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루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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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루비에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엑상프로방스에서 사업가로 경력을 시작하여 하원의원, 상원의원, 그리고 세 차례에 걸쳐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재무장관으로도 여러 차례 활동하며 재정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았으며, 파나마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하기도 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에는 교회와 국가 분리, 모로코 위기 해결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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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루비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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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모리스 루비에 |
원어 이름 | Maurice Rouvier |
로마자 표기 | Morise Rub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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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42년 4월 17일 |
출생지 | 엑상프로방스 |
사망일 | 1911년 6월 7일 (향년 69세) |
사망지 | 뇌이쉬르센 |
배우자 | 마리-노에미 카디오 |
직책 | |
임기 시작 | 1905년 1월 24일 |
임기 종료 | 1906년 3월 14일 (1년 1개월 18일) |
대통령 | 에밀 루베, 아르망 팔리에르 |
내각 | 루베 2기 및 루베 3기 |
전임 | 에밀 콩브 |
후임 | 페르디낭 사리앵 |
임기 시작 2 | 1887년 5월 30일 |
임기 종료 2 | 1887년 12월 4일 (6개월 4일) |
대통령 2 | 쥘 그레비, 사디 카르노 |
내각 2 | 루베 1기 |
전임 2 | 르네 고블레 |
후임 2 | 피에르 티라르 |
2. 생애
모리스 루비에는 프로방스 출신의 소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마르세유 상고(현 리세 티에르)에서 상업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시절 마르세유의 금융 재벌 자피로풀로스의 후계자와 친분을 쌓아 졸업 후 그곳에 취업하여 빠르게 경력을 쌓았다.[2] 가스통 크레미외와 함께 교육연맹을 조직하고, 극좌 성향의 공화파 신문 <인민>과 레옹 강베타가 지원하던 <프로방스의 외침>에 참여했으며, 이후 <레갈리테>를 창간했다. 1870년 11월에는 엑상프로방스 시청에서 벌어진 폭동에 가담하기도 했다.[3]
모리스 루비에는 1887년과 1905년에 총리직을 수행하며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05년에는 교회와 국가 분리법을 통과시켜 정교분리 원칙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제국이 몰락한 후, 루비에는 부슈뒤론 도지사 비서로 임명되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마르세유에서 사업가로 초기 경력을 쌓은 그는 1867년 레옹 감베타의 후보를 지지했고, 1870년에는 반제정주의 신문인 ''평등''(L'Egalité)을 창간했다. 또한 감베타와 같은 마르세유의 프리메이슨 로지 "라 레폼(La Réforme)"에 소속되어 있었다.[2][3] 1870년부터 1871년까지 부슈뒤론 현의 사무총장을 지냈으나, 현 지사직은 거절했다. 1871년 7월 마르세유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공화당과 함께 꾸준히 투표했다. 재정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아 예산 위원회에서 보고관이나 위원장으로 여러 차례 활동했다.
1881년 총선에서 쥘 페리 내각이 몰락한 후,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지방 분권, 소득세 부과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하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감베타 내각에서 상업 및 식민지부 장관을,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쥘 페리 내각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1887년 5월 31일, 온건 공화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 겸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나, 불랑제 장군을 지지하는 급진파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레비 대통령의 사위 다니엘 윌슨이 연루된 훈장 스캔들이 터지자, 루비에 내각은 대통령을 보호하려다 붕괴되었다. 이후 예산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여 1889년 2월 샤를 플로케 내각의 패배에 영향을 주었다. 불랑제주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구성된 티라르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을 맡았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프레시네, 루베, 리보 내각에서도 같은 직책을 유지했다. 파나마 스캔들 기간인 1892년 12월, 코르넬리우스 헤르츠와 라인아흐 남작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리보 내각에서 사임했다. 이후 성공적인 은행가로 활동하며 재정 및 예산 문제에 대한 전문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3. 정치 경력
1887년 5월, 루비에는 온건 공화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 겸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레비 대통령의 사위가 연루된 훈장 스캔들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었다. 1889년에는 불랑제주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구성된 티라르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을 맡았다. 1890년부터 1893년까지 프레시네, 루베, 리보 내각에서도 재무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1892년 파나마 스캔들에 연루되어 리보 내각에서 사임했다.
이후 은행가로 활동하며 재정 및 예산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은 루비에는, 1902년 에밀 콤브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했고, 1905년 콤브 내각이 붕괴되자 총리로 임명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루비에는 이전 내각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화해 정책, 노령 연금, 소득세 도입 등을 추진했다. 또한, 모로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과 협상을 벌여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기간 직책 비고 1886년 - 1911년 도의회 의원 브뢰유쉬르루아야 캉통 선거구 1890년 - 1911년 알프마리팀 도의회 의장 1903년 - 1911년 상원의원 알프마리팀 지역구
3. 1. 하원의원 및 초기 정치 활동
모리스 루비에는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마르세유에서 사업가로 초기 경력을 쌓았다. 1867년에는 레옹 강베타의 후보 지지를, 1870년에는 반제정주의 신문인 ''평등''(L'Egalité)을 창간했다. 그는 또한 강베타와 같은 마르세유의 "라 레폼(La Réforme)"이라는 프리메이슨 로지에 소속되어 있었다.[2][3] 1870년부터 1871년까지 부슈뒤론 현의 사무총장을 역임했지만, 현 지사직은 거절했다.
1871년 7월, 마르세유에서 열린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공화당과 함께 꾸준히 투표했다. 재정에 관한 권위자로 인정받아 예산 위원회에서 보고관 또는 위원장으로 여러 번 활동했다.
1881년 총선에서 쥘 페리 내각이 몰락한 후,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지방 분권 정책, 소득세 부과 등을 포함하는 공약을 내걸고 하원에 재선되었다. 그 후 강베타 내각에 상업 및 식민지부 장관으로 참여했으며,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쥘 페리 내각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기간 | 직책 | 비고 |
---|---|---|
1871년 - 1885년 | 하원의원 (부슈드론 지역구) | |
1881년 - 1882년 | 재무장관 | 강베타 정부, 제3공화국 당시 재무장관은 농업장관 겸직 |
1885년 - 1903년 | 하원의원 (알프마리팀 지역구) |
3. 2. 총리 및 재무장관 재임
1902년, 루비에는 약 10년 동안 공직에서 배제된 후 에밀 콤브의 급진 내각에서 다시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1905년 1월 콤브 내각이 붕괴되자 대통령의 요청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재무부 장관을 겸임했다.새로운 총리로서 루비에는 하원에 대한 첫 번째 선언에서 이전 내각의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화해 정책, 노령 연금, 소득세,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1905년 4월에 통과된 법률에 따라 실업 급여 기금에 대한 공공 보조금 목적으로 프랑스 예산에 특정 예산이 책정되었다.
1905년, 정부는 교회와 국가 분리법을 도입했다. 이 법은 1901년 자발적 결사법과 종교 단체의 교육 자유에 관한 1904년 법을 엄격하게 시행했던 에밀 콤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 2,500개 이상의 사립 교육 기관이 국가에 의해 폐쇄되었고, 이는 가톨릭 및 보수 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1905년 2월 10일, 하원은 "바티칸의 태도"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선언했고,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1905년 12월에 통과되었다. 분리법과 관련하여 발생한 소란은 조르주 클레망소에 의해 교묘하게 처리되어 내각을 실추시켰고, 그 자리는 사리엔의 지휘 하에 내각으로 대체되었다.
루비에의 총리 및 재무장관 재임 기간과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다:
기간 | 직책 | 인물 |
---|---|---|
1881년 - 1882년 | 재무장관 (농업장관 겸직) | 모리스 루비에 |
1887년 5월 30일 - 1887년 12월 3일 |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장관 | 모리스 루비에 (모리스 루비에 1기 정부) |
1887년 5월 30일 - 1887년 12월 3일 | 외무장관 | 에밀 플로랑 |
육군장관 | 테오필 아드리앵 페롱 | |
내무장관 | 아르망 팔리에르 | |
법무장관 | 샤를 마조 | |
해군 및 식민지 장관 | 에두아르 바르베 | |
공공 교육, 미술 및 예배부 장관 | 외젠 스퓔러 | |
농업장관 | 프랑수아 바르베 | |
공공사업장관 | 세베리아노 데 에레디아 | |
상공장관 | 뤼시앵 도트렘 | |
1887년 11월 30일 - 1887년 12월 3일 | 임시 법무장관 | 아르망 팔리에르 (내무장관 겸임) |
1905년 1월 24일 - 1906년 2월 18일 |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장관 | 모리스 루비에 (모리스 루비에 2기 정부) |
1905년 1월 24일 - 1905년 6월 6일 | 외무 장관 | 테오필 델카세 |
육군 장관 | 모리스 베르토 | |
내무 장관 | 외젠 에티엔 | |
법무 장관 | 조제프 쇼미에 | |
해군 장관 | 가스통 톰송 | |
1905년 1월 24일 - 1906년 2월 18일 | 공공 교육, 미술 및 종교 장관 | 비앙브뉘 마르탱 |
1905년 1월 24일 - 1906년 2월 18일 | 농업 장관 | 조제프 루오 |
식민지 장관 | 에티엔 클레망텔 | |
공공 사업 장관 | 아르망 고티에 드 로드 | |
1905년 1월 24일 - 1905년 11월 12일 | 상공부, 산업, 우편 및 전신 장관 | 페르낭 뒤비에프 |
1905년 6월 6일 - 1906년 2월 18일 | 외무장관 | 모리스 루비에 |
1905년 6월 17일 - 1906년 2월 18일 | 재무장관 | 피에르 메를로 |
1905년 11월 12일 - 1906년 2월 18일 | 육군 장관 | 외젠 에티엔 |
1905년 11월 12일 - 1906년 2월 18일 | 내무 장관 | 페르낭 뒤비에프 |
1905년 11월 12일 - 1906년 2월 18일 | 상공부, 산업, 우편 및 전신 장관 | 조르주 트루이요 |
1906년 2월 18일 - 1906년 3월 7일 |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장관 | 모리스 루비에 (모리스 루비에 3기 정부) |
3. 3. 모로코 위기와 외교적 노력
에밀 콤브 내각에서 테오필 델카세는 모로코 문제에 대해 스페인과 은밀한 합의를 했고, 영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의 정책은 독일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모로코 문제가 베를린에서 다루어진 방식의 격렬함으로 드러났다.[1]1905년 6월 5일 내각 회의에서 루비에는 모로코 문제에 대한 외무 장관의 경솔함을 질책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델카세가 사임했다. 루비에는 이 중대한 시점에 외무부 장관 직을 맡았다. 중요한 협상 끝에 그는 7월 8일, 독일이 프랑스가 알제리 제국의 국경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데 특별한 이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보장 하에, 모로코 술탄이 제안한 국제 회의를 수용하는 독일과의 합의를 얻어냈다. 긴 논의 끝에 9월에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고, 여기에는 제안된 회의의 프로그램이 담겼으며, 1905년 12월에 루비에는 의회에서 이 모든 절차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고, 이는 모든 정당의 동의를 받았다.[1]
4. 평가
이언 피어스의 역사 미스터리 소설 ''스톤 폴''에 단역으로 등장한다.
모리스 루비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총리를 역임했으며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재정 정책과 프랑스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분리에 관한 비판적인 정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앙드레 랑은 루비에를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아무도 아니었던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Né le 17 avril 1842 à Aix-en-Provence (Bouches-du-Rhône) et mort le 7 juin 1911 à Neuilly-sur-Seine (Hauts-de-Seine)프랑스어.
참조
[1]
간행물
Nécrologie {{!}} Le Général de Division de Grimaudet, Comte de Rochebouët
https://books.google[...]
Berger-Levrault & Co.
1899-03
[2]
서적
Ce que la France doit aux francs-maçons
Grund
2012
[3]
서적
Histoire de la Franc-Maçonnerie française
Fayard
1975
[4]
서적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Volum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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