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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요시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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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요시토키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무장으로, 호조 도키마사의 아들이다. 그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신으로 가마쿠라 막부 수립에 기여했으며, 13인의 합의제에 참여하여 권력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요리토모 사후,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제거하고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으나, 사네토모 암살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2대 싯켄으로 취임하여 오에 히로모토 등과 함께 막부 정치를 이끌었으며, 조큐의 난을 진압하여 막부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을 다진 핵심 인물로 평가받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 정적을 숙청하고 겐지 쇼군 가문을 몰락시킨 배후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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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요시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시토키
조큐기 그림 두루마리 제2권에 실려 있는 삽화 속 요시토키의 모습
씨족간무 헤이시 방계 호조 씨(北條氏)
출생1163년
사망1224년 7월 1일
향년62세
묘소시즈오카현이즈노쿠니시 미나미에마 호조사
개명요시토키(義時)
간카이(觀海)
도쿠무네(得宗)
별명에마노 시로(江間四郞) 또는 고시로(小四郞)
소슈(相州)
우쿄노죠(右京兆)
오슈(奧州)
가몬Japanese Crest mitu Uroko.svg
가몬 설명비늘 가몬
관직 정보
관위사가미노카미(相模守)
종4위하
우쿄노 곤노다이후(右京權大夫)
무쓰노카미(陸奧守)
막부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3인의 합의제
제2대 싯켄(執權) (1205년 - 1224년)
쇼군미나모토노 사네토모
가계
아버지호조 도키마사
어머니이토 스케치카의 딸
형제무네토키(宗時)
마사코(政子)
요시토키
도키후사(時房)
마사노리(政範)
아와노쓰보네(阿波局)
도키코(時子) 등
배우자정실: 히메노마에(姬の前)
계실: 이가노가타(伊賀の方)
측실: 아와노 쓰보네 (도키마사의 딸과는 동명이인)
이사 도모마사(伊佐朝政)의 딸
자녀야스토키(泰時)
도모토키(朝時)
시게토키(重時)
아리토키(有時)
마사무라(政村)
사네야스(實泰)
도키히사(時尚)
타케도노(竹殿)
딸 (구게 이치조 사네마사(一條實雅)의 딸) 등
생애
시대헤이안(平安) 시대 말기 - 가마쿠라(鎌倉) 시대 초기
주군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요리이에(賴家)
사네토모(實朝)
후지와라노 요리쓰네(藤原賴經)
서명

2. 생애

1163년 호조 도키마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호조 요시토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기여했다. 1180년 이시바시 산 전투에 참전했으나 형 호조 무네토키는 전사했다. 1181년 유력 고케닌 자제들로 구성된 '기후쥬'에 들어가 요리토모의 침소 경호 등을 맡았다. 1185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이끄는 헤이케 추토군에 참가, 아시야우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189년 오슈 전투에도 종군했다. 1190년 요리토모의 상경을 수행했으며, 1192년 히키 도모무네의 딸 히메노 마에와 결혼했다.

요리토모 사후,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가마쿠라도노가 되면서 13인의 합의제 일원이 되었다. 1203년 히키 요시카즈의 난을 일으켜 히키 일족을 멸하고, 요리이에의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3대 쇼군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1204년 사가미노카미에 임명되었고, 1205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을 진압했다. 같은 해 마키 씨 사건으로 아버지 도키마사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싯켄 지위에 올랐다. 1213년 와다 전투에서 와다 요시모리를 멸하고 사무라이도코로 벳토가 되었다.

1219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암살당하면서 겐지 쇼군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후지와라노 요리쓰네를 4대 쇼군으로 맞이하고, 호조 마사코와 함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싯켄 정치를 확립하였다.

1221년 조큐의 난이 발발, 고토바 상황과 대립했다. 요시토키는 군사를 일으켜 교토를 점령하고 상황을 유배 보내며 막부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후 로쿠하라 탄다이를 설치, 조정을 감시하고 막부의 영향력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224년 6월, 요시토키는 62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각기와 더위로 인한 병사로 알려져 있으나, 독살설도 제기된다.

2. 1. 청년기

호조 도키마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에마노 고시로'''(江間小四郞)라고 불렸다. 어머니는 이토 스케치카의 딸로 추정된다. 마사코는 누나이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내가 되었다. 지쇼 4년(1180년),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아버지 도키마사, 형 무네토키와 함께 참전했으나 형은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후 요리토모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가마쿠라 입성에 기여했다.

요와 원년(1181년) 4월, 요시토키는 유력 고케닌의 자제들로 구성된 친위조직 '기후쥬'(祗候衆)에 들어가 요리토모의 침소 경호 등을 맡았다. 요시토키는 가와치 겐지 혈연자인 몬후타쓰(門葉)의 중간에 해당하는 게시(家子)의 지위에 있었고,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혔다. 이때 이미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전사한 형 무네토키 대신 호조 씨의 적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즈마카가미』에는 에마(江間)로 기록된 경우가 많아 에마 집안의 초대 시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겐랴쿠 2년(1185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가 이끄는 헤이케 추토군을 따라 서쪽으로 갔으며 아시야우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분지 5년(1189년) 7월, 오슈 전투에 종군하였다. 겐큐 원년(1190년) 11월 요리토모의 상경 때 수행했다. 겐큐 3년(1192년) 9월 25일, 요리토모의 중개로 히키 도모무네의 딸 히메노 마에(姫の前)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2. 2. 정권 쟁탈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2대 가마쿠라도노(鎌倉殿)로 뒤를 이은 후 13인의 합의제 일원이 되었다. 요시토키는 이 중 최연소(30대)였고 관직도 없었으나,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와 함께 참여했다.

1203년, 요리이에가 병에 걸리자 도키마사는 히키 요시카즈를 암살하고 히키 요시카즈의 난을 일으켜 히키 일족을 멸망시켰다. 구간초에는 요시토키가 요리이에의 아들 미나모토노 이치만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요리이에의 동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3대 쇼군으로 옹립하고, 오에노 히로모토와 함께 만도코로 벳토에 취임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1204년 요시토키는 사가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구간초 등에는 요리이에가 요시토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이가노 카타를 계실로 맞아 1205년에 다섯째 아들 마사무라를 낳았다.

1205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에서 도키마사와 요시토키는 대립한다. 도키마사는 사위 히라가 아사마사의 참소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모반죄로 몰아 제거했다. 요시토키는 시게타다 토벌에 반대했지만 결국 동의했고, 시게타다 멸망 후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요시토키는 시게타다의 모반은 거짓이라며 도키마사를 질책했다.

같은 해 7월, 도키마사와 마키노 카타는 사네토모를 폐하고 히라가 아사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다. 요시토키는 누나 마사코와 협력하여 미우라 요시무라의 도움을 받아 도키마사와 마키노카타를 이즈국으로 추방했다(마키 씨 사건). 그리고 히라가 아사마사를 교토에서 주살했다.

도키마사 추방 후, 요시토키는 고케닌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1205년 요시토키는 도키마사의 뒤를 이어 만도코로 벳토 및 싯켄 지위에 취임했다.

요시토키는 아다치 가게모리 등과 연계하여 막부 최고 책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지만, 권력을 스스로 드러내는 데는 신중했다. 1209년 사네토모가 만도코로를 설치하여 친정을 시작했다.

1212년 요시토키는 와다 씨와의 긴장이 높아지자, 1213년 이즈미 지카히라의 난을 계기로 와다 요시모리를 도발하여 반란으로 몰아 멸망시켰다(와다 전투). 요시토키는 요시모리를 대신하여 사무라이도코로 벳토가 되어 만도코로 벳토와 겸무하게 되었다.

1219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구교에게 암살당하면서 겐지(源氏)의 정통은 끊어졌다. 요시토키가 사네토모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혹도 있지만,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사네토모 암살 이후, 막부는 새 쇼군으로 왕자를 임명하여 가마쿠라로 보내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고토바인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막부는 구조 요리쓰네를 4대 쇼군으로 맞아들였다. 요리쓰네는 당시 한 살 남짓한 아기였기에 마사코가 '비구니 쇼군'으로서 요리쓰네의 후견인이 되었고, 요시토키는 이를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하는 형태로 싯켄 정치를 확립하였다.

2. 3. 사네토모 암살

1219년 정월 27일, 사네토모가 쓰루오카 하치만구에서 구교에게 암살당하면서 요리토모로부터 이어져온 겐지 쇼군 가문은 단절되었다. 요시토키는 사네토모 바로 옆에 없었기에 암살을 피했다. 이 사건과 이후 수습 과정에서 요시토키 배후 조종설[29][30], 사네토모의 쇼군 친정 강화에 불만을 품은 요시토키와 미우라 요시무라 등 가마쿠라 고케닌 공모설[31][32], 호조 씨에 대항하는 미우라 요시무라 흑막설[33][34][35], 고토바 상황 흑막설[36] 등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최근에는 흑막설을 부정하고 구교의 단독 범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37][38][39][40][41][42]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시토키는 사네토모를 따라 태도를 받들 예정이었으나, 당일 흰 개를 본 후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미나모토 나카아키와 교대하여 귀가했다. 그 결과 나카아키는 사네토모와 함께 암살되었지만 요시토키는 살아남았다. 요시토키는 전년 오쿠라 약사당을 건립했고, 꿈에서 약사당 신령으로부터 사네토모를 따르지 말라는 계시를 받았으며, 흰 개도 신령의 사자였다고 한다. 반면 『구칸쇼』에서는 사네토모가 요시토키에게 하치만구 중문에 머물라고 명했고, 요시토키는 암살 현장에 동행하지 않았지만 나카아키는 요시토키로 오인되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토키가 쇼군 살해를 막지 못한 실태를 은폐하기 위해 현장에 없었다고 『아즈마카가미』가 왜곡했다는 설도 있다.[43]

겐지 쇼군 단절로 막부 내 동요가 커지자, 1219년 2월에는 요리토모의 이복동생 아노 젠세이의 아들 토키모토가 쇼군 자리를 노리고 스루가국에서 거병했으나, 요시토키는 가네쿠보 유키치카를 파견하여 토벌했다. 사네토모 암살 후, 막부는 새 쇼군으로 친왕(親王)의 가마쿠라 하향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고토바 상황은 이를 거절하고 연기했다. 『구칸쇼』에서는 일본이 둘로 쪼개지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친왕 쇼군은 사네토모 후견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사네토모가 없는 상황에서 막부 권위가 상승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막부가 거듭 친왕 하향을 요청하자, 상황은 총희 가메키쿠 소유 장원의 지토 폐지를 요구했다. 막부는 이를 거부하고, 요시토키의 동생 도키후사에게 1천 기(騎)를 이끌고 상경시켜 교섭하게 했으나, 양측의 강경한 태도로 교섭은 결렬되었다. 다만 고토바 상황은 황자가 아니면 셋칸케 자제라도 가마쿠라로 보내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막부는 황족 쇼군을 포기하고 1219년 7월에 요리토모 여동생의 증손이자 구조 미치이에의 아들인 미토라(후의 후지와라 요리쓰네)를 4대 가마쿠라 쇼군으로 맞이했다. 당시 1세였던 미토라는 즉시 정이대장군에 임명될 수 없었고(실제 쇼군 취임은 7년 후), 정무를 볼 수도 없었다. 이에 마사코가 가마쿠라 쇼군 지위를 대행하여 정무를 담당하고, 요시토키가 이를 보좌하여 실무를 보충함으로써 실권을 쥐는 싯켄 정치가 확립되었다.

이후 쇼군 후계자 문제에 불복한 세쓰 겐지 출신 미나모토 요리시게가 교토에서 모반을 계획했다가 상황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에게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궐이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황이 요리시게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44][42] 1220년에는 구교의 이복동생 젠쿄가 구교에게 가담했다는 혐의로 교토에서 주살되었다.

2. 4. 조큐의 난

1221년, 조큐의 난이 발생했다. 고토바 상황은 호조 씨에게 환멸을 느껴 섭정 요시토키를 불법자로 선포하고 처형하려 했다. 교토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요시토키는 자신의 군대에 교토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으며, 1221년에 함락되었다.[1] 마사코는 이 음모를 밝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토바 상황은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요시토키의 아들 호조 야스토키가 수도를 점령했다.

오오우리 소실(大内裏焼失) 이후 고토바 상황은 막부를 포함한 각 방면에 재건을 위한 부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공가, 사찰, 무사 누구도 비협조적이어서 상황은 막부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조큐 3년 5월 14일, 조난지(城南寺)의 불사 수호라고 칭하며 여러 나라의 병사를 소집하자, 인세 내 친가마쿠라파를 숙청하고 요시토키의 교토 대관 이가 미쓰스에를 살해하고 거병했다. 15일, 요시토키 추토의 관선지가 전국에 발포되어 여러 나라의 슈고인, 지토들에게 상황에게 달려와 참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토키는 생애 최대의 난국에 직면하게 된다.

선지에는 요시토키의 이름뿐이었고, 막부 자체를 쓰러뜨린다고 명언하지 않았지만, 마사코는 막부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고 하며 요리토모 이래의 은혜를 호소하고 고케닌들을 단결시켰다. 또한, 호조 씨 다음으로 유력한 고케닌인 미우라 요시무라가 일찍부터 요시토키 지지 자세를 명확히 했다. 막부 수뇌부에 의한 군의에서는 신중론도 나오는 가운데, 오에노 히로모토의 "방어로는 도고쿠 고케닌의 동요를 초래한다"는 의견과 마사코의 "상경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말에 의해 교토로의 출격 방침이 일단 결정되었다. 이가 미쓰스에 전사의 보고를 받은 막부는 다시 동요했지만, 히로모토와 미요시 야스노부가 다시 진격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다시 교토 공격 방침이 결정되었다. 요시토키는 적자 야스토키를 총대장으로 도카이도에서 교토로 군세를 보내고, 차남 아사토키, 동생 도키후사를 다이쇼군으로 호쿠리쿠·도산의 삼도에서 교토로 올라오게 했다. 막부 수뇌부의 적극 작전이 효력을 발휘하여 도고쿠 무사들이 속속 동원령에 응하여 총 19만 대군이 되어 도읍으로 쳐들어갔다. 도중, 시나노국의 무사 이치카와 씨가 호쿠리쿠도의 다이쇼군 아사토키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군하여 에치고·엣추의 경계, 오야시라즈 부근을 돌파하여 전진하자, 요시토키는 즉시 그 공을 치하하며 "한 명도 남김없이 섬멸하라. 산사냥을 해서라도 체포하라. 적을 소탕하지 않고 공을 서둘러 교토를 공격하려고 하지 마라"라고, 의기양양하면서도 신중한 지령을 발하고 있다. 한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요시토키 저택에 벼락이 떨어진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조정에 반역한 것에 의한 멸망의 전조가 아닌가 불안해하는 요시토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막부군이 가마쿠라를 떠난 후 6월 8일, 요시토키의 저택에 벼락이 떨어져, 심부름하는 남자가 1명 사망했다. 이를 두려워한 요시토키는 오에노 히로모토에게 "조정을 쓰러뜨리기 위한 상경으로 이러한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막부의 운명도 여기까지라는 전조일까"라고 묻자, 히로모토는 "군신의 운명은 천지가 정하는 것이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일찍이 승리를 거둔 오슈 전투에서는 낙뢰가 있었다. 막부에게 낙뢰는 길조이다"라고 대답하여 당황하는 요시토키를 달랬다. 그리고 음양사를 불러 점을 쳐본 결과, 최길이라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요시토키가 신의 후예인 황족에게 활을 겨누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는 것, 천황을 절대적인 권위로 하는 당시의 "상식"을 요시토키 또한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지적된다.

5월 21일에 가마쿠라를 출발한 막부군은 기소강, 우지가와의 교토 방위선을 돌파하여, 6월 15일에는 교토를 제압했다. 요시토키 추토의 선지 발포로부터 불과 1개월 후 막부군의 완승이었다. 군기물어인 『조큐기』에서는, 승리의 보고를 받은 요시토키는 "지금 나에게 후회하는 것은 없다. 이 요시토키의 전생으로부터의 과보는 왕의 과보에 이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 보답받는 선행이 하나 부족했기 때문에,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음에 틀림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패배한 고토바 상황은 선지를 철회한 뒤, 도막 계획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측근들이 마음대로 일으킨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막부는 난의 주모자인 고토바 상황 이하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여, 고토바 상황은 오키 섬, 준토쿠 상황은 사도 섬으로 유배되었다. 도막 계획에 반대했던 쓰치미카도 상황은 스스로 원하여 도사국으로 유배되었다(후에 아와국으로 옮겨짐). 고토바 상황의 황자 마사나리 친왕, 요리히토 친왕도 각각 탄바국, 비젠국으로 유배되었다. 재위 70여 일의 추쿄 천황은 폐위되고 새롭게 고호리카와 천황이 세워졌으며, 친막부파 공가·사이온지 킨츠네 등을 중심으로 조정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상황 측에 가담한 무사의 처분은 가장 엄격하여 대부분이 참수되었고, 귀족도 처형·유배·해관되었다. 고토바 상황의 막대한 장원은 몰수되어, 고타카쿠라인에게 기진되었지만 최종적 지배권은 막부가 쥐고 있었다. 공가 정권의 감시에 해당하는 출장 기관으로 교토 수호 대신 로쿠하라 탄다이가 새롭게 교토에 설치되었다. 교토 측의 귀족·무사들의 소령 3,000곳은 모두 막부에 몰수되어, 새롭게 도고쿠 무사들이 은상으로 지토에 임명되었다.

이 승리에 의해, 조정과 막부의 역학 관계는 역전되어, 막부의 영향력은 일본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한편 막부에는 공가와 사찰, 비고케닌, 그리고 조정으로부터의 이해 조정의 요구에 대응할 필요가 생겨, 고케닌의 보호 조직에 지나지 않았던 막부가 무가 정권으로서 성숙해지게 된다.

2. 5. 말년

겐닌 원년(1224년) 6월 13일, 호조 요시토키는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사인은 각기와 더위로 인한 병으로,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49] 한편, 『백련초』와 『묘에 상인 전기』에서는 양도장을 쓸 틈도 없이 급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9]

요시토키의 죽음을 맞아 쓰루오카 하치만구에서는 신사를 연기했는데, 이는 쇼군 이외의 죽음을 이유로 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49] 또한 교토의 조정도 천하 촉예를 발령하여, 낙중은 30일간 촉예가 되었다. 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의 사건이었다.[49] 요시토키의 사망 직후 이가 씨 사건이라고 불리는 정변이 일어나, 계실인 이가노 가타, 그 일족인 이가 씨, 사위인 이치조 사네마사가 제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요시토키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아내 이가노 가타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츠키』 안테이 원년(1227년) 6월 11일 조에는, 조큐의 난의 교토 측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이치조 사네마사의 이복 형이었던 손초가 붙잡혀 심문받을 때의 일을 기술하고 있다. 로쿠하라 단다이 호조 도키우지・도키모리 앞에 끌려간 손초는 "그저 빨리 목을 쳐라, 그렇지 않으면, 또 요시토키의 아내가 요시토키에게 준 약을 먹여서 빨리 죽여라"라고 외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49] 이 발언에 주목한 히라이즈미 스미는 『아즈마카가미』의 병세 악화에 대한 기술은 꾸며진 것이며, 요시토키가 독살되었다고 보았다.[49] 이시이 스스무나 가미요코테 마사타카와 같은 연구자도 손초의 말에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있다고 보고 있다.[49]

반면, 야마모토 미나미는 『탄에이셋소』에 수록된 요시토키 사십구재 법요 때의 표백에서, 요시토키가 평소 각기와 더위 때문에 쇠약해졌다고 기록된 점을 지적하며, 요시토키의 사인은 병사라고 주장했다.[49] 손초와 사네마사는 조큐의 난에서는 적과 아군으로 나뉘었고, 이가노 가타의 형제 이가 미츠스에는 교토 측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사네마사나 이가노 가타와 손초가 연락을 취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손초의 발언은 자포자기한 데 따른 발언이므로 신빙성은 얇다고 보고 있다.[49]

『호료쿠칸키』에는 측근의 소사무라이에게 살해당했다는 기술도 있지만, 이시이 기요후미는 독살설과 관련하여 명령을 받은 소사무라이가 독을 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50] 미우라 치카유키는 요시토키가 마지막을 온전히 맞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에 의한 "소설"이라고 하고, 야마모토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49] 구레자 유이치도 독살설에 언급하면서, 요시토키의 62세라는 사망 연령은 당시로서는 장수였으며, 굳이 의심할 것도 없다고 하고 있다.[51]

3. 명칭

원복 후 가명은 "호조 고시로"였다.[8] "시로"는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의 가명과 같다.[8] 에마(현재의 이즈노쿠니시)로 이주한 후에는 "에마 시로"라고 칭했고,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임관 전의 3분의 2는 "에마 도노" 등의 "에마" 성씨로 불리고 있다.[8] "요시토키"라는 이름은 어머니 쪽 친척인 미우라 씨의 통자(通字)인 "요시"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미우라 씨 적류(미우라 요시아키 혹은 요시즈미)를 에보시 친으로 원복하고 편휘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9] 임관 후에는 "소슈", "우쿄조", "오슈" 등의 관명으로 칭해지고 있다.[10]

4. 가계

구 분비 고
아버지호조 도키마사
어머니이토 뇨도의 딸
아내아와노 쓰보네[2]
자녀
아내히메노마에 - 히키 도모무네의 딸
자녀
아내이사 아사마사의 딸
자녀
아내이가노 가타 - 이가 도모미쓰의 딸
자녀
아내불명
자녀


5. 평가

호조 요시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을 다진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큐의 난에서의 승리로 막부의 권력을 확고히 하였다.

근대 이전 일본에서는 긍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존왕사상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주군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무사도 인식이 생겨나면서, 겐지 쇼군을 멸망시키거나 꼭두각시로 만든 요시토키를 불충한 신하이자 음험한 책략가로 묘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70] 아라이 하쿠세키는 자신의 저서 《독사여론》에서 "일본 역사를 통틀어 요시토키만한 소인배도 없다"고 혹평했다.[70]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는 중세 일본 무가 정권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5. 1. 긍정적 평가

호조 요시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과 안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조큐의 난을 진압하고 무가 정권의 우위를 확립했으며, 호조 싯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호조 씨의 후손들은 조큐의 난 승리 등의 업적을 들어 요시토키를 사실상 그들의 시조로 받들었다.[65] 《고금저문집》에는 어떤 사람이 꿈을 통해 요시토키가 다케노우치노 스쿠네가 환생한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이라노 마사쓰라가 호조 사다토키를 깨우치기 위해 올린 간언인 《다이라노 마사쓰라 간초》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환생 전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고금저문집》 성립 연도를 고려할 때 요시토키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 이야기의 단초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6]

가마쿠라 막부 중기의 승려 니치렌은 요시토키를 요리토모와 더불어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않음)" 즉 헛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름은 신하라 하지만 그 몸은 대왕"이라는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67] 무로마치 시대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제정한 겐무시키모쿠에는 요시토키와 야스토키의 행적을 "근대의 스승"[60]이라 기록하고 있다. 난보쿠초 시대 남조 측 구게(귀족)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저술한 《신황정통기》에도 "요시토키는 인망을 등지는 일이 없었다"[61]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일본의 사학자 호소카와 시게오는 "요시토키의 생애는 밀어닥치는 재난에 거듭 휩쓸리는 일생이었고, 그 와중에 자신의 몸과 친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거듭한 결과 최고 권력자가 되어 버렸다."라며 "요리토모의 거병이 없었다면 일개 도고쿠(東國) 무사로써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68]

5. 2. 부정적 평가

北条義時일본어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을 숙청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1] 특히 겐지 쇼군 가문을 몰락시킨 배후로 의심받기도 한다.[71] 또한 조정을 무력화시키고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69]

아라이 하쿠세키는 자신의 저서 《독사여론》에서 "일본 역사를 통틀어 요시토키만한 소인배도 없다"고 혹평했다.[70] 그는 요시토키가 순탄하게 죽었을 리 없다며 암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70]

에도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주군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무사도 인식이 생겨나면서, 겐지 쇼군을 멸망시키거나 꼭두각시로 만든 요시토키를 불충한 신하이자 음험한 책략가로 묘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70] 메이지 시대에는 조큐의 난에서 막부 측 총대장으로서 고토바 상황 등 세 명의 상황을 유배 보내고 주쿄 천황을 폐위시킨 점을 들어, 존왕 사상에 기반한 비판이 거세졌다.[69] 요시토키는 동정의 여지가 없는 역신(逆臣)이자 불손한 자로 평가되었다.[69]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겐지 쇼군 암살뿐만 아니라 친아버지 호조 도키마사를 내쫓고 싯켄이 된 행동에 대한 '불의'(不義)라는 도덕적 평가와도 관련이 있다.[71]

6. 대중문화

호조 요시토키는 여러 소설, 만화, 드라마 등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 '''소설'''
  • * 경성수호전: 에도 시대의 합권본으로, 호조 요시토키가 악역으로 등장한다.
  • * 쓰보우치 쇼요, 『요시토키의 최후』
  • * 다자이 오사무, 『우대신 사네토모』 (킨조 출판사, 1943년) - 사네토모의 측근이 쓴 회상록 형식으로, 요시토키는 중요한 인물로 언급된다. (작중 호칭은 "소슈")
  • * 나가이 미치코, 「패수」(『염환』 (고후샤, 1964년) 수록) - 대하 드라마 『풀이 타오르다』의 원작 중 하나. 『풀이 타오르다』에서는 누이 마사코는 남편과 가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반면, 요시토키는 시골의 순박한 청년에서 정쟁에 휘말려 냉철한 정치가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 * 하무로 린, 『사네토모의 목』 (신인물왕래사, 2007년)
  • * 이토 준, 『수라의 도시』 (분게이슌주, 2018년)
  • * 사토 시즈쿠, 『언어는 남아』 (슈에이샤, 2020년)
  • * 이토 준, 『야차의 도시』 (분게이슌주, 2021년)
  • * 시마즈 요시타다, 『호조 요시토키 「무사의 세상」을 만든 남자』 (PHP 문고, 2021년)
  • * 오쿠야마 게이코, 『요시토키 운명의 고리』 (슈에이샤 문고, 2021년)
  • * 다카하시 나오키, 『호조 요시토키 나는, 가마쿠라에서 천운을 기다린다』 (시오 문고, 2021년)
  • '''영화'''
  • * 『수선사 이야기』 (쇼치쿠, 1955년, 연기: 나가타 미츠오)
  • '''텔레비전 드라마'''
  • * 『호조 마사코』 (NET, 1970년, 연기: 이시다테 테츠오)
  • * 『신 · 헤이케 이야기』 (NHK 대하 드라마, 1972년, 연기: 니시다 토시유키)
  • * 『풀이 타오르다』 (NHK 대하 드라마, 1979년, 연기: 마츠다이라 켄)
  • * 『불타오르다』 (NHK 대하 드라마, 1993-1994년, 연기: 구로키 히로시)
  • * 『요시츠네』 (NHK 대하 드라마, 2005년, 연기: 키무라 노보루)
  • * 『헤이케 이야기』 (NHK 대하 드라마, 2012년, 연기: 나카야마 타쿠야)
  • * 『가마쿠라도노의 13인』 (NHK 대하 드라마, 2022년, 주연: 오구리 슌)
  • * 『요시츠네의 스마트폰』 (NHK, 2022년, 연기: 니와타이 코스케)
  • '''만화'''
  • * 유구치 세이코, 『꿈 이야기 시리즈』 (아키타 서점)
  • * 소니시 켄지,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지츠교노니혼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문서 Different from his sister.
[3] 문서 『佐野本北条系図』
[4] 문서 『飛州志』所収の[[江馬氏|江馬氏系図]]による。
[5] 서적 執権 北条義時 三笠書房 知的生きかた文庫
[6] 서적 鎌倉殿と執権北条氏―義時はいかに朝廷を乗り越えたか NHK出版 2021-09-10
[7] 뉴스 渡邊大門の日本中世史ミステリー これはあり得ない!大河ドラマ「鎌倉殿の13人」の疑問点を検証する https://web.archive.[...] SankeiBiz 2022-04-30
[8] 간행물 『吾妻鏡』空白の三年間 https://cir.nii.ac.j[...]
[9]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10] 논문 日本の姓氏 学生社
[11] 서적 執権 北条義時 三笠書房 知的生きかた文庫
[12] 뉴스 「姓」から「名字」への転換期だった『鎌倉殿の13人』の時代 https://news.yahoo.c[...] 2022-01-03
[13] 서적 日本人の姓・苗字・名前:人名に刻まれた歴史 吉川弘文館
[14] 간행물 得宗被官の歴史的性格 ―『吾妻鏡』から『太平記』へ― https://cir.nii.ac.j[...] 創価大学大学院
[15] 간행물 「法名」「出家」にみる中世武士の精神 - 鎌倉北条氏を事例として - https://cir.nii.ac.j[...] 駒沢大学歴史学研究室内駒沢史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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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北条義時:これ運命の縮まるべき端か ミネルヴァ書房
[18]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19] 서적 執権 北条義時 三笠書房 知的生きかた文庫
[20] 서적 源氏将軍断絶 なぜ頼朝の血は三代で途絶えたか PHP新書
[21]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2] 서적 執権 北条義時 三笠書房 知的生きかた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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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논문 鎌倉幕府と東国
[26] 논문 北条泰時の政治思想
[27] 서적 源氏将軍断絶 なぜ頼朝の血は三代で途絶えたか PHP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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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承久の乱 日本史のターニングポイント 文春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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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日本の歴史9 頼朝の天下草創 講談社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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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웹사이트 鎌倉の埋蔵文化財9 https://www.city.kam[...] 鎌倉市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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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적 執権 北条義時 三笠書房 知的生きかた文庫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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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문서 北条氏系図考証 吉川弘文館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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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문서 北条泰時の娘とする異本もある
[60] 웹사이트 建武式目条々 https://kotobank.jp/[...]
[61] 웹사이트 神皇正統記 https://ja.wikisourc[...]
[62]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63]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64]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65] 서적 安達泰盛と鎌倉幕府 - 霜月騒動とその周辺 有隣新書 2006
[66] 문서 사노본(佐野本) 호조계도(北條系圖)
[67] 웹사이트 建武式目条々 https://kotobank.jp/[...]
[68] 웹사이트 神皇正統記 https://ja.wikisourc[...]
[69]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70]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71] 서적 北条義時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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