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몬테 사크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몬테 사크로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언덕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 시가지에서 떨어진 교외 지역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점술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으며, '거룩한'을 의미하는 '사크라'라는 명칭의 유래로 여겨진다. 몬테 사크로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 라티푼디움의 일부였고, 이후 주거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평민들이 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두 차례(기원전 494년, 기원전 449년) 몬테 사크로로 분리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로마 공화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805년에는 시몬 볼리바르가 몬테 사크로에서 베네수엘라 해방을 맹세하는 '몬테 사크로의 맹세'가 있었다. 현재는 로마 시의 제3구역에 속하며, 몬테 사크로 구역의 이름을 유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마의 언덕 - 핀초 언덕
    핀초 언덕은 로마 시내에 위치하며 고대 로마의 일곱 언덕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중세 시대 핀치 가문의 정착으로 이름이 유래되었고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로마의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 로마의 언덕 - 바티칸 언덕
    바티칸 언덕은 고대 로마 시대에 바티카누스 몬스 또는 바티카누스 콜리스로 불렸으며 빈민 거주지에서 칼리굴라와 네로에 의해 변화를 겪고 키벨레 여신 사원이 있던 곳이자 성 베드로 순교지로 알려져 구 성 베드로 대성전이 건설된 후 교황청의 중심지가 된 로마에 위치한 언덕이다.
몬테 사크로
개요
위치이탈리아 라치오 주로마 북동쪽
다른 이름몬스 사케르 (Mons Sacer)
의미신성한 산
역사적 의의
기원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
사건기원전 494년: 평민들의 첫 번째 세케시오 발생
기원전 449년: 두 번째 세케시오 발생
결과평민들의 권리 옹호, 호민관 제도 확립
지리적 특징
형태낮은 언덕
위치아니에네 강과 테베레 강 사이
중요 지점로마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거리
비아 노멘타나 인근
현대적 의미
상징성로마 공화정 시대 평민들의 권리 투쟁 상징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
기념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장소
이탈리아의 역사 유적지
관련 유적
인근 지역안트레네

2. 역사

배경으로 몬테 사크로가 그려진 노멘타노 다리 (주세페 바시) 작


전설에 따르면 아우구르(새를 관찰하여 신의 뜻을 점치는 신관)들이 새의 비상 상황을 관찰하고 예언을 하는 장소였다고 되어 있고 이것이 ‘거룩한’을 의미하는 ‘사크라’라는 명칭의 유래로 간주하고 있다. 잘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모자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으며, 그것은 조수들을 지키기 위해 마법의 의식을 행하고자하는 신관들에게 불길한 징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몬테 사크로는 로마 시가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였으며, 로마 시가지와 피쿨레아(Ficulea : 고대 도시) 사이의 노멘툼(Nomentum : 현재 멘타나로 통하는 노멘타나 가도 근처에 있었다.) 가도에는 현무암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곳이 있고, 다수의 분묘가 설치되어 있고, 현재도 그 중 2개가 산 근처에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전방에 위치하는 노멘타노 다리에서 가도는 아니에네강을 넘는다.

몬테 사크로 언덕은 종교 행사지이기도 했었지만, 지리적인 표적이 되는 지형이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 근처는 라티푼디움(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 후, 택지화가 진행되어 일대는 주거 지역이 되어 갔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황제 일족과 가까운,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하는 파온테(Faonte)라는 네로 황제의 해방 노예였던 인물의 저택이 이곳에 있었다는 중요한 기록도 남아 있다. 그 저택은 고대 살라리아 가도가 크게 곡선을 그리는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가 끝나면서, 군사적으로 방어가 어려운 이유 등으로 인해 이 언덕 일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로마 시가지의 확장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근처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점으로 남은 것은 노멘타노 다리뿐이며, 이 다리는 오랜 세월 동안 빈번히 검문소로 또는 군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성산의 이름은 점술가 또는 점술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된 데서 유래했을 수 있지만, 역사가들에 따르면 첫 번째 분리를 종식시킨 ''렉스 사크라타'' (신성한 법)에서 유래했으며, 이 법은 언덕에 제단을 세워 통과시키고 기념했다.[5][6] 이 법의 계기는 고대 로마의 세습 귀족인 귀족과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간의 갈등이었다. 이 계급 투쟁은 기원전 494년에 정점에 달했는데, 평민들은 빚에 시달리자 로마 원로원에 구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들은 성산으로 집단적으로 분리되었고, 그곳에서 그들만의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귀족들의 모든 간청을 거부했다.[2][7]

바르톨로메오 발로치니, ''성산으로의 민중 분리'' (1849).


이 대치는 원로원이 사비니족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도시를 위해 싸울 군대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평민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해결되었다. 사절단의 지도자는 아그리파 메네니우스 라나투스였다. 메네니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귀족과 평민 모두 서로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도시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일련의 양보에 동의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민 집회에서만 선출되는 두 개의 연례 직위를 설정한 것이었다. 즉, 도시의 사원, 공공 건물 및 종교 축제를 담당하는 아이딜, 그리고 평민을 대변하여 입법을 옹호하고 제안할 수 있으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호민관이었다.[8][9][6]

기원전 449년, 평민들은 두 번째로 도시에서 분리되어 두 번째 십인 위원회의 폭정에 항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먼저 로마 남쪽에 있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했지만, 데켐비르들이 움직이지 않자, 첫 번째 분리에 있어서 그 언덕의 상징성과 역할을 통해 데켐비르들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성산으로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아 피쿨렌시스를 따라 도시 밖으로 행진했고, 다시 한번 몬스 사케르에 주둔했으며, 원로원의 사절들이 그들의 귀환을 협상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0] 키케로는 이 사건을 반대로 보고하면서, 평민들이 먼저 성산으로 분리된 다음 도시로 돌아와 아벤티노 언덕을 점령했다고 말한다.[11]

성산은 이 분리 이후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에는 이 언덕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1] 오늘날 이곳은 로마 시 내의 제3구역의 일부를 형성한다.

2. 1. 고대 로마와 몬테 사크로



몬테 사크로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 시가지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이었다. 아우구르(새를 관찰하여 신의 뜻을 점치는 신관)들이 새의 비상을 관찰하고 예언을 하는 장소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거룩한’을 의미하는 ‘사크라’라는 명칭의 유래로 간주된다.[5][6] 잘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모자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으며, 이는 조수들을 지키기 위해 마법의 의식을 행하고자 하는 신관들에게 불길한 징조였다고 한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 근처는 라티푼디움(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 후, 택지화가 진행되어 일대는 주거 지역이 되어 갔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황제 일족과 가까운 관계였던 네로 황제의 해방 노예 파온테(Faonte)의 저택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가 끝나면서, 군사적 방어가 어려워 이 언덕 일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로마 시가지의 확장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 근처에서 자주 언급되는 지점으로 남은 것은 노멘타노 다리뿐이며, 이 다리는 오랜 세월 동안 빈번히 검문소나 군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성산이라는 이름은 점술가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된 데서 유래했을 수 있지만, 역사가들에 따르면 첫 번째 분리를 종식시킨 ''렉스 사크라타'' (신성한 법)에서 유래했으며, 이 법은 언덕에 제단을 세워 통과시키고 기념했다.[5][6] 이 법의 계기는 고대 로마의 세습 귀족인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었다.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빚에 시달리자 로마 원로원에 구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성산으로 집단적으로 분리되었다.[2][7]

이 대치는 원로원이 사비니족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도시를 위해 싸울 군대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평민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해결되었다. 사절단의 지도자는 아그리파 메네니우스 라나투스였다. 메네니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귀족과 평민 모두 서로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도시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일련의 양보에 동의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평민 집회에서만 선출되는 두 개의 연례 직위, 즉 아이딜과 호민관이었다.[8][9][6]

기원전 449년, 평민들은 두 번째로 도시에서 분리되어 두 번째 십인 위원회의 폭정에 항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먼저 로마 남쪽에 있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했지만, 데켐비르들이 움직이지 않자, 첫 번째 분리에 있어서 그 언덕의 상징성과 역할을 통해 데켐비르들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성산으로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아 피쿨렌시스를 따라 도시 밖으로 행진했고, 다시 한번 몬스 사케르에 주둔했으며, 원로원의 사절들이 그들의 귀환을 협상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0] 키케로는 이 사건을 반대로 보고하면서, 평민들이 먼저 성산으로 분리된 다음 도시로 돌아와 아벤티노 언덕을 점령했다고 말한다.[11]

성산은 이 분리 이후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에는 이 언덕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1]

2. 2. 플레브스의 반란 (기원전 494년, 기원전 449년)

기원전 494년, 로마의 평민(플레브스)들은 빚 문제로 로마 원로원에 구제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평민들은 집단으로 성산으로 이동하여 농성하며 도시 로마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2][7] 사비니족과의 전쟁 위협에 직면한 원로원은 평민에게 우호적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를 사절단의 지도자로 파견했다.[8][9][6] 메네니우스는 사회를 인체에 비유하며 각 부분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유명한 변론으로 평민들을 설득했다.[6]

결국 평민들은 도시로 복귀하는 대신 몇 가지 양보를 얻어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민회에서만 선출되는 두 가지 연례 직위, 즉 도시의 사원, 공공 건물 및 종교 축제를 담당하는 아이딜과 평민을 대변하여 입법을 옹호하고 제안하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호민관의 설치였다.[8][9] 또한, 플레브스들은 호민관 제도를 설치하고, 스스로의 의회인 플레브스 민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에서 호민관을 선출했으며, 플레브스들을 위한 건물을 세웠고, 평민을 위한 법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호민관과 플레브스의 지위를 지켰다.[6]

이 사건을 기념하고 획득된 합의를 보장하기 위해 플레브스들은 언덕에 유피테르에게 봉헌하는 신전을 건립했다. 일설에는 이것이 ‘거룩한’을 뜻하는 ‘사크로’의 이름을 이 언덕에 가지게 된 유래라고 한다.[5][6]

기원전 449년, 평민들은 두 번째 십인 위원회의 폭정에 항의하며 다시 한번 도시에서 분리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먼저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했지만, 데켐비르들이 움직이지 않자, 첫 번째 분리에서 성산이 갖는 상징성과 역할을 통해 데켐비르들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성산으로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아 피쿨렌시스를 따라 도시 밖으로 행진했고, 다시 한번 몬스 사케르에 주둔했으며, 원로원의 사절들이 그들의 귀환을 협상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0] 키케로는 이와 반대로 평민들이 먼저 성산으로 분리된 다음 도시로 돌아와 아벤티노 언덕을 점령했다고 말한다.[11]

2. 3. 중세 시대 이후

3. 현대

1805년 8월 15일, 시몬 볼리바르몬테 사크로에서 어린 시절 교사였던 은사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es와 사촌인 페르난도 델토로(Fernando del Toro)와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해방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몬테 사크로의 맹세’로 알려져 있다.[17] 이때 이후 5개의 나라를 리베르타도레스(해방자)가 되는 청년은 22세였다.

3. 1. 몬테 사크로의 맹세 (1805년)

1805년 8월 15일, 시몬 볼리바르는 몬테 사크로에서 어린 시절 교사였던 은사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와 사촌인 페르난도 델토로(Fernando del Toro)와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해방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몬테 사크로의 맹세’로 알려져 있다.[17] 이때 이후 5개의 나라를 리베르타도레스(해방자)가 되는 청년은 22세였다.

3. 2. 현재의 몬테 사크로

4. 지리

몬스 사케르(Mons Sacer)는 아니오강(아니에네강) 북동쪽에 있는 언덕으로, 아니오강이 테베레강과 합류하는 지점보다 조금 위에 있다. 이 언덕은 고대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노멘타나 가도(비아 노멘타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2][3] 현재는 현대 로마의 경계 안에 있으며, 이곳에서 이름을 따온 몬테 사크로 구역이 있다. 언덕은 동쪽과 남서쪽으로 아니오강 계곡으로 가파르게 내려가고, 북쪽으로는 도시에서 뻗어 나가는 고원과 연결되어 있다. 작은 시내인 ''리부스 울마누스''(Rivus Ulmanus), 즉 느릅나무 시내는 가파른 동쪽 경사면에서 흘러내린다.[4][1]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Geography
[2] 서적 Livy
[3] 서적 Brutus
[4] 서적 Carta di' Dintorni di Roma
[5] 서적 Dionysius
[6] 서적 Bellum Civile
[7] 서적 Dionysius
[8] 서적 Livy
[9] 서적 Dionysius
[10] 서적 Livy
[11] 서적 De Republica
[12] 웹사이트 Orationum Ciceronis Quinque Enarratio, IV. Pro Cornelio http://www.thelatinl[...]
[13] 서적 Antichità romane
[14] 서적 Factorum et dictorum memorabilium libri IX
[15] 서적 Brutus
[16] 서적 Ab urbe condita
[17] 간행물 네즈에라・차베스정권을 읽어 풀기 위한 열쇠-볼리바르 혁명의 일찰- https://www.mofa.go.[...] 2012-08-28
[18] 웹사이트 Orationum Ciceronis Quinque Enarratio, IV. Pro Cornelio http://www.thelatinl[...]
[19] 서적 Antichità romane
[20] 서적 Factorum et dictorum memorabilium libri IX
[21] 서적 Brutus
[22] 서적 Ab urbe condit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