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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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의 화재는 1601년부터 1867년까지 267년 동안 에도에서 49차례 발생한 대형 화재를 의미한다. 에도의 인구 증가와 함께 화재 발생 빈도도 증가했으며, 메이레키 대화재, 메이와 대화재, 분카 대화재가 에도 3대 화재로 불린다. 화재는 잦은 방화, 건조한 기상 조건, 밀집된 도시 구조 등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소방 조직의 제도화와 도시 계획, 불연성 건축 장려, 방화 단속 등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재는 에도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쳐 물가 상승과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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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레키 대화재는 1657년 에도에서 발생하여 도시 대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대규모 화재로, 후리소데 화재 전설, 막부 방화설 등 다양한 원인 논쟁이 있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함께 방재를 위한 건축 규제 및 도시 계획이 시행되었다.
에도의 화재 | |
---|---|
개요 | |
명칭 | 에도의 화재 |
별칭 | 화재 도시 |
배경 | |
시기 | 에도 시대 |
원인 | 목조 건축물의 밀집 부주의 방화 |
특징 | |
빈발 | 잦은 화재 발생 (에도의 꽃) |
피해 규모 | 광범위한 피해 발생 |
재건 | 화재 후 도시 재건 |
주요 화재 | |
메이레키 대화재 | 1657년 |
기타 화재 | 아사쿠사 문 화재 무사시아부미 화재 |
문화적 영향 | |
문학 | 가나조시 등 |
속담 | 화재와 싸움은 에도의 꽃 |
관련 인물 | |
인물 | 아사이 료이 |
기타 | |
관련 용어 | 슈쿠유 카이로쿠 |
2. 주요 화재
1601년(게이초 6년), 세키가하라 전투 다음 해부터 1867년(게이오 3년) 대정봉환까지 267년 동안 에도는 49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같은 기간 교토, 오사카, 가나자와에서 발생한 큰 화재는 각각 9번, 6번, 3번으로, 에도의 화재 발생 건수는 일본의 대도시 중 두드러졌다.[1] 다른 기록에 따르면 에도의 역사 동안 85건 이상의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1600년에서 1945년 사이, 에도/도쿄는 화재,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및 전쟁으로 인해 대략 25~50년마다 잿더미가 되었다.
메이레키 대화재, 메이와 대화재, 분카 대화재는 에도 3대 화재로 불린다.[30]
작은 화재까지 포함하면 267년 동안 1,798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1601~1700년에는 269건, 1701~1800년에는 541건, 1801~1867년에는 986건이었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에도의 인구가 경제적 번영과 함께 증가하면서, 도시의 화재 발생 빈도 역시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851년(가에이 3년)부터 1867년까지 17년 동안 506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한 행정으로 인한 불안정한 치안이 주요 원인이었다.
다음 표는 에도 시대의 주요 대화재를 나타낸다.
2. 1. 메이레키 대화재 (1657년)
1657년 3월 2일(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18일)에서 3월 4일(음력 1월 20일)까지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도)에서 일어난 화재이다. 이 화재로 인해 에도의 60 ~ 70%가 불에 탔으며 사망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또한 에도 성의 천수각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들이 소실되었고 에도 시가지가 파괴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4][5][6]
메이레키 대화재는 에도 시대 최대의 화재였으며, 에도의 도시 계획과 소방 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에도 시대에 발생한 주요 대화재를 나타낸 표이다.
연월일 | 명칭 별칭/통칭 | 사망자 수 | 개요 |
---|---|---|---|
메이레키 3년 1월 18일, 19일 (1657년 3월 2일, 3일) | 메이레키 대화재 후리소데 불 | 최대 10만 7000명으로 추정 | 혼고 마루야마 혼묘지를 비롯한 야마노테 3곳에서 출화, 양일 모두 북서풍으로 연소. 에도의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고 에도 성천수각도 소실되었다. 에도 시대 최대의 피해를 입힌 대화재이며, 에도의 도시 계획과 소방 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2. 2. 메이와 대화재 (1772년)
메이레키 대화재, 분카 대화재와 함께 에도 3대 화재 중 하나로 불린다.[1] 1772년 4월 1일 (메이와 9년 2월 29일)에 발생했다.[10]메이와 대화재로 14,700명이 사망하고 4,060명이 실종되었으며, 904개 마을이 불에 탔다.[10]
날짜 | 이름 | 사상자 | 피해 | ||||||
---|---|---|---|---|---|---|---|---|---|
서력기원 | 일본 (연/월/일) | 영어 | 일본어 | 사망 | 실종 | 마을 | 사무라이 가옥 | 사찰 및 신사 | 초닌 가옥 |
1772년 4월 1일 | 9 메이와/2/29 | 메이와 대화재 | 明和の大火일본어 | 14,700명 | 4,060명 | 904 |
2. 3. 분카 대화재 (1806년)
분카 3년 3월 4일(1806년 4월 22일) 에도에서 발생한 대화재이다. 시바 구루마마치에서 발생한 불은 남서풍을 타고 번져 530개 마을, 다이묘 저택 80개, 사찰 80개를 태웠다.[12] 사망자는 1,200명을 넘어섰다.[72] 이 화재는 '구루마마치의 불' 또는 '우시마치의 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화재가 난 곳에 소달구지 운송업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메이레키 대화재, 메이와 대화재와 함께 '에도 3대 화재' 중 하나로 불린다.[30]
날짜 | 이름 | 사상자 | 피해 | ||||||
---|---|---|---|---|---|---|---|---|---|
서력 | 일본 (연/월/일) | 영어 | 일본어 | 사망 | 실종 | 마을 | 사무라이 가옥 | 사찰 및 신사 | 초닌 가옥 |
1806년 4월 22일 | 분카 3년/3/4 | 분카 대화재[12][1] | 文化の大火일본어 | 1200명 | 530 | 80 | 80 |
2. 4. 기타 주요 대화재
- '''1668년''': 1668년 3월 3일(간분 8년, 2월 1일) 에도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재앙은 방화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며, 45일 동안 불이 타올랐다.[15]
- '''1682년''': 1682년 2월 5일(덴나 1년, 12월 28일)에 시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화재가 발생하여 통제되었다.
- '''1697년''': (겐로쿠 10년) 이 화재는 "겐로쿠 10년의 화재"로 불렸다.[8]
3. 화재의 원인
게이초 6년(1601년) 세키가하라 전투 다음 해부터 게이오 3년(1867년) 大政奉還|다이세이호칸|대정봉환일본어까지 267년 동안 에도에서는 49번의 대화재가 발생했다. 같은 기간 교토, 오사카, 가나자와에서 발생한 큰 화재는 각각 9번, 6번, 3번으로, 에도의 화재 발생 건수는 일본의 대도시 중 두드러졌다.[1] 1600년에서 1945년 사이, 에도/도쿄는 화재,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및 전쟁으로 인해 대략 25~50년마다 잿더미가 되었다.
작은 화재까지 포함하면 267년 동안 발생한 1,798건의 화재 중 1601~1700년에는 269건, 1701~1800년에는 541건, 1801~1867년에는 986건이 발생했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에도의 인구가 경제적 번영과 함께 증가하면서 도시의 화재 발생 빈도 역시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851년(가에이 3년)부터 1867년까지 17년 동안 506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한 행정으로 인한 불안정한 치안이 주요 원인이었다.[29]
에도 시대에는 불이 일상생활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사고로 이어졌다. 다양한 동기에 의한 방화 역시 화재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에도에서 대형 화재가 더 자주 발생한 것은 인구가 많은 조밀한 도시 배치, 빈곤한 사회 계층의 존재, 그리고 에도의 독특한 기상 조건 등 다양한 이유에서 기인했다.
니시야마 마쓰노스케는 에도 화재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8]
- 에도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대형 화재를 즐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에도와 같은 대도시에서 통일된 정치 시스템의 부재는 빈번한 대형 화재의 원인 중 하나였다.
- 에도의 町人|조닌|도시민일본어은 화재가 불가피하고 확산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집이 화재의 근원이 되지 않는 한 만족했을 것이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쇼군은 화재의 잠재적 원인 금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의 화재 경보 명령, 실제 화재 발생 시 특정 활동 금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지시를 내렸다.
화재 위험을 겨냥한 금지 조치는 목욕탕, 불꽃놀이, 左義長|사기초일본어[20], 그리고 쓰레기 소각을 대상으로 했다. 대부분의 조닌 거주지는 화재 발생 시 그 원인으로 의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목욕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 결과, 공중 목욕탕이 인기를 끌었다.[50] 목욕탕 사업에서 화재의 필요성으로 인해 완전한 금지는 불가능했지만, 1653년(조오 2년) 공중 목욕탕에서의 화재는 오후 6시 이후까지 금지되었다.[51] 공중 목욕탕은 또한 화재 진압에 사용할 수 있도록 아침까지 목욕물을 보관해야 했다. 1648년(게이안 원년)에는 도시 내 불꽃놀이 제작이 금지되었다. 1642년(간에이 19년)에는 강어귀에서만 사용하도록 제한되었고, 더 나아가 스미다 강을 따라 사용하도록 제한되었다. 겐로쿠 시대에는 마을과 집에서의 ''사기초'' 행사가 금지되었다. 이보다 앞선 1655년(메이레키 원년)에는 쓰레기 소각이 금지되었다. 예외적인 경우로, 불타는 연이 에도 성의 切手門|깃테몬|깃테 문일본어으로 떨어진 지 이틀 후인 1646년(쇼호 3년)에는 연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52]
쇼군의 日光東照宮|닛코토쇼구|닛코 동조궁일본어 방문, 교토에서 온 왕족 여성의 방문, 조선 사절의 도착과 같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 화재 경보 수준을 높이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도시는 화재와 싸움을 예방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고, 물이 채워진 양동이가 준비되었으며, 도시 지역이 청소되었다. 寛永寺|간에이 사일본어, 조조지|増上寺|조조지일본어 및 山王社|산노샤|산노 신사일본어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도 비슷한 명령이 내려졌다.
화재 시 금지된 특정 활동에는 "화재 구경",[53] 다이하치구루마(대팔차)라고 불리는 대형 수레로 도구를 옮기는 것, 그리고 구루마나가모치(바퀴 달린 의류 보관 상자)의 사용 및 제작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모두 혼란이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대피의 장애물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3. 1. 인구 증가와 밀집된 도시 구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수립한 후, 에도는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겪었다. 에도성 주변에는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저택이 세워져 많은 무사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상인과 장인들이 조닌으로 유입되었다. 간에이 17년(1640년) 약 40만 명이던 에도의 인구는 겐로쿠 6년(1693년)에는 약 80만 명, 교호 6년(1721년)에는 약 110만 명에 달했다.[38]무사들의 광대한 주거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조닌들은 훨씬 좁은 지역에 갇혀 있었다. 인구 증가로 인해 조닌들의 인구 밀도는 극도로 높아졌다.[38] 그들의 거주지는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고, 나가야|ながや|긴 집일본어가 흔했다. 1인당 생활 공간은 부엌과 벽장을 포함하여 보통 여섯 개의 다다미 매트 크기였다. 게다가 나무와 종이로 된 건축 자재는 쉽게 화재의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조건은 자연스럽게 화재 사고의 높은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3. 2. 방화
에도 시대에는 요리와 조명에 불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빈곤, 사회 불만, 개인적인 원한 등 다양한 동기에 의한 방화 역시 빈번하게 발생했다.[16] 체포된 방화범들은 대부분 에도의 높은 생활비와 보증인 문제로 인해 빈곤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집이 불에 타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17] 1723년과 1724년에는 체포된 방화범 102명 중 41명이 비인(부랑인), 22명이 등록된 영구 거주지가 없는 하층민이었다.[17]방화 동기는 다양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약탈이었다. 이들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불을 질러 혼란을 틈타 절도를 했다. 그 외에도 하인들이 주인에게 복수하거나, 실패한 연애 관계에서 비롯된 원한, 경쟁 상인 방화, 아이들의 불장난, 심지어 "갑자기 불을 지르고 싶었다"는 자백도 기록되었다.[41] 화재는 목수, 미장공, 사다리차 작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부 소방관들은 의도적으로 불을 퍼뜨려 자신들의 사업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42]
체포된 방화범들은 화형 전에 거리를 행진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막부의 엄격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방화는 근절되지 않았고, 바쿠마츠 시대에는 쇼군의 행정력 약화와 공공 질서 악화로 인해 방화로 인한 화재가 급증했다.
일부 방화범들은 문학 작품이나 가부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683년 텐나 대화재로 최대 3,500명의 사망자를 낸 야오야 오시치가 대표적이다. 오시치는 화재로 집을 잃고 절에 피신했다가 하인과 사랑에 빠졌고, 다시 만나기 위해 방화를 시도했다가 체포되어 화형당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하라 사이카쿠의 호색오인녀|好色五人女일본어와 쓰루야 난보쿠의 적타구다이코|敵討櫓太鼓일본어의 기반이 되었다.

에도 막부는 방화범 단속을 위해 '''화재 감시관'''(후에 '''화재 도적 개정''')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설치하고, 시민들에게 방화범 체포를 장려했다. 방화는 중죄로 간주되어 화형으로 처벌했다.
'''화재 도적 개정'''은 중죄인 방화, 도적, 도박 등을 단속하기 위해 설치된 관직이었다. 처음에는 화재 개정, 도적 개정, 도박 개정으로 나뉘었으나, 1718년에 통합되어 화재 도적 개정이 되었다.
화재 도적 개정은 마치 부교(문관)와 달리 번방(무관)이었기 때문에 난폭한 취조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방화 혐의" 단계에서 체포 권한을 가졌고, 오인 체포라도 문책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상한 자를 체포하여 고문하고 억지로 자백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고, 그 결과 억울한 누명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48] 시민들은 화재 도적 개정을 "거지 연극"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으로 인식했다.[49]
3. 3. 기상 조건
에도는 겨울철에 건조하고 강한 북서풍이 부는 특유의 기상 조건 때문에 화재 발생 위험이 높았다. 겨울과 봄에는 북서풍과 북풍이 우세하여 건조한 날씨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45] 1658년(만지 1년) 쇼군이 설립한 4개 팀의 소방관들은 에도성의 북서쪽에 배치되어 북서풍으로 인한 화재로부터 성을 보호했다.봄과 가을에는 강한 남풍도 대형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44] 월별 화재 발생 건수를 보면, 3월에 가장 많은 "대형 화재"가 발생했고, 2월, 4월, 1월이 그 뒤를 이었다. 이 4개월 동안 전체 대형 화재의 70%가 발생했다.[45] 에도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낸 메이레키 대화재는 1657년 3월 2일(메이레키 3년 1월 18일)에 발생했다.
에도의 조닌들은 이러한 기상 조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여성들을 에도 교외의 친가로 피난시키고 화재철이 지난 후에 돌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계절별 인구 변동이 발생했다. 1725년(교호 10년) 6월의 인구는 4월보다 1만 명 이상 많았으며, 증가한 인구의 90% 이상이 여성이었다.[46]
4. 소방 조직
에도 시대에는 잦은 화재가 발생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소방 조직이 운영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소방이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대형 화재가 반복되면서 화재 진압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이 시스템 하의 소방관들은 크게 '''무가 화재 진압(武家火消)'''과 '''마치 화재 진압(町火消)'''으로 분류되었다. ''무가 화재 진압''은 다시 다이묘에 의한 '''다이묘 화재 진압'''과 하타모토에 의한 '''정화재 진압'''으로 세분화되었다.
메이와 시대에는 竜吐水|류도스이일본어라는 인력 작동식 나무 펌프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물 공급이 부족하여 완전한 소방 수단이 되지는 못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전문 소방관(대부분 고층 건물 해체 전문가)이 수동으로 건물을 철거하는 파괴 소방이 주요 소방 방법이었다.[18]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 개혁의 일환으로 화재 예방 조치를 에도 전역으로 확대했다. 1720년(교호 5년)에는 오오카 타다스케에게 ''조닌''의 주거 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소방대인 ''마치비케시''를 설립하도록 명령했다.
4. 1. 무가 화재 진압 (武家火消)

에도 시대 초기에는 소방 조직이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잦은 대형 화재를 겪으면서 '''화재 진압''' 제도가 마련되었다. 무사에 의해 조직된 '''무가 화재 진압'''은 다이묘에 의한 '''다이묘 화재 진압'''과 하타모토에 의한 '''정화재 진압'''으로 나뉜다.
당시 화재 진압의 주요 소화 방법은 현대와 달랐다. 대형 펌프로 대량의 물을 뿌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불이 난 곳 주변의 아직 타지 않은 건물을 파괴하여 가연물을 제거하고 방화대를 만들어 더 이상의 연소를 막는 파괴 소방이라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메이와 시대부터는 류도스이(竜吐水)라고 불리는 목제 수동 펌프가 사용되었지만, 불을 완전히 끄기에는 물 공급이 부족했다. 메이지 유신까지 전문 소방관(대부분 고층 건물 해체 전문가)에 의한 수동 건물 철거가 주요 소방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18]
간에이 20년(1643년), 오케마치 화재 2년 후, '''다이묘 히케시'''(大名火消)가 제도화되었다. 이는 막부가 다이묘에게 소방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이전에는 화재 발생 후 임시 명령으로 다이묘가 소방 업무에 파견되었으나, 이를 개선하여 사전에 소방 담당 다이묘를 임명했다. 이 외에도 다이묘 히케시의 한 형태로, 영묘, 신사, 쌀 창고 등 막부에게 중요한 장소의 소방을 담당시킨 '''쇼쇼 히케시'''(所々火消, 위치별 소방관), 에도의 구역을 나눠 소방을 담당시킨 '''호가쿠 히케시'''(方角火消, 구역별 소방관), 각 다이묘 저택의 자위 소방 조직에 인근 화재 출동 의무를 부과한 '''카쿠지 히케시'''(各自火消, 개인별 소방관) 등이 있었다.
만지 원년(1658년), 만력 대화재 이듬해에 '''조비케시'''(定火消)가 제도화되었다. 이는 막부 직할로, 하타모토에게 소방을 명령한 것이다. 망루를 갖춘 화재 진압 저택(현재의 소방서의 원형)을 하사하고, 가엔(臥煙)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 인부를 고용하여 소방 활동을 담당하게 했다. 처음에는 4개 조였으나, 한때 15개 조까지 증가했고, 막말에는 1개 조까지 감소하는 등 막부의 재정, 병제, 정화소 정비 등에 따라 증감했다. 10개 조로 구성된 기간이 길어 십인 저택, 십인 화재 진압이라고도 불렸다.
4. 2. 마치 화재 진압 (町火消)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했을 때, 에도의 소방 업무는 ''다이묘 히케시'', ''조비케시'', 그리고 상인과 장인으로 구성된 ''조닌'' 소방대로 분담되었다. ''다이묘 히케시''와 ''조비케시''는 경험이 풍부했지만, ''조닌'' 주거 지역 화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한편, ''타나비케시''는 위협적인 화재로부터 도망치는 아마추어 소방대였다.[18]1720년(교호 5년),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 개혁의 일환으로 ''마치비케시''(町火消)를 제도화했다. 그는 오오카 타다스케에게 ''조닌'' 주거 지역을 보호할 새로운 소방대 설립을 명했다. ''마치비케시'' 시스템 하에서 각 마을은 ''조닌''을 소방 업무에 파견해야 했다.[18] 오오카는 마을 관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방대를 조직했다. 스미다강 서쪽에는 48개 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이 중 4개를 제외한 모든 그룹은 히라가나 문자로 지정되어 ''이로하 48구미''(いろは 48 組)라고 불렸다.[18] 혼조와 후카가와에는 강 동쪽에 16개 그룹이 추가로 형성되었다. 각 그룹은 고유의 마토이와 유니폼을 가졌으며, 그룹 내 친목은 일반적이었지만 그룹 간 불화도 잦았다. 1730년(교호 15년)에는 화재 시 동원 규모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소방대를 더 큰 그룹으로 재편했다.[18]
''마치비케시''는 초기에는 ''조닌'' 주거 지역만 담당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사무라이 주거 지역 내 다리, 신사, 쌀 창고, 에도성 내부 화재 진압에도 파견되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는 에도의 주요 소방력이 되었고, ''부케 히케시''는 크게 감소했다.
5. 화재 예방 대책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 개혁의 일환으로 에도 전역에 화재 예방 조치를 확대했다. 에도 시대 화재의 주요 원인이 방화였기 때문에, 막부 정부는 방화범 단속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화재 도적 개정(火付盗賊改方) 설치''': 방화, 절도, 도박 등의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火付盗賊改方|히쓰케 토조쿠 아라타메카타|방화/절도 조사 부서일본어라는 새로운 직책을 도입했다.[19] 1683년(덴나 3년) 中山 直守|나카야마 나오모리일본어가 이 직책을 겸임한 이후, 1703년(겐로쿠 16년) 부활하여 1718년(교호 3년)에 하나의 직책으로 통합되었다.
- '''방화범 체포 장려''': 조닌(町人, 도시 상공인)들은 방화범을 체포하면 포상을 받았다.[50] 막부는 체포된 방화범을 즉시 넘길 것을 반복적으로 명령하고, 체포자에게 보상을 제공했다. 방화범을 체포한 사람에 대한 미결 사건은 사면되었고, 공범이나 다른 방화범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방화범도 사면과 함께 보상을 받았다.[50] 1723년(교호 8년)에는 화재 발생 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체포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 '''엄격한 처벌''': 방화는 중죄로 간주되어 화형으로 처벌했다. 체포된 방화범은 도시를 행진한 뒤 화형에 처해졌으며, 혐의는 나무 팻말에 적혀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화형은 구지카타 오사다메가키(公事方御定書)에 규정되어 1868년(메이지 1년) 가리케이리츠(仮刑律)로 대체될 때까지 시행되었다.[51] 방화범의 가족도 연루되어 처벌받았으며, 청부 방화의 경우 범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사람도 처벌받았다. 사무라이 방화범은 화형 대신 고쿠몬(獄門)이라는 최고 형벌이 부과되었다. 서면으로 방화를 위협한 자는 처음에는 사형, 나중에는 유배로 형벌이 감경되었다. 방화 실패와 같은 정황상 감경 사유도 고려되었으며, 15세 미만 방화범은 유배되거나 보호 관찰에 처해졌다.
화재 도적 개정은 무관이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심문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방화 용의자를 체포할 권한은 있었지만 오인 체포에 대한 처벌은 없어,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고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오심이 발생했다.[48] 이는 ''초닌''들에게 악명 높은 이미지를 남겼다.[49]
쇼군은 화재 예방을 위해 화재의 잠재적 원인 금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의 화재 경보 명령, 실제 화재 발생 시 특정 활동 금지 등 다양한 지시를 내렸다.
- '''화재 위험 요소 금지''': 목욕탕, 불꽃놀이, 사기초|左義長일본어,[20] 쓰레기 소각 등이 금지되었다. 1653년(''조오'' 2) 공중 목욕탕에서의 화재는 오후 6시 이후까지 금지되었고,[58] 목욕물은 아침까지 보관해야 했다. 1648년(''케이안'' 1) 도시 내 불꽃놀이 제작이 금지되었고, 1642년(''케이안'' 5)에는 강어귀, 스미다 강으로 사용이 제한되었다. ''겐로쿠'' 시대에는 마을과 집에서의 ''사기초'' 행사가 금지되었고, 1655년(''메이레키'' 1)에는 쓰레기 소각이 금지되었다. 1646년(''쇼호'' 3)에는 연이 금지되었다.[59]
- '''주요 행사 시 화재 경보 강화''': 쇼군의 닛코 토쇼구(日光東照宮) 방문, 교토에서 온 왕족 여성의 방문, 조선 통신사의 도착과 같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 화재 경보 수준을 높이는 명령이 내려졌다. 도시는 화재와 싸움을 예방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고, 물이 채워진 양동이가 준비되었으며, 도시 지역이 청소되었다. 간에이 사(寛永寺), 조조지(増上寺), 산노샤(山王社)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도 비슷한 명령이 내려졌다.
- '''화재 발생 시 특정 활동 금지''': "화재 구경",[60] ''다이하치구루마''(대팔차)라고 불리는 대형 수레로 도구를 옮기는 것, ''구루마나가모치''(바퀴 달린 의류 보관 상자)의 사용 및 제작이 금지되었다.
5. 1. 도시 계획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자 에도성 주변에는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저택이 세워져 많은 무사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사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상인과 장인이 조닌으로 유입되어 에도의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간에이 17년(1640년) 경 약 40만 명이었던 인구는 겐로쿠 6년(1693년)에는 약 80만 명, 교호 6년(1721년)에는 약 110만 명에 달했다.광대했던 무가지에 비해 조닌지의 면적은 좁았고, 인구 증가로 인해 조닌지의 인구 밀도는 극도로 높아졌다. 조닌의 주거는 좁은 지역에 밀집하여 늘어서게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막부 중신들은 대화재의 원인이 강풍 등에 편승한 방화범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쇼군과 에도성의 방비를 최우선으로 대책을 세웠다. 그 때문에, 상인 마을에 대한 화재 대책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상인의 힘이 증대됨에 따라 막부의 대책에도 변화가 나타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한 교호 개혁에서는 에도 전역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화재 대책이 이루어졌다.
막부의 대책으로는 소방 조직인 화재 진압대의 제도화, 엄벌을 가하는 것으로 방화 억제, 다이묘 저택이나 사찰의 이전에 의한 화재 방지 구역·광소로 확보, 기와 지붕이나 흙 창고의 채용에 의한 불연화 추진 등이 이루어졌다. 인구 증가에 대해서는 덴포 개혁에 의해 덴포 14년(1843년)에 인반시의 법을 발표했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화재의 원인으로는 불에 잘 타는 재질로 만들어진 건물이 밀집해 있다는 점도 컸다. 일단 건물에 불이 붙으면, 소화 활동을 할 틈도 없이, 잇따라 인근 건물로 연소되어 갔다. 그 때문에, 메이레키 대화재를 계기로 에도 시내의 불연화를 목표로 하는, 화재에 강한 도시 만들기가 이루어졌다. 에도의 각지에 화재 방지 구역(히요케치)과 광소로(히로코지)가 설치되었고, 건물에는 기와 지붕이나 흙 창고와 같은 내화 구조의 채용이 명령받게 되었다.
메이레키 3년(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로 에도 시내가 소실된 후, 재건 계획에서는 화재 대책이 중요하게 여겨져 연소를 방지하기 위한 공간 조성이 이루어졌다. 먼저 에도성 내에 있던 고산케의 상옥을 성 밖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방화 용지로 사용했다. 고산케의 저택 이전에 따라 다른 다이묘 저택이나 하타모토 저택도 이전 명령을 받았다. 에도 시내의 과밀 상태를 완화하기 위해 이전 대상의 대부분은 지금까지보다 에도성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또한, 다이묘에게 겐로쿠 연간에 걸쳐 나카야시키나 시모야시키의 용지를 제공했고, 에도의 외곽에 설치된 시모야시키는 화재 시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일련의 이동으로 매립이 완료된 츠키지 등에도 새로운 무가 저택이 설치되게 된다. 간분 원년(1661년)경에는 혼쇼의 간척이 완료되어 무가 저택의 건설이나 마을의 이전이 진행되었다[52]。사찰에도 마찬가지로 이전 명령이 내려졌다. 주요 이전 대상은 외참호의 바깥쪽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찰이 아사쿠사・고마고메・고이시카와 등으로 집결하여 이전되었다. 또한, 요시와라 유곽이 니혼바시 부근에서 아사쿠사 부근으로 이전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전은 대화재 전부터 결정되었다).
에도 시내의 재건에서는, 새롭게 연소를 방지하기 위한 광장・공지인 화재 방지 구역이 설치되었다. 기존의 가로를 확장하여, 화재 방지 구역과 동일한 기능을 갖춘 광소로도 설치되었다. 화재 방지 구역이나 광소로가 설치된 장소의 주민들에게는 이주가 명령되었고, 에도의 외연부나 매립지에 이주처로서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에도의 시가지가 확대되게 되었다. 간분 2년(1662년)에는 전년까지 대체로 외참호 안쪽에 한정되어 있던 마치부교의 지배 지역 (에도 부내)이, 우에노・아사쿠사・시바 등도 포함하도록 개편되었다. 이전을 동반하지 않는 대책으로는, 가옥에 처마 제거를 명령하는 마을 포고가 내려졌다. 이것은, 가로로 돌출된 처마를 짧게 제거함으로써, 실질적인 가로의 확폭과 연소 방지를 의도한 것이었다.
덴나 대화재 후에는, 화재 방지 구역의 신설이나 광소로의 연장이 계획되었고, 다시 다이묘 저택이나 사찰의 이전이 이루어졌다. 이 이전으로 사찰의 대부분은 외참호의 바깥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교호 개혁에서는, 마을 소방대 제도의 제도화를 시작으로 에도 시내의 화재 대책이 강화되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에도의 불연화에 열심이었고, 요시무네의 방침에 따라 간다・핫초보리・이치가야 등에 새로운 화재 방지 구역이 설치되었다[54]。
이처럼 에도 시내 각지에 설치된 화재 방지 구역이나 광소로였지만, 화재 방지 구역으로 지정된 장소에 가옥이 건설되거나, 광소로에 상업용 오두막이 늘어서면서 이전보다 위험해지는 등,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5. 2. 불연성 건축 장려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에서는 화재에 대한 도시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연성 재료로 된 구조물이 장려되었다. 히요케치(방화 구역) 및 히로코지(넓은 골목길)와 같은 방화 구역이 에도의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기와 지붕과 흙집을 포함한 내화성 재료의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1601년(게이초 6년)의 대화재 이후, 막부는 초가 지붕을 너와 지붕으로 개조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기와 지붕은 호화로운 다이묘 저택 내부 건물에서 유행하게 되었으며, 일부 조닌 거주지에서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내화성 기와가 지붕에서 떨어져 많은 부상을 초래했기 때문에 기와 지붕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 변화가 있었다.[56] 대신, 인화성 초가 지붕은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흙으로 덮어야 했다. 1661년(간분 원년)에는 신축 건물에 초가 지붕을 사용하는 것 또한 금지되어, 너와 지붕만이 허용되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권력을 잡고 나서야 기와 지붕이 의무화되었다. 1723년(교호 8년)에는 반초 근처에서 불에 탄 하타모토 저택을 기와 지붕으로 재건축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위해 무이자 대출도 제공되었다. 1725년(교호 10년)경부터 제한된 지역에서 기존 주택에 기와 지붕을 설치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이 정책은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주택은 철거될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조닌 거주지의 경우, 기와 지붕 금지령은 1720년(교호 5년)에 철회되었다. 1722년(교호 7년) 이후, 에도의 모든 건물은 기와 지붕을 설치하고 흙으로 짓거나 덮어야 했지만, 조닌의 경제적 부담을 고려하여 일부 경우에 굴 껍질로 만든 지붕도 허용되었다. 사무라이 저택과 마찬가지로 공공 서비스 요금 면제와 무이자 대출이 가능했으며, 개조하지 않은 주택은 철거 대상이 되었다.
막부가 추진한 불연성 에도 프로그램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통치하에 수행되었지만, 1751년(간에이 4년) 그의 사후, 막부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활동이 둔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결코 완전히 완료되지 않았으며, 이는 메이지 시대 이전 여러 대화재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5. 3. 방화 단속
에도 시대에는 방화가 주요 화재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막부는 방화범 단속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직책으로 화재 도적 개정(火付盗賊改方)을 설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방화범 체포를 장려했다.[19] 방화범을 체포하면 포상을 받았고,[50] 방화는 중죄로 간주되어 화형으로 처벌하여 대중에게 경고했다.화재 도적 개정은 방화, 절도, 도박과 같은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설치된 직책이었다. 처음에는 세 가지 범죄에 대해 각각 세 개의 직책이 있었지만, 1683년(덴나 3년)에 통합되었다가 잠시 폐지 후 1703년(겐로쿠 16년)에 부활, 1718년(교호 3년)에 하나의 직책으로 통합되었다.
화재 도적 개정은 무관이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심문 방식을 사용했다. 방화 용의자를 체포할 권한을 가졌지만 오인 체포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이 때문에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고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많은 오심이 발생했다.[48] 이는 ''초닌''들에게 악명 높은 이미지를 남겼다.[49]
막부는 체포된 방화범을 즉시 넘길 것을 반복적으로 명령하고, 체포자에게 보상을 제공했다. 또한, 방화범을 체포한 사람에 대한 미결 사건은 사면되었다. 공범이나 다른 방화범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방화범조차도 사면 외에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50] 1723년(교호 8년)에는 화재 발생 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누구든지 체포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일반 대중에게 경고하기 위해 체포된 방화범은 도시를 행진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은 에도 시대의 형법인 구지카타 오사다메가키(公事方御定書)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1868년(메이지 1년)에 메이지 정부의 임시 형법인 가리케이리츠(仮刑律)로 대체될 때까지 시행되었다.[51] 방화범의 가족도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청부 방화의 경우, 범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사람도 처벌받았다. 방화범이 사무라이일 경우, 화형은 적용되지 않았다. 대신 고쿠몬(獄門)이라는 최고 형벌이 부과되었다. 서면으로 방화를 위협한 자는 처음에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나중에는 유배로 형벌이 감경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원칙에 따라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방화 실패와 같은 정황상 감경 사유도 고려되었다. 15세 미만의 방화범은 처형되지 않고 유배되거나 보호 관찰에 처해졌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쇼군은 화재의 잠재적 원인 금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의 화재 경보 명령, 실제 화재 발생 시 특정 활동 금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지시를 내렸다.
화재 위험을 겨냥한 금지 조치는 목욕탕, 불꽃놀이, 사기초(左義長),[20] 쓰레기 소각을 대상으로 했다. 1653년(''조오'' 2) 공중 목욕탕에서의 화재는 오후 6시 이후까지 금지되었다.[58] 1648년(''케이안'' 1)에는 도시 내 불꽃놀이 제작이 금지되었다. 1642년(''케이안'' 5)에는 강어귀에서만 사용하도록 제한되었고, 더 나아가 스미다 강을 따라 사용하도록 제한되었다. ''겐로쿠'' 시대에는 마을과 집에서의 ''사기초'' 행사가 금지되었다. 1655년(''메이레키'' 1)에는 쓰레기 소각이 금지되었다. 1646년(''쇼호'' 3)에는 연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59]
쇼군의 닛코 토쇼구(日光東照宮) 방문, 교토에서 온 왕족 여성의 방문, 조선 통신사의 도착과 같은 중요한 행사 기간 동안 화재 경보 수준을 높이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도시는 화재와 싸움을 예방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고, 물이 채워진 양동이가 준비되었으며, 도시 지역이 청소되었다. 간에이 사(寛永寺), 조조지(増上寺) 및 산노샤(山王社)에서 의식이 거행될 때도 비슷한 명령이 내려졌다.
화재 시 금지된 특정 활동에는 "화재 구경",[60] ''다이하치구루마''(대팔차)라고 불리는 대형 수레로 도구를 옮기는 것, 그리고 ''구루마나가모치''(바퀴 달린 의류 보관 상자)의 사용 및 제작이 포함되었다.
6. 화재가 사회 경제에 미친 영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쇼군 정권을 수립한 후, 에도 성 주변에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저택이 세워지면서 많은 사무라이가 거주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생활을 지원하는 상인과 장인들이 에도로 몰려들어 인구가 증가했다. 에도의 인구는 1640년(간에이 17년) 약 40만 명에서 1693년(겐로쿠 6년) 약 80만 명으로 증가했고, 1721년(교호 6년)에는 약 110만 명으로 성장했다.[2] 초닌들은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거주하였고, 나가야|長屋일본어와 같이 좁은 주택이 흔했다. 1인당 생활 공간은 부엌과 벽장을 포함하여 보통 여섯 개의 다다미 매트 크기였다. 게다가 나무와 종이로 된 건축 자재는 쉽게 화재의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화재 사고의 가능성을 높였다.
가연성 재료로 지어진 건물이 밀집되어 있던 것은 작은 화재가 대형 화재로 번지는 주요 원인이었다. 한 건물에 불이 붙으면 소방관이 도착하기 전에 인접 건물에도 곧 불이 옮겨 붙었다.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에서는 화재에 대한 도시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연성 재료로 된 구조물이 장려되었다. 히요케치|火除地|extra=방화 구역일본어 및 히로코지|広小路|extra=넓은 골목길일본어와 같은 방화 구역이 설치되었고, 기와 지붕과 흙집을 포함한 내화성 재료의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다음 해인 게이초 6년(1601년)부터 대정봉환이 이루어진 게이오 3년(1867년)까지 267년 동안 에도에서는 49번의 대화재가 발생했다. 같은 기간 동안 교토는 9번, 오사카는 6번, 가나자와는 3번의 대화재가 발생하여 에도의 화재 빈도가 두드러지게 많았다. 대화재 외의 화재를 포함하면 267년 동안 1798번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특히 에도 막부의 권력 저하에 따른 치안 악화가 심했던 가에이 3년(1851년)부터 게이오 3년(1867년)까지 17년 동안에는 506번이나 화재가 발생했다.
날짜 | 이름 | 사상자 | 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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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 일본 (연/월/일) | 영어 | 일본어 | 사망 | 실종 | 마을 | 사무라이 가옥 | 사찰 및 신사 | 초닌 가옥 |
1601년 12월 26일 | 게이초 6/11윤/2 | [2] | |||||||
1641년 3월 10일 또는 11일 | 간에이 18/1/29 또는 30 | 오케마치 화재[3] | 桶町火事일본어 | 400명 이상 | 97 | 123 | |||
1657년 3월 2–3일 | 메이레키 3/1/18–19 | 메이레키 대화재[4][5][6] | 明暦の大火일본어 | 최대 107,000명 | |||||
1683년 1월 25일 | 텐나 2/12/28 | 텐나 대화재[7][8] | 天和の大火일본어 | 830–3500명 | 241 | 95 | |||
1698년 10월 9일 | 겐로쿠 11/9/6 | 쵸쿠가쿠 화재 | 勅額火事일본어 | 3000명 | 326 | 308 | 232 | 18,700 | |
1704년 12월 25일 | 겐로쿠 16/11/29 | 미토사마 화재[9] | 水戸様火事일본어 | 275 | 75 | 20,000 | |||
1745년 3월 14일 | 엔쿄 2/2/12 | 로쿠도 화재 | 六道火事일본어 | 1323명 | 28,678 | ||||
1760년 3월 22일 | 호레키 10/2/6 | 호레키 화재 | 宝暦の大火일본어 | 460 | 80 | ||||
1772년 4월 1일 | 메이와 9/2/29 | 메이와 대화재[10][11][1] | 明和の大火일본어 | 14,700명 | 4060명 | 904 | |||
1806년 4월 22일 | 분카 3/3/4 | 분카 대화재[12][1] | 文化の大火일본어 | 1200명 | 530 | 80 | 80 | ||
1829년 4월 24일 | 분세이 12/3/21 | 분세이 대화재 | 文政の大火일본어 | 2800명 | 370,000 | ||||
1834년 3월 16일 | 템포 5/2/7 | 코고 화재[13] | 甲午火事일본어 | 4000명 | |||||
1845년 3월 2일 | 코카 2/1/24 | 아오야마 화재 | 青山火事일본어 | 800–900명 | 126 | 400 | 5000 | ||
1855년 11월 11일 | 안세이 2/10/2 | 지진 화재[14] | 地震火事일본어 | 4500–26,000명 |
6. 1. 경제적 부담
거대한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황폐해진 에도를 재건하기 위한 물질적, 금전적 비용은 엄청났다. 대화재는 소비자 물가와 경제 전망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에도에서 시작하여 일본 전역으로 파급될 수 있었다. 따라서 대화재의 빈번한 발생은 에도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27] 반대로, 재건 비용은 쇼군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었고, 쇼군의 재정적 어려움에 기여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린 것은 조닌(町人, 에도 시대 상공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사업을 운영하던 상인이 대화재 이후 나가야(長屋, 서민용 임대 주택)에 살게 되는 상황도 상상할 수 있었다. 쇼군의 예산에서 조닌에게 할당된 지출 중에서도 화재 예방 및 소방과 관련된 비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소실된 시설의 재건은 막부의 재정상 큰 지출이었다. 메이레키 대화재에서는 소실된 에도성 천수각의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본마루 어전 등의 재건으로 총 공사비가 93만 냥 이상 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1]
대화재 이후에는 막부에 의한 구제가 이루어졌으며, 이 또한 큰 지출이었다.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에는 하타모토와 고케닌에게 녹봉에 따라 하사금을 지급하고, 급료의 일부를 미리 빌려주는 제도(급미의 전차)도 인정했다. 다이묘에게는 하사금이나 은대금(10년으로 상환)을 지급하고, 조닌에게도 가옥 면적에 따라 하사금(메이레키 대화재 때는 약 16만 냥)을 지급했다. 또한, 화재로 쫓겨난 조닌에게는 다이묘에게 명하여 죽을 쑤어 나눠주게 하고, 그 외에도 쌀 창고가 불탄 쌀을 무상으로 조닌에게 제공했다. 이후에도 대화재가 일어날 때마다 막부에 의한 구제가 이루어졌지만, 재정 악화로 인해 규모는 축소되었다.
6. 2. 물가 상승
화재 발생 후에는 건축 자재, 식량 등의 물가가 급등하여 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큰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에도에서는 쌀을 비롯한 식량뿐만 아니라 가옥 재건에 필요한 건축 자재의 가격이 모두 크게 올랐다.[69] 예를 들어,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에는 사케 가격은 1되(약 1.74L)당 40문에서 1000문으로 치솟았고, 기름 가격은 1되당 3문에서 2400문으로 급등했다.[69] 도시 재건으로 인한 업무량 증가는 고용된 장인의 임금 상승을 부추겼다. 장인 외에도, 에도에서 대화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고용된 하인들도 임금 인상을 누렸다. 이 외에도 주택 부족으로 인해 임대료가 상승했으며, 다리가 재건되기 전에는 수요 증가로 인해 뱃삯도 올랐다.막부는 물가 폭등을 억제하기 위해 가격 인상을 금지하고, 장인의 임금 상한선을 설정하며, 주요 위반자를 처벌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또한 에도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쌀을 농부로부터 직접 구매하여 재판매하고, 농부들이 직접 쌀을 판매하기 위해 에도로 오는 것을 허용했다.
에도에서 전국 각지로의 구매 주문이 증가함에 따라, 에도의 대화재가 경제 전망에 미치는 영향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막부는 기회주의적인 가격 인상에 대해 광범위한 지역에 경고를 발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와무라 스이켄과 같은 상인들은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목재 거래와 건설 계약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70]
6. 3. 사회 불안 가중
잦은 화재는 사회 불안을 가중시켰으며, 에도 막부의 통치력 약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에도의 인구가 경제적 번영과 함께 증가하면서, 도시의 화재 발생 빈도 역시 비례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851년(가에이 3년)부터 1867년까지 17년 동안 506건의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한 행정으로 인한 불안정한 치안이 주요 원인이었다.[1]거대한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황폐해진 에도를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금전적 비용은 엄청났다. 따라서 대화재가 소비자 물가와 경제 전망에 미치는 영향은 에도에서 시작되어 일본 전역에 파급될 수 있었다. 대화재의 빈번한 발생은 에도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27] 반대로 재건 비용은 쇼군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었고, 쇼군의 재정적 어려움에 기여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린 것은 ''초닌''(町人, 에도 시대 상공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사업을 운영하던 상인이 대화재 이후 ''나가야''(長屋, 서민용 임대 주택)에 살게 되는 상황도 상상할 수 있었다. 쇼군 예산에서 ''초닌''에게 할당된 지출 중에서도 화재 예방 및 소방 관련 비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u Japon
2002
[2]
문서
First recorded great fire in Edo. The entire city was burned down.
[3]
문서
Daimyō hikeshi
[4]
문서
Also called the Fire of Furisode (振袖火事). It was the worst fire in the history of Edo. Over half of Edo was involved in the conflagration that had begun on March, 2, 1657, the third year of the Meireki era. During its two-day span the awesome conflagration reduced 60-70% of the capital city to ashes and burnt down Edo Castle's Tenshu Keep. The great fire would have significant long-term impact on the urban planning and firefighting system of Edo. (Meireki 3, 18th–19th days of the 1st month); and the city was devastated, claiming over 100,000 lives.
[5]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6]
서적
The Desjima Dagregisters, Volume XII 1650–1660
Leiden
2005
[7]
문서
Also called the Fire of Yaoya Oshichi
[8]
문서
Titsingh, p. 415.
[9]
문서
Compounding the damaged inflicted on Edo by the earthquake six days earlier, the area of destruction exceeded that of the Great Fire of Meireki.
[10]
문서
The fire broke out on February 29, 1772 (Meiwa 9, 26th day or the 1st month). This is considered one of the three greatest Edo Fires. Unofficial reports describe a swath of ashes and cinders nearly width and length—destroying 178 temples and shrines, 127 daimyo residences, 878 non-official residences, 8705 houses of bannermen, and 628 blocks of merchant dwellings, with estimates of over 6,000 casualties. All this devastation subsequently engendered the staggering costs of reconstruction.
[11]
서적
Tanuma Okitsugu, 1719–1788: Forerunner of Modern Japan
1955
[12]
문서
a severe fire which broke out in Edo during the third year of the Bunka era.
[13]
문서
Series of fire incidents lasted for six days.
[14]
문서
A magnitude 7.0 earthquake struck Edo on the same day and caused fires in numerous locations that evolved into this great fire.
[15]
문서
Titsingh, p. 414.
[16]
문서
Hinin were the lowest, most discriminated rank in the caste system of the Edo society. Members were typically ex-convicts and vagrants.
[17]
문서
The number of arrested arsonists in those two years skyrocketed. It is possible that some of them were in fact innocent.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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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ha is a Japanese poem known for being a pangram of all kana.
[19]
웹사이트
Japanese Police — Encyclopedia of Japan
https://doyouknowjap[...]
[20]
문서
A fire festival celebrated on the day of full moon of the first month of the lunisolar calendar.
[21]
문서
A monthly rotating position that oversaw affairs in a town
[22]
문서
In the Edo period, families in neighboring residences were grouped in units of five to share various responsibilities including fighting crimes, securing tribute payments and mutual assistance. Such groups were called goningumi.
[23]
문서
These gachigyōji were punished for letting a fire spread. The six towns which they oversaw were the ones whose machibikeshi were required to mobilize during a fire.
[24]
웹인용
This was before the reform in 1669 that changed the shō to be equivalent to about
http://dic.yaho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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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町人総論」P.5-P.2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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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災都市江戸の実体」P.8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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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市史稿 変災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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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る、読む、調べる 江戸時代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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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江戸・文化の大火(文化3年3月4日) | 災害カレンダー
https://typhoon.yaho[...]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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