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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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에 호조씨가 무사시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 호조 토키마사와의 갈등 끝에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막부 내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무사시국을 장악하려는 호조 토키마사와 무사시 무사단의 맹주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1205년, 하타케야마 시게야스가 살해되고,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또한 토벌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호조씨는 무사시국을 장악하고 권력을 강화했으며, 이후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억울한 죽음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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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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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 |
다른 이름 | 畠山重忠の乱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노 란) |
분쟁 | 가마쿠라 막부의 내란 |
날짜 | 겐큐 2년 6월 22일 (1205년 7월 10일) |
장소 | 무사시국 후타마타가와 (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호도가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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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호죠씨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호죠씨ㆍ가마쿠라 고케닌 |
교전국 2 | 하타케야마씨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호죠 요시토키 |
지휘관 2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
병력 1 | 수천 기마병 |
병력 2 | 134기 |
사상자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궤멸 |
2. 배경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막부 내부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1200년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변, 1203년 히키 요시카즈의 변으로 유력자들이 멸망하면서, 막부의 실권은 11세의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한 호죠 토키마사가 쥐고 있었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치치부씨가 대대로 계승해 온 무사시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류슈쇼 총겐교직의 지위에 있었으며, 그 무용과 인망으로 요리토모 시대에는 항상 선봉을 맡았고,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자손을 지키도록 유언을 받은 유력 고케닌이었다. 또한 도키마사의 전처의 사위였으며,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변과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서는 모두 호죠씨 측에 협력했다.
무사시는 사가미국과 함께 국사가 추천되는 간토 고분코쿠(쇼군 가문 지교쿠니) 중 하나였으며, 수많은 무사단이 존재하고, 가마쿠라 방위의 전략상 요지였다. 요리토모 시대에는 겐지몬요의 히라가 요시노부가 국사를 맡았고, 지치부 씨의 총령인 류슈쇼 직은 가와고에 시게요리였다. 가와고에 시게요리와 히라가 요시노부의 아내는 요리토모의 유모 히키노 아마의 차녀와 삼녀였으며, 무사시의 군지인 히키씨의 가독은 히키노 아마의 조카 히키 요시카즈가 계승했고, 무사시는 요리토모의 연고자에 의해 다스려졌다. 시게요리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모반에 연루되어 주살된 후에는 시게타다가 류슈쇼 직이 되었고, 요시노부 후의 무사시 국사는 그의 아들이자 도키마사의 후처 마키노카타의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가 물려받았다. 히키 요시카즈의 변 다음 달인 겐닌 3년(1203년) 10월, 도모마사는 교토 수호를 위해 상경했다. 도모마사는 고토바 상황의 신임이 두터웠고, 상황과 장인인 도키마사, 마키노카타의 위광을 받아 교토 수호·지교쿠니 슈가 되어 쇼군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으며 권세를 강화했다.
도모마사가 상경한 후 도키마사가 쇼군 사네토모의 명으로 무사시 국무직에 임명되어, 무사시 고쿠가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히키 요시카즈의 변으로 멸망한 유력 호족 히키 씨의 연척 고다마 당 등, 무사시에는 히키 씨와 연결된 자가 많았고, 히키의 뒤를 세력 하에 두려고 한 도키마사의 무사시 진출은, 무사시 무사단의 맹주인 시게타다의 세력권으로의 진입이었으며, 히키의 난 후의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도키마사와 시게타다는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메이게츠키 겐큐 원년(1204년) 정월 18일 조에 따르면, 교토에서 "호조 도키마사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싸워 패배하여 산속에 숨었다. 오에노 히로모토가 이미 살해되었다고 한다"는 풍문이 퍼져, 히로모토의 연고자가 그 유언비어에 소란을 피우고 짐을 운반하는 소동이 일어나는 등, 양자의 대립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5][6][7]
2. 1. 가마쿠라 막부 초기 권력 투쟁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막부 내부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1200년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변, 1203년 히키 요시카즈의 변으로 유력자들이 제거되었고, 막부의 실권은 14세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한 호죠 토키마사가 쥐고 있었다.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치치부씨가 대대로 계승해 온 무사시국 무사단 통솔 부재소 총검교직 지위에 있었다. 무용과 인망으로 요리토모 시대에 항상 선봉을 맡았으며, 요리토모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손 수호 유언을 남긴 유력 고케닌이었다. 토키마사 전처의 사위였으며, 카지하라 카게토키의 변과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서 모두 호죠씨 측에 협력했다.
무사시국은 쇼군에 의해 국사가 천거되는 관동어분국 (쇼군가 지행국) 중 하나로, 수많은 무사단이 존재하여 가마쿠라 방위의 전략상 요지였다. 이 무렵 무사시 국사는 토키마사의 후처 마키노카타의 사위 히라가 토모마사였다. 히키 요시카즈의 변 다음 달인 1203년 10월, 토모마사는 교토 수호를 위해 상락했다. 토모마사 상락 후, 토키마사가 쇼군 사네토모 명에 따라 무사시 국무직에 임명되어 무사시 국아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2. 2.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위상
치치부씨의 후예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무사시국 무사단을 통솔하는 유력 고케닌이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신임을 받았으며, 호죠씨와도 협력 관계였다. 그는 무용과 인망으로 요리토모 시대에는 항상 선봉을 맡았고, 요리토모는 죽음에 임박해 자신의 자손을 시게타다에게 수호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3] 또한 시게타다는 호죠 토키마사의 전처의 사위였으며,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변과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서는 모두 호죠씨 측에 협력했다.[3]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무사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호죠 토키마사와 대립하게 된다. 무사시는 쇼군에 의해 국사가 천거되는 관동어분국의 하나로 수많은 무사단이 존재해 가마쿠라 방위의 정략상 요지였다. 히키 요시카즈의 변 이후, 호죠 토키마사는 자신의 후처 마키노카타의 사위 히라가 토모마사를 무사시 국사로 임명하고, 나아가 자신도 무사시 국무직에 임명되어 무사시국의 행정권을 장악하려 했다.[3] 이는 무사시 무사단의 맹주인 시게타다의 세력권에 대한 침해였으며, 결국 양측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2. 3. 무사시국의 중요성
무사시국은 쇼군이 국사를 천거하는 관동어분국(쇼군가 지행국) 중 하나로, 수많은 무사단이 존재하여 가마쿠라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무사시 국사는 토키마사의 후처 마키노카타의 사위 히라가 토모마사였으나, 히키 요시카즈의 변 다음 달인 겐닌 3년 (1203년) 10월, 토모마사가 교토 수호를 위해 상락하였다. 이후 토키마사가 쇼군 사네토모의 명에 따라 무사시 국무직에 임명되어 무사시 국아의 행정권을 장악하였다.[3]2. 4. 호죠 토키마사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갈등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가마쿠라 막부 내부의 권력 투쟁 속에서 호조 도키마사는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무사시국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요리토모의 신임을 받는 유력 고케닌이었다. 또한 시게타다는 도키마사의 사위였으며, 이전의 권력 투쟁에서 호조 씨 측에 협력했었다.무사시는 가마쿠라 방위의 요지였고, 여러 무사단이 존재했다. 요리토모 시대에는 겐지 일족인 히라가 요시노부가 국사를 맡았고, 지치부씨의 총령인 류슈쇼 직은 가와고에 시게요리였다. 시게요리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모반에 연루되어 주살된 후에는 시게타다가 류슈쇼 직을 이었고, 요시노부의 아들 히라가 도모마사가 무사시 국사를 물려받았다.
도모마사가 교토로 상경한 후, 도키마사는 쇼군의 명으로 무사시 국무직에 임명되어 무사시 고쿠가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무사시 무사단의 맹주인 시게타다의 세력권에 진입하는 것이었고, 양측은 대립하게 되었다. 1204년에는 교토에서 "호조 도키마사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와 싸워 패배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질 정도로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었다.[5][6][7]
3. 경과
겐큐 원년 (1204년) 11월 4일, 교토 히라가 토모마사 저택에서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히라가 토모마사와 하타케야마 시게야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키노카타를 통해 호죠 토키마사에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부자의 모반 혐의로 과장되어 전달되었다.[1]
마키노카타의 참소로 호죠 토키마사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토벌을 결심했다. 호죠 요시토키와 호죠 토키후사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마키노카타의 오빠 오오오카 토키치카의 압박으로 결국 토벌에 동의했다.[7]
호죠 요시토키를 총대장으로, 호죠 토키후사, 미우라 요시무라, 와다 요시모리 등 유력 고케닌들이 토벌군에 참여했다. 토벌군은 수천에서 3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에 맞서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측은 약 150기 정도였다.
지휘관 | 주요 참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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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죠 요시토키 | 호죠 토키후사, 미우라 요시무라, 와다 요시모리, 사쿠마 이에무라, 아시카가 요시우지, 오야마 토모마사, 아다치 카게모리, 우츠노미야 요리츠나, 아이코 스에타카, 나가누마 무네마사, 타이라 모리츠나 |
하타케야마 군 (약 150기) | |
3. 1. 히라가 토모마사와 하타케야마 시게야스의 갈등
겐큐 원년 (1204년) 11월 4일, 교토 히라가 토모마사 저택에서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히라가 토모마사와 하타케야마 시게야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1] 이 사건은 마키노카타를 통해 호죠 토키마사에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부자의 모반 혐의로 과장되어 전달되었다.3. 2. 호죠 토키마사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토벌 결심
마키노카타는 히라가 토모마사의 참소를 호죠 토키마사에게 전하며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부자의 모반을 주장했다. 호죠 토키마사는 아들 호죠 요시토키, 호죠 토키후사에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토벌을 상담했으나,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혔다.[7] 마키노카타의 오빠 오오오카 토키치카의 압박으로 호죠 요시토키는 결국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토벌에 동의했다.[7]3. 3.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토벌군의 구성
호죠 요시토키, 호죠 토키후사를 비롯하여 미우라 요시무라, 아다치 카게모리, 우츠노미야 요리츠나 등 유력 고케닌들이 참여했다. 토벌군은 수천에서 3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지휘관 | 주요 참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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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죠 요시토키 | 호죠 토키후사, 미우라 요시무라, 와다 요시모리, 사쿠마 이에무라, 아시카가 요시우지, 오야마 토모마사, 아다치 카게모리, 우츠노미야 요리츠나, 아이코 스에타카, 나가누마 무네마사, 타이라 모리츠나 |
3. 4.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측의 구성
하타케야마 군 (약 150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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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과
호죠 요시토키는 마키노카타의 사위인 히라가 토모마사를 옹립하려 한 아버지 토키마사를 버림으로써, 억울하게 시게타다를 죽였다는 집안 사람들의 원망을 피했다. 혼란을 틈타 토모마사와 치치부 일족의 이나게 시게나리, 한가야 시게토모 등 유력자들을 한 번에 처리하고 무사시국 장악에 성공했다. 이후, 무사시국은 대대로 호죠 도쿠소가의 지배하에 놓였고,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ㆍ렌쇼가 "무사시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호죠가 내부에서는 카지와라 카게토키, 히키 요시카즈 등 강력한 정적 배제에는 단결해 있었지만, 전처의 아이 요시토키ㆍ마사코 등과 후처 마키노카타와의 사이에는 이전부터 카메노마에 사건 등의 다툼이 있었다. 공통의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 마키노카타 소생의 유일한 아들이자 호죠 본가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던 마사노리의 죽음으로 양자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하타케야마의 난에서 비롯된 마키씨 사건으로 토키마사를 추방함에 따라 막부는 토키마사의 전제 정치에서 요시토키ㆍ마사코 남매 주도에 의한 과두 체제로 이행하여 전제 정치가 계속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호죠씨가 후년에 편찬한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찬미하는 기사가 많이 보인다. 시게타다 토벌 때 시게타다를 옹호했다는 요시토키는 이후 시게타다의 남겨진 아이나 친척을 비호하여 하타케야마씨의 소령을 주었다는 등의 흔적은 없으며, 하타케야마씨의 소령은 마사코에 의해 시게타다를 토벌한 자나 마사코의 뇨보들에게 배분되었다. 요시토키ㆍ마사코의 자매인 시게타다의 아내는 하타케야마씨 본령을 받았고, 아시카가 요시즈미에게 재가하여,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하타케야마씨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시게타다의 핏줄은 단절되었다.
그 후, 출가했던 시게타다의 막내아들 쵸케이 난이 벌어지고 난 8년 후, 겐포 원년 (1213년) 9월에 모반 혐의를 받아 살해되었다. 이때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시게타다는 본래 잘못이 없이 주살되었다"라고 하였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서 요시토키의 시게타다 옹호, 시게타다의 과잉 찬송 기사는, 아버지 토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의 영웅을 멸망시킨 요시토키 (토쿠슈)가 변호를 위한 작위로 여겨진다. 다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호죠 종가가 아닌 분가인 에마가의 초대로 간주되는 요시토키가 토키마사의 의사를 거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낮은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현재,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소테츠 츠루가미네역 근처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마지막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4. 1.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억울한 죽음과 호죠씨의 권력 강화
호죠 요시토키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죽음이 억울한 일이었다고 인정했지만, 이는 호죠 토키마사와 마키노카타를 실각시키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3] 호죠씨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제거하고 무사시국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후 무사시국은 대대로 호죠 도쿠소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ㆍ렌쇼가 "무사시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했다.가마쿠라 막부 호죠씨가 후년에 편찬한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찬양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그러나 호죠 요시토키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남겨진 아이나 친척을 비호하여 하타케야마씨의 소령을 주었다는 등의 흔적은 없으며, 하타케야마씨의 소령은 호죠 마사코에 의해 시게타다를 토벌한 자나 호죠 마사코의 뇨보(女房)들에게 배분되었다. 호죠 요시토키ㆍ호죠 마사코의 자매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아내는 하타케야마씨 본령을 받았고, 아시카가 요시즈미에게 재가하여 요시즈미가 하타케야마씨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핏줄은 단절되었다.
이후 출가했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막내아들 시게토요가 1213년 9월 모반 혐의로 살해되었다. 이때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시게타다는 본래 잘못이 없이 주살되었다"라고 하였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서 호죠 요시토키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옹호,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과잉 찬송 기사는, 아버지 호죠 토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의 영웅을 멸망시킨 호죠 요시토키(도쿠슈)가 변호를 위한 작위로 여겨진다.
4. 2. 마키씨 사건
호죠 요시토키는 마키노카타의 사위인 히라가 토모마사를 옹립하려 한 아버지 토키마사를 버리고, 억울하게 시게타다를 죽였다는 집안 사람들의 원망을 피했다. 혼란을 틈타 토모마사와 치치부 일족의 이나게 시게나리, 한가야 시게토모 등 유력자들을 한 번에 처리하고 무사시국 장악에 성공했다. 이후 무사시국은 대대로 호죠 도쿠소가의 지배하에 놓였고,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 렌쇼가 "무사시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했다.[1] 호죠가 내부에서는 카지와라 카게토키, 히키 요시카즈 등 강력한 정적을 제거할 때는 단결했지만, 전처의 아이 요시토키, 마사코 등과 후처 마키노카타 사이에는 이전부터 가메노마에 사건 등의 다툼이 있었다.[1] 공통의 적이 없어지고, 마키노카타 소생의 유일한 아들이자 호죠 본가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던 마사노리가 죽음으로써 양자 대립이 표면화되었다.[1]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에서 비롯된 마키씨 사건으로 토키마사를 추방함에 따라 막부는 토키마사의 전제 정치에서 요시토키, 마사코 남매 주도에 의한 과두 체제로 이행하여 전제 정치가 계속되었다.[1]4. 3.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에 대한 재평가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5][6][7]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시게타다는 본래 잘못이 없이 주살되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호죠 요시토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으로 해석된다. 즉, 아버지 호죠 토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시의 영웅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변호로 여겨진다.하지만 호죠 요시토키가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옹호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남겨진 아이나 친척을 비호하여 하타케야마 가문의 영지를 주었다는 등의 흔적은 없다. 오히려 하타케야마 가문의 영지는 호죠 마사코에 의해 시게타다를 토벌한 자나 호죠 마사코의 시녀들에게 분배되었다. 호죠 요시토키ㆍ호죠 마사코의 자매이자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아내는 하타케야마 가문 본령을 받았으나, 호죠 가문의 친척 아시카가 요시즈미에게 재가하여,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하타케야마 가문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써,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현대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충절과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소테츠 츠루가미네역 근처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마지막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5. 평가 및 의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 권력 투쟁과 무사 사회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의 위험성, 그리고 권력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호조 도키마사는 사위 히라가 도모마사를 옹립하려다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권력을 잃었고, 이 과정에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 희생되었다.[5][6][7] 요시토키는 도키마사를 내쫓으면서 시게타다를 쳤다는 무사들의 증오를 피하고, 혼란을 틈타 유력자들을 제거하여 무사를 장악했다. 이후 무사들은 호조 도쿠소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렌쇼가 "무사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했다.[5][6][7]
『아즈마카가미』에서 시게타다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요시토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게타다의 죽음은 권력자의 독단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한 권력 견제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5. 1. 권력 투쟁의 희생양
호조 요시토키는 아버지 도키마사를 내쫓으면서, 무고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쳤다는 무사들의 증오를 피하고, 혼란을 틈타 유력자들을 제거하여 무사를 장악했다. 이후 무사들은 대대로 호조 도쿠소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렌쇼가 "무사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하타케야마의 난으로 시작된 마키 씨 사건으로 도키마사를 추방한 막부는 도키마사의 전제 정치에서 요시토키·마사코 남매 주도의 과두 체제로 이행하여 전제 정치가 지속되었다.가마쿠라 막부 호조 씨가 후년에 편찬한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시게타다를 찬양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시게타다 토벌 당시 그를 옹호했다는 요시토키는 이후 시게타다의 유자 및 연고자를 보호하지 않았고, 하타케야마 씨의 영지는 마사코에 의해 분배되었다. 요시토키·마사코의 자매이자 시게타다의 아내는 하타케야마 씨 본령을 받았으나, 아시카가 요시즈미에게 재가하여 요시즈미가 하타케야마 씨의 묘지를 계승함으로써 시게타다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 후 출가했던 시게타다의 막내아들 시게토요는 난이 발생한 8년 후인 1213년 9월에 모반 혐의로 살해당했다. 당시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시게타다는 본래 잘못이 없이 주살되었다"라고 말했다. 『아즈마카가미』에서 요시토키의 시게타다 옹호, 시게타다의 과도한 찬양 기사는 아버지 도키마사를 추방하고 무사의 영웅을 멸망시킨 요시토키(도쿠소 가문) 변호를 위한 의도적인 행위로 여겨진다.[5][6][7]
현재,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소테츠츠루가미네 역 근처에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마지막을 기리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5. 2. 무사 사회의 변화
이 사건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불안정한 권력 구조와 무사 사회의 변화를 보여준다. 유력 고케닌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면서, 막부의 권력 기반이 취약해졌다. 호조 요시토키는 마키노카타의 사위인 아사마사를 옹립하려던 아버지 토키마사를 내침으로써, 무고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쳤다는 고케닌들의 증오의 화살을 피하고, 혼란을 틈타 아사마사와 지치부(秩父) 일족의 이나게 시게나리(稲毛重成), 나리야 시게토모(榛谷重朝) 등 유력자를 일소하여 무사의 장악에 성공했다. 이후 무사는 대대로 호조 도쿠소 가문의 지배하에 놓여, 싯켄 정치 안정화 후에는 싯켄·렌쇼가 "무사노카미", "사가미노카미"를 차지하는 사례가 증가한다.[5][6][7]5. 3. 역사적 교훈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은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호조 도키마사는 자신의 사위인 히라가 도모마사를 옹립하려다 아들 호조 요시토키에게 권력을 잃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가 희생되었다.[5][6][7]이 사건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호조 요시토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죽음은 민주주의적 가치와 절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권력자의 독단적인 결정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권력을 견제해야 함을 보여준다.
6. 관련 유적 및 문화재
요코하마시 등록 지역 문화재로 츠루가미네 주변의 사적이 등록되어 있다.[1]
참조
[1]
서적
史伝 北条義時
小学館
[2]
간행물
畠山重忠の政治的遺産
勉誠出版
[3]
서적
史伝 北条義時
小学館
[4]
서적
頼朝と義時 武家政権の誕生
講談社現代新書
[5]
논문
畠山物語との関連
岩波書店
[6]
서적
吾妻鏡辞典
東京堂出版
[7]
간행물
河越重頼の娘-源義経の室
京都橘大学
[8]
웹사이트
指定・登録文化財目録
https://www.city.yok[...]
横浜市教育委員会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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