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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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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와 대화재는 1772년 4월 1일부터 3일까지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에도 시내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메구로의 다이엔지에서 시작된 불은 방화로 인해 확산되었으며, 934개의 마을, 169채의 다이묘 저택, 170개의 다리, 382개의 절을 태웠다. 사망자는 1만 4700명, 행방불명자는 4000명이 넘었으며, 이 화재를 계기로 연호가 메이와에서 안에이로 개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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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대화재
개요
'1772년 메이와 대화재 당시 에도'
화재 정보
발생 위치일본, 에도 (현재의 도쿄도)
발생 날짜1772년 2월 29일 (메이와 9년)
소실 범위에도성의 니시노마루 소실
하타모토 이상의 저택 680채
일반 주택 6275채
사원 172개소
다리 124개소
창고 237채
인명 피해사망자 14,700여명
재건 노력막부의 노력으로 1774년에 대부분 재건 완료
배경 및 원인
발생 원인정확한 원인 불명 (방화설, 실화설 등)
사회적 배경에도 시대의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인한 화재 위험 증가
빈곤층 증가와 사회 불만 고조
막부의 재정 악화
자연적 배경겨울철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
영향
사회적 영향에도 시민들의 생활 기반 파괴 및 고통 심화
물가 상승 및 경제 혼란
사회 불안 증가
정치적 영향막부의 권위 실추 및 사회적 불만 고조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적 입지 약화
문화적 영향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새로운 건축 기술 및 디자인 도입
화재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 및 예술 작품 창작
같이 보기
관련 재해에도의 화재

2. 화재 발생

1772년4월 1일(음력 2월 29일) 오후 1시경, 메구로의 다이엔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은 남서풍을 타고 아자부, 교바시, 니혼바시를 덮쳐 에도 성 아래의 무가 저택을 잿더미로 만들고 칸다, 센주 방면으로 번져나갔다. 고즈카하라 부근에서 한때 진화되었지만, 오후 6시경 혼고에서 다시 불이 붙어 고마고메, 네기시를 태웠다. 4월 2일(음력 2월 30일) 낮 무렵에는 진화된 듯 보였지만, 4월 3일(음력 3월 1일) 오전 10시경 바쿠로초 부근에서 또다시 재발화하여 동쪽으로 번져 니혼바시 지역은 궤멸되었다.

2. 1. 발화 원인

메구로에 있는 다이엔지에서 불이 시작되었다. 불을 낸 사람은 무슈구마가야 출신의 무숙인인 마호라는 승려로, 도둑질을 하려고 고리에 방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호는 화부도적개 장관이었던 하세가와 노부오 (하세가와 노부유키의 아버지)의 부하에게 메이와 9년 (1772년) 4월경에 체포되었고, 같은 해 6월 21일 (1772년7월 21일)에 시중 견인 후 코즈카하라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2. 2. 화재 확산

메이와 대화재 사망자 공양묘. 고묘지 (도쿄도 미나토구)


4월 1일(음력 2월 29일) 오후 1시경, 메구로의 다이엔지에서 발생한 화재는 남서풍을 타고 아자부, 교바시, 니혼바시를 덮쳐 에도 성 아래의 무가 저택을 잿더미로 만들고 칸다, 센주 방면으로 번져나갔다. 한때 고즈카하라 부근에서 진화되었지만, 오후 6시경 혼고에서 다시 불이 붙어 고마고메, 네기시를 태웠다. 4월 2일(음력 2월 30일) 낮 무렵에는 진화된 듯 보였지만, 4월 3일(음력 3월 1일) 오전 10시경 바쿠로초 부근에서 또다시 재발화하여 동쪽으로 번져 니혼바시 지역은 궤멸되었다.

3. 피해



메이와 대화재로 불에 탄 마을은 934개, 다이묘 저택은 169채, 다리는 170개, 절은 382개에 달했다. 히에 신사, 칸다묘진, 유시마텐진, 아사쿠사 혼간지, 유시마 세이도 등 주요 종교 시설도 피해를 보았다.

사망자는 1만 4700명, 행방불명자는 4000명을 넘었다. 노중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타누마 오키츠구의 저택도 소실되었다. 이 화재를 계기로 연호가 메이와에서 안에이로 변경되었다.

4. 사건의 영향



메이와 대화재는 4월 1일(음력 2월 29일) 13시경, 메구로의 다이엔지에서 발생하여 남서풍을 타고 아자부, 교바시, 니혼바시를 덮치며 에도 성 아래의 무가 저택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후 칸다, 센주 방면으로 번져나갔고, 고즈카하라 부근에서 일시적으로 진화되었으나, 18시경 혼고에서 다시 불이 붙어 고마고메, 네기시를 태웠다. 4월 2일(음력 2월 30일) 낮 무렵에는 진화된 듯 보였지만, 4월 3일(음력 3월 1일) 10시경 바쿠로초 부근에서 재발화하여 동쪽으로 번져 니혼바시 지역은 궤멸되었다.

이 화재로 불에 탄 마을은 934개, 다이묘 저택은 169채, 다리는 170개, 절은 382개에 달했다. 산노 신사, 칸다묘진, 유시마텐진, 아사쿠사 혼간지, 유시마 세이도도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1만 4700명, 행방불명자는 4000명을 넘었으며, 노중이 된 지 얼마 안 된 타누마 오키츠구의 저택도 소실되었다. 이 화재를 계기로 연호가 메이와에서 안에이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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