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노중은 미카와 시대 도쿠가와 가문의 토시요리에서 유래한 직책으로, 에도 막부의 주요 보직 중 하나였다. 1634년 정부 재편을 통해 직무가 명확히 규정되었으며, 일본 천황, 조정, 다이묘, 쇼군 영지 내 업무, 공공사업 등 광범위한 책임을 가졌다. 노중은 쇼군과 소통하며, 주요 의회 구성원으로서 계승 분쟁 등을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쇼군의 명령을 다이묘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 권력이 약화되었으나 에도 시대를 거치며 정부 직책과 의회로 계속 존재했으며, 캇테카케 노중 제도를 통해 재정을 전담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에도 막부 노중 - 오쿠보 나가야스
오쿠보 나가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케다 가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막부 운영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부정 축재 의혹으로 실각하고 가문이 몰락했다. - 에도 막부 노중 - 다누마 오키쓰구
다누마 오키쓰구는 에도 시대 후기 쇼군의 신임을 얻어 로주에 올라 막부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부정부패와 농촌 황폐화로 비판받으며 실각한 인물이다. - 일본의 번 - 부번현 삼치제
부번현 삼치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체제로, 막부 직할지를 부와 현으로 나누고 번을 존속시키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종료되었다. - 일본의 번 - 판적봉환
판적봉환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로, 봉건적 막번 체제를 개혁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각 번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노중 | |
---|---|
개요 | |
직위명 | 노중 (老中) |
로마자 표기 | Rōjū |
설명 | 에도 막부의 최고위 직책 중 하나이다. |
상세 정보 | |
역할 | 막부의 정치, 행정, 군사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 쇼군을 보좌하고 막부의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 다이묘를 감찰하고 통제 |
정원 | 시대에 따라 변동 보통 4~5명 |
임명 | 후다이 다이묘 중에서 임명 쇼군이 직접 임명 |
급여 | 석고로 지급 다이묘의 격에 따라 차등 지급 |
근무 장소 | 에도성 |
관련 직책 | 와카도시요리 오메쓰케 교토 쇼시다이 오사카 조다이 |
역사 |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설치 초기에는 로닌 출신도 임명 점차 후다이 다이묘의 독점적인 직책이 됨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에도 시대 막부 후다이 다이묘 |
2. 역사
노중은 정이대장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직책이었으나, 에도 막부 이전부터 존재한 직명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집안의 요리키 제도에서 유래해 간에이 연간에 정식 관직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로주의 '주(じゅう,中)'는 경칭이며, '노(老)' 자는 에도 막부의 가로(家老)를 뜻한다.[1]
로주의 최저 녹봉은 2만 5천 석의 수조권이었으며, 녹봉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로주카쿠(老中格)'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로주는 막부의 직신(直臣)이었으나, 예외적으로 가로(家老)를 여럿 둔 지방 다이묘들의 경우 가로의 우두머리에게 로주 명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에도 무가정권의 각료에 해당하며, 그 중 필두를 '''로주슈자'''(老中首座)라 하여 총리격으로 삼았다.[1]
로주는 지방 다이묘들을 감독하고, 에도 등 주요 대도시의 행정 및 사법 처리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감독했다. 온고쿠부교(遠国奉行) 등 관리들이 교토 중앙 조정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 다이묘, 사찰, 신토 신사와의 관계도 처리했다. 부교(감독관)들은 재정, 세입, 세출을 감독하고 관련 보고서를 막부와 로주에게 제출했다. 로주는 중요 사안에만 직접 개입하고 쇼군을 보좌하여 권력이 막강했다.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로주 제도는 봉건적이라는 명분으로 해체되고, 각종 장관과 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1]
원칙적으로 로주는 후다이 다이묘여야 했으며, 5만 석 이상 봉지를 소유해야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쇼군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 지위나 재산과 무관하게 로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토 수호직, 오사카 죠다이 등 대도시 관리직에도 정이대장군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주로 임명되었다.[1]
정이대장군은 로주 중 명망 높고 능력 있는 인물을 대로(大老)로 임명하기도 했다. 대로 지위는 이이씨, 사카이씨, 호타씨 등 정이대장군 최측근만 오를 수 있었고, 정이대장군 다음가는 권력자였다. 대로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이 나오스케로,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에도성 사쿠라다몬에서 살해당했다.[1]
2. 1. 기원과 초기 발전
도쿠가와 가문에서 가정을 관장했던 '''토시요리'''(年寄, 원로)에서 유래한다. 토시요리를 "노(老)" 한 글자로 나타내고, 여기에 "집단의 일동, 전체"를 의미하는 "중(中)"(가중, 씨자중, 렌중, 소중, 촌중 등과 같음)을 붙여, 본래는 복수의 숙로로 구성된 총체를 가리켰다. 『도쿠가와 실기』에는 '''숙로'''라고도 기록되어 있다.[1] 처음에는 '''오토시요리중'''(御年寄衆)이라고 불렸으며, 하타모토 사이에서는 이 호칭으로 정착되었다.[1] 노중 봉서 (막부의 명령서)에 서명·화압을 더하여 발출하는 것으로부터 '''가판의 열'''이라고도 했다.[1]간에이 11년(1634년)부터 케이안 2년(1649년)까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근을 등용하여 6인중이라는 직책이 설치되어 일상적인 잡무를 처리했다.[1] 그 중 4명이 노중으로 승진하면서 한 번은 노중의 직무에 흡수되었지만, 간분 2년(1662년)에 '''와카도시요리'''가 설치되어 하타모토·고케닌의 지배, 에도성 안의 관리와 같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정을 담당하고, 노중은 다이묘 지배 등의 국정을 담당하는 막정의 기본적인 분담 체제가 정비되었다.[1]
2. 2. 제도 정비와 권력 강화
노중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정을 관장했던 '''토시요리'''(年寄, 원로)에서 유래한다. 토시요리를 "노(老)" 한 글자로 나타내고, 여기에 "집단의 일동, 전체"를 의미하는 "중(中)"을 붙여, 본래는 복수의 숙로로 구성된 총체를 가리켰다. 도쿠가와 실기에는 '''숙로'''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오토시요리중'''(御年寄衆)이라고 불렸으며, 하타모토 사이에서는 이 호칭으로 정착되었다. 노중 봉서 (막부의 명령서)에 서명·화압을 더하여 발출하는 것으로부터 '''가판의 열'''이라고도 했다.[1]간에이 11년(1634년)부터 케이안 2년(1649년)까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근을 등용하여 6인중이라는 직책이 설치되어 일상적인 잡무를 처리했다. 그 중 4명이 노중으로 승진하면서 한 번은 노중의 직무에 흡수되었지만, 간분 2년(1662년)에 '''와카도시요리'''가 설치되어 하타모토·고케닌의 지배, 에도성 안의 관리와 같은 도쿠가와 가문의 가정을 담당하고, 노중은 다이묘 지배 등의 국정을 담당하는 막정의 기본적인 분담 체제가 정비되었다.[1]
3. 직무와 권한
노중은 막부 최고위 관직으로, 4~5명의 원로들로 구성되어 정이대장군의 국정 운영을 보좌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임무를 수행했다.[1] 주요 직무는 다음과 같다.
- 지방 다이묘들에 대한 감독 및 지휘[1]
- 에도와 같은 주요 대도시의 행정 및 사법 처리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는지 감독[1]
- 온고쿠부교(遠国奉行)와 같은 관리들이 교토의 중앙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지원[1]
- 다이묘, 거대 사찰, 신토 신사와의 관계 처리[1]
- 재정 및 세입, 세출 감독과 관련된 보고서를 막부와 로주에게 제출하는 부교(감독관)들을 감독[1]
이 외에도 천황, 조정 및 승려와의 관계, 10,000 ''곡'' 이상 토지를 소유한 ''다이묘'' 감독, 공식 문서 양식 관리, 쇼군 영지 내부 업무 감독, 주화, 공공사업, 봉토 수여, 정부 관계 및 승려 사찰과 신사에 대한 감독, 지도, 도표 및 기타 정부 기록 편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1]
노중은 오메쓰케, 마치부교, 엔고쿠부교, 슨푸성대 등을 지휘 감독하고, 조정, 공가, 다이묘, 절사 관련 사항 및 지행 배분 등을 총괄했다.[1]
도쿠가와 쓰나요시 통치 시기에는 ''로주''가 쇼군, ''타이로''(Tairō),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등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대부분의 권력을 잃고 단순한 메신저 역할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정부 직책과 의회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1]
3. 1. 주요 직무
노중은 정이대장군의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직책이었으나, 원래 에도 막부 이전부터 존재한 직명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집안의 요리키 제도에서 유래해 간에이 연간에 정식 관직 명칭으로 정착됐다. '로주(老中)'의 '로(老)'는 '늙다'라는 뜻으로 에도 막부의 가로(家老)를 의미하며, '주(じゅう,中)'는 경칭이다. [1]로주는 1634년 정부 재편과 함께 여러 책임이 명확하게 규정되었다.[1]
- 천황, 조정 및 승정과의 관계.[1]
- 10,000 ''곡''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다이묘''에 대한 감독.[1]
- 공식 문서의 양식을 관리하는 업무.[1]
- 쇼군의 영지 내부 업무 감독.[1]
- 주화, 공공사업, 봉토 수여.[1]
- 정부 관계 및 승려 사찰과 신사에 대한 감독.[1]
- 지도, 도표 및 기타 정부 기록 편찬.[1]
이들은 지방 다이묘 감독을 지휘하고, 에도와 같은 주요 대도시들의 행정, 사법 처리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되는지를 감독했다. 온고쿠부교(遠国奉行)와 같은 관리들이 교토에 있는 중앙 조정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는 데에 힘썼으며, 그 외 다이묘, 거대 사찰, 신토 신사들과의 관계도 처리했다. 그 외의 부교(감독관)들이 재정과 세입, 세출을 감독했고 모든 재정과 관련된 보고서를 막부와 로주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 로주들은 가장 중요한 사안들만 직접 개입하였으며, 쇼군을 직접 곁에서 도와 일을 처리하는 만큼 그 권력도 막강하였다.[1]
''로주''는 동시가 아닌 순환 방식으로 근무했으며, 각자는 한 달 동안 쇼군을 섬겼으며, ''소바요닌''(Soba-yōnin)이라 불리는 시종을 통해 쇼군과 소통했다. ''로주''는 ''효조쇼''(Hyōjōsho) 의회의 구성원으로, ''오메츠케''(Ō-Metsuke) 및 ''부교''(Bugyō) 대표와 함께 활동했다. ''효조쇼''의 일원으로서 ''로주''는 대법원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여, 계승 분쟁 및 기타 국가와 그 가신 간의 분쟁 사항을 결정했다.[1]
노중은 오메쓰케, 마치부교, 엔고쿠부교, 슨푸성대 등을 지휘 감독하고 조정, 공가, 다이묘, 절사에 관한 사항, 지행 배분 등에 관해 통괄했다. 정원은 4명에서 5명이며, 평소 업무는 월번제로 매달 1명이 담당하고, 에도성 혼마루 어전에 있던 어용방이라는 방을 집무실로 삼아 중대한 사항에 대해서는 합의했다.[1]
덴포 11년 (1840년)의 "무감"에 따르면, 노중의 지배하에 타야스 가, 히토츠바시 가, 시미즈 가, 가로(家老)들, 오소바슈, 고케들, 루스이, 오반가시라, 오메츠케, 마치부교, 간조부교, 간토 군다이, 간조 긴미야쿠, 사쿠지부교, 후신부교, 코부신구미 지배, 하타부교, 야리부교, 루스이반, 코다이요리아이들, 오모테 고케들, 미노 군다이, 원국(遠国)의 관리가 있었다.[1]
3. 2. 운영 방식
노중은 막부 최고 관직으로, 원로 4~5명으로 구성되어 정이대장군의 국정 수행을 보좌했다. 임기는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갔다.[1]정이대장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했으나, 에도 막부 이전부터 있던 직책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요리키 제도에서 유래, 간에이 연간에 정식 관직으로 정착되었다. 로주의 '주(じゅう,中)'는 경칭이며, '로(老)'는 에도 막부의 가로(家老)를 뜻한다.[1]
로주의 최저 녹봉은 2만 5천 석 수조권이었고, 미달 시 '로주카쿠(老中格)' 꼬리표가 붙었다. 막부 직신(直臣)이었으나, 예외적으로 지방 대영주 가로의 우두머리에게도 로주 명칭이 부여됐다. 에도 무가정권 각료 중 필두는 '''로주슈자'''(老中首座)로 총리격이었다.[1]
지방 다이묘 감독, 에도 등 주요 도시 행정/사법 처리 감독, 온고쿠부교(遠国奉行)를 통한 조정과의 관계 유지, 다이묘, 사찰, 신사와의 관계 처리 등을 담당했다. 부교(감독관)들은 재정 감독 및 보고를, 로주는 중요 사안에 직접 개입했다. 쇼군을 직접 보좌해 권력이 막강했으나, 1867년 메이지 유신 개혁으로 해체, 각종 장관과 부들이 자리를 대신했다.[1]
원칙상 후다이 다이묘, 5만 석 이상 봉지 소유자가 로주가 될 수 있었으나, 쇼군 신임에 따라 예외가 많았다. 교토 수호직, 오사카 죠다이 등 고위 관리직에도 쇼군 총애를 받는 인물이 임명되었다.[1]
정이대장군은 로주 중 명망 높은 인물을 대로(大老)로 임명했다. 이이씨, 사카이씨, 호타씨 등 최측근만 대로가 될 수 있었고, 이이 나오스케가 대표적이다. 이이 나오스케는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에도성 사쿠라다몬에서 살해당했다.[1]
1634년 정부 재편 칙령으로 ''로주'' 책임이 규정되었다.[1]
1. 천황, 조정, 승정과의 관계.[1]
2. 10,000 ''곡'' 이상 토지 소유 ''다이묘'' 감독.[1]
3. 공식 문서 양식 관리.[1]
4. 쇼군 영지 내부 업무 감독.[1]
5. 주화, 공공사업, 봉토 수여.[1]
6. 정부 관계, 승려 사찰/신사 감독.[1]
7. 지도, 도표 등 정부 기록 편찬.[1]
''로주''는 순환 근무, 매달 쇼군을 섬기며 ''소바요닌''(Soba-yōnin)을 통해 소통했다. ''효조쇼''(Hyōjōsho) 의원으로 ''오메츠케''(Ō-Metsuke), ''부교''(Bugyō) 대표와 활동, 대법원처럼 계승 분쟁 등을 결정했다.[1]
도쿠가와 쓰나요시 통치 하, ''로주''는 쇼군, ''타이로''(Tairō),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협력으로 권력을 상실, 메신저로 전락했으나 에도 시대 동안 정부 직책/의회로 존속했다.[1]
오메쓰케, 마치부교, 엔고쿠부교, 슨푸성대 등을 지휘, 조정, 공가, 다이묘, 절사 관련 사항, 지행 배분 등을 통괄했다. 4~5명 정원, 월번제로 매달 1명 담당, 에도성 혼마루 어전 어용방에서 집무, 중대 사항은 합의했다. 도청 방지 위해 이로리 재 위에 필담, 담당 외에도 중요 사항 합의/처리했다. 쇼군 명령을 노중 봉서로 다이묘에게 하달, 담당 다이묘-막부 간 사전 조정/지도/중재 (취차의 노중)했다.[1]
쇼군은 총리, 노중은 각료로 비유되나, 실제로는 달랐다. 정무 전반 담당, 월번 교대/협의, 부교 레벨에서 정무 분장. 1명은 '''캇테카케 노중'''으로 재정 전임, 노중 필두로 정치. 니시노마루 노중은 오고쇼/쇼군 세자 가정 총괄. 게이오 3년 (1867년) 막말 막정 개혁으로 월번제 폐지, 5 총재 전임 체제.[1]
집무 시간 약 4시간, 오전 10시경 등성, 오후 2시경 퇴출. 노중 취임 시 니시노마루 시타(현 황거 외원) 저택 변경. 간토 주변 다이묘 가문이 막부 중요 직 취임, 엔고쿠 다이묘는 시모사국사쿠라번 등 에도 근처로 전봉. 비젠가라쓰번주 미즈노 타다쿠니는 도토미국하마마쓰번 전봉 후 노중 취임.[1]
5만 석 이상 후다이 다이묘가 노중이 될 수 있었으나, 예외로 재능 따라 '''노중격''' 등용, 노중과 동등 직책(노중 봉서 연서 불가). 노중격에서 노중 승진, 도자마 다이묘도 원후다이로 막각 참여.[1]
소요닌, 교토 쇼시다이, 오사카성대 등 쇼군 직속 직책에서 노중 전임. 오사카성대는 종5위에서 종4위하 승진, 교토 쇼시다이/노중은 종4위하・시지쥬 승진, 종4위하 이상 천황 알현.[1]
노중과 같은 관명(○○수, ○○대보 등) 자율 회피. 새 노중 취임 시, 같은 관명 오로카 즈메, 오히로마 즈메, 타마노마 즈메 외 다이묘/하타모토는 관명 변경. 노중 간 호칭은 관명에 "전" 추가.[1]
덴포 11년 (1840년) "무감"에 따르면, 타야스 가, 히토츠바시 가, 시미즈 가, 가로(家老), 오소바슈, 고케, 루스이, 오반가시라, 오메츠케, 마치부교, 간조부교, 간토 군다이, 간조 긴미야쿠, 사쿠지부교, 후신부교, 코부신구미 지배, 하타부교, 야리부교, 루스이반, 코다이요리아이, 오모테 고케, 미노 군다이, 원국(遠国) 관리가 노중 지배하에 있었다.[1]
3. 3. 다른 관직과의 관계
노중은 오메쓰케, 마치부교, 엔고쿠부교, 슨푸성대 등을 지휘 감독하고 조정, 공가, 다이묘, 절사에 관한 사항, 지행 배분 등에 관해 통괄했다. 정원은 4명에서 5명이며, 평소 업무는 월번제로 매달 1명이 담당하고, 에도성 혼마루 어전에 있던 어용방이라는 방을 집무실로 삼아 중대한 사항에 대해서는 합의했다. 외부에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도청(당시에는 도청 장치가 없었으므로, 마룻바닥이나 천장 속에서 엿듣는 것)을 당하지 않도록, 더 나아가 문서로 증거도 남지 않도록 최선의 방법으로 어용방에 놓여 있던 이로리의 재 위에 필담을 했다. 실제로는 담당이 아닌 사람도 월번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항을 합의・처리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다이묘의 통치도 직무로 하여 쇼군의 명령을 노중 봉서로 다이묘에게 하달했다. 담당 다이묘와 막부 사이를 사전에 조정・지도하여 중재하는 '취차의 노중'이라고 불리는 입장도 있었다.쇼군을 총리에 비유하고, 노중을 각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다르다. 노중은 정무 전반을 담당하고, 월번 교대 또는 협의를 했으며, 현재의 각료와 같은 정무의 분장은 행하지 않았다. 에도 막부의 제도에서는 정무의 분장은 각 부교 레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후에 1명을 '''노중 수좌'''라고도 불리는 '''캇테카케 노중'''으로 재정을 전임시켜 노중의 필두로서 정치를 행했다. 이 외에 때로는 니시노마루 노중을 두었다. 니시노마루 노중은 막정에 관여하지 않고, 주로 니시노마루에 거주하는 오고쇼나 쇼군 세자의 가정을 총괄했다. 게이오 3년 (1867년)에 막말의 막정 개혁으로 월번제를 폐지하고, 국내 사무・회계・외국 사무・육군・해군의 5명의 총재가 각각 전임하는 체제가 되어, 현재의 각료와 같은 정무의 분장이 행해졌다.
덴포 11년 (1840년)의 "무감"에 따르면, 노중의 지배는 타야스 가, 히토츠바시 가, 시미즈 가, 가로(家老)들, 오소바슈, 고케들, 루스이, 오반가시라, 오메츠케, 마치부교, 간조부교, 간토 군다이, 간조 긴미야쿠, 사쿠지부교, 후신부교, 코부신구미 지배, 하타부교, 야리부교, 루스이반, 코다이요리아이들, 오모테 고케들, 미노 군다이, 원국(遠国)의 관리였다.
4. 임용
노중(老中)은 막부에서 가장 명망 높은 최고 원로 가신들을 의미하며, 보통 4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정이대장군의 국정 수행을 보좌했다.
정이대장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했으나, 에도 막부 이전부터 존재했던 직책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요리키 제도에서 유래하여 간에이 연간에 정식 관직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로주의 '주(じゅう,中)'는 경칭이며, '로(老)' 자는 에도 막부의 가로(家老)를 뜻한다.
로주의 최저 녹봉은 2만 5천 석의 수조권이었다. 로주 직책을 수행하더라도 녹봉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로주카쿠(老中格)'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로주는 막부의 직신(直臣)이었으나, 예외적으로 가로(家老)를 여럿 둔 지방 대영주의 경우 가로의 우두머리에게 로주 명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에도 무가정권의 각료에 해당하며, 그 중 필두는 '''로주슈자'''(老中首座)라 하여 총리격으로 삼았다.
정이대장군은 종종 로주 중에서 명망과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대로(大老)로 임명하였다. 다이로는 이이씨, 사카이씨, 호타씨 등 정이대장군의 최측근만이 오를 수 있었으며, 정이대장군 다음가는 권력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다. 대로를 지낸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이 나오스케로, 1860년 사쿠라다몬 사건으로 에도성 사쿠라다몬에서 살해당했다.
4. 1. 노중 임용의 예외
원칙적으로 로주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후다이 다이묘여야만 했으며, 5만 석 이상의 봉지를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다만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로주의 자리에는 지위나 재산에 상관없이 쇼군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교토 수호직, 오사카 죠다이와 같은 대도시를 관리하는 고위 관리직에도 정이대장군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5. 캇테카케 노중 (勝手掛老中)
엔포 8년(1680년),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홋타 마사토시(다이로)에게 농정, 재정 등 경제 부문을 전담하게 한 것이 캇테카케 노중(勝手掛老中)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홋타가 조쿄 원년(1684년)에 암살된 후,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하여 간조쇼 기구의 개혁에 착수한 교호 시기까지 이 직책에 임명된 사람은 없었다.
요시무네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캇테카케 노중에 임명된 사람은 미즈노 타다유키로, 교호 7년(1722년) 5월 15일에 취임하여 교호 15년(1730년) 노중에서 퇴임할 때까지 재정 재건을 위해 연공 증징과 신덴 개발의 두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미즈노의 퇴임 후 다시 공석이 되었지만, 겐분 2년(1737년) 6월 14일에 마쓰다이라 노리무라가 캇테카케 노중에 취임했다. "금곡의 출납을 관장해야 할 뜻을 받들"게 된 노리무라는 농재정의 전부를 관장하게 되었고, 간토 지방 어용가케의 직책을 맡고 있던 오오카 타다스케도 "월번의 무구"(노중의 월번과 관계없이) 농정에 관한 것은 모두 노리무라에게 보고하도록 지시받았다.
6. 역대 노중 목록
각 직책자는 한 번씩만 나열된다. 일부는 여러 쇼군 밑에서 근무했을 수 있으며, 여러 임기 때문에 이 목록은 직책이 수행된 순서를 완전히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홋타 마사요시는 아베 마사히로(1843년 ~ 1857년) 이후인 1857년 ~ 1858년에 근무했지만, 이전에도 근무했기 때문에 더 앞에 나열되어 있다. 그는 아베 이후에도 다시 나열되지 않는다.
'''굵은 글씨'''는 후에 대로에 취임했다.
6. 1.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
오쿠보 다다치카 | 1593년 - 1614년 |
오쿠보 나가야스 | 1600년 - 1613년 |
혼다 마사노부 | 1600년 - 1615년[1] |
나루세 마사나리 | 1600년 - 1616년 |
안도 나오쓰구 | 1600년 - 1616년 |
혼다 마사즈미 | 1600년 - 1622년 |
나이토 기요나리 | 1601년 - 1606년 |
아오야마 다다나리 | 1601년 - 1606년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1600년 - (여러 설이 있음) |
6. 2.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
아오야마 나리시게 | 1608년 ~ 1613년 |
사카이 다다토시 | 1609년 ~ 1627년 |
사카이 다다요 | 1610년 ~ 1634년 |
도이 도시카쓰 | 1610년 ~ 1638년 |
안도 시게노부 | 1611년 ~ 1621년 |
나이토 기요쓰구 | 1616년 ~ 1617년 |
아오야마 다다토시 | 1616년 ~ 1623년 |
이노우에 마사나리 | 1617년 ~ 1628년 |
나가이 나오마사 | 1622년 ~ 1633년 |
6. 3.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
아베 마사쓰구 | 1623년 ~ 1626년 |
이나바 마사카쓰 | 1623년 ~ 1634년 |
나이토 다다시게 | 1623년 ~ 1633년 |
사카이 다다카쓰 | 1624년 ~ 1638년 |
모리카와 시게토시 | 1628년 ~ 1632년 |
아오야마 요시나리 | 1628년 ~ 1633년 |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 1632년 ~ 1662년 |
아베 다다아키 | 1633년 ~ 1666년 |
홋타 마사모리 | 1635년 ~ 1651년 |
아베 시게쓰구 | 1638년 ~ 1651년 |
마쓰다이라 노리나가 | 1642년 ~ 1654년 |
6. 4. 도쿠가와 이에쓰나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사카이 다다키요 | 1653년 ~ 1666년 | 노중 수좌 |
이나바 마사노리 | 1657년 ~ 1681년 | 1671년 ~ 1681년 노중 수좌 |
구제 히로유키 | 1663년 ~ 1679년 | |
이타쿠라 시게노리 | 1665년 ~ 1668년, 1670년 ~ 1673년 | |
쓰치야 가즈나오 | 1665년 ~ 1679년 | |
아베 마사요시 | 1673년 ~ 1676년 | |
오쿠보 다다토모 | 1677년 ~ 1698년 | 1681년 ~ 1698년 노중 수좌 |
홋타 마사토시 | 1679년 ~ 1681년 | |
도이 도시후사 | 1679년 ~ 1681년 | |
이타쿠라 시게타네 | 1680년 ~ 1681년 |
6. 5.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
재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681년 ~ 1699년 | 도다 다다마사 | |
1681년 ~ 1704년 | 아베 마사타케 | 1698년 ~ 1704년 로주 수좌 |
1685년 ~ 1686년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 |
1687년 ~ 1718년 | 쓰치야 마사나오 | 1704년 ~ 1718년 로주 수좌 |
1697년 ~ 1705년, 1709년 ~ 1710년 | 오가사와라 나가시게 | |
1699년 ~ 1707년 | 아키모토 다카토모 | |
1701년 ~ 1707년 | 이나바 마사미치 | |
1704년 ~ 1711년 | 혼다 마사나가 | |
1705년 ~ 1713년 | 오쿠보 다다마스 | |
1705년 ~ 1722년 | 이노우에 마사미네 | 1718년 ~ 1722년 로주 수좌 |
6. 6. 도쿠가와 이에노부 및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
재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711년 ~ 1717년 | 아베 마사타카 | |
1713년 ~ 1720년 | 구제 시게유키 | |
1714년 ~ 1716년 | 마쓰다이라 노부쓰네 | |
1714년 ~ 1729년 | 도다 다다자네 | 로주 수좌: 1722년 ~ 1729년 |
6. 7.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승정(勝手掛) 노중에 임명된 사람은 미즈노 다다유키였다. 그는 교호 7년 5월 15일에 취임하여 교호 15년까지 재정 재건을 위해 연공 증징과 신덴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2] 미즈노가 퇴임한 후 이 직책은 다시 공석이 되었지만, 겐분 2년 6월 14일에 마쓰다이라 노리사토가 승정 노중에 취임했다.[3] "금곡의 출납을 관장해야 할 뜻을 받들"게 된 노리사토는 농재정 전부를 관장하게 되었고, 간토 지방 어용가케의 직책을 맡고 있던 오오카 타다스케도 "월번의 무구"(노중의 월번과 관계없이) 농정에 관한 것은 모두 노리사토에게 보고하도록 지시받았다.[3]요시무네 시대의 노중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미즈노 다다유키 | 1717년 - 1730년 | 노중 수좌: 1729년 - 1730년 |
안도 노부토모 | 1722년 - 1732년 | |
마쓰다이라 노리사토 | 1723년 - 1745년 | 노중 수좌: 1730년 - 1745년 |
마쓰다이라 다다치카 | 1724년 - 1728년 | |
오쿠보 쓰네하루 | 1728년 | |
사카이 다다오토 | 1728년 - 1735년 | |
마쓰다이라 노부토키 | 1730년 - 1744년 | |
마쓰다이라 데루사다 | 1730년 - 1745년 | |
구로다 나오쿠니 | 1732년 - 1735년 | |
혼다 다다나가 | 1734년 - 1746년 | |
도키 요리토시 | 1742년 - 1744년 | |
사카이 다다즈미 | 1744년 - 1749년 | 노중 수좌: 1745년 - 1749년 |
마쓰다이라 노리카타 | 1745년 - 1746년 | |
홋타 마사스케 | 1745년 - 1761년 | 노중 수좌: 1749년 - 1761년 |
6. 8. 도쿠가와 이에시게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
니시오 다다나오 | 1746년 ~ 1760년 |
혼다 마사요시 | 1746년 ~ 1758년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 1746년 ~ 1779년 |
사카이 다다요리 | 1749년 ~ 1764년 |
미즈노 다다토 | 1755년 ~ ? |
마쓰다이라 데루타카 | 1758년 ~ 1781년 |
이노우에 마사쓰네 | 1760년 ~ 1763년 |
아키모토 스케토모 | 1747년 ~ 1764년, 1765년 ~ 1767년 |
6. 9. 도쿠가와 이에하루 시대
취임 년도 | 이름 | 비고 |
---|---|---|
1762년 | 마쓰다이라 야스요시 | |
1764년 | 아베 마사스케 | |
1769년 | 이타쿠라 가쓰키요 | |
1769년 | 다누마 오키쓰구 | |
1780년 | 아베 마사치카 | |
1781년 | 구제 히로아키라 | |
1781년 | 미즈노 다다토모 | 1796년-1802년 재임 |
1781년 | 도리이 다다오키 | |
1781년 | 마쓰다이라 야스토미 | 노중 수좌 (1781년-1787년) |
1784년 | 마키노 사다나가 |
6. 10.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의 노중(老中)은 다음과 같다. 노중은 에도 막부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쇼군의 통치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아베 마사토모 | 1787년 ~ 1788년 |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1787년 ~ 1793년 |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 1788년 ~ 1803년, 1806년 ~ 1817년 | 1793년 ~ 1803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노리사다 | 1789년 ~ 1793년 | |
혼다 다다카즈 | 1790년 ~ 1798년 | |
도다 우지노리 | 1790년 ~ 1806년 | 1803년 ~ 1806년 노중 수좌 |
오타 스케요시 | 1793년 ~ 1801년 | |
안도 노부나리 | 1793년 ~ 1810년 | |
마키노 다다키요 | 1801년 ~ 1816년, 1828년 ~ 1831년 | 1806년, 1828년 ~ 1831년 노중 수좌 |
도이 도시아쓰 | 1802년 ~ 1822년 | 1817년 ~ 1822년 노중 수좌 |
아오야마 다다히로 | 1804년 ~ 1835년 | 1822년 ~ 1835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 1810년 ~ 1826년 | |
사카이 다다유키 | 1815년 ~ 1828년 | |
미즈노 다다나리 | 1817년 ~ 1834년 | |
아베 마사키요 | 1817년 ~ 1823년 | |
오쿠보 다다자네 | 1818년 ~ 1837년 | 1835년 ~ 1837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노리히로 | 1822년 ~ 1839년 | 1837년 ~ 1839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데루노부 | 1823년 ~ 1825년 | |
우에무라 이에나가 | 1825년 ~ 1828년 | |
마쓰다이라 야스토 | 1826년 ~ 1835년 | |
미즈노 다다쿠니 | 1828년 ~ 1843년, 1844년 ~ 1845년 | 1839년 ~ 1843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무네아키라 | 1831년 ~ 1840년 | |
오타 스케모토 | 1834년 ~ 1841년, 1858년 ~ 1859년, 1863년 | 1858년 ~ 1859년, 1863년 노중 수좌 |
와키사카 야스타다 | 1836년 ~ 1841년 | |
마쓰다이라 노부요리 | 1837년 | |
홋타 마사요시 | 1837년 ~ 1843년, 1855년 ~ 1858년 | 1855년 ~ 1858년 노중 수좌 |
6. 11. 도쿠가와 이에요시 시대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도이 도시쓰라 | 1838년 ~ 1844년 | 1843년 ~ 1844년 노중 수좌 |
이노우에 마사하루 | 1840년 ~ 1843년 | |
마나베 아키카쓰 | 1840년 ~ 1843년, 1858년 ~ 1859년 | 1859년 노중 수좌 |
사나다 유키쓰라 | 1841년 ~ 1844년 | |
호리 지카시게 | 1843년 ~ 1845년 | |
도다 다다하루 | 1843년 ~ 1851년 | |
마키노 다다마사 | 1843년 ~ 1857년 | |
아베 마사히로 | 1843년 ~ 1857년 | 1845년 ~ 1855년 노중 수좌 |
아오야마 다다나가 | 1844년 ~ 1848년 | |
마쓰다이라 노리야스 | 1845년 ~ 1855년, 1858년 ~ 1860년 | 1859년 ~ 1860년 노중 수좌 |
마쓰다이라 다다마스 | 1848년 ~ 1855년, 1857년 ~ 1858년 | |
구제 히로치카 | 1851년 ~ 1858년, 1860년 ~ 1862년 | 1860년 ~ 1862년 노중 수좌 |
나이토 노부치카 | 1851년 ~ 1862년 |
6. 12. 도쿠가와 이에사다 시대
6. 13. 도쿠가와 이에모치 및 도쿠가와 요시노부 시대
직책 | 이름 | 재임 기간 |
---|---|---|
로주 | 안도 노부마사 | 1860년 - 1862년 |
로주 | 혼다 다다모토 | 1860년 - 1862년, 1864년 - 1865년 |
로주 |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 1860년 - 1863년 |
로주 |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 1862년 - 1863년, 1865년, 1866년 - 1868년 |
로주 | 이타쿠라 가쓰키요 | 1862년 - 1864년, 1865년 - 1868년 |
로주 | 이노우에 마사나오 | 1862년 - 1864년, 1865년 - 1867년 |
로주 | 미즈노 다다키요 | 1862년 - 1866년 |
로주 | 사카이 다다시게 | 1863년 - 1864년 |
로주 | 아리마 미치즈미 | 1863년 - 1864년 |
로주 | 마키노 다다유키 | 1863년 - 1865년 |
로주 | 마쓰마에 다카히로 | 1864년 - 1865년 |
로주 | 아베 마사토 | 1864년 - 1865년 |
로주 | 스와 다다마사 | 1864년 - 1865년 |
로주 | 이나바 마사쿠니 | 1864년 - 1865년, 1866년 - 1868년 |
로주 | 마쓰다이라 무네히데 | 1864년 - 1866년 |
로주 | 마쓰다이라 야스히데 | 1865년 - 1868년 |
로주 | 미즈노 다다노부 | 1866년 |
로주 | 마쓰다이라 노리카타 | 1866년 - 1868년 |
로주 | 이나바 마사미 | 1866년 - 1868년 |
로주 |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 1867년 |
로주 | 마쓰다이라 마사타다 | 1867년 - 1868년 |
로주 | 사카이 다다토시 | 1867년 - 1868년 |
로주 | 다치바나 다네유키 | 1868년 |
참조
[1]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3]
문서
『大岡越前守忠相日記』より
[4]
서적
山形藩主水野家御歴代略伝
豊烈神社拝殿改築委員会
1920-09-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