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막낀꿍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낀꿍은 막 왕조의 인물로, 1593년 황제로 옹립되어 문란주를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후 레 왕조와의 대립에서 화공으로 승리하기도 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명나라로 도망갔다. 1600년 탕롱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고평으로 물러났으며, 1621년 조카 막낀코안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다. 1625년 후 레 왕조에 의해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25년 사망 - 제임스 1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을 이뤘으나, 의회와의 갈등, 재정 문제, 종교 문제 등 여러 난관에 직면했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고 《킹 제임스 성경》 번역을 주도하는 등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1625년 사망 - 모리 데루모토
    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가문의 당주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와 기카와 모토하루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전하지 않아 영지를 잃고 조슈 번을 다스리게 된 인물이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막낀꿍
기본 정보
이름막 낀꿍 (Mạc Kính Cung)
칭호황제
통치 정보
왕조막 왕조
즉위1592년 ~ 1625년
이전 통치자막 낀 찌
다음 통치자막 낀 콴
연호깐 통 (Càn Thống, 건통)
인물 정보
아버지막 낀 디엔
사망 년도1625년
묘호 및 시호
묘호대종 (代宗)
시호기천정지극문정무영황제 (起天挺地克文定武靈皇帝)

2. 생애

막낀꿍은 막 왕조 후기의 군주로, 겸왕 막낀디엔의 일곱째 아들이자[3] 막민종(莫敬止)의 동생이다. 즉위 전에는 돈후왕(敦厚王)에 봉해졌다.[3] 1593년 형 막낀찌가 후 레 왕조 군대에 사로잡히자, 안군공(安郡公) 막옥련(莫玉輦)에 의해 옹립되어 문란주에서 즉위했으며[3][4], 연호를 건통(乾統)으로 정하고 막 왕조 부흥을 꾀했다.

초기에는 해양과 경북(京北) 등지에서 지지 세력을 얻고, 후 레 왕조응우옌호앙 군대를 화공으로 격파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으나, 1594년 후 레 왕조 군대에 패배하여 사명부(思明府)를 거쳐 명나라 용주로 피신하기도 했다.[4] 1600년 막머우헙의 서모 배씨의 도움으로 탕롱 복귀를 시도했으나 찐뚱에게 패배하고 고평으로 물러나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5]

1621년 조카인 막낀코안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대자현에 머물렀다.[3][4] 1625년 후 레 왕조의 찐짱이 보낸 군대에 사로잡혀 청화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치세는 막 왕조가 북부 까오방 지역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후 레 왕조와 대립하던 시기였다.

2. 1. 즉위 이전

겸왕 막낀디엔의 일곱째 아들[3]이자, 막민종(莫敬止)의 동생이다. 즉위 이전에는 돈후왕(敦厚王)에 봉해졌다.[3]

1593년 (광유 원년) 형 막낀찌가 후 레 왕조 군대에 사로잡히자, 안군공(安郡公) 막옥련(莫玉輦)에 의해 옹립되었다.[3][4]

2. 2. 즉위와 후 레 왕조와의 대립 (1593년 ~ 1600년)

1593년, 형 막낀찌후 레 왕조 군대에 사로잡히자, 안군공(安郡公) 막응옥리엔(莫玉輦)에 의해 문란주(文蘭州)에서 황제로 옹립되었다.[3][4] 즉위 이전에는 돈후왕(敦厚王)에 봉해져 있었다.[3] 연호를 건통(乾統)으로 정하자, 해양(海陽)과 경북(京北) 등 각지에서 막 왕조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막낀꿍에게 합류하였다. 후 레 왕조의 장수 응우옌호앙(阮潢, 단국공)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왔으나, 막낀꿍은 화공을 이용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고 해양의 장왕(壯王) 막낀쯔엉(莫敬章)의 세력 기반을 점령했다. 이를 통해 해양과 산남(山南) 일대를 평정하였다.

1594년(건통 2년), 막응옥리엔과 함께 근거지를 안박현(安博縣)으로 옮겼으나, 후 레 왕조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막낀꿍과 막응옥리엔은 사명부(思明府)로 달아나 명나라에 신하를 자처하며 도움을 요청했다.[4] 그러나 후 레 왕조의 계속된 공세와 막 왕조 내부 장수들의 이탈 및 투항이 이어지자, 막낀꿍과 막응옥리엔은 결국 명나라의 용주(龍州)로 피신했다.[4] 이후 양산(諒山) 일대에서 병사를 동원하여 소규모 교전을 벌이며 저항을 이어갔다.

1600년(건통 8년), 막머우헙의 서모(庶母)인 배(裴)씨가 탕롱(昇龍, 현 하노이)에서 스스로 국모(國母)를 칭하며 막 왕조 지지자들의 봉기를 촉구하고, 동시에 막낀꿍을 맞이하여 귀국하도록 했다.[5] 막낀꿍은 이에 호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탕롱으로 돌아가려 시도했으나, 후 레 왕조의 실권자 찐뚱(鄭松, 평안왕)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군대는 금성현(金城縣)까지 밀려났고, 결국 오래지 않아 고평(高平)으로 철수해야 했다.[5]

2. 3. 탕롱 복귀 시도와 고평 천도 (1600년 ~ 1621년)

1600년, 막머우헙의 서모(庶母)인 부이(裴)씨가 탕롱(승룡)에서 국모를 자칭하며 막 왕조 지지자들에게 봉기를 호소했고, 동시에 막낀꿍을 맞이하여 귀국하게 했다.[5] 막낀꿍은 군대를 이끌고 탕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후 레 왕조찐뚱에게 공격받아 패배했다. 군대는 금성현까지 이르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평으로 물러났다.[4]

1618년, 찐뚱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막 왕조를 공격하여 태원(太原)을 점령했다.

1621년, 막낀꿍은 자신의 조카인 막낀코안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자신은 대자현으로 물러나 그곳을 지키며 태상황으로 추대되었다.[3][4]

2. 4. 양위와 최후 (1621년 ~ 1625년)

1621년, 막낀꿍은 그의 조카인 막낀코안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대자현에 근거지를 두고 머물렀다.

1625년, 후 레 왕조찐짱이 찐끼에우(鄭橋)를 파견하여 까오방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막낀꿍은 사로잡혀 청화로 압송된 뒤 참수되었다. 막낀코안명나라로 달아났다.

참조

[1]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vi.wikisourc[...]
[2]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vi.wikisourc[...]
[3] 서적 大越史記全書
[4] 서적 ベトナム史略
[5] 서적 大越史記全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