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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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희악은 오대 십국 시대 초나라의 인물로, 947년 마희범 사후 동생 마희광이 옹립되자 반란을 일으켜 초왕이 되었다. 그는 남당의 지원을 받아 마희광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초나라를 장악했으나, 이후 남당에 복종하며 천책상장군, 초왕 등을 자칭했다. 통치 기간 동안 사치와 정쟁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반란으로 폐위되어 남당으로 끌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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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십국)의 왕 - 마희범
마희범은 오대 십국 시대 초나라의 군주로, 형의 뒤를 이어 통치하며 후당에 입조하여 초왕에 봉해졌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통치 말기에 혼란을 겪다가 사망했다. - 초 (십국)의 왕 - 마희성
마희성은 오대십국시대 초나라의 2대 군주로, 가뭄과 흉년에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공신을 숙청하여 민심을 잃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송나라 - 남송
남송은 정강의 변으로 멸망한 북송을 조구(고종)가 강남에서 재건한 왕조로, 금나라와 대립 후 화의를 통해 안정되었으나, 몽골의 침입과 권신들의 전횡으로 쇠퇴하여 1279년 멸망할 때까지 경제, 사회, 문화적 발전을 이루며 일본과 교류하였다. - 송나라 - 정강의 변
정강의 변은 1125년부터 1127년까지 금나라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한 사건으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어 중국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마희악 | |
|---|---|
| 기본 정보 | |
| 칭호 | 추공효왕 |
| 직위 | 추나라 왕 |
| 계승 순서 | 추나라의 왕자 |
| 통치 기간 | 951년 1월 24일 – 951년 10월 22일 |
| 즉위식 | 알 수 없음 |
| 이전 | 마희광 |
| 이후 | 마희숭 |
| 부인 | 원부인 (사망: 949년) |
| 배우자 종류 | 아내 |
| 첩 | 예 |
| 자녀 | 마광찬 (아들) |
| 전체 이름 | 마희악 |
| 연호 | 보대 (Adopted the era names of 남당) |
| 연호 기간 | 950–951 |
| 시호 | 공효왕 (恭孝王, "공손하고 효성스러운") |
| 가문 | 마씨 |
| 왕조 | 마초 |
| 아버지 | 마인 |
| 어머니 | 알 수 없음 |
| 출생지 | 추정: 장사 |
| 사망 시기 | 950년대 |
| 사망 장소 | 금릉 |
| 군사 경력 | |
| 직책 | 무안군 절도사 |
| 임기 | 951년 1월 24일 – 951년 10월 22일 |
| 섭정 | 마희숭 |
| 섭정 종류 | 대리 |
| 이전 | 마희광 |
| 이후 | 마희숭 |
| 직책 | 무평군 절도사 |
| 임기 | 947 – 951 |
| 이전 | 마희고 |
| 이후 | 마광휘 |
2. 생애
947년 마희범이 사망하자 형제 중 맏이였던 마희악을 배제하고 서른다섯째 동생인 마희광이 여러 장수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를 부왕이 정한 형제 상속의 유훈에 어긋난다며 동생 마희숭이 반대하며 마희악 옹립을 꾀한다.
건우 2년(949년) 마희숭에게 사주받은 마희악이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남하, 초의 수도 담주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마희광은 형제 간의 싸움을 원치 않아 추격을 자제했다. 그러나 건우 3년(950년) 마희악은 원주민 세력과 결탁하여 다시 마희광을 공격, 동시에 남당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담주 공격의 원군을 요청했다. 마희광은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대패, 마희악은 순천왕을 자칭하며 담주를 포위, 수장 허가경을 투항시켜 결국 담주를 점령했다. 마희광을 포획하고 얼마 후 자결을 명했다.
마희악은 초기에 마희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당에 표면적으로 복종하며 무목왕 마은 이래 지속되었던 중원에 대한 복속을 중단했기 때문에 책봉을 받지 못하고, 천책상장군·무안무평정강녕원등군절도사·초왕을 자칭하는 데 그쳤다. 또한 즉위 후에는 저항 세력에 대한 보복을 가하고, 사생활에서도 주색에 빠져 그 정무를 마희숭에게 일임했으며, 그 마희숭 또한 부하에게 일임하는 등 국내 정치의 혼란이 보였고, 사졸에 대한 은상도 한정적이었기에 군의 이반이 발생했다.
보대 9년(951년), 그 무장이었던 왕규·주행봉이 랑주를 점령하자 맏형 마희진의 아들인 마광혜를 절도사로 옹립했다. 그 몇 달 후, 서위 등의 장령들이 결기, 마희악은 갇히고 형산현에 연금되었다. 마희악은 그곳에서 형산왕이 되었지만, 곧 남당에 의해 초가 멸망하자 강남서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초왕에 봉해졌다. 그리고 남당에 입조했을 때 원종 이경에게 억류되어 남당의 수도 금릉(현재의 장쑤성난징시)에서 객사했다.
2. 1. 권력 투쟁과 즉위
947년 마희범이 죽고 마은의 15번째 아들 마희광이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배다른 형인 마희악(馬希萼)은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남당의 지원을 얻어 담주의 마희광을 공격했다.[1] 950년 마희악의 군대는 담주를 함락하고, 마희광을 살해하여 마희악이 초왕이 되었다.[2]마희악은 처음 패배한 후, 진(辰州)과 서(漵州) (둘 다 현재 후난성 화이화시)의 비한족 부족 지도자들과 메이산 부족(梅山蠻, 현재 후난성 이양시 지역을 중심으로 함)에게 편지를 보내 탄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부족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창사(長沙)의 부유함에 대해 들었고, 이에 유혹되어 함께 이양(益陽, 현재 이양)을 공격했다.[1]
950년 겨울, 유언도는 마희광에게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여 직접 랑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제안하며, 마희악을 격파하고 체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희광은 동의했다. 유언도가 군대를 이끌고 랑으로 갔을 때, 처음에는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지만, 곧 마희악과 비한족 부족의 군대에 의해 함정에 빠져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마희광은 두려움에 떨며 국고를 열어 병사들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여 그들의 충성을 유지하려 했다.[1]
마희악이 다가오자, 마희광은 장군 서극경에게 주력 부대를 지휘하게 하여 마희악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서극경은 마인의 신뢰받는 장군 서덕훈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희충을 서극경의 군대 감찰관으로 임명했다. 기병 지휘관 이언온(李彥溫)과 보병 지휘관 한례(韓禮)도 마희악 군대의 다른 잠재적 경로를 막기 위해 주둔했다.[1]
951년 1월 21일[2] 이른 아침, 마희악의 장교 하경진(何敬真)은 한례의 깃발이 흩어진 것을 보고, 한례의 군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신호라고 믿고, 한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한례의 군대는 패배했고, 한례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무평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창사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마희광의 다른 보병 지휘관 오홍(吳宏)과 양이는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무평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양이의 군대는 서극경이나 유언도에게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지쳐갔다. 마희악의 비한족 병사들은 창사 동쪽 성벽에 불을 질렀고, 방어자들이 서극경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서극경은 대신 마희악에게 항복했고, 창사는 이후 함락되었다.[1]
951년 1월 22일[2] 마희악은 창사에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성문을 닫고 이후 마희광, 이홍고, 이홍고의 형제 이홍절(李弘節), 등, 양, 그리고 관리 탕조음(唐昭胤)을 체포할 수 있었다. 마희악은 마희광에게 "아버지와 형제의 업적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 장유의 서열이 없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마희광은 "장군들과 관리들의 지지와 황제의 임명 때문이었다."라고 대답했다. 마희악은 그를 체포했다.[1]
마희악은 초기에 마희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당에 표면적으로 복종하며 무목왕 마은 이래 지속되었던 중원에 대한 복속을 중단했기 때문에 책봉을 받지 못하고, 천책상장군·무안무평정강녕원등군절도사·초왕을 자칭하는 데 그쳤다.
2. 2. 통치와 폐위
947년 마희범이 죽고 마은의 15번째 아들 마희광이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배다른 형인 마희악(馬希萼)은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남당의 지원을 얻어 담주의 마희광을 공격했다. 950년 마희악의 군대는 담주를 함락하고, 마희광을 살해하여 마희악이 초왕이 되었다.마희악은 초기에 마희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당에 표면적으로 복종하며 무목왕 마은 이래 지속되었던 중원에 대한 복속을 중단했기 때문에 책봉을 받지 못하고, 천책상장군·무안무평정강녕원등군절도사·초왕을 자칭하는 데 그쳤다. 951년 1월 24일, 마희악은 추(楚)의 왕, 천책상장군(天策上將軍, 마은(馬殷) 이후 추 통치자들이 사용하던 전통적인 칭호), 그리고 무안(武安), 무평(武平), 형강(荊江), 영원(寧遠, 현대의 위린에 위치) 절도의 지위를 주장했다. 그는 이홍고(李弘杲), 이홍걸(李弘傑), 탕조음(唐昭顖), 양제(楊諟)를 처형하고 그들의 시신을 군인들이 먹게 했다. 등이문(鄧貽文) 또한 처형되었다.
951년 봄, 마희악은 자신의 비서 유광보(劉光輔)를 남당(南唐) 황제 이경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보냈다. 이경은 그에게 천책상장군, 무안, 무평, 형강 절도, 추 왕의 칭호를 수여하고, 재상 손성과 외교관 야오펑(姚鳳)을 보내 수여식을 주관하게 했다. 유광보는 남당의 수도 금릉에 머무는 동안 이경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는 몰래 이경에게 "호남(후난, 즉 추 영토)은 백성들이 지쳐 있고, 군주는 오만합니다. 점령할 수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한편, 마희악은 장사를 점령한 후 오만해지고 비열해져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밤낮으로 연회를 즐기며, 본부의 일들을 마희숭(馬希崇)에게 맡겼다. 마희숭은 자신의 좋고 싫음에 따라 정치를 펼쳐 법질서가 붕괴되었다. 즉위 후에는 저항 세력에 대한 보복을 가하고, 사생활에서도 주색에 빠져 그 정무를 마희숭에게 일임했으며, 그 마희숭 또한 부하에게 일임하는 등 국내 정치의 혼란이 보였다.
보대 9년(951년) 10월 22일, 서위(徐威), 진경천(陳敬遷), 루궁관(魯公館), 류맹준(陸孟俊)은 마희충의 묵인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마희악은 도망치려 했지만 체포되었다. 사는 토막으로 잘려 처형되었다. 관료들은 마희충을 무평 절도의 임시 지휘관으로 선포하고 마희악을 형산 (衡山, 현대의 형양, 후난성)으로 보내 체포했다. 마희악은 그곳에서 형산왕이 되었지만, 곧 남당에 의해 초가 멸망하자 강남서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초왕에 봉해졌다. 그리고 남당에 입조했을 때 원종 이경에게 억류되어 남당의 수도 금릉(현재의 장쑤성난징시)에서 객사했다.
2. 3. 폐위 이후
마희악은 남당의 수도 금릉(현재의 장쑤성 난징시)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남당이 후주의 공격을 받은 뒤, 마희숭은 후주에게 보호를 받아 장군직을 하사받았다.그 후, 마희악의 무장이었던 주행봉(周行逢)이 남당의 지배를 물리치고 956년 다시 호남을 제압했으나, 962년 그의 아들 주보권(周保權)이 뒤를 잇지 못하고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다음 해 북쪽의 송나라에게 병합되었다.
마희악이 형산에 도착했을 때, 형산 수비대 사령관 랴오옌(廖偃)은 그의 삼촌 랴오쾅닝(廖匡凝)에게 마씨 가문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랴오옌은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군단을 조직하고, 펑스카오와 함께 마희악을 형산왕으로 선포했다. 그들은 샹강에 방어 울타리를 건설하고 대나무로 군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곧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모았고 인근 현의 지원을 받았다.
한편, 쉬웨이는 마희악과 류옌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마희충을 죽일 것을 고려했다. 마희충은 이를 깨닫고 남은 초나라 영토를 남당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이징은 변하오와 그의 군대를 창사로 보내 항복을 받아들였다. 변하오는 마희충과 그의 가족을 창사에서 떠나 남당 수도 진링으로 가도록 강요하여 마씨 가문의 초나라 통치를 종식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희악은 군대를 이끌고 진링으로 향했다. 진링에 도착하자 이징은 마희악을 강남서도(江南西道, 현대의 난창, 장시성에 위치) 관찰사(觀察使)로 임명하고 강남서도의 수도 홍주(洪州)에 주둔하게 했으며, 초왕의 작위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또한 명예 재상 칭호인 중서령(中書令)을 하사했다.
953년 설 무렵, 마희악은 이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진링으로 갔다. 이때 이징은 그를 진링에 머물게 하고 홍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몇 년 후 진링에서 사망했다.
보대 9년(951년), 왕규·주행봉이 랑주를 점령하자 맏형 마희진의 아들인 마광혜를 절도사로 옹립했다. 그 몇 달 후, 서위 등의 장령들이 결기, 마희악은 갇히고 형산현에 연금되었다. 마희악은 그곳에서 형산왕이 되었지만, 곧 남당에 의해 초가 멸망하자 강남서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다시 초왕에 봉해졌다. 그리고 남당에 입조했을 때 원종 이경에게 억류되어 남당의 수도 금릉에서 객사했다.
3. 사후
마희악은 남당의 수도 금릉으로 끌려가 이곳에서 죽었다. 마희숭은 남당을 섬기는 절도사가 되었고, 남당이 후주의 공격을 받은 뒤에는 후주에게 보호를 받아 후주로부터 장군직을 하사받았다.
그 후 마희악의 무장이었던 주행봉(周行逢)이 남당의 지배를 물리치고, 956년 다시 호남을 제압했으나, 962년 아들 주보권(周保權)이 뒤를 이어받지 못하고,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다음 해 북쪽의 송나라에게 병합되었다.
마희악이 헝산에 도착했을 때, 헝산 수비대 사령관 랴오옌(廖偃)은 마희악을 헝산왕으로 선포하고 샹강에 방어 울타리를 건설하고 군함을 만들었다.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모았고 인근 현의 지원을 받았다.
한편, 쉬웨이는 마희악과 랴오옌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마희숭을 죽일 것을 고려했고, 마희숭은 남은 초나라 영토를 남당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953년 설 무렵, 마희악은 이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진링으로 갔고, 이때 이징은 그를 진링에 머물게 하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몇 년 후 진링에서 사망했다.
4. 평가
5. 가계
6. 둘러보기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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