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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루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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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 루베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899년부터 1906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변호사로 경력을 시작하여 몽텔리마르 시장, 프랑스 하원 의원, 상원 의원, 그리고 총리를 거쳤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드레퓌스 사건을 해결하고 정교분리법을 제정하는 등 굵직한 현안들을 처리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를 방문했다. 루베는 대통령 임기를 모두 채우고 퇴임한 후 1929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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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루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밀 루베, 폴 나다르 촬영, 1900년경
폴 나다르 촬영, 1900년
이름에밀 프랑수아 루베
로마자 표기Émile François Loubet
출생일1838년 12월 30일
출생지마르산, 드롬, 프랑스
사망일1929년 12월 20일
사망지몽텔리마르, 프랑스
국적프랑스
학력파리 대학교
배우자마리루이즈 피카르 (1869년 결혼, 1925년 사별)
서명
정치 경력
직책프랑스 대통령
임기 시작1899년 2월 18일
임기 종료1906년 2월 18일
전임 대통령펠릭스 포르
후임 대통령아르망 팔리에르
총리샤를 뒤퓌
피에르 발데크루소
에밀 콩브
모리스 루비에
직책프랑스 총리
임기 시작1892년 2월 27일
임기 종료1892년 12월 6일
대통령사디 카르노
전임 총리샤를 드 프레시네
후임 총리알렉상드르 리보
정당민주공화연합
기타 직책
직책프랑스 상원의장
임기 시작1896년 1월 16일
임기 종료1899년 2월 18일
전임 의장폴 아르망 샬멜라쿠르
후임 의장아르망 팔리에르
직책국무회의 의장
임기 시작1892년 2월 27일
임기 종료1892년 11월 28일
대통령사디 카르노
내각루베
전임 의장샤를 드 프레시네
후임 의장알렉상드르 리보
직책내무장관
임기 시작1892년 2월 27일
임기 종료1893년 1월 11일
대통령사디 카르노
내각루베
리보 1기
전임 장관샤를 드 프레시네
후임 장관알렉상드르 리보
직책공공사업부 장관
임기 시작1887년 12월 12일
임기 종료1888년 4월 3일
대통령사디 카르노
내각티라르 1기
전임 장관세베리아노 드 에레디아
후임 장관피에르 들룅몽토

2. 생애

루베는 1838년 12월 30일, 소작농이자 마르산(Marsanne, Drôme프랑스어)의 시장(Mayor)이었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1] 1862년 파리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이듬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제2제정(Second French Empire) 시기인 1863년 총선에서 파리에서 공화파(Republican)의 압도적인 승리를 목격했을 당시 아직 학생이었다. 그는 몽텔리마르(Montélimar)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정착했고, 1869년 마리-루이즈 피카르(Marie-Louise Picard)와 결혼했다. 그는 또한 그리냥(Grignan)에 있는 작은 토지를 상속받았다.[1]

1838년 12월 20일, 마르산느(Marsanne, Drôme)에서 태어났다.[17] 그의 아버지는 마르산느 시장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인물이었다.[17]

1862년 파리(Paris)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며, 이듬해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7] 그 후 몽텔리마르(Montélimar)로 거처를 옮겨 1869년 마리 루이 피카르(Marie Louis Picard)와 결혼했다.[17] 또한, 그리냥(Grignan)에 있는 작은 영지를 상속받았다.[17]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普仏戦争)의 격변 속에서 몽텔리마르 시장에 취임하여 이후 레옹 감베타(Léon Gambetta)의 지지자가 되었다.[17]

1876년 몽텔리마르에서 선출되어 프랑스 대의원(代議院) 의원이 되었고, 1877년 5월 16일 위기(16 May 1877 crisis)에서는 알베르 드 브로이(Albert de Broglie) 공작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363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17] 1877년 프랑스 의회 선거(1877 French legislative election)에서는 정부에 의해 몽텔리마르 시장직에서 해임된 것이 오히려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17] 대의원에서는 주로 교육 관련 법안에서 활약하며, 팔루 법(Falloux Laws) 폐지와 초등 교육의 무상화, 의무화, 세속화를 추진했다.[17] 1880년 드롬주(ドローム県) 의회 의장에 취임했다.[17]

제2차 쥘 페리(ジュール・フェリー) 내각(1883년-1885년)의 식민지 확장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온건 공화파의 유력 정치인이 되었고, 1885년 프랑스 상원(元老院) 의원으로 당선되었다.[17] 1887년 12월부터 1888년 3월까지 피에르 티라르(Pierre Tirard) 내각에서는 공공 사업 장관(公共事業大臣)으로 입각했다.[17] 1892년 친구이자 대통령인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マリー・フランソワ・サディ・カルノー)의 요청으로 내각을 구성하여 내무 장관(内務省)을 겸임했다.[17] 총리로서 같은 해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들의 범죄와 카르모(カルモー)에서 발생한 파업에 대처해야 했다.[17] 카르모 파업에서는 중재 역할을 맡았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판결이 노동자 측에 너무 유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7] 파나마 운하 스캔들(パナマ運河疑獄)로 인해 내각은 11월에 무너졌지만, 루베는 다음 알렉상드르 리보(Alexandre Ribot) 내각에서 유임했고, 이듬해 1월 내각 개편으로 사임했다.[17]

뛰어난 웅변가로서의 명성과 성실한 인품 등으로 인정받아 1896년 상원 의장에 취임했고, 펠릭스 포르(フェリックス・フォール)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1899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1899年フランス大統領選挙)에서는 483표를 획득하여 쥘 멜린(Jules Méline)(279표)을 누르고 당선되었다.[17]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알프레드 드레퓌스(アルフレド・ドレフュス)의 반역죄 재판을 둘러싸고 여론이 양분되어 있었다(드레퓌스 사건(ドレフュス事件)), 대통령 선거에서도 드레퓌스 지지파가 루베를 공격했다.[17] 포르의 장례식 날에는 고데리크 로제(Gaudérique Roget)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병영으로 돌아가는 길에 폴 델레르드(ポール・デルレード) 장군으로부터 엘리제궁(エリゼ宮殿)으로 진군할 것을 요구받는 사건이 있었지만, 로제는 응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병영으로 돌아갔다.[17] 같은 해 6월에는 반 드레퓌스파 인물이 지팡이로 루베의 머리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17] 이에 대해 루베는 피에르 발데크-루소(ピエール・ワルデック=ルソー)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하는 동시에 공화파 여러 당파에 연합하여 헌법을 수호할 것을 촉구했다.[17] 그리고 루베는 육군 장관(陸軍大臣) 가스통 드 갈리페(Gaston, Marquis de Galliffet)의 조언을 받아 군사 재판에서 다시 유죄 판결을 받은 드레퓌스에게 사면을 내려 드레퓌스 사건을 해결했다.[17]

루베 대통령 시대는 프랑스에서의 정교 분리(政教分離)가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며, 피에르 발데크-루소 내각 시대와 그 뒤를 잇는 에밀 콩브(エミール・コンブ) 시대에도 반교권주의(反教権主義)의 목소리가 컸지만, 1905년 4월에는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가 소환될 정도가 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대의원에서 정교분리법(政教分離法)이 제정되었다.[17] 루베는 외교에도 적극적이어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パリ万国博覧会) 개막식에 참석했고, 1901년 9월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ニコライ2世)의 방문을 받았으며, 1902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도 순방했지만, 1905년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폭탄 테러로 암살 시도를 당하기도 했다.[17] 또한, 대영 관계에서는 영국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처리를 비판하고, 프랑스가 영국제2차 보어 전쟁(第二次ボーア戦争)을 비판하는 등 긴장이 계속되었지만, 영불협상(英仏協商) 체결(1904년)에 성공한 결과, 영국이집트 점령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프랑스의 모로코(モロッコ)에 대한 주장이 영국에 의해 인정되었다.[17]

1906년 1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17] 1929년 12월 20일 몽텔리마르(モンテリマール)에서 사망했다.[18]

2. 1. 생애 초반

에밀 루베는 1838년 12월 30일 드롬 지방의 소지주이자 26년간 마르산 시장을 역임한 오귀스탱 루베(1808-1882)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삼남매 중 차남으로, 맏형 조제프 오귀스트(1837-1916)는 의사였으며, 여동생 펠리시(1842-1892)가 있었다. 1862년 파리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17][1] 이듬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7][1]

몽텔리마르에 정착한[21] 루베는 1869년 8월 18일 마리 루이즈 피카르(Marie-Louise Picard, 1843-1925)와 결혼하여 마르그리트, 드니, 폴, 필리베르 에밀 등 총 4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는 그리냥(Grignan)에 있는 작은 토지를 상속받기도 했다.[1]

2. 2. 정계 생활

1870년 위기로 제2제정이 막을 내리자 그는 몽텔리마르의 시장이 되었고, 그 이후로 레옹 감베타를 꾸준히 지지했다. 1876년 몽텔리마르에서 중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1877년 5월 16일 위기에서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킨 주목할 만한 363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다.[1]

10월 총선에서 그는 재선되었는데, 정부가 그를 시장직에서 몰아낸 사실 때문에 지역의 열렬한 지지가 더해졌다. 그는 의회에서 특히 교육에 힘썼고, ''팔루 법률''에 의해 수립된 성직자 체제에 맞서 싸우고 무료 의무 세속 초등 교육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880년 그는 드롬주의 주 의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두 번째 쥘 페리 내각을 지지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열정을 보임으로써 온건 공화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

그는 1885년 상원에 진출했고, 티라르 내각(1887년 12월~1888년 3월)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되었다. 1892년 그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사디 카르노 대통령은 그에게 내각을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 루베는 총리직과 내무부 장관직을 맡아 그 해의 무정부주의자 범죄와 카르모의 대파업을 처리해야 했으며, 그는 중재자로서 행동하여 여러 곳에서 파업자들에게 너무 유리한 결정으로 여겨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11월 파나마 스캔들 문제로 패배했지만, 알렉상드르 리보 다음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직을 유지했지만 1월 개편에서 사임했다.[1]

  • 에밀 루베(Émile Loubet) – 총리 겸 내무부 장관
  • 알렉상드르 리보(Alexandre Ribot) – 외무부 장관
  • 샤를 드 프레시네(Charles de Freycinet) – 전쟁부 장관
  • 모리스 루비에(Maurice Rouvier) – 재무부 장관
  • 루이 리카르(Louis Ricard) – 사법부 장관
  • 쥘 로슈(Jules Roche) – 상공업 식민지부 장관
  • 고드프루아 카바냐크(Godefroy Cavaignac) – 해군부 장관
  •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 교육미술부 장관
  • 쥘 드벨(Jules Develle) – 농업부 장관
  • 이브 기오(Yves Guyot) – 공공사업부 장관


'''변경 사항'''

  • 1892년 3월 8일 – 고드프루아 카바냐크(Godefroy Cavaignac)가 로슈(Roche)의 뒤를 이어 식민지부 장관이 됨. 로슈(Roche)는 상공업부 장관직을 유지함.

2. 2. 1. 정계 입문

1870년, 몽텔리마르 시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레옹 강베타의 지지자가 되었다. 1876년 몽텔리마르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사태에서 브로이 공작 알베르트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시키는 데 동참하였다.[21] 재선된 후 교육분야에 전념했는데 비종교적인 교육과 무상·의무 교육 정책을 추진했다. 1880년 그는 드롬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제2의 쥘 페리 사역에 대한 그의 지지와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온건파 공화당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21] 1885년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1887년 12월부터 1888년 3월까지 티라르 내각의 공공사업부 장관이 되었다. 1892년 개인적인 친구였던 사디 카르노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무회의 의장 겸 내무부 장관직을 맡아 일했다.

에밀 루베()


1870년 위기로 제2제정이 막을 내리자 그는 몽텔리마르의 시장이 되었고, 그 이후로 레옹 감베타를 꾸준히 지지했다. 1876년 몽텔리마르에서 중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1877년 5월 16일 위기에서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킨 주목할 만한 363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이었다.[1]

10월 총선에서 그는 재선되었는데, 정부가 그를 시장직에서 몰아낸 사실 때문에 지역의 열렬한 지지가 더해졌다. 그는 의회에서 특히 교육에 힘썼고, ''팔루 법률''에 의해 수립된 성직자 체제에 맞서 싸우고 무료 의무 세속 초등 교육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1880년 그는 드롬주의 주 의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두 번째 쥘 페리 내각을 지지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에 대한 열정을 보임으로써 온건 공화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

그는 1885년 상원에 진출했고, 티라르 내각(1887년 12월~1888년 3월)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되었다. 1892년 그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사디 카르노 대통령은 그에게 내각을 구성해달라고 요청했다. 루베는 총리직과 내무부 장관직을 맡아 그 해의 무정부주의자 범죄와 카르모의 대파업을 처리해야 했으며, 그는 중재자로서 행동하여 여러 곳에서 파업자들에게 너무 유리한 결정으로 여겨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11월 파나마 스캔들 문제로 패배했지만, 알렉상드르 리보 다음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직을 유지했지만 1월 개편에서 사임했다.[1]

2. 2. 2. 파나마 운하 스캔들

파나마 운하 건설사업과 관련하여 뇌물을 받은 정치인들로 인해 제3공화국이 위기에 봉착했다. 수에즈 운하(1859~69) 건설에 성공한 레셉스가 민간회사를 설립하여 1881년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말라리아와 황열병등 예상치 못했던 문제[22]와 자금 고갈등으로 1889년 파산하고 운하 건설은 중단되었다.[23] 파산전 모집한 복권부 사채를 입법화 할 때 유대인 금융자본가를 통하여 정부의 각료들과 국회 의원들이 매수되었다는 사실이 1892년 가을에 반유대계 신문 <자유 언론>에 의해 폭로되어 파문이 확산되었다.[22][24] 여론이 악화되자 루베는 11월에 국무회의 의장에서 사임하였고 다음해 1월에 내무부 장관직에서도 물러났다.[21] 또한 클레망소등 공화파 의원들이 대거 퇴진하였다.[22] 이 사건으로 인해 제3공화국은 보수화되었고[25] 유대인에 대한 국민정서는 더욱 악화되었다.

2. 2. 3.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군적 박탈식(1895년 1월 5일)


파나마 운하 스캔들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1789년) 이후 잠재되었던 반유대주의가 다시 팽배해진 가운데, 1894년 10월 유대인 출신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26]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증거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 보불전쟁(1870~71) 이후 형성된 애국주의, 군국주의 그리고 반유대 정서라는 시류에 편승하여 감정적인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1897년 진범이 체포되었으나 군부는 대국민 신뢰 추락을 피하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후 이듬해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을 무죄로 석방하였다.[27] 이런 사실에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분노하며 군부를 비판하였고 특히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신문에 투고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28]

에밀 졸라의 글은 가히 폭발적인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재심요구파와 재심반대파로 분열되었고, 준 내전 사태에 이를 정도로 양진영은 본격적으로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였다. 시위, 폭동, 테러, 폭력사태, 유혈충돌이 빈번하였고[29] 정치 쟁점화 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존립마저 흔들렸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이 사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사건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발생하며 급반전되었다. 증거조작의 주범이었던 앙리 중령이 1898년 8월 자살하고[30] 진범 에스테라지는 해외로 도주하였으며 재심을 반대하였던 펠릭스 포르 대통령이 1899년 2월에 급사한 것이다. 재심반대파는 큰 타격을 받았고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31]

2. 3. 대통령 재임

뛰어난 설득력과 명료한 설명 능력, 그리고 안전하고 정직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1896년 상원 의장직을 얻었고, 1899년 2월에는 펠릭스 포르의 뒤를 이어 483표 대 279표(유일한 경쟁자였던 쥘 멜린 획득)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

루베의 초상화


귈트가 베니티 페어를 위해 그린 루베의 풍자화, 1899년


그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추구했던 공화당 내 일파의 대표자로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했다. 포르 대통령의 장례식 날, 폴 드루레드는 로제 장군 지휘하의 군대가 병영으로 복귀하는 길에 그들을 만나 엘리제궁을 향해 행군할 것을 요구했지만, 로제 장군은 현명하게도 군대를 병영으로 돌려보냈다. 6월 오퇴유 경마장에서는 반드레퓌스주의자에게 몽둥이로 머리를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루베 대통령은 그달 발덱루소를 총리로 임명하고 동시에 모든 계파의 공화주의자들에게 국가 방위에 힘쓸 것을 간청했다. 루베와 발덱루소의 노력으로 드레퓌스 사건이 해결되었고, 루베는 전쟁부 장관 가스통 갈리페 장군의 조언에 따라 드레퓌스의 렌에서 선고받은 10년형을 감면해 주었다.[1]

루베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피에르 발덱루소와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에밀 콩브 내각에 의해 공격받은 성직자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었다. 1905년 4월 프랑스 대사가 바티칸에서 소환되었고, 7월에는 하원에서 정교분리가 의결되었다. 남아프리카 전쟁과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상호 비판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영불협상을 통해 해결되었고, 1904년 양국 간 협약으로 이집트 점령에 대한 불개입을 대가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루베 대통령은 소작농 계급 출신이었으며, 포르 대통령과 같은 귀족적인 성향은 없었다. 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막하고, 1901년 프랑스 군사훈련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맞이했으며, 1902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다.[1]

1901년 니콜라이 2세 방불 기념 엽서.


1902년 7월 4일 루베 대통령은 로드아일랜드 신시내티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루베는 또한 에드워드 7세 국왕, 포르투갈 국왕, 이탈리아 국왕, 스페인 국왕과 상호 방문을 했다. 1905년 스페인 국왕 방문 중, 그와 그의 손님이 가르니에 궁을 떠날 때 마차 밑에 폭탄이 던져지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1][3] 1906년 1월 대통령직이 끝났을 때 그는 제3공화국에서 전임 기간을 채우고 사임하지 않고 재임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쥘 그레비의 두 번째 임기와는 다르다).[1] 그는 은퇴하여 1929년 12월 2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1. 선거



펠릭스 포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 선거가 조기에 열렸다.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파로 분열되었다. 펠릭스 포르 전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그는 드레퓌스 사건 재심에 반대하는 세력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34]

쥘 멜린과 에밀 루베가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었다. 멜린은 1897년 "드레퓌스 사건은 없다"고 선언한 반드레퓌스파였다. 반면, 루베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반드레퓌스파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드레퓌스파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조르주 클레망소는 루베를 적극 지지했다. 공화파는 단일 후보를 원했지만, 급진적인 후보는 원하지 않았다. 루베는 전 대통령이자 전 국무회의 의장이었던 사디 카르노의 후임으로 국무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대선 당시에는 상원 의장을 맡고 있어 풍부한 정치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쥘 멜린은 대선 후보에서 사퇴했다.[34]

1899년 2월 18일 베르사유에서 열린 의회에서 쥘 멜린은 279표(사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밀 루베는 483표를 얻어 에밀 루베가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34]

이 선거 결과는 두 가지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첫째, 폴 데룰레드가 제3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둘째, 에밀 루베는 오퇴유 경마장 관람석에서 크리스티아니 남작에게 지팡이로 구타당했다.[34] 남작은 4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32]

2. 3. 2. 드레퓌스 특별사면

발데크루소 내각은 드레퓌스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드레퓌스 재심에 긍정적인 에밀 루베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재심반대파는 폴 데룰데드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1][33] 1899년 6월 4일에는 크리스티아니 남작이 루베 대통령을 지팡이로 가격하는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34][21]

1899년 9월 열린 드레퓌스 재심에서 10년형이 선고되자, 재심요구파(드레퓌스파)의 시위와 유럽 각국의 프랑스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보이콧 움직임까지 일어났다.[35] 이에 루베 대통령은 국방장관 가스통 갈리페 장군의 조언에 따라 드레퓌스에게 특별사면령을 내렸다.[34] 드레퓌스 동지들은 반대했지만, 드레퓌스와 그의 가족들을 설득하여 특별사면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31] (1906년 2차 재심에서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되었다.[34])

2. 3. 3. 정교분리

루베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피에르 발덱루소와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에밀 콩브 내각에 의해 공격받은 성직자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었다.[1] 1905년 4월 프랑스 대사가 바티칸에서 소환되었고, 7월에는 하원에서 정교분리가 의결되었다.[1]

2. 3. 4. 대외 정책



루베 대통령은 무엇보다 대외 정책에 주목하였다. 에밀 루베는 정부 각료들에게 조언을 주기도 하면서 대외 정책의 큰 틀을 잡았다.

또한 에밀 루베의 7년 임기 중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러불동맹을 만들고 영국과의 친선을 꾀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언급되곤 한다. 루베는 1901년 9월 프랑스에 방문한 니콜라이 2세를 맞이했으며[27], 1902년에는 루베가 직접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방문했다.

루베는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는데, 1900년,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을 인정하는 대신, 리비아에 눈독들인 이탈리아의 이해 관계를 인정해 주겠다는 합의를 맺었다.

1901년, 루베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서훈인 성 안눈치아타 훈장을 받았으며, 1904년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파리에 방문한 것에 뒤이어 루베는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루베의 방문은 통일 이탈리아가 당시 교황령이었던 로마를 함락한 이후 이뤄진 최초의 공식적인 로마 방문이었는데, 교황 비오 10세는 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1905년 5월 31일, 파리를 방문한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를 노린 암살이 있었는데 루베는 천운으로 이를 피했다. 두 개의 투척 폭탄이 로앙 가와 리볼리 가의 교차로에서 던져졌다. 17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주동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전쟁과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상호 비판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영불협상을 통해 해결되었고, 1904년 양국 간 협약으로 이집트 점령에 대한 불개입을 대가로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루베 대통령은 소작농 계급 출신이었으며, 펠릭스 포르 대통령과 같은 귀족적인 성향은 없었다. 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막하고, 1901년 프랑스 군사훈련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맞이했으며, 1902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다.[1]

루베는 또한 에드워드 7세 국왕, 포르투갈 국왕, 이탈리아 국왕, 스페인 국왕과 상호 방문을 했다. 1905년 스페인 국왕 방문 중, 그와 그의 손님이 가르니에 궁을 떠날 때 마차 밑에 폭탄이 던져지는 암살 시도가 있었다.[1][3]

2. 3. 5. 파리 만국 박람회

20세기를 맞이하는 첫 국제 행사로, 지난 19세기의 과학·예술·건축·산업 등 여러 분야의 성과를 보여줌과 동시에 지난 세기를 기념하고 다음 세기를 향한 발전을 가속하자는 의미에서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였다.[36] 만국박람회의 개최를 위해 파리 곳곳에 대형 전시관이 세워졌고, 약 83,000명이 출품했다. 이 박람회에서 널리 선보였던 건축 양식이 바로 '아르누보'였다. 총 관람객수가 5000만 명에 달한 박람회에서는 수많은 기계와 발명품, 그리고 건축물들이 전시됐는데 그 중에는 그랑드 루 드 파리 대관람차, 마트료시카 인형, 디젤 엔진,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텔레그라폰 (최초의 자석식 녹음기) 등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는 것들도 등장했다.

루베 대통령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개막하였다.[1]

2. 3. 6. 임기 끝

에밀 루베와 후임 대통령 폴 데샤넬, 레몽 푸앵카레, 아르망 팔리에르 (1920년 2월 18일).


1906년, 에밀 루베는 제3공화국 대통령 중 도중 사임하지 않고 7년 임기를 모두 채운 첫 번째 대통령으로서 엘리제 궁을 떠났다. (쥘 그레비 대통령은 첫 7년 임기를 채웠으나, 재선 후 1887년 장식 스캔들로 사임했다.)[1] 1905년 스페인 국왕 방문 중에는 가르니에 궁을 떠날 때 마차 밑에 폭탄이 던져지는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1][3] 1906년 1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 그는 제3공화국에서 임기를 채우고 사임 없이 물러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쥘 그레비의 두 번째 임기와는 다르다.)[1] 그는 은퇴 후 1929년 12월 2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4. 퇴임과 사망

에밀 루베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17] 1929년 12월 20일, 몽텔리마르에서 90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으며,[18][17] 생-라자르 드 몽테리마르 묘지에 매장되었다. 루베는 8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장 장수한 프랑스 대통령이었으나, 2017년 1월 22일을 기점으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루베의 나이를 넘기게 되면서 두 번째로 장수한 프랑스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루베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 이어 대통령 임기 종료 시점에서의 나이가 두 번째로 많은 프랑스 대통령이기도 하다. 루베 자신의 유언에 따라 자식들은 그를 국립묘지에 매장하길 거절했다.[17]

3. 서훈

에밀 루베는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수여받았으며,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레지옹 도뇌르 단장을 역임했다.[4][5]

그는 또한 여러 국가로부터 다양한 훈장을 받았다. 1901년 이탈리아로부터 성 안눈치아타 기사단 훈장을,[9]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성 안드레야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4][5] 1902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황금양모 기사단 훈장을,[12] 태국으로부터 대 차크리 훈장을 수여받았다.[13] 1904년에는 노르웨이 사자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15]

그 외에도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장(1900년),[6] 불가리아 공국 성 알렉산더 훈장 대십자장(1902년 7월),[7] 덴마크 코끼리 훈장 기사장(1900년 11월 1일),[8] 에티오피아 제국 에티오피아 별 훈장 대십자장, 독일 제국 검은 독수리 훈장 기사장, 일본 제국 국화 훈장 대십자장(1899년 8월 5일),[10] 룩셈부르크 나소 왕가 황금 사자 훈장 기사장(1902년),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장(1902년), 오스만 제국 훈장, 포르투갈 왕국 탑과 검 훈장 대십자장(1902년 10월),[11] 러시아 제국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 기사장, 성 안나 훈장 1등급 기사장,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1등급 기사장, 산마리노 산마리노 훈장 대십자장, 세르비아 왕국 백색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스웨덴-노르웨이 세라핌 훈장 기사장(1899년 4월 17일),[14] 모나코 성 샤를 훈장 대십자장(1901년 3월 15일)[16] 등을 받았다.[4][5]

참조

[1] 백과사전 Loubet, Émile François
[2] 서적 The Old World and Its Ways Thompson Publishing
[3] 뉴스 Bomb for Loubet and King Alfonso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05-06-01
[4] 간행물 Almanach national. Annuaire officiel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https://gallica.bnf.[...] Berger-Levrault
[5] 간행물 Almanach national. Annuaire officiel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Berger-Levrault
[6] 뉴스 Nieuws Van Den Dag 1900-10-07
[7] 뉴스 Court Circular The Times 1902-07-04
[8] 서적 Statshaandbog for Kongeriget Danmark for Aaret 1901 https://dis-danmark.[...] J.H. Schultz A.-S. Universitetsbogtrykkeri 2020-07-04
[9] 서적 Calendario generale del regno d'Italia https://books.google[...] Italy. Ministero dell'interno
[10] 서적 明治時代の勲章外交儀礼 http://meijiseitoku.[...] 明治聖徳記念学会紀要
[11] 뉴스 Court Circular The Times 1902-10-31
[12] 뉴스 Latest intelligence - France The Times 1902-06-23
[13] 간행물 ส่งเครื่องราชอิสริยาภรณ์ไปพระราชทานเครื่องราชอิสริยาภรณ์มหาจักรกรีบรมราชวงษ์พระราชทานแก่ มองซิเออ เอมินลูเบด์ ประธานาธิบดีแห่งฝรั่งเศส http://www.ratchakit[...] Royal Thai Government Gazette 1902-10-16
[14] 간행물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21-03-12
[15] 웹사이트 The Order of the Norwegian Lion http://www.royalcour[...] 2018-08-10
[16] 웹사이트 Journal de Monaco https://journaldemon[...]
[17] 백과사전 Loubet, Émile François
[18] 웹사이트 シェルブール https://kotobank.jp/[...] 2020-06-20
[19]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20]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21] 서적 Encyclopædia Britannica
[22]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23] 백과사전 파나마 운하 사건 위키미디어 커먼즈 2005-08-01
[24] 백과사전 파나마사건 두산백과
[25]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26] 서적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푸른역사 2000-05-15
[27]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28] 서적 거꾸로 읽는 세계사 푸른나무 2003-08-18
[29] 서적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세기의 재판이야기 한겨레신문사 2000-03-28
[30] 서적 거꾸로 읽는 세계사 푸른나무 2003-08-18
[31]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32] 서적 Ces assassins qui ont voulu changer l'Histoire Plon
[33] 백과사전 드레퓌스 사건 양철북 1899-02-23
[34]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5] 서적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세기의 재판이야기 한겨레신문사 2000-03-28
[36] 백과사전 파리 만국박람회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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