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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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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송은 1127년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고종에 의해 건국된 중국의 왕조이다. 초기에는 금나라에 저항했으나, 진회가 재상이 되면서 화평을 맺었다. 이후 효종 시대에 번영을 누렸으나, 한탁주의 실정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남송은 정치적으로 독재 재상의 등장과 당파 싸움이 심했고, 경제적으로 강남 지역의 발전을 통해 번영을 이루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북송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금나라, 몽골,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1279년 몽골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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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남송 및 금의 지도
남송 및 금의 지도
기본 정보
약칭남송
한국어 국명남송
공식 국명
건국 시기1127년
멸망 시기1279년
공용어고관화
수도임안
통화회자
교자
현재 국가
(금문현, 롄장현)
정치
정치 체제전제 군주제
원수 칭호황제
주요 황제고종 조구 (1127년 ~ 1162년)
효종 조신 (1162년 ~ 1189년)
공제 조현 (1274년 ~ 1276년)
주요 재상진회 (1131년 ~ 1155년)
사미원 (1208년 ~ 1233년)
재상 칭호승상
역사
이전 국가북송
초 (장방창)
계승 국가원 (왕조)
건국1127년 6월 12일
주요 사건소흥의 화의 (1142년)
개희용병 (1206년)
양양·번성의 전투 (1267년 ~ 1273년)
임안 함락 (1276년 2월 4일)
애산 전투에서 멸망 (1279년 3월 19일)
면적 및 인구
면적1127년: 2,100,000
1204년: 1,800,000
인구1218년: 80,600,000

2. 역사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한 후, 흠종의 동생 조구는 남쪽으로 도망쳐 1127년 강녕부(江寧府)에서 황제(송 고종)로 즉위하여 송나라를 재건했다.[1] 초기에는 악비,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금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었다.[1]

진회는 권력을 장악하고 군 지휘권을 조정으로 되돌렸으며, 주전론자들을 탄압하여 악비는 살해되고 한세충은 은거하였다.[1] 진회 사후 금나라의 해릉왕이 침공했으나 격퇴되었고, 완안옹(세종)이 즉위하여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양자인 조신(효종)이 즉위하였다.[1]

금의 세종과 남송의 효종은 각 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데, 이 시기 남송은 여러 개혁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1] 효종이 1189년 퇴위하고 광종이 즉위했으나, 광종은 우둔하여 황후 이씨에게 휘둘렸다. 조여우한탁주 등은 광종을 퇴위시키고 영종을 즉위시켰다.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개희북벌 실패 후 사미원에게 살해되었다.[1]

이후 북쪽의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1233년 몽골 제국금나라수도 개봉부를 함락시키자, 몽골군은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남쪽으로 도망친 애종을 자결로 몰고 갔고, 1234년 금나라는 멸망하였다. 이후 몽골은 일시 북쪽으로 물러났으나, 1235년부터 남송에 대한 침공을 시작하여 1279년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44년간 전쟁이 이어졌다.

2. 1. 건국과 항쟁 (1127년 ~ 1162년)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한 후, 조구는 1127년 강녕부(현재의 상추시)에서 남송을 건국했다. 초기에는 악비,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금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했다.[1] 그러나 재상 진회의 주도로 화의론이 대두되었다. 진회는 권력을 장악하고 군 지휘권을 조정으로 환원했으며, 주전론자들을 탄압하여 악비는 모반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고 한세충은 은거했다.[1][2] 1142년 소흥화의를 통해 송과 금은 화평을 맺고, 회하를 경계로 국경선이 확정되었다.[2]

남송 건국과 항쟁기 주요 사건
연도사건
1127년정강의 변으로 북송 멸망. 조구가 남경에서 남송 건국.
1131년진회, 재상이 됨.
1138년공식적으로 임안이 수도가 됨.
1140년주전론자에 대한 탄압 시작, 악비 처형.
1142년소흥화의 체결, 송과 금의 국경선 확정.
1155년진회 사망.


2. 2. 효종의 치세와 번영 (1162년 ~ 1189년)

진회 사후, 금나라 해릉왕이 침공했으나 채석기 전투에서 패배하여 격퇴되었다.[1] 해릉왕은 권력 확립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완안옹(세종)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고,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1] 같은 해, 고종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양자인 조신(효종)이 즉위하였다.[1]

금의 세종과 남송의 효종은 각 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인물들로, 우연히도 동시대에 두 명군이 남북에 등장하여 평화가 찾아왔다.[1]

효종은 불필요한 관료를 줄이고, 당시 남발되던 회자(지폐) 발행을 조절하고, 농촌과 강남 경제를 활성화하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하여 남송의 번영을 이끌었다.[1]

2. 3. 한탁주 시대 (1189년 ~ 1207년)

광종은 아버지 효종과 달리 우둔하여 황후 이씨의 말만 들었다.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종실 재상 조여우한탁주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되었다. 한탁주는 이 공적으로 권력에 가까워지리라 생각했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그를 멀리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1195년 조여우를 재상직에서 몰아냈고, 경원의 당금을 일으켜 1197년에는 조여우 편에 섰던 주자 등 59명을 금고(禁錮)에 처하고, 1198년에는 주자의 성리학을 위학으로 규정하여 탄압했다.

한탁주는 그 후 10년간 권력을 유지했으나, 뒤를 보호해주던 황후와 황태후가 차례로 붕어하자 권력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때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으로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통해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심각했던 것이다.

1207년 금나라가 조기 화평을 바라며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예부시랑 사미원이 한탁주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금나라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

2. 4. 몽골의 위협과 멸망 (1207년 ~ 1279년)

사미원한탁주를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북쪽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부상했다. 1233년 몽골이 금나라 수도 개봉부를 함락시키고, 1234년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몽골은 남송과의 조약을 위반하고 남송을 침공하기 시작했다(1235년).

몽골의 1차 침공(1235년 ~ 1241년)은 맹공 등의 활약과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몽골의 2차 침공(1253년 ~ 1259년)은 몽케 칸의 사망과 가사도의 밀약으로 중단되었으며, 가사도는 권력을 장악했다.

몽골의 3차 침공(1268년 ~ 1279년)은 쿠빌라이 칸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으며,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이 함락되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

3. 정치

남송의 중앙 관제는 북송의 제도를 기본적으로 계승하였다. 재상은 상서좌복사 겸 문하시랑과 상서우복사 겸 중서시랑 2명이었으나, 이후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개칭되었고, 부재상으로 참지정사가 있었다.

南宋중국어 시대에는 진회, 한탁주, 사미원, 가사도 등 독재 재상이 장기간 집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1] 이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기간은 남송 150년 중 약 70년에 달한다. 그러나 남송은 북송 시대에 이어 출신지, 사상, 학문적 대립 등이 얽힌 당파 대립이 심했고, 이러한 독재 재상에 대한 악평은 반대파 및 이들을 추종하는 당시 민중의 감정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또한 간관·어사대 계열의 언론을 직무로 하는 관료(대간·언관)의 진언에 의해 황제가 자주 인사나 정책을 번복하는 경우가 많았다.[1]

그 외의 점에서는 원풍 체제와 거의 변함이 없고, 2명의 승상 아래 실무 기관인 육부(호부, 이부, 형부, 병부, 예부, 공부)가 있었다. 다만 당대에는 인사권이 이부에 집중되었으나, 송대에는 고급 문무관의 인사는 중서와 추밀원, 특히 중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호부, 이부, 형부 세 부처에 비해 병부, 예부, 공부 세 부처의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진 것은 특기할 만하다. 병부는 추밀원이 존속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다루는 일이 적고, 예부와 공부는 원래부터 중요성이 낮았다.[2]

4. 경제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수를 줄이고, 당시 남발 기미가 보이던 지폐(회자, 會子) 발행을 절제하고 농촌의 체력을 회복하며, 강남 경제를 활성화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여 남송은 번영을 누렸다.[3] 국제 교역 및 농지 개량 등을 통해 고도의 문화를 축적하여, 화중 지역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4] 절강성 용천애산의 청자 및 복건성 건요(建窯)의 천목다완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4] 또한 일본과의 사이에서 · 교역이 왕성하여, 선종이 이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등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4]

5. 사회

남송 사회는 북송의 사회 구조를 이어받아 발전하였다. 사대부 계층이 사회 지배층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이들은 과거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과거 제도는 남송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거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사대부 계층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이는 사회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학문과 교육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도시 문화 역시 남송 시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수도 임안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상업과 수공업 중심지로 번성하였으며, 다양한 문화 시설과 오락거리가 발달하여 많은 사람이 도시 생활을 즐겼다. 항주(임안)는 1129년 임안부로 승격되어 행재(임시수도)가 되었고, 1138년 공식적으로 수도가 되었다.

서민들의 생활 수준도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서민들도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175년 주희와 육구연의 아호의 회가 열리는 등 서민 문화와 교육 수준도 높아져 사회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 문화

남송은 북송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성리학이 주류 학문으로 자리 잡았고,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했다.[1] 역사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이 이루어졌다. 절강성 용천애산의 청자와 복건성 건양 건요의 천목다완이 유명했다.[1]

7. 국제 관계

남송의 주요 외교 상대는 북쪽의 금나라와 몽골 제국(원나라)이었다. 고려서하 등과는 거리가 멀어져 관계가 약화되었으나, 해상 기술의 발달로 일본과의 관계는 활발해졌다.

송나라를 복속시킨 금나라는 고려, 서하, 대리국 등도 복속시켜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경제적 기반은 약하여 송나라로부터의 조공이 없다면 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 조공조차도 송나라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결제로 다 써버리는 상태였다.

송나라와 금나라는 약 100년에 걸쳐 중국을 양분했다. 양국 간에는 금나라에서 송나라로는 말과 비단 등이, 송나라에서 금나라로는 은, 동전, 도자기, 향료, 서화, 서적 등이 교역되었다. 북송 시대에 화북과 강남에서 거래되던 것과 거의 같은 품목이 거래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즉, 북쪽과 남쪽을 다스리는 나라가 달라도 강남의 물자가 화북을 지탱한다는 중국의 경제 시스템은 거의 변함없이 더욱 발전했던 것이다. 그 후의 원나라, , 의 경제 시스템도 기본적으로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과의 일송무역은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며, 선종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등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3]

7. 1. 금나라와의 관계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한 후, 1127년 고종이 남쪽에서 송나라를 재건하면서(남송) 금나라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악비, 한세충 등의 활약으로 금나라에 강력히 저항했으나, 진회가 재상이 되면서 주전론을 억누르고 금나라와의 화평을 추진했다.

1142년 소흥의 화의가 체결되면서 남송은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1161년 금나라 해릉왕의 침입으로 화의가 깨졌고, 해릉왕 사후 1165년 건도의 화의를 통해 양국 관계가 다소 개선되었다.

1206년 한탁주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1208년 가정화의를 통해 다시 화의가 맺어졌다. 이후 남송은 금나라가 약화되자 조공을 중단하고, 몽골과 연합하여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켰다.[4]

남송과 금나라의 주요 사건
연도사건내용
1127년남송 건국정강의 변 이후 고종이 남쪽에서 송나라 재건
1142년소흥의 화의남송이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바치는 관계 성립
1161년해릉왕의 침입금나라 해릉왕이 남송을 침략, 화의 파기
1165년건도의 화의해릉왕 사후, 양국 관계 개선
1206년개희북벌한탁주의 북벌 실패
1208년가정화의다시 화의 체결
1234년금나라 멸망남송,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 멸망


7. 2. 몽골과의 관계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자 그 영토는 개봉과 진주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하여, 남동쪽은 남송이, 북서쪽은 몽골 제국이 차지하기로 약속되었다.[1] 그러나 남송 조정은 이 기회에 개봉을 회복하고자 하여 맹약을 파기했다.

이에 분노한 몽골 황제 오고타이는 남송을 공격하여 사천의 대부분을 함락시켰으나, 남송도 저항하여 전선은 교착되었다.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고, 구육과 몽케 사이에 계승 다툼이 벌어졌으나, 1251년 몽케가 반대파를 제거하고 국내를 평정했다.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에게 대리국 정벌을 명령하여 1253년 정복을 완료했고, 1258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쿠빌라이, 우량카다이와 함께 세 방향에서 남송을 공격했다.

그러나 1259년 몽케가 사망하면서, 쿠빌라이와 알리쿠부케 사이에 계승 다툼이 벌어졌고, 1264년 쿠빌라이가 승리했다. 이후 쿠빌라이는 1267년 남송에 대한 재침공을 시작했으나, 남송은 저항을 계속했다. 1276년 임안이 함락되고, 1279년 마지막 황제 위왕이 자결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송 황족들은 대도로 보내졌으나, 일부 유신들은 친(陳)나라로 망명했다.

7. 3. 일본과의 관계

일송통상 참조

송(宋)은 오랫동안 주도적인 위치에서 일본과의 통상을 이끌었으나, 일본 국내 경제가 발전하고 귀족들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조정과 대사(大宰府)의 통상 통제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평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빨라졌고, 평청성은 일송통상을 국가 재정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자 복원경으로 일시 천도하기도 하였다.[3]

송은 북송 시대와 마찬가지로 민간 교역을 허용하고 세금을 부과하여 수입을 얻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송에서 일본으로는 비단, 도자기, 약품, 서적, 경전, 동전 등이 수출되었고, 일본에서 송으로는 금, 은, 진주, 유황, 공예품 등이 수출되었다.

항해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 상선은 처음에는 고려를 거쳐 경험을 쌓은 후 남송으로 향했다. 일본 선박이 송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소흥 15년(구안 원년/1145년)에 "일본 상인 남녀 19명이 온주에 표착했다"는 기록[3]이며, 남송 말까지 10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기록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례만 해당될 뿐, 실제로는 훨씬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씨 정권이 몰락하고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후에도 민간 교역은 계속 허용되었지만, 평청성과 같이 막부가 직접 교역에 참여하지는 않고 간섭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민간 교역은 더욱 활발해졌고,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송나라 승려의 이야기를 듣고 송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울 정도로 송으로 가는 위험이 줄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 또한 어분당선이라는 교역선을 운영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는 막부가 해외 교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겐초 6년(1254년/남송 보우 2년)에 당선은 5척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은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 이 명령 전후로 송은 몽케의 친정(1253년-1259년)을 겪었다.

함순 2년(1266년/원 지원 3년/일본 분에이 3년),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주된 목적은 일본과 남송의 관계를 끊어 남송 공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친정(1268년-1279년) 이후, 쇼코 2년(1279년/원 지원 16년/일본 고안 2년) 압산의 싸움에서 남송은 결국 멸망하였다.

송이 멸망한 후, 원구 등으로 인해 일본과 원나라 정부 사이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지만, 민간 교역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일송통상은 대체로 일원통상으로 이어졌다.[5]

8. 고려와의 관계

남송과 고려는 북송 시대부터 이어져 온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 고려는 남송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쳤으며, 남송의 선진 문물을 수입했다. 1172년, 남송 효종은 명주지주를 통해 일본 후백화법황과 평청성에게 국서와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일송무역)[1]

남송의 상인들은 고려에 와서 무역을 했고, 고려의 인삼, 종이, 나전칠기 등이 남송에 수출되었다. 남송의 유학, 불교, 도교 등 사상과 문화가 고려에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다. 남송은 고려에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1]

9. 역대 황제

남송 황제
대수초상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 기간
1
고종수명중흥전공지덕성신무문소인헌효황제(受命中興全功至德聖神武文昭仁憲孝皇帝)조구1127년 ~ 1162년
2--효종소통동도관덕소공철문신무명성성효황제(紹統同道冠德昭功哲文神武明聖成孝皇帝)조선1162년 ~ 1189년
3--광종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조돈1189년 ~ 1194년
4--녕종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철무성예공효황제(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哲武聖睿恭孝皇帝)조확1194년 ~ 1224년
5--리종경문강무민효황제(景文剛武敏孝皇帝)조윤1224년 ~ 1264년
6--도종단문명무경효황제(端文明武景孝皇帝)조기1264년 ~ 1274년
7--공제공황제(恭皇帝)조현1274년 ~ 1276년
8--단종효공인헌단성정황제(孝恭仁憲端聖靖皇帝)조시1276년 ~ 1278년
9--상흥제소제(少帝)조병1278년 ~ 1279년



북송에서는 태조의 자손이 아닌 그의 동생인 태종의 자손이 황위를 계승했으나, 고종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형제들도 금나라에 끌려갔기 때문에 태조의 차남인 조덕방의 자손인 조백종이 양자가 되어 황위를 계승함으로써 황위가 태조의 계통으로 이동하게 되었다.[1]

참조

[1] 서적 秦檜の講和政策と南宋初期の官界 汲古書院 2006
[2] 서적 中国歴代職官事典 1963
[3] 서적 建炎以来繋年要録
[4] 서적 吾妻鏡
[5] 서적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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