월 26일: 천황 친정파 3000기 이상 (다이라노 시게모리 1000기, 다이라노 요리모리 1000기, 다이라노 쓰네모리 1000기, 로쿠하라 잔존군 불명) (학습원본 『헤이지 이야기』『헤이지 이야기』 여러 판본 중 학습원본이 가장 성립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학습원본은 이와나미쇼텐의 『신일본고전문학대계43 호겐이야기・헤이지이야기・조큐기』에 수록되어 있다.)
2월 20일: 고레카타, 쓰네무네 체포 무사 불명
병력 212월 9일: 산조 저택 습격군 500기 (학습원본 『헤이지 이야기』)
12월 26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군 약 800기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300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200기 약,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300기) (학습원본 『헤이지 이야기』)
2월 20일: 후지와라노 고레카타, 후지와라노 쓰네무네 0
사상자 1신제이 자살
사상자 2후지와라노 노부요리 처형,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패주 후 사망, 그 외 노부요리에게 가담한 무장 자살 또는 처형, 후지와라노 쓰네무네, 후지와라노 고레카타 등 유배
전쟁 정보
분쟁헤이지의 난
날짜1159년
장소교토
결과천황파 승리 (고시라카와 상황 유배)
교전국 1천황파 (니조 천황)
교전국 2상황파 (고시라카와 상황)
지휘관 1다이라노 기요모리
지휘관 2미나모토노 요시토모

2. 배경

호겐의 난 이후,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 9월 5일(호겐 3년 8월 11일)에 퇴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했다.[5] 니조 천황이 즉위했지만, 모든 정무는 상황(上皇)이 된 고시라카와 천황이 인세이 제도를 통해 맡았다.[6]

이 시기에 후지와라 노부요리와 신제이(후지와라 미치노리)가 주요 고문으로 등장했는데, 신제이가 더 두각을 나타냈다.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의 일부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권력 유지를 도왔지만, 미나모토 씨는 신제이의 영향 아래 궁정에서 다이라 씨가 더 총애받는다고 느꼈고, 스토쿠 천황에게 충성했던 미나모토 타메요시 등의 처형 명령에 분개했다.

1159년 말, 다이라 기요모리가 가족과 함께 개인적인 순례를 위해 교토를 떠나자, 야심 찬 후지와라 노부요리는 이를 기회로 미나모토 씨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 1. 호겐의 난 이후의 정국

호겐의 난(1156년)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여 인세이를 시작했으나, 그 사이에 인노긴신(院近臣-인을 보필하는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5][6]

측근 신하인 신제이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하여, 신제이가 노부요리의 근위대장 취임을 저지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측의 투쟁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무사단의 당주로서 양대 세력을 형성한 이세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호겐의 난에서 공을 세우며 실질적인 유력 무력 집단으로 대두하였다. 난에서 최고의 전공을 세운 요시토모는 논공행상에서 자신은 정 5위의 관직만 얻은 데 비해 기요모리가 정 4위 관직에 장원까지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고, 양자의 반목도 첨예해졌다. 요시토모는 처음에 신제이에게 접근하려 하였으나 기요모리가 선수를 쳐서 신제이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시키자, 신제이와 대립하는 노부요리와 손을 잡았다. 이로써 신제이·기요모리와 노부요리·요시토모의 2개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에 달했다.

1159년(헤이지 1년) 12월, 노부요리·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지역에 신사참배에 나간 사이를 틈타 거병하여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의 저택을 불태웠으며, 신제이를 자결시켰다. 노부요리는 일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급거 귀경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구출함과 동시에 노부요리가 점거하고 있던 궁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요시토모 군을 격파하였다.

1160년 (헤이지 원년 12월 9일~26일)에 일어난 이 사건은 헤이지의 난[1], 헤이지의 소란, 헤이지의 폭동 또는 헤이지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보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1156년(보원 원년) 윤9월에 ‘보원신제’라 불리는 새로운 제도를 발표했다. “규슈의 땅은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덴노(天皇)의 명령 밖에, 어찌 사사로운 권세를 휘두르겠는가?”라며 왕토사상을 강하게 천명한 이 신제는 장원정리령을 주된 내용으로 했다. 토바원정기에는 전국에 많은 장원이 형성되었고, 각지에서 국무 수행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장원정리령은 그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의 장원·국아령·공령을 덴노의 통치하에 두려는 의도였으며, 장원공령제 성립에 큰 계기가 된 새로운 제도로 여겨진다. 그 국정개혁을 기획·추진한 인물이 고시라카와의 측근인 신제이였다.

신제이는 개혁 실현을 위해 기록소를 설치했다. 장관인 상경(上卿)에는 다이나곤 산조 공교가 취임했고, 실무를 담당하는 벤관(弁官)에는 우중벤 후지와라 코리카타, 좌소벤 미나모토 마사요리, 우소벤 후지와라 토시노리(신제이의 적자)가 기용되었으며, 그 아래 21명의 기닌(寄人)이 장원 영주로부터 제출된 문서의 심사, 본소 간의 분쟁 재판을 담당했다. 더욱이 내리의 복구에도 착수하여, 1157년(보원 2년) 10월에 재건했다. 그 직후에 새롭게 신제 30개조를 발표하여 공사·행사의 정비, 관인의 규율 엄정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신제이와 그 일족의 등장은 눈부셨고, 다카이 시게나카의 딸을 어머니로 둔 토시노리·후지와라 사다노리는 벤관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실무를 담당하는 한편, 후지와라 아사코(고시라카와 천황의 유모)를 어머니로 둔 후지와라 시게노리·후지와라 나가노리는 각각 도토미·미노의 수령이 되었다. 신제이 자신은, 보원의 난에서 패사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소령을 몰수하여 후원령에 편입하고, 자신은 그 예소가 되는 등 경제적 기반 확보에도 힘썼다.

국정 개혁 추진을 위해 신제이는 헤이시헤이 시게모리(기요모리)를 두터이 대우했다. 헤이시 일문은 호쿠멘부시 중 최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난 이후 시게모리(기요모리)가 하리마슈, 헤이 요리모리가 아키슈, 헤이 노리모리가 아와지슈, 헤이 쓰네모리가 히타치노스케가 되는 등 형제들이 4개국의 수령직을 차지하며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또한 쇼엔 정리, 쇼칸·백성 단속, 신진·악승(悪僧) 통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의 치안 유지에도 헤이시의 무력은 필수적이었다. 야마토노카미에 헤이 모토모리가 임명된 것도 헤이시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마토고후쿠지의 소령이 가득 차 있어, 지금까지 국검(国検)을 하려고 해도 신진·악승(悪僧)의 저항으로 인해 잇따라 실패로 끝났다. 시게모리(기요모리)는 무력을 배경으로 국검(国検)을 단행하는 한편, 사찰 세력의 특권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등 유연한 대응으로 야마토의 지행국 지배를 실시했다. 더 나아가 시게모리(기요모리)는 다이자이타이니에 취임함으로써 일송무역에 깊이 관여하게 되어 경제적 실력을 높였다. 신제이는 자신의 아들 후지와라 나리노리와 시게모리(기요모리)의 딸(후의 가잔인 가네마사의 아내)의 혼약으로 헤이시와의 제휴를 세상에 보여주고,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2. 2. 권력 투쟁의 격화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여 인세이(院政-현 천황이 천황의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院에 들어가 정치를 하는 것으로 실권은 그대로 유지하는 섭정형태)를 시작했으나, 그 사이에 인노긴신(院近臣-인에서 정치하는 상황(上皇)을 보필하는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6]

측근 신하인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하여, 신제이가 노부요리의 근위대장 취임을 저지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측의 투쟁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무사단의 당주로서 양대 세력을 형성한 이세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가와치 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호겐의 난에서 공을 세우며 실질적인 유력 무력 집단으로 대두되었다. 난에서 최고의 전공을 세운 요시토모는 논공행상에서 자신은 정 5위의 관직만 얻은 데 비해 기요모리가 정 4위 관직에 장원까지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고, 양자의 반목도 첨예해졌다. 요시토모는 처음에 신제이에게 접근하려 하였으나 기요모리가 선수를 쳐서 신제이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시키자 신제이와 대립하는 노부요리와 손을 잡았고, 신제이·기요모리와 노부요리·요시토모의 2개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에 달했다.

미복문원을 중심으로 동궁·모리히토의 옹립을 꾀하는 세력(니조 친정파)이 있었다. 미복문원은 토바 법황으로부터 장원의 대부분을 상속받아 최대의 장원 영주가 되어 있었기에, 그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미복문원은 오래전부터 염원하던 자신의 양자 모리히토의 즉위를 신제이에게 요구했다. 원래 고시라카와의 즉위는 모리히토 즉위까지의 중계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신제이도 미복문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1158년 8월 4일, 신제이와 미복문원의 협의에 따라 고시라카와 천황은 모리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니조 천황). 이로써 고시라카와 원정파와 니조 친정파의 대립이 시작된다. 니조 친정파는 후지와라 쓰네무네(니조의 삼촌)·후지와라 코리카타(니조의 유아 시절 동무, 기록소의 弁官의 한 사람)를 중심으로 미복문원의 지원을 배경으로 고시라카와의 정치 활동을 억압한다. 이에 대해 고시라카와는 코노에 천황의 급사로 갑자기 황위를 계승한 탓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신제이뿐이었다. 게다가 신제이 자신도 원래 토바 법황의 측근으로 미복문원과도 강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불리했다. 고시라카와에게는 자신의 원정을 지탱할 측근의 육성이 급선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시라카와는 무사슈(武蔵守) · 후지와라 노부요리(藤原信頼)를 발탁한다. 노부요리는 호겐(保元) 2년(1157년) 3월에 우곤에곤츄죠(右近衛権中将)이 되고, 10월에는 쿠라도노캄파(蔵人頭), 이듬해 2월에는 산기(参議) · 코오구우굥료(皇后宮権亮), 8월에는 곤츄나곤(権中納言), 11월에는 켄비이시베토(検非違使別当)으로 급속히 승진한다. 원래 노부요리의 일문은 무사시국(武蔵国) · 무쓰국(陸奥国)을 지행국으로 하고 있어, 양국과 깊은 인연을 가진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와 연계하고 있었다. 1155년 8월에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요시토모의 장남)가 숙부인 미나모토노 요시카타(源義賢)를 멸한 무사시국(武蔵国)에서의 오쿠라 전투(大蔵合戦)에서도, 무사슈(武蔵守)였던 노부요리의 지원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1158년 8월에 후백하원청(後白河院庁)이 개설되자, 노부요시는 원(院)의 군마를 관리하는 규베토(厩別当)에 취임한다. 요시토모는 궁중의 군마를 관리하는 사마도(左馬頭)였고, 양자의 동맹 관계는 더욱 강고해졌다. 요시토모의 무력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얻은 노부요시는, 자신의 여동생과 섭관가의 적자 · 고노에 모토자네(近衛基実)의 혼인도 실현시킨다. 섭관가는 호겐의 난에 의해 후지와라노 다다자네(藤原忠実)의 지행국 · 요시나가(頼長)의 소령이 몰수된 데다가, 가인으로서 장원(荘園) 관리의 무력을 담당하고 있던 미나모토노 다메요시(源為義) 등이 처형됨으로써 각지의 장원(荘園)에서 분쟁이 격화되는 등, 그 세력을 크게 후퇴시키고 있었다. 혼란의 수습을 위해서는 대체의 무력이 필요하고 요시토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노부요시와의 제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으로는 그 외에,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후지와라노 이에나리(藤原家成)의 삼남)이나 미나모토노 모리나카(源師仲)가 가세하여 원정파(院政派)의 진용도 정비되었다.

2. 3. 니조 천황 친정파의 등장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정치 세력인 미복문원을 중심으로 동궁·모리히토의 옹립을 꾀하는 세력(니조 친정파)이 있었다. 미복문원은 토바 법황으로부터 장원의 대부분을 상속받아 최대의 장원 영주가 되어 있었기에, 그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미복문원은 오래전부터 염원하던 자신의 양자 모리히토의 즉위를 신사이에게 요구했다. 원래 고시라카와의 즉위는 모리히토 즉위까지의 중계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신사이도 미복문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1158년 8월 4일, 신사이와 미복문원의 협의에 따라 고시라카와 천황은 모리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니조 천황). 여기에 고시라카와 원정파와 니조 친정파의 대립이 시작된다. 니조 친정파는 후지와라 쓰네무네(니조의 삼촌)·후지와라 코리카타(니조의 유아 시절 동무, 기록소의 弁官의 한 사람)를 중심으로 미복문원의 지원을 배경으로 고시라카와의 정치 활동을 억압한다.

3. 전개

호겐의 난 이후, 고시라카와 천황은 인세이를 시작했으나, 인노긴신(院近臣-상황의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 간의 권력 투쟁, 그리고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 간의 반목이 심화되었다.

1159년(헤이지 1년) 12월,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신사 참배를 간 틈을 타 거병,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하고 신제이를 자결시켰다. 이들은 산조궁을 공격하여 고시라카와 상황을 납치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7] 노부요리는 섭정을 선포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급히 귀환하여 상황과 천황을 구출하고 궁성을 공격, 요시토모 군을 격파했다. 기요모리는 계략을 써서 천황과 상황을 탈출시켰다.[9] 이후 칙령을 받은 기요모리는 다이라 시게모리를 시켜 궁궐을 공격, 미나모토 요시히라가 맞섰으나 결국 록하라에서 패배, 퇴각했다.[8]

요시토모는 오와리에서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노부요리는 참수되었다. 요시토모의 아들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은 목숨을 건졌다.[9] 이로써 가와치 겐지는 몰락하고 헤이케(이세 헤이시)가 헤이케 정권을 열었다.

3. 1. 구마노 참배와 거병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이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하면서, 인노긴신(院近臣-상황의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측근 신하인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다.[15]

한편, 무사단 당주로서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호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워 유력한 무력 집단으로 떠올랐다. 요시토모는 논공행상에서 기요모리보다 낮은 관직과 적은 영지를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둘 사이의 반목이 심해졌다. 요시토모는 신제이와 손을 잡으려 했으나, 기요모리가 먼저 신제이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하자, 신제이와 대립하던 노부요리와 손을 잡았다. 이로써 신제이·기요모리와 노부요리·요시토모의 두 정치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1159년(헤이지 1년) 12월,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신사 참배를 간 사이 거병하여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의 저택을 불태웠다. 신제이는 자결했다.[7] 산조궁 공격에서, 노부요리와 미나모토 동맹군은 고시라카와 상황을 납치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7] 추격전 끝에 신제이는 사망했다.

미나모토 요시토모와 후지와라 노부요리는 납치한 고시라카와 천황을 니조 천황과 함께 궁궐로 옮겨 가택 연금했다.[8] 노부요리는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하고 정치적 권력 장악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했다. 미나모토 측은 군사적으로 충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고, 기요모리의 귀환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기요모리가 귀환했을 때, 미나모토 측은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주저했다.

기요모리는 노부요리에게 평화 제안을 했으나, 이는 계략이었다. 노부요리가 방심하는 사이, 니조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은 기요모리 측으로 탈출했다.[9]

산조궁 야습 (수권화 세부)


록하라 전투

3. 2. 기요모리의 귀환과 반격

平治|헤이지일본어 원년(1159년) 12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구마노 지역에 신사참배를 간 사이 거병하여 고시라카와 상황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의 저택을 불태워 신제이를 자결시켰다.[7][8] 노부요리는 일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기요모리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했다.

삼조동전(三条東殿) 터(헤이지의 난 발발지)


기요모리는 귀환 즉시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구출하고, 노부요리가 점거하고 있던 궁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요시토모 군을 격파하였다.[9] 기요모리는 노부요리에게 평화 제안을 했지만, 이는 계략이었다. 노부요리가 방심하는 사이, 니조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은 기요모리 측으로 탈출했다.[9]

기요모리는 천황으로부터 요시토모와 노부요리를 공격하라는 칙령을 받았다. 다이라 시게모리(기요모리의 장남)는 기병 3,000명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미나모토군은 록하라로 돌격했지만, 결국 혼란스러운 퇴각을 시작했다.[8]

기요모리는 구마노 참배 길에 있는 기이국에서 교토의 변란 소식을 들었다.[16] 유아사 무네시게와 구마노 별당 탄카이의 협력으로 17일 귀경한다. 한편, 요시토모는 쿠데타를 위해 은밀히 소수의 군세를 모았을 뿐 전투를 예상하지 못했다. 교토의 군사적 균형은 크게 변화하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우세는 흔들리게 된다.

25일 밤, 후지와라 나리요리(유카타의 동생)가 고시라카와를 방문하여[19] 니조 천황의 탈출 계획을 알리자, 고시라카와는 곧바로 닌나지로 탈출한다.[20] 26일 새벽, 니조 천황은 내리를 나서[21] 기요모리의 저택인 육파라로 이동한다. 후지와라 나리요리가 이 소식을 전하자, 공경·제대부들이 속속 육파라에 집결한다. 요시토모와 제휴 관계에 있던 다다미치·모토자네 부자도 참입함으로써, 기요모리는 순식간에 관군으로서의 체면을 갖추게 되었고, 요시토모·요리토모의 토벌 선지가 내려졌다.

『평지가 이야기 그림 두루마리』육파라 행행 두루마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국보

3. 3. 요시토모의 패배와 헤이시 정권의 성립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여 인세이를 시작했으나, 그 사이에 인노긴신(院近臣-인을 보필하는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측근 신하인 신제이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고, 무사단 당주로서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호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둘의 반목이 심해졌다. 요시토모는 노부요리와 손을 잡고 신제이, 기요모리와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1159년(헤이지 1년) 12월,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지역에 신사참배를 간 사이 거병하여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를 자결시켰다. 노부요리는 일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급히 귀경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구출하고 궁성을 공격하여 요시토모 군을 격파했다.[7]

산조궁 공격에서 노부요리와 미나모토 동맹군은 고시라카와 천황을 납치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추격전 끝에 신제이는 사망했다.[8] 미나모토 요시토모와 후지와라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 천황을 니조 천황과 함께 궁궐로 옮겨 가택 연금했다. 노부요리는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하고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했다. 미나모토 측은 기요모리의 귀환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기요모리는 노부요리에게 평화 제안을 했으나, 이는 계략이었다. 노부요리가 방심하는 사이, 니조 천황과 고시라카와 상황은 기요모리 측으로 탈출했다.[9]

기요모리는 천황으로부터 요시토모와 노부요리를 공격하라는 칙령을 받았다. 다이라 시게모리(기요모리의 장남)는 기병 3,000명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했다. 미나모토 요시히라(요시토모의 장남)는 맞서 싸웠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이라군은 후퇴했고 미나모토군은 추격을 위해 궁궐을 나섰다. 이것은 기요모리의 위장 작전이었다. 다이라군의 일부 부대가 궁궐을 점령하여 미나모토군은 후퇴할 길이 끊겼다. 미나모토군은 기요모리의 근거지인 록하라를 향해 돌격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혼란스러운 퇴각을 시작했다.[8]

기요모리는 구마노 참배 길에 있는 기이국에서 교토의 변란 소식을 들었다. 유아사 무네시게와 구마노 별당 탄카이의 협력으로 귀경했고, 이토 가게츠나·다테 사다야스 등 이가·이세의 로토가 합류했다. 한편, 요시토모는 쿠데타를 위해 은밀히 소수의 군세를 모았을 뿐 전투를 예상하지 못하여, 교토의 군사적 균형은 크게 변화하고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우세는 흔들리게 된다.

산죠 공교는 요시토모의 전횡에 분노를 느껴 기요모리를 설득하는 동시에 니조 친정파와 접촉을 시도했다. 공교와 유카타에 의해 니조 천황의 육파라 행행 계획이 세워졌다. 기요모리는 요시토모에게 공순의 뜻을 보였고, 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자기 편이 된 것을 기뻐했다.

유카타가 고시라카와를 방문하여 니조 천황의 탈출 계획을 알리자, 고시라카와는 닌나지로 탈출한다. 니조 천황은 내리를 나서 기요모리의 저택인 육파라로 이동한다. 후지와라 나리요리가 이 소식을 전하자, 공경·제대부들이 속속 육파라에 집결한다. 요시토모와 제휴 관계에 있던 다다미치·모토자네 부자도 참입함으로써, 기요모리는 관군으로서의 체면을 갖추게 되었고, 요시토모·요리토모의 토벌 선지가 내려졌다. 천황·상황의 탈출을 알게 된 고시라카와 인정파는 격렬하게 동요했고, 요리토모는 요시토모를 “일본 제일의 어리석은 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삼조전 습격에 참가했던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미나모토 시게나리(源重成)·미나모토 미쓰모토(源光基)·미나모토 스에사네(源季実), 신사이(信西)를 체포했던 미나모토 미쓰야스(源光保) 등의 혼성군이었다. 요시토모(義朝)휘하의 군세는, 그의 아들 요시타이라(義平)·아사나가(朝長)·요리토모(頼朝), 삼촌 요시타카(義隆), 시나노겐지(信濃源氏)의 히라가 요시노부 등의 일족, 가마다 마사키요·고토우 사네모토·사사키 히데요시 등의 랑등에 의해 형성되었고, 요시토모(義朝)의 세력 기반인 관동에서는 미우라 요시스미·가즈사 히로츠네·야마우치 스도우씨 등이 참전했을 뿐이었다.

기요모리(清盛)는 내리(内裏)가 전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로쿠하라(六波羅)에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세우고, 적장 미나모토 시게모리와 동생 요리모리가 출진했다. 헤이시군(平氏軍)은 예정대로 후퇴하고, 전장은 로쿠하라(六波羅) 근처로 이동했다. 요시토모(義朝)는 결사의 각오로 로쿠하라(六波羅)에 접근하지만 로쿠죠가와라에서 참패한다. 요시토모(義朝)는 헤이시군(平氏軍)과 미나모토 요리마사군(頼政軍)의 공격을 받고, 야마우치 스도우 토시미치·가타기리 카게시게 등이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사이 전장에서 탈출했다.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에 구명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참수되고, 요시토모는 동쪽으로 피신하나 결국 요시토모의 장남 가마쿠라 아쿠겐타와 함께 처형되고 삼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후일 가마쿠라 막부를 세움)는 이즈국으로 유배된다.

결국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요시토모를 패배시켰다. 요시토모는 오와리에서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요시토모의 두 아들, 미나모토노 토모나가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도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세 아들, 요리토모(당시 13세, 25년 후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됨), 노리요리와 요시츠네는 목숨을 건졌다.[9]

이 헤이지의 난 결과, 요리토모 집안인 가와치 겐지는 몰락하고 기요모리 집안인 헤이케(이세 헤이시)가 중앙 정계에서 거의 유일의 세도 무사(武士)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헤이케 정권을 열었다.

4. 결과 및 영향

다이라노 기요모리미나모토노 요시토모를 패배시켰고, 요시토모는 오와리로 도망가던 중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도모나가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도 죽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훗날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노리요리, 요시츠네는 살아남았다.[9] 기요모리는 요리토모를 유배 보내고, 미나모토 가문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헤이케 정권을 성립시켰다.

헤이지의 난으로 궁정의 권위는 약화되고, 권력은 다이라 씨족에게 넘어가 미나모토 씨족과 다이라 씨족의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고시라카와 상황의 다이라 세력에 대한 불만과 함께 겐페이 전쟁으로 이어졌고,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씨족이 패배하며 끝났다.[10]

가마쿠라 시대의 서사시 ''헤이지 이야기''는 헤이지의 난에 참여한 사무라이들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있다.[10] ''호겐 이야기''와 ''헤이케 이야기''와 함께 이러한 전쟁 이야기(군기 모노가타리)는 미나모토 씨족과 다이라 씨족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11]

헤이지의 난 이후 고시라카와 인세이파와 니조 천황 친정파 모두 신제이 타도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제거되었다. 신사이의 아들들은 귀경을 허락받았지만, 쓰네무네와 유카타는 유배되었고, 모로나카, 요리토모, 요시요시도 유배되었다. 신사이의 목을 벤 미쓰야스와 그의 아들 미쓰무네는 모반 혐의로 유배되어 살해되었다.

4. 1. 헤이시 정권의 성립과 무가 정치의 시작

호겐의 난에서 승리한 고시라카와 천황은 1158년(호겐 3년)에 퇴위하여 인세이를 시작했으나, 그 사이에 인노긴신(院近臣-인을 보필하는 측근)과 무사(武士) 사이에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23]

측근 신하인 신제이(信西)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하여 신제이가 노부요리의 근위대장 취임을 저지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측의 투쟁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무사단의 당주로서 양대 세력을 형성한 이세 헤이시다이라노 기요모리겐지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호겐의 난에서 공을 세우며 실질적인 유력 무력 집단으로 대두하였다. 난에서 최고의 전공을 세운 요시토모는 논공행상에서 자신은 정 5위의 관직만 얻은 데 비해 기요모리가 정 4위 관직에 장원까지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고 양자의 반목도 첨예해졌다. 요시토모는 처음에 신제이에게 접근하려 하였으나 기요모리가 선수를 쳐서 신제이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시키자 신제이와 대립하는 노부요리와 손을 잡았고 신제이·기요모리와 노부요리·요시토모의 2개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에 달한다.

1159년(헤이지 1년) 12월, 노부요리·요시토모는 기요모리가 구마노 지역에 신사 참배를 간 사이에 거병하여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유폐시키고 신제이의 저택을 불태우고 신제이를 자결시킨다. 노부요리는 일시적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나 급거 귀경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구출함과 동시에 노부요리가 점거하고 있던 궁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요시토모 군을 격파하였다.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에 구명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참수되고, 요시토모는 동쪽으로 피신하나 결국 요시토모의 장남 가마쿠라 아쿠겐타와 함께 처형되고 삼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후일 가마쿠라 막부를 세움)는 이즈국으로 유배된다.

이 헤이지의 난 결과, 요리토모 집안인 가와치 겐지는 몰락하고 기요모리 집안인 헤이케(이세 헤이시)가 중앙 정계에서 거의 유일의 세도 무사(武士)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비 후지와라 씨로는 최초로 생전에 실직으로서 태정대신에 올라 헤이케 정권을 열었다. 요시토모는 오와리에서 교토를 탈출하는 도중 가신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요시토모의 두 아들, 미나모토노 도모나가와 미나모토노 요시히라도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세 아들, 요리토모(당시 13세, 25년 후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됨), 노리요리와 요시츠네는 목숨을 건졌다.[9]

그 후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유배 보내고, 미나모토 가문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결국 일본 봉건 역사 시대에 네 번의 무사(侍) 지배 정부 중 첫 번째 정부를 수립했다.

4. 2. 겐페이 전쟁의 발발

헤이지의 난은 궁정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켜, 권력을 다이라 씨족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는 미나모토 씨족과 다이라 씨족 사이의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적대감과 고시라카와 상황의 다이라 세력에 대한 불만이 결합되어 겐페이 전쟁이 발발했고,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씨족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났다.[10]

가마쿠라 시대의 서사시인 ''헤이지 이야기''는 헤이지의 난에 참여한 사무라이들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있다.[10] ''호겐 이야기''와 ''헤이케 이야기''와 함께 이러한 전쟁 이야기 (군키 모노가타리)는 미나모토 씨족과 다이라 씨족의 부흥과 몰락을 묘사하고 있다.[11]

5. 역사적 평가

헤이지의 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난의 원인, 전개 과정, 결과에 대한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가와치 쇼스케(河内祥輔)는 최근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가 신제이(信西)를 살해한 것이 고시라카와 상황(後白河上皇)의 명령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그는 『헤이지 이야기(平治物語)』와 『구칸초(愚管抄)』의 기록 차이, 신제이 아들의 유배지 변경 시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28] 이 설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상황은 자신의 원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신제이를 제거하려 했고, 헤이지의 난은 이러한 상황의 의도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토키 야스오(元木泰雄)는 신제이를 제거하려면 유배를 보내면 충분하며, 니조 천황 친정을 막기 위해서는 니조 천황 측근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비판했다.[29][30]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에 대한 포상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논쟁도 있다. 모토키 야스오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파격적인 포상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31] 후루사와 나오토(古澤直人)는 무가의 선례와 비교했을 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에 대한 포상이 부족했으며, 이것이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불만을 야기하여 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반박했다.[35]

5. 1. 이설

최근, 가와치 쇼스케(河内祥輔)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가 신제이(信西)를 살해한 것은 고시라카와 상황(後白河上皇)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 『헤이지 이야기(平治物語)』에서는 고시라카와 상황니조 천황(二条天皇)이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에게 감금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구칸초(愚管抄)』에서는 니조 천황은 "잡아 가두었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모셔 가두었다"고 구별되어 있어, 고시라카와 상황이 구속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않다.
  • 『공경보임(公卿補任)』에 따르면, 신제이의 아들 도시노리(俊憲)의 유배지 변경(에치고 국(越後国)⇒아와 국(阿波国))이 노부요리 일파 멸망 후 다음 해 정월에 이루어졌다. (유배를 명한 노부요리 등이 모반인으로 처단되어도 신제이 일족에 대한 처분은 취소되지 않았고, 2월이 되어서야 사면령이 내려진다.)


이 설에 따르면, 원래 도바 법황(鳥羽法皇)이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니조 천황이고, 고시라카와 상황은 즉위까지의 임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도바 법황의 사망으로 본래라면 원정(院政)을 행할 자격이 없는 고시라카와 상황이 형식적으로 원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제이는 경력으로 보아 "도바 법황의 측근"이며, 법황 생전의 뜻대로 니조 천황에 의한 친정(親政)을 실현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장래에 신제이에 의해 자신의 원정이 정지될 것이라 생각한 고시라카와 상황이, 니조 천황의 친정이 시작되기 전에 신제이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원정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으킨 것이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가와치 설에서는 "니조 친정파"와 고시라카와 상황의 대립 시작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 이후로 보고, 후지와라노 쓰네무네(藤原経宗)·고레카타(惟方) 등 니조 천황 측근도 이 단계에서는 신제이와의 대립은 있어도 고시라카와 상황과는 대립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산조도노(三条殿)의 화재는 노부요리·미나모토노 요시토모(義朝) 측의 방화라는 충분한 증거가 없고, 실화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신제이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산조 기미노리(三条公教)에 의해 니조 천황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군사적 보호하에 놓이고, 공경(公卿)들이 그곳에 결집하면서 공가 사회에서 옹립된 아들 천황이 아버지 상황과 대결하는 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고시라카와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노부요리 등을 버렸다. 즉, 25일 밤 니조 천황의 로쿠하라(六波羅) 행차(行幸) 단계에서 이미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은 끝나고, 다음 날 전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마지막 저항에 불과하며, 다이라노 기요모리 측에서 보면 잔적 소탕전이었다는 것이다.

이 설에 대해 모토키 야스오(元木泰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28]

  • "원(院)의 입장에서 신제이를 제거하려면 죄를 씌워 유배 보내면 된다."
  • "니조 친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신제이보다 니조 측근의 제거가 우선이다."
  • "외척인 후지와라노 쓰네무네가 친정 저지에 가담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 "고시라카와 상황모치히토 왕을 포함한 후지와라노 나리코 소생의 황자를 배려한 흔적이 없다."


후루사와 나오토(古澤直人)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29][30]

  • "신제이 일가의 대두는 귀족 사회에 심각한 동요를 주었고, 친정파와 원정파의 대립은 고시라카와 상황니조 천황의 대립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 근신(院近臣)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친정파인 후지와라노 쓰네무네에게 "신제이 제거"라는 공통 목표·대의명분을 주었다.)"
  • "노부요리가 처형된 후에도 "신제이 제거"를 내건 후지와라노 쓰네무네·고레카타·미나모토노 미쓰야스(源光保) 등 친정파가 중앙에서 건재한 이상, 신제이의 아들에 대한 처분은 취소되지 않았다. (단, 유배 강행이 원(院)에 의한 친정파 제거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한편, 모토키는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원인으로 여겨져 온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의 공훈에 대한 포상" 문제에 대해,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수령(受領)으로서 최고위직인 하리마노카미(播磨守)에 임명되어 장차 공경(公卿)으로 승진이 약속된 반면,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우마곤노카미(右馬権頭)(후에 사바노카미(左馬頭))에 임명되어 승전(昇殿)을 허락받고, 더 나아가 시모쓰케노카미(下野守)에 재임명되고, 종5위상(従五位上)으로 승진하는 것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일족을 희생하면서까지 분투한 결과를 생각해 보면 냉대받았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그는 포상의 많고 적음을 고려할 경우, 정4위하(正四位下) 형부경(刑部卿) 다이라노 다다모리(平忠盛)의 아들이자 호겐의 난(保元の乱) 당시 이미 정4위하 아키노카미(安芸守)였던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종5위하 시모쓰케노카미였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사이에 격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게다가 아버지와 동생이 반역자로 처형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인근신(院近臣)의 중직인 사바노카미에 임명되고, 더욱이 가와치 겐지(河内源氏)로서 증조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 이래 승전을 허락받은 것은 "파격적인 포상"이었으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포상에 불만을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31] 이에 대해 혼고 가즈토(本郷和人)[32]와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33]도 이를 지지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후루사와 나오토는 사바노카미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미나모토노 미쓰나카(源満仲) 부자가 임명된 이래,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와 깊은 인연이 있는 관직이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우마노스케(右馬助)(시모쓰케노카미)에서 우마곤노카미, 더 나아가 사바노카미로 승진한 것은 일정한 배려의 결과임을 인정한다. (후루사와는 사바노카미를 인근신으로서의 요소보다는 세이와 겐지의 관직으로서의 요소를 더 중시한다.) 그러나 무가 사회에서 포상의 많고 적음의 기준은 현임 관위와의 비교 이상으로, 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 진압에서 6위(六位)에서 4위(四位)로 월계(越階)하고 더 나아가 시모쓰케노조(下野掾)에서 시모쓰케노카미로 승진한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나,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 진압에서 자신이 정4위하 이요노카미(伊予守)에 임명될 뿐만 아니라 아들과 낭당(郎党)도 관직에 임명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와 같은 "선례"와의 비교이며, 후에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頼朝)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 토벌의 전공으로 종5위하에서 정4위하로 월계했을 때 히데사토의 선례가 제기된[34] 것으로 보아 조정에서도 반역 진압에 대한 포상의 선례로서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에 대한 포상을 검토해 보면, 후지와라노 히데사토나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와 같은 "반역 진압"이라는 실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종5위상 승진은 난의 다음 해까지 미뤄졌고 4위로의 월계는 없었으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싸운 자식(미나모토노 요시히라(義平))이나 낭당에 대해서는 관직 등의 포상이 없었던 등 무가의 선례와 비교하면 명백히 적은 포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망폐국(피폐하여 여러 가지 부담이 면제되었던 국가)인 시모쓰케 국(下野国)의 국수(国守)에 머물렀기 때문에 내리 재건의 성공(任官)에서 일부 면제를 받았고(반대로 성공에 의한 승진이 기대할 수 없었고), 신제이의 아들과의 혼인이 거절되는 등, 호겐의 난(保元の乱)에서의 (무가의 선례와 비교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에 대한 포상의 저하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격차를 더욱 확대한 결과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불만을 깊게 한 것이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며, 모토키 설은 포상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의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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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Seeds in the Heart https://books.google[...] 1999
[11]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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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平治物語
[14] 웹사이트 平治の乱(ヘイジノラン)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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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논문 保元・平治の乱 教育社 1977
[17] 논문 平治の乱の構図意図をめぐ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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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적 河内源氏- 頼朝を生んだ武士本流 中央公論新社 2011
[25] 서적 乱世に挑戦した男 平清盛 新人物往来社 2011
[26] 서적 愚管抄
[27] 서적 愚管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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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논문 平治の乱の構図意図をめぐって
[30] 논문 平治の乱の経緯と結末について
[31] 논문 保元の乱における河内源氏 1988
[32] 서적 なぞとき清盛 文春新書 2012
[33] 서적 平清盛 福原の夢 講談社選書メチエ 2007
[34] 서적 吾妻鑑 1184-04-10
[35] 논문 平治の乱における源義朝の謀反の動機形成-勲功賞と官爵問題を中心に- 2013
[36] 서적 中世初期の〈謀叛〉と平治の乱
[37] 서적 平家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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