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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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는 기원전 10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한 여러 부족들의 교류와 전쟁을 거쳐 형성된 문명으로, 초기에는 왕정 시대를 거쳐 공화정 시대를 맞이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며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으나, 해외 팽창에 따른 내분으로 공화정은 붕괴하고 제정 시대로 전환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번영기를 누렸으나, 3세기의 위기를 겪으며 쇠퇴, 결국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 제국은 476년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로마 사회는 계급 사회였으며, 가족 중심적인 문화와 교육 시스템을 갖추었다. 로마의 법, 군사, 건축,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라틴어를 사용하고, 종교적으로는 다신교를 믿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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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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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로마 원로원과 시민 |
로마자 표기 | Senatus Populusque Romanus |
수도 | 로마 (후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라벤나) |
공용어 | 라틴어 |
주요 언어 | 라틴어 |
역사 | |
건국 | 기원전 753년 |
공화정 전환 | 기원전 509년 |
제정 전환 | 기원전 27년 |
서방 분할 | 286년 |
4분할 통치 | 293년 |
동서 분할 | 395년 |
서방 제국 멸망 | 480년 |
동방 제국 멸망 | 1453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왕정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공화정 (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 제정 (기원전 27년 ~ 서기 476년) |
국가 원수 | 로마 왕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집정관 (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 로마 황제 (기원전 27년 ~ 서기 480년) |
면적 | |
최대 면적 | 5,000,000 km² |
인구 | |
추정 인구 (117년) | 88,000,000명 |
인구 밀도 | 17.6명/km² |
통화 | |
통화 | 콰드란스 세미스 아시스 퀴나리우스 세스테르티우스 데나리우스 아우레우스 솔리두스 |
관련 국가 | |
현재 국가 | 보스니아 |
2. 역사적 배경
고대 로마는 초기 왕정으로 시작하여, 이후 공화정으로 발전했으며, 최종적으로 제정 시대를 맞이했다. 로마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세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고, 이후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476년까지를 다룬다. 일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본토를 재정복한 554년까지를 고대 로마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하여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정착한 여러 부족들은 약 200~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이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8세기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위치한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족이 이탈리아반도 곳곳으로 흩어질 때 형성된 이탈리아어파 집단 중 하나였다.[198] 이들은 주로 농경과 목축으로 생활했으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고 조잡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만 있는 원형 나무 오두막 형태였다. 일부 보석 장신구나 청동 또는 철 연장을 제외하면 해외 물품 수입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99]
고대 로마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라는 도시를 건설했다고 기록했지만, 로마의 기원 전설은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어 지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실제로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으며, 이들 산지 촌락은 각기 독특한 방언과 관습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200]
당시 상대적으로 미개했던 이탈리아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는 데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로마의 발전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201]
고대 로마는 초기에는 로마 왕정 체제였으나, 이후 로마 공화정으로 전환되었고, 다시 제정 로마 시대를 맞이했다.
전통적으로 고대 로마의 종말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퇴위로 간주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본토를 재정복한 554년까지를 고대 로마 시대로 포함하기도 한다.
로마 시는 제국 멸망 후에도 도시로서 존속했으며, 세계 제국 로마의 기억은 이후 시대의 사상과 제도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의 공식 국호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을 의미하는 Senātus Populusque Rōmānusla였으며, 이는 공화정 성립부터 고대 로마의 종말까지 사용되었다.
3. 역사
전통적으로 로마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약 240년간 왕들이 다스리는 왕정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기 로마는 주변 지역과의 교류와 갈등 속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고고학적 증거들은 기원전 8세기 중반경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정착지가 형성되고 방어 시설이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509년경,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화정 초기 로마는 귀족과 평민 간의 신분 투쟁을 겪으며 정치 체제를 발전시켰고, 집정관과 원로원, 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 제도를 확립했다. 공화정의 공식 국호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ātus Populusque Rōmānus|세나투스 포풀루스퀘 로마누스la, SPQR)이었다. 로마는 점차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며 서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후 동쪽으로 눈을 돌려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 등 헬레니즘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18]
그러나 급격한 팽창은 심각한 내부 갈등을 야기했다. 속주 착취로 부를 쌓은 귀족층과 달리, 전쟁에 동원된 자영농들은 몰락했고 라티푼디움(대토지 소유제)과 노예 노동이 확산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로마 사회는 유력 가문 간의 권력 투쟁과 내전으로 점철된 '내전의 1세기'를 겪으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등장과 암살,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최종 승리로 귀결되며 공화정의 종말을 고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으면서 사실상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을 수립했고, 그의 통치 아래 로마는 약 200년간의 평화와 번영기인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누렸다. 이 시기 오현제 시대를 거치며 제국은 안정의 정점에 달했고, 트라야누스 황제 때 영토가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3세기 들어 제국은 3세기의 위기로 알려진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군인 황제들이 난립하고, 외부의 침입이 격화되었으며, 제국이 일시적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사두 정치(테트라르키아)를 도입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전제정(도미나투스)을 수립하여 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기고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으로 영구히 분열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입과 내부 혼란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유럽사에서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기점으로 여겨진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이후 천년 가까이 존속하며 고대 로마의 유산을 계승했으나, 점차 영토가 축소되고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유럽사에서 중세와 근세의 경계로 간주되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로마 시는 계속 존속했으며, 고대 로마가 남긴 법률, 건축, 언어, 정치 제도, 문화 등은 이후 서양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1. 왕정 시대
왕정 시대(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8년)는 로마의 건국부터 공화정이 수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202]에 로물루스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고대 로마의 신화와 전설을 연구하여 설정한 것으로,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를 기원전 750년경으로 보고 있다.[203]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도시 건설에 대한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화성과 신화 속 도시 알바 롱가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도시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4]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암늑대에게 구출되어 자란 형제는 알바 왕을 복위시킨 후 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다툼 끝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의 유일한 건설자가 되었으며, 팔라티노 언덕에 세운 그의 초기 정착지는 나중에 로마 콰드라타(정방형 로마)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니시우스 할리카르나스수스가 기록한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 이후 아이네이아스 왕자가 트로이인들을 이끌고 새로운 트로이를 건설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티베르 강 기슭에 도착했는데, 함께 온 로마라는 여인이 다시 떠나지 못하도록 배에 불을 질렀고,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정착지를 로마라고 명명했다고 한다.[4]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가 새로운 트로이를 건설할 운명이었다는 이 전설을 묘사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 멸망 후 시, 음악, 의학, 무역, 정치 제도 등을 가지고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와 로마를 건국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로마 역사가 고대 그리스 역사와 연결되는 연속성을 부여하고 중요하게 여겼다.[190]
로마 주변 정착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규모 조직은 기원전 800년경에야 등장하는데, 에스퀼리노 언덕의 공동묘지에 최초의 무덤이 나타나고, 기원전 8세기 중반에는 팔라티노 언덕 아래에 점토와 목재로 된 벽이 건설되었다. 기원전 650년경부터 로마인들은 오늘날 로마 포럼이 위치한 카피톨리노와 팔라티노 언덕 사이 계곡의 물을 빼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까지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을 건설하고, 카피톨리노와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위치한 포룸 보아리움으로 도시를 확장했다.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로마에는 왕이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하다.[5]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왕정이 선거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혈연관계가 거의 없는 7명의 전설적인 왕들이 있었다고 믿었다. 초기 네 명의 왕은 로마 건국의 중심 세력이었던 라틴인과 사비니인 중에서 선출되었으나, 후기 세 명의 왕은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여겨진다. 이는 기원전 7세기 말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이 지역에서 귀족 및 왕족 계급을 형성하여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렸음을 시사한다. 왕정이 폐지된 후에도 왕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명목상의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 직책은 계속 남아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로마는 상당한 확장을 이루었다. 기원전 6세기 말 로마는 약 780km2의 영토를 지배했으며 인구는 3만 5천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25년경에는 레기아(Regia)라는 궁전이 건설되었다. 로마인들은 최초의 대중 조직과 로마 원로원의 창설 역시 왕정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로마는 또한 이웃한 라틴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후대의 로마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모든 라틴인이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고고학적으로도 공통된 문화가 증명된다. 라틴 도시들 간의 상호 결혼 및 시민권(Jus Latii) 공유와 공동 종교 축제는 이러한 공통 문화를 더욱 잘 보여준다. 6세기 말까지 이 지역 대부분은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지배는 기원전 6세기 말,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오만한 타르퀴니우스)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로마의 귀족 여성 루크레티아를 성폭행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204] 이 사건을 계기로 라티움족과 사비니족이 힘을 합쳐 왕정을 폐지하고,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한 공화정 체제를 수립했다(기원전 509년경).[205]
3. 2. 공화정 시대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여러 군사적 패배와 사회·정치적 위기를 겪으며 왕정이 몰락했다.[206]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파스티)에 기록된 기원전(BCE) 509년에서 507년 사이를 왕정 몰락 시점으로 본다.[206]
공화정 체제는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트리부누스 밀리툼)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태였으나,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두 명의 집정관이 통치하는 제도로 변경되었다. 로마의 정치 체제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을 특징으로 했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명의 집정관으로, 이들은 군사 통솔권인 임페리움(imperium)을 통해 행정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207] 집정관직은 오랜 실험과 발전을 거쳐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BCE 5세기 중엽에는 공화정의 최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불렀다.[208]
집정관은 본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력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원로원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졌다.[209] 원로원은 로마의 유력 가문 출신들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다가 공화정 수립 이후에는 집정관 등 선출직 관리들의 자문 기관이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처음에는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원로원과 평민 간의 완전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204]
공화정의 다른 주요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등이 있었다.[210] 이러한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에게만 허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211] 공화정 시대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서 유래한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와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켄투리아회는 전쟁과 평화 여부를 결정하고 고위 관리를 선출했으며,[212] 트리부스회는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했다. 나중에는 이 민회들이 모든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204]
BCE 5세기경부터 로마는 에트루리아를 비롯한 이탈리아반도의 다른 세력들을 점차 정복하기 시작했다.[213] 특히 베이를 점령한 것은 로마가 라티움 지역을 넘어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로마는 남쪽과 북쪽으로 팽창을 거듭하며 이탈리아 내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삼니움인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면서 세 차례에 걸친 삼니움 전쟁을 치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로마의 지배에 마지막으로 도전한 세력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 타렌툼이었다. BCE 281년, 타렌툼은 그리스 북서부의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의 팽창을 저지하려 했다. 피로스는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승리(피로스의 승리)였기에 결국 그리스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타렌툼은 로마에 의해 멸망했다.[214][215] BCE 270년까지 로마는 정복 활동을 통해 이탈리아 전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216] BCE 1세기에는 라틴어가 이탈리아 본토 전역의 공용어가 되었다.[204]
BCE 3세기 후반,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BCE 264년 ~ BCE 146년)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초기에는 두 세력이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인해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제1차,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시칠리아,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 첫 해외 영토를 확보했다. 특히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시기는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로마는 한니발과의 전쟁 과정에서 동원된 대규모 시민군을 상비군으로 전환했고, BCE 229년에는 아드리아해에서 로마의 해상 교역을 방해하던 일리리아를 공격하여 발칸반도 서부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 지역 정복은 훗날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204]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가 로마와의 협약을 위반했다는 명분으로 로마가 침공하여 시작되었다. 이 전쟁 결과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다.[217][218]
이후 약 200년간 로마의 팽창은 계속되었다. BCE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을 차례로 격파하며 지중해 세계 전체의 지배자로 부상했다.[18][219][220] 이러한 헬레니즘 왕국 정복은 로마와 그리스 문화의 접촉을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고, 로마 지배층의 문화적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로마는 군사적으로 통합된 강력한 제국이었으며, 이렇다 할 경쟁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해외 팽창은 심각한 내부 갈등을 야기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 속주를 착취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전쟁에 동원된 소농 출신 병사들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으면서 농지를 잃거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외국인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는 라티푼디움(대농장)이 발달하면서 자유민 농민층은 더욱 몰락했다.[19][221][222] 전쟁 배상금과 새로운 속주에서의 상업 발달, 세금 징수권 등으로 인해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이 경제적으로 부상했다.[20][223]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은 원로원 의원들의 상업 활동을 금지했고, 이는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제약하는 결과를 낳았다.[20][224][225]
원로원은 내부 정쟁에 몰두하며 중요한 토지 개혁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켰고, 기사 계급에게 더 많은 정치적 발언권을 주는 것에도 반대했다. 심지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도시의 실업자들로 구성된 폭력 조직을 동원하여 유권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BCE 2세기 후반, 그라쿠스 형제가 귀족들이 독점한 토지를 평민들에게 재분배하려는 개혁을 시도하면서 극에 달했다. 호민관이었던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결국 모두 살해당했다.[21] 이후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개혁의 일부를 마지못해 통과시켰지만, 이는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평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파(Populares)와 귀족 및 기사 계급 중심의 최고 귀족파(Optimates)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탈리아의 동맹 도시(소키이, Socii)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BCE 91년부터 BCE 88년까지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226] 한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토지 없는 빈민층도 군대에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로마 군대의 규모를 늘리는 데 기여했지만, 병사들이 국가보다는 자신들을 지휘하는 장군에게 충성하게 되면서 군대가 사병화(私兵化)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유력한 장군들이 국가와 원로원을 위협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시대가 열렸다.[227]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여러 차례 집정관에 선출되었고(BCE 107년 첫 집정관 포함 총 7회), 특히 BCE 104년부터 BCE 100년까지 5년 연속 집정관직을 맡기도 했다.
동맹국 전쟁 이후,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로마의 최고 군벌로 부상하여 권력 투쟁을 벌였다. BCE 88년, 집정관이 된 술라는 동방의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 원정을 준비했으나, 마리우스 파가 이를 저지하고 마리우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이에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숙청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술라가 동방 원정을 떠난 사이, 망명했던 마리우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함께 로마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고 반대파에 대한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BCE 87년).[22][23] 마리우스는 BCE 86년 사망했지만, 킨나는 BCE 84년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BCE 83년,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술라는 다시 로마로 진군하여 내전을 일으켰고, 승리 후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수천 명의 귀족, 기사, 원로원 의원들이 처형되었다. 술라는 독재관이 되어(BCE 81년 ~ BCE 79년) 무너져가던 공화정 체제를 복구하려는 개혁을 실시했으나,[228] 그의 통치는 로마 공화정의 위기와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2] 술라는 2년 만에 자진 퇴임했지만, 그의 사후 로마는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BCE 1세기 중반,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그리고 막대한 부를 소유한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공화정을 사실상 지배했다. 그러나 BCE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의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붕괴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BCE 58년부터 7년간의 갈리아 전쟁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과 명성을 얻은 카이사르는 원로원과의 갈등 끝에 BCE 49년,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BCE 48년)에서 폼페이우스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잔존 세력을 소탕하며 내전에서 최종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어 화폐 개혁, 역법 개정(율리우스력)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229]
그러나 BCE 44년, 카이사르의 독재에 반발하여 공화정을 수호하려 한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는 다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암살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230][231] 하지만 이 동맹 역시 권력 투쟁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레피두스는 실각하여 추방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결국 BCE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그의 연인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232] 이로써 길었던 공화정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정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3. 3. 제정 시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30] 그의 통치와 함께 로마는 약 2세기 동안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를 맞이했는데, 이를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로마 제정 시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아우구스투스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전까지를 원수정(프린키파투스, Principatus) 시대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를 전제정(도미나투스, Dominatus)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수정 시대는 황제가 자신을 '제1시민'(프린켑스)이라 칭하며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점차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전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주인'(도미누스)으로 불리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황제 숭배가 강화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제국의 종교 지형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제정 시대의 상세한 역사는 원수정 시대, 3세기의 위기, 전제정 시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3. 3. 1. 원수정 시대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지만, 겉으로는 공화정을 존중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 시기의 통치 체제를 원수정(Principatus)이라고 부르며, 이는 사실상 제정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칭했다. 그가 독재관 자리를 거부하는 등 신중하게 행동한 배경에는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233]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는 큰 반대 없이 권력을 승계하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어갔다.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이후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하면서 막을 내렸다. 네로의 죽음 이후 로마는 약 1년간의 내전 상태(네 명의 황제의 해)에 빠졌고, 이 기간 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차례로 황제에 올랐다. 혼란 끝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황제가 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기원후 69년 ~ 96년)를 열었다.[234] 플라비우스 왕조는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들인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로 이어졌다.[237]
제정 시대에도 로마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고 전반적으로 안정기를 누렸지만,[235] 일부 황제들은 폭정을 행하거나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폭정을 일삼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네로는 국가의 중요한 일보다는 개인적인 관심사에 몰두하고 잔인했다는 평판이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236]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로마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며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다.[238] 이 시기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도 부르며, 약 80년간 지속된 이 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를 구가했다.[239][240]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를 정복하고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제국의 영토가 약 650만km2에 달하며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241]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팽창 정책을 중단하고, 제국 전역을 순시하며 국경 방어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3. 3. 2. 3세기의 위기
193년부터 235년까지 이어진 세베루스 황조 시기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붕괴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기도 했지만, 카라칼라나 엘라가발루스와 같이 포악하거나 무능한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고, 근위대장 마크리누스 같은 찬탈자도 나타났다.[242]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암살된 이후, 막시미누스 트락스부터 카리누스에 이르는 시기 동안 근위대와 군대가 황제 계승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은 외부적으로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에 시달렸다. 260년에는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샤한샤 샤푸르 1세가 이끄는 사산조 페르시아 군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방의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지역에서는 포스투무스가 갈리아 제국을 선포하며 독립했고, 동방의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제노비아 여왕이 팔미라 제국을 세워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제국은 세 개로 분열되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의 노력에 이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분열된 제국들을 모두 토벌하면서 로마는 다시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르는데, 약 50년 동안 20명에서 30명에 달하는 황제가 교체될 정도로 극심한 불안정기였다.[243][244]
3. 3. 3. 전제정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를 시작으로 하는 제정 후기 시대를 전제정 시대(도미나투스, Dominatus)라고 부른다.[245] 이 시기에는 황제에 의한 전제와 군주 숭배가 강화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를 제정 후기로 묶는 경우가 많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는 일반적으로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나누어 다룬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위기를 일단락짓고, 기존의 프린켑스(제1 시민) 칭호 대신 도미누스(주인)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원수정의 종식을 알리고 전제정을 수립했다.[245] 286년에는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친구인 막시미아누스를 서방의 정제(Augustus)로 임명하고, 각자의 사위를 부제(Caesar)로 삼아 제국을 통치하는 사두 체제(Tetrarchia)를 도입했다.[246]
305년 두 정제가 공동 퇴위한 후, 여러 공동 황제들이 50년 이상 권력 투쟁을 벌였다.[247] 이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330년 5월 11일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로 개칭하고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248] 또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분열되었다.[249]
서로마 제국은 4세기 이후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250] 4세기 훈족의 서진으로 서고트족이 제국 국경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251] 410년에는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 시를 약탈했다.[252]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다시 로마를 약탈했다.[253] 455년 이후 게르만 출신 장군 리키메르가 황제를 계속해서 폐위시키는 등 혼란이 극심했으며, 마침내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254] (일부 학자는 480년까지 달마티아에서 저항한 율리우스 네포스나 486년까지 갈리아 북부를 지배한 로마 장군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을 마지막으로 보기도 한다.) 이로써 1200여 년간 지속된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255]
동로마 제국 역시 위기를 겪었으나 서방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지만,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대한 영향력은 축소되었다.[256]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전염병과 전쟁 이후,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받았다.[257][258] 그러나 8세기경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하고 9세기 초에는 일부 영토를 되찾기도 했다.[259] 이슬람 발흥 시기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변경하고, 황제 칭호도 아우구스투스 대신 그리스어 바실레우스(제왕)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000년경 동로마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 아래 전성기를 맞았다.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성했다.[260] 그러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면서 제국의 팽창은 멈추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수백 년간의 내분과 튀르크의 침략으로 약화된 제국은 알렉시우스 1세 황제 때인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257] 이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수십 년 뒤 파견된 제4차 십자군은 1204년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잠시 라틴 제국,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등으로 분열되었다.[261]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제위를 계승했지만, 제국은 에게해 연안의 그리스계 국가로 축소되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262]
4. 사회
수도 로마는 당시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최소 45만 명에서 최대 14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3][264][265] 이는 19세기 런던의 인구와 맞먹는 규모였다. 로마의 공공장소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 소리로 매우 붐볐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 시간 동안 도심 마차 통행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 인구의 약 20%가 도시에 거주했으며, 이탈리아 전체로는 25~40%에 달하는 높은 도시화율을 보였다.[266] 대부분의 도시에는 포룸과 신전 같은 공공건물이 있었다.
로마 사회는 매우 위계적이며 계급을 중시하는 구조였다.[267] 사회 계층은 크게 자유민(cives), 해방 노예(liberti), 노예(servi)로 나뉘었으며, 자유민 내에서도 다양한 계층 구분이 존재했다. 초기에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중요했지만, 공화정 시대를 거치며 일부 평민 가문이 부와 권력을 얻고 귀족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가문에서 집정관을 배출하면 신귀족(nobilis)으로 인정받았으나, 혈통 귀족의 명성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268][269]
시민권은 중요한 구분 기준이었다.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시민 외에도, 로마는 일부 동맹국 주민들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완전한 시민권과 외국인(peregrini)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권리로, 로마법에 의해 보장되었다.[271] 라틴 시민권 내에서도 투표권 유무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다.[272] 기원전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이탈리아의 많은 동맹국 주민들이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으며,[273] 서기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제국 내 거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확대되었다.[274]
여성은 남성 배우자와 유사한 기본권을 가졌으나,[275]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투표권이나 정치 참여권은 없었다.
4. 1. 계급
고대 로마 사회는 법적 지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는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 계층으로는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자유민(cives),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해방 노예(liberti), 그리고 재산으로 취급받던 노예(servi)가 있었다. 로마법에서는 개인의 법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이는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대 로마의 계급 참조.또한, 로마 사회에서는 누우스 호모(Novus homo)라 불리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가문에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는 가문 출신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족 구조 내에서는 가족의 가장( Pater familiasla)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가장은 보통 가문 내 최고 연장자 남성이 맡았으며, 십이표법에 규정된 바와 같이 법적 제한이 가해지기 전까지 노예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생살여탈권( ius vitae necisquela)을 가졌다.[191] 이는 강력한 가부장제적 특징을 보여준다.
4. 2. 가족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 또는 가구였다.[276] 가족은 가장 나이 많은 남성 시민인 ''가부장''(''pater familias'')과 그의 아내, 아들, 딸, 다른 친척들로 구성되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로 여겨졌다.[276] 가부장은 아내, 자녀, 가문의 노예 및 재산에 대해 절대적인 법적 권한인 ''patria potestas''(가부장권 또는 부권)를 행사했다.[277] 가부장은 결혼(종종 경제적 이유로)과 이혼을 결정하고,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손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심지어 생사여탈권까지 가졌다. 다만 이 생사여탈권은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금지되었다.[277] 이러한 극단적인 권력 행사는 매우 드물었으며, 제국 시대에는 점차 국가의 간섭과 입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30] 그럼에도 가부장은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해 도덕적, 법적 의무를 지녔으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가족 및 씨족(gens)의 고위 구성원과 상의하는 것이 관례였다.[130]
가부장권은 자신의 가구를 가진 성인 아들에게도 행사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아들은 법적으로 가부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277][278][132] 이는 성인 아들이 법적으로 미성년자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로마 역사 초기에는 딸이 결혼하면 남편 가문의 가부장 수권(''manus'')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는 이러한 관습이 약화되어, 기혼 여성은 자신의 출생 가족을 진정한 가족으로 계속 여길 수 있게 되었다.[279] 하지만 로마인들은 남성 계통을 중시했으므로, 결혼에서 태어난 모든 자녀는 남편의 가족에 속했다.[280] 어머니나 나이 든 친척이 남녀 자녀 모두를 양육하는 경우가 많았다.[133]
서로 혈연관계가 있거나 입양으로 맺어진 여러 가족의 집단을 씨족(gens)이라고 불렀다.[281] 씨족은 혈연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연대이기도 했다. 특히 공화정 시대에는 일부 유력 가문(''gentes maiores'')이 정계를 지배했다.[281]
고대 로마의 결혼은 특히 상류층에서 낭만적인 관계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결합의 성격이 강했다. 가부장은 보통 딸이 12세에서 14세 정도가 되면 사윗감을 찾았으며, 신랑은 대개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다. 상류층 여성들이 어린 나이에 결혼한 반면, 하층민 여성들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혼은 한쪽 당사자의 동의와 지참금 반환으로 가능했다.[134]
아버지가 태어난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면 그 아이는 잠재적 상속인이 되었다. 아이를 합법적으로 포기하거나 노예로 팔 수는 없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수 없거나 부권이 의심될 경우, 영아 유기가 행해지기도 했다. 명백히 기형이거나 병든 신생아를 죽이는 것은 가부장의 의무로 여겨졌다. 건강한 자유민 신생아를 유기한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았으나, 그 아이에 대한 ''patria potestas''를 상실했다. 버려진 아이들은 때때로 입양되거나 노예로 팔렸다.[131]
노예 제도는 로마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빚을 진 시민이 자신이나 아들의 노동력을 채권자에게 제공하는 제한된 형태의 노예제(''nexum'')가 있었으나, 중기 공화정 시대에 폐지되었다. 공화정 후기에는 전쟁 포로 등으로 노예 공급이 늘어나면서 숙련 및 비숙련 노동 모두에서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인구의 약 20%, 로마 시 인구의 약 40%가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는 주인의 동의 하에 합법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으며, 해방된 후에도 이전 주인과의 후원-피후원 관계를 유지하며 주인의 가족과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로마 경제와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정복 전쟁이 줄어들고 노예 가격이 상승한 제국 시대에는 고용 노동이 노예 소유보다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게 되었다.
로마 시민 여성은 투표권은 없었지만 법의 보호를 받는 제한된 형태의 시민권을 가졌다. 그들은 가정을 운영하고, 사업체를 소유 및 운영하며,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유언을 작성하고, 법원의 허가와 남성 친척의 명목상 감독 하에 법정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변호할 수도 있었다. 공화정 후기와 제국 시대에 걸쳐 엘리트 계층의 출산율 감소는 많은 가문에게 우려 사항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 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여성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자녀가 없는 여성을 처벌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는 큰 반감을 샀고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다. 귀족 여성들은 출산의 위험성과 불편함 때문에 점차 출산을 꺼리는 경향을 보였다.[135]
4. 3. 교육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7세까지는 주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소년들은 부모나 주로 그리스 출신인 노예 교사(paedagogus|파이다고구스la)에게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282][283][284] 아버지는 아들에게 로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을 가르치고, 종교 및 정치 활동에 동행시키며 사회생활을 익히게 했다. 이 시기 교육의 주된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귀족 자제들은 16세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 복무를 시작했다. 이러한 관습은 제정 시대 일부 귀족 가문에서도 이어졌다.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 변화가 생겼으나, 그리스식 교육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다.[285]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7세가 된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ludus|루두스la라 불리는 사립 초등학교에 보냈다.[284][286] 이곳의 교사(litterator|리테라토르la 또는 magister ludi|마기스테르 루디la)는 아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3Rs: reading, writing, reckoning) 및 때로는 그리스어를 가르쳤다.[284][286][192] 12세부터 학생들은 중등 학교에 진학하여 교사(grammaticus|그람마티쿠스la)에게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배웠다. 16세가 되면 일부 학생들은 수사학 학교에 진학했는데, 이곳 교사(rhetor|레토르la)는 대개 그리스인이었다. 이러한 고등 교육 과정은 법조인이나 정치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주로 거쳤으며, 로마법 암기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193] 학생들은 종교 축제일이나 장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고대 로마 남성의 문해율에 대해서는 50% 이상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194] 평균적인 문해율은 5~30% 이상으로 추정된다.[195][196]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정부의 공증인인 scriba|스크리바la가 대필이나 대독을 해주었다.
5. 정치
원래 로마는 각 부족에서 서로 돌아가며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287] 왕권의 정확한 속성은 확실하지 않다.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살아있는 상징은 왕이었다.[288] 다만 군사 분야에서는 왕은 절대적인 명령권(imperiumla)을 행사했다.[289] 또 국가 종교의 수장이기도 하였다.[289] 원로원은 왕을 위한 자문 기구였으며, 쿠리아회는 임금이 입안한 법을 정하고 비준할 수 있는 민회였다.[290]
공화정기의 신분 투쟁으로 로마는 로마 특유의 민주정과 과두정이 혼합되었다. 'republic영어'의 어원이 된 'res publicala'는 '공공의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291] 로마법은 전통적으로 민회(트리부스회)에서만 표결로 투표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공직 출마자도 인민이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하는 과두적인 정치 기구였다. 공화정에서 원로원에는 강력한 권위(auctoritasla)가 있었으나 기능상 자문 기구이므로 입법권은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원로원의 집단적인 의지에 맞서기는 힘들었다.[292] 원로원 의원은 감찰관이 명문 귀족 중에서 임명했는데, 감찰관은 "부도덕한" 행실을 한 의원을 면직할 수도 있었다. 가령 뇌물을 받는다거나 혹은 소 카토가 감찰관이던 시절에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아내와 포옹하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나중에 독재관 술라의 개혁으로 재무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에는 엄격한 관료제가 없었으며, 세금도 징세 청부를 통해 거두었다. 재무관, 조영관, 혹은 장관(praefectusla) 등 정무관은 본인 돈으로 공무를 처리했다. 시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정무관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정무관과 권력을 분할하도록 하였다. 가령 평상시에는 최고 권력은 집정관 두 사람이 함께 보유했다. 비상시에는 임시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행정 체제는 필요할 때마다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로마가 크게 팽창하면서 공화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제정 성립으로 이어진다.
제정 초기는 정부는 공화정의 형태를 가장하였다. 로마 황제는 그저 ''제1시민''(princepsla)일 뿐이었으며, 원로원은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력은 점차 전제 권력으로 발전했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시대의 행정 체제를 물려받지 않았는데, 공화정에는 원로원 외에 영속적인 행정 기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위 행정가와 원로원 의원, 자신의 친구, 전문 법률가 등을 모아 조언을 구하였으며, 원로원 의원, 기사, 피해방인, 심지어 노예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곡물, 수도, 치안, 법, 재정 등 일종의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293]
알렉산더 세베루스 사후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다. 로마 국가는 내전, 외부 침략, 정치적 혼란, 전염병 및 경제 공황으로 고통받았다.[86] 옛 로마의 가치관은 쇠퇴했고, 미트라교와 기독교가 대중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들은 더 이상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대개 제국의 변방의 하층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군사 계급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고, 내전을 통해 황제가 되었다.
49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등극하는 정치적 불안정을 보였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당시 첫 통치자였으며, 겨우 3년 동안 통치했다. 다른 이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발비누스, 호스틸리아누스처럼 몇 달 동안만 통치했다. 황제들은 대부분 라이벌을 물리치고 권력을 확립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인구와 국경은 방치되었다. 경제 또한 타격을 입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막대한 군사 지출로 로마 화폐의 가치가 하락했다. 이때 초인플레이션도 발생했다. 250년에 키프리아누스의 역병이 발생하여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87] 260년, 시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이집트 지방은 나머지 로마 국가에서 분리되어 팔미라 제국을 형성했고, 제노비아 여왕이 통치했으며 팔미라를 중심으로 했다. 같은 해에 포스투무스가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를 유지하며 갈리아 제국을 건설했다.[88] 이들 국가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힌 후 로마에서 분리되었다. 적에게 포로로 잡힌 최초의 로마 황제라는 사실은 로마인들에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87]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268~270년)는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 침입자들을 격파했고, 아우렐리아누스 (271~275년)는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을 모두 재정복하면서 위기는 잦아들기 시작했다.[89]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 기간에 위기는 극복되었다.
6. 법
고대 로마의 법 체계는 기원전 449년 제정된 12표법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 편찬된 로마법대전으로 집대성되었다. 로마법은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이어졌으며, 서유럽 여러 나라 법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넓게 보면 로마법은 17세기 말까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영향을 미쳤다.
고대 로마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기록된 분류로, '''시민법'''(Ius Civile|이우스 키윌레la), '''만민법'''(Ius Gentium|이우스 겐티움la), '''자연법'''(Ius Naturale|이우스 나투랄레la)이다.
구분 | 설명 | 관할 법무관 |
---|---|---|
시민법 (Ius Civile) |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294] | 도시 법무관(Praetor Urbanus): 시민 간의 소송 담당 |
만민법 (Ius Gentium) | 외국인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에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이다.[276] | 외국 법무관(Praetor Peregrinus): 외국인 관련 소송 담당 |
자연법 (Ius Naturale) | 자연법의 일반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 특정 법무관 명시 없음 (보편적 원리) |
7. 군사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였다.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지원제로 바뀌었고, 이는 당시 증가하던 실업자 구제책으로도 여겨졌다. 제정으로 전환된 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비대해진 군대 규모를 축소하고, 필요할 때마다 군대를 편성하던 방식에서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주로 국경 방어를 위해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다.
서기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군으로부터 황제(Imperator|임페라토르la)로 추대받았다. 그는 시리아를 약탈한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내고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여러 야만족 부족을 정복했다. 그의 통치는 전통적인 제정 형태인 원수정(Principate)을 끝내고 사두정치(Tetrarchy)를 시작했다.
초기 로마 군대 (기원전 500년경)는 다른 동시대 폴리스처럼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아 호플리트 전술을 사용하는 시민 민병대였다. 군대는 소규모였고 다섯 계급으로 나뉘었으며(정치 조직인 켄투리아 의회와 유사하게), 세 계급은 호플리트를, 두 계급은 경보병을 제공했다. 초기 로마 군대는 전술적으로 제한적이었고 주로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116][117]
기원전 3세기경, 로마인들은 호플리트 대형 대신 더 유연한 시스템을 채택했다. 이는 120명(때로는 60명)으로 구성된 작은 부대인 소대(Manipulus)가 전장에서 독립적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했다. 지원 병력과 함께 세 줄로 배치된 30개의 소대는 로마 군단을 이루었으며, 총 병력은 4,000명에서 5,000명에 달했다. 초기 공화정 군단은 세 줄의 중장보병(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이), 경보병 부대(벨리테스), 그리고 기병(에퀴테스)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직은 로마가 주변 도시 국가들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다. 초기 공화정 군단은 명목상 최대 3,600명에서 4,800명의 중장보병, 수백 명의 경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다.[118]
후기 공화정 시대까지 군단병은 주로 시골 출신의 토지를 소유한 시민 농부(assidui|아시두이la)였으며, 특정 (종종 연례) 원정에 참여했고, 자신의 장비를 공급했다. 기원전 200년 이후 농촌 경제 상황 악화와 병력 수요 증가로 인해 복무에 필요한 재산 자격이 점차 완화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군단병들은 봉급(stipendium|스티펜디움la)을 받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시민 병사 개념은 사라지고 군단은 완전히 전문화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대를 재편성하여 기존 병사들을 해산하고 군단을 정비했다. 그는 제국의 속주에 배치된 28개의 상비 군단을 유지했다.[120]
원수정 동안 군대의 전술 조직은 계속 발전했다. 보조군(auxilia)은 독립된 코호르트(cohort)로 남았고, 군단 병력은 종종 전체 군단이 아닌 코호르트 그룹 단위로 작전을 수행했다. 기병과 군단병을 결합한 새로운 다목적 부대인 cohortes equitatae|코호르테스 에퀴타타에la가 등장했다. 이 부대는 수비대나 초소에 배치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균형 잡힌 소규모 부대로 싸우거나 다른 부대와 연합하여 더 큰 군단 규모의 부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적 유연성은 로마 군대의 장기적인 성공에 기여했다. 갈리에누스 황제(재위 253년~268년)는 후기 제국의 군사 구조를 확립하는 재편성을 시작했다. 그는 일부 군단병을 국경의 고정 기지에서 철수시켜 기동 부대(코미타텐세스)를 창설하고, 이들을 국경 후방에 전략 예비군으로 배치했다. 국경의 고정 기지에 남은 국경군(리미타네이)은 계속해서 최전선 방어를 담당했다. 야전군의 기본 단위는 연대였는데, 보병은 legiones|레기오네스la 또는 auxilia|아욱실리아la, 기병은 vexillationes|벡실라티오네스la였다. 명목상 병력은 보병 연대가 1,200명, 기병 연대가 600명이었으나 실제 병력은 이보다 적었을 수 있다(보병 800명, 기병 400명). 많은 보병 및 기병 연대는 코메스의 지휘 아래 함께 작전했다. 야전군에는 동맹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포이데라티(foederati) 연대도 포함되었다. 서기 400년경에는 포이데라티 연대가 제국으로부터 급료와 장비를 받고 로마 트리부누스가 지휘하는 상설 부대가 되어 로마 부대처럼 운용되었다. 제국은 또한 동맹 부족 집단을 야전군에 편입하지 않고, 로마 장군의 총 지휘 아래 자체 지휘관을 따르는 형태로 활용하기도 했다.
군 지휘 체계는 로마 역사에 걸쳐 변화했다. 왕정 시대에는 왕이 군대를 이끌었다. 초기 및 중기 공화정에서는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이 군대를 지휘했다. 후기 공화정에서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이 명예직 경로(cursus honorum)를 따라 공직을 역임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 이들은 먼저 콰이스토르(quaestor, 종종 현장 지휘관의 대리인으로 파견됨)를 거쳐 프라이토르(praetor)가 되었다.[121] 프라이토르나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은 이들을 총독 대리(propraetor) 또는 집정관 대리(proconsul)로 임명하여 해외 속주를 다스리게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황제가 모든 군단의 법적 지휘관이었으나, 실제 지휘는 원로원 귀족 중에서 임명한 레가투스(legatus)를 통해 이루어졌다. 군단이 하나인 속주에서는 레가투스가 군단 지휘관(레가투스 레기오니스)과 속주 총독을 겸했고, 군단이 둘 이상인 속주에서는 각 군단을 레가투스가 지휘하고 이들을 총괄하는 더 높은 계급의 레가투스가 속주 총독을 맡았다.
제국 후기(아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에는 이러한 아우구스투스 모델이 폐기되었다. 속주 총독의 군사 권한은 박탈되었고, 여러 속주의 군대 지휘권은 황제가 임명한 장군(둑스, duces)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더 이상 로마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 군 경력을 통해 승진한 인물들이었다. 점차 이들 장군들이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경우가 많아졌고(때로는 성공하기도 했다), 이는 황제의 권력을 위협했다. 자원 감소, 정치적 혼란 심화, 내전은 결국 서로마 제국을 외부의 침략과 점령에 취약하게 만들었다.[122]
로마 해군에 대한 기록은 육군에 비해 적다. 기원전 3세기 중반 이전에는 duumviri navales|두움비리 나발레스la라는 관리들이 주로 해적 소탕에 사용된 20척 규모의 함대를 지휘했다. 이 함대는 기원전 278년에 해체되고 동맹국의 함대로 대체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로마는 대규모 함대를 건설해야 했으며, 이는 주로 동맹국의 지원과 자금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동맹국 의존은 공화정 말기까지 이어졌다. 퀸퀘레메(quinquereme)는 포에니 전쟁 당시 양측의 주력 전함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더 가볍고 기동성이 좋은 함선으로 대체될 때까지 로마 해군의 주력으로 남았다.[125]
트리레메(trireme)에 비해 퀸퀘레메는 숙련된 선원과 비숙련 선원을 혼합하여 운용할 수 있었고(이는 육상 강국이었던 로마에게 유리했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약 40명의 해병을 태워 까마귀(corvus)라는 접선용 다리를 이용한 백병전 전술을 개발하여 사용했다. 함선은 켄투리오와 동급인 navarch|나바르크la가 지휘했는데, 이들은 보통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 함대가 비로마인들에 의해 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해군은 비로마적인 것으로 여겨져 평화 시기에는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125]
제국 말기(350년경) 로마 해군은 전함과 수송 및 보급용 상선을 포함한 여러 함대로 구성되었다. 전함은 3단에서 5단 노를 젓는 갤리선이었다. 함대 기지로는 서쪽의 라벤나, 아를, 아퀼레이아, 미세눔, 솜강 하구 등이 있었고, 동쪽에는 알렉산드리아, 로도스 등이 있었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따라서는 소형 강상 함대(classesla)가 요새화된 항구에 주둔하며 국경 수비대(리미타네이)의 일부로 활동했다. 저명한 장군들이 육군과 해군을 모두 지휘했다는 점은 해군이 독립적인 군종이라기보다는 육군의 보조 부대로 간주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해군의 정확한 지휘 구조나 함대 규모는 불분명하지만, 함대는 총독(praefectus|프라이펙투스la)의 지휘를 받았다.
8. 문화
고대 로마의 문화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로마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로마 시는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포룸, 판테온과 같이 아치를 활용한 웅장한 건축물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수백 킬로미터 길이의 수도관을 통해 운반된 신선한 물이 도시 곳곳의 분수에서 솟아났으며, 극장, 체육관, 도서관, 상점, 시장, 그리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로마식 목욕탕 등 다양한 공공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거 형태는 다양하여, 전원 지역의 빌라부터 도시 중심부의 공동주택인 인술라까지 있었다. 수도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는 황제의 궁전이 자리 잡았고, 하층 플레브스나 중산층인 기사 계급은 주로 인술라에 거주했다. 인술라는 상류층 지주들이 임대 수입을 목적으로 지은 경우가 많았으며, 이곳 주민들의 생활은 콜레기움(직업 또는 종교적 조합)이나 타베르나(선술집, 상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무료 곡물 배급을 받기도 했으며, 검투사 경기를 관람하며 여가를 즐겼다. 또한, 많은 평민은 유력 가문의 피호민(클리엔테스)이 되어 후원자(파트로누스)로부터 경제적, 법적 보호를 받는 대신 필요할 때 지지를 제공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었다.
로마 사회는 기본적으로 계층적 구조를 가졌다. 가장 낮은 계층은 노예(servi)였고, 그 위로 해방 노예(liberti), 그리고 가장 높은 계층은 자유민 시민(cives)이었다. 자유민은 다시 출신과 재산에 따라 여러 계층으로 나뉘었다.
계층 | 설명 |
---|---|
파트리키 (Patricii) | 건국 초기 100명의 족장 후손으로 알려진 명문 귀족 가문. 초기에는 정치, 종교적 특권을 독점했다. |
플레브스 (Plebeii) | 파트리키를 제외한 모든 자유민. 공화정 초기에는 정치 참여에 제한이 있었으나, 투쟁을 통해 점차 권리를 확보했다. |
노빌레스 (Nobiles) | 조상 중에 집정관을 배출한 가문. 파트리키와 부유한 플레베이 가문 출신 모두 포함될 수 있었으며, 공화정 후기 실질적인 지배층을 형성했다. |
기사 계급 (Equites) | 본래 기병으로 복무할 재산을 가진 계층이었으나, 점차 상업, 금융 등에 종사하는 유력한 경제 계층으로 성장했다. 원로원 계급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다. |
일반 시민 | 재산 정도에 따라 여러 하위 계급으로 분류되었으며, 군 복무와 투표권 행사 등에 차등이 있었다. |
프롤레타리아 (Proletarii) | 자녀 외에는 거의 재산이 없는 최하층 자유민. 초기에는 군 복무 자격도 없었다. |
리베르티 (Liberti) |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들. 일부 권리가 제한되었으나, 경제 활동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
세르비 (Servi) | 노예.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법적 권리가 없었다.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을 통해 공급되었다. |
공화정 시기 투표권은 재산에 따른 계급과 연동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투표 단위인 '켄투리아'에 등록되었는데, 부유한 계급의 켄투리아는 인원수가 적었지만 투표 영향력은 컸고, 가난한 계급은 투표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의 여성은 기본적인 권리는 일부 공유했지만 완전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아 투표권이나 정치 참여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의 법적 지위는 점차 향상되어 재산 소유권 등을 확보하기도 했다.[113]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온 동맹 도시 주민들에게는 라틴권이 주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완전한 시민권과 외국인 사이의 중간 단계였다.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제국 내 거의 모든 자유민 남성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83]
로마법은 고대 로마 문명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그 근원은 기원전 449년 제정된 십이표법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기 530년경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에서 집대성되었다. 로마법은 이후 비잔티움 제국으로 계승되었고, 유럽 대륙의 법체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 시민법 (Jus civile):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고유법.
- 만민법 (Jus gentium): 로마 시민과 외국인, 또는 외국인 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법. 국제법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 자연법 (Jus naturale):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 원리.
초기 공화정 시대 로마에는 공립학교가 없었다. 아이들은 주로 부모나 교육받은 노예(paedagogus)에게 읽기, 쓰기 등을 배웠다.[114] 교육의 주된 목표는 농업, 전쟁, 로마 전통, 공무 수행 능력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114] 귀족 소년들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정치와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 16세부터는 유력 정치인 밑에서 실무를 배우며 17세부터 군 복무를 시작했다.[113] 기원전 3세기 이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교육 방식이 변화했지만, 실용성을 중시하는 로마 고유의 특징은 유지되었다.[113] 이후 사립학교가 생겨나면서 교육 체계가 잡혔다.
단계 (나이) | 교육 기관 | 담당 교사 | 주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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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7세~11세) | 루두스 (ludus, 사립 초등학교) | 리테라토르(litterator) / 마기스터 루디(magister ludi) |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때로) 그리스어 기초[113][115] |
중등 (12세~) | 중등 학교 | 그라마티쿠스(grammaticus) | 그리스 및 라틴 문학[113][115] |
고등 (16세~) | 수사학 학교 | 레토르(rhetor) | 수사학, 로마법 등 (주로 법률가나 정치가 지망생 대상)[113][115] |
고대 로마의 윤리관은 현대와 다른 면이 많았다. 끊임없는 외부 위협 속에서 군사적 용맹함(virtus)이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고,[142] 현대 사회에서 미덕으로 여겨지는 연민은 오히려 약점으로 간주되기도 했다.[143][142][144] 로마인들은 대신 용기, 의무감, 절제(moderatio), 관용(clementia), 공정함(severitas), 충성심(pietas) 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145] 성(性) 규범은 엄격했으며, 특히 여성에게 일부일처제(''univira'')와 정숙함(''pudicitia'')이 강하게 요구되었다. 결혼 외 성관계는 일반적으로 금기시되었고 제정 시대에는 불법화되기도 했으나,[146] 매춘은 허용되고 관리되는 관행이었다.[147] 검투 경기와 같은 폭력적인 공개 행사는 오락의 일종이었지만, 사회 질서 유지와 권력 과시의 목적도 있었다.
고대 로마의 요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소박했으나, 제국이 확장되면서 그리스 문화와 정복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해졌다. 올리브, 배, 무화과 등 다양한 과일과 채소가 식탁에 올랐다.[163]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30종 이상의 올리브, 40종의 배, 다양한 색깔의 당근(주황색 제외[162]), 셀러리, 마늘, 양배추, 아스파라거스, 순무, 완두콩, 오이 등이 재배되었다. 돼지고기, 특히 소시지가 가장 인기 있는 육류였고,[165] 생선 소비량도 많았으며 양식업도 발달했다.[166] 현대 이탈리아 요리의 대표 재료인 토마토, 감자, 피망, 옥수수 등은 신대륙 발견 이후에 전래되어 로마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164] 식사는 전통적으로 아침(ientaculum), 점심(cena, 원래 하루 중 주된 식사), 저녁(vesperna)으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점심(prandium)은 가벼워지고 저녁(cena)이 주된 식사가 되었다.[167][168] 식사 시에는 남녀 모두 포도주를 마셨다.[161]
고대 로마의 의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했다. 공화정 시대를 상징하는 토가는 제정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일상복에서 멀어져 의례용 복장으로만 남게 되었다. 4세기경에는 폰초와 유사한 형태의 ''파에눌라''(paenula)가 계층을 막론하고 널리 입는 일상복이 되었다. 후기 제국 시기에는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아 튜닉과 바지, 필레우스 판노니쿠스 같은 모자를 착용하기도 했다. 군복의 일종인 ''팔루다멘툼''은 황제의 전유물이 되었고, 기독교 성직자들도 입었던 달마티카가 널리 퍼졌다.[169]
이처럼 로마인들은 일상생활, 사회 구조, 법, 교육, 윤리, 식생활, 의복 등 다방면에 걸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또한 언어, 종교, 예술, 음악, 오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유산을 남겼으며, 이는 후대 유럽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8. 1. 언어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파에 속한다. 문법상으로는 단어 배열이 비교적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를 통해 의미가 달라지는 특징을 가졌다.[295][136]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유래했다.[296][137]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부터 사용된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였다. 민중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와 문법, 어휘, 발음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297][138] 시간이 흐르면서 구어 라틴어는 변화하여, 7세기경에는 고전 라틴어나 '정통 라틴어'를 제2언어로 배워야 할 정도가 되었다.[139]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공용어이자 서면 언어였지만, 교양 있는 상류층은 그리스어도 구사했다. 이는 로마인들이 공부한 문학 작품 대부분이 그리스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황제들도 두 언어를 구사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래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라틴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그리스어가 라틴어보다 우세했으며, 후대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제1언어로 사용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통치한 이후, 그리스어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298]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는 각 지역에서 방언으로 분화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여러 로망스어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8. 2. 종교
초기 로마 종교는 신에 대한 기록된 이야기가 없으며[299],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 의례와 의식에 가까웠다.[300] 종교의 목적은 의식을 통해 신을 불러내어 원하는 것을 얻고 보답을 약속하는 일종의 거래였다.[301] 그리스 신화와 달리 로마의 신들은 명확한 인격이 없었으며,[302] 문, 경계, 꽃, 곡물 등에 깃든 정령(numen)이나[303] 모든 사람, 장소, 사물에 있는 신성한 영혼(genius)을 숭배했다.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 출신들이 맡는 엄격한 사제직 체계가 갖춰졌다.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기록을 보관하고 의식을 감독했으며, 최고 성직자인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은 국가 종교의 수장이었다.[304] 사제(flamen)는 여러 신의 의식을, 복점관(augur)은 점을 쳤다. 왕이 축출된 후에는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이 왕의 종교적 역할을 대신했다.[292]
그리스 문화를 접하면서 옛 로마 신들은 점차 그리스 신들과 동일시되었다.[305] 예를 들어, 유피테르는 제우스와, 마르스는 아레스와, 넵투누스는 포세이돈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이 과정에서 로마 신들은 동일시된 그리스 신의 신화와 속성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제정 시대에는 로마가 정복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 옆에 외국 신을 모시는 신전이 함께 있는 경우도 생겨났다.[306] 또한, 사망한 황제 중 업적이 뛰어난 인물은 후계자와 원로원에 의해 신격화되어[140] 황제 숭배가 점차 중요해졌다.
기독교는 초기 로마 제국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며, 1세기 네로 황제 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기원후 64년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리며 잔인한 박해가 이루어졌다.[307]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기독교 박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반전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94] 그는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적극 지원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과 유럽의 기독교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잠시 고대 로마 및 헬레니즘 종교를 복원하려 시도했으나, 이는 기독교 황제들의 계승을 잠시 중단시키는 데 그쳤다.
마침내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칙령을 통해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를 금지함으로써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국교로 선포했다.[308][141]
8. 3. 예술

로마의 회화는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은 주로 시골 별장(Villa rustica)의 벽과 천장을 장식하던 프레스코화이다. 라틴 문학에는 나무나 상아, 그 외 다른 재료에 그린 그림에 대한 언급도 남아 있다.[148][309][310] 폼페이 유적에서는 로마 시대 그림들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미술사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로마 회화의 역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 양식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전 1세기 초중반까지 유행했다. 이 시기 그림은 주로 대리석이나 석조물의 질감을 모방했으며, 때로는 신화 속 인물을 묘사하기도 했다. 두 번째 양식은 기원전 1세기 초에 시작되었는데, 건축물이나 풍경을 3차원으로 보이도록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세 번째 양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에 등장했으며, 이전 양식의 사실주의를 벗어나 단순한 장식을 선호했다. 단색 배경의 중앙에 작은 건축물, 풍경, 추상적인 디자인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네 번째 양식은 기원후 1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신화 속 장면을 그리면서도 건축적인 세부 묘사나 추상적인 패턴을 함께 사용했다.[309][310]
초상 조각 분야에서는 초기에 젊고 고전적인 비율을 사용했으나, 점차 사실주의와 이상주의가 혼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안토니누스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는 더욱 화려하고 세밀하게 조각된 머리카락과 수염 표현이 유행했다. 로마의 승리를 주로 묘사하는 부조 조각 역시 중요한 예술 형식으로 발전했다.
라틴 문학은 초기부터 그리스 작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 일부는 로마 초기의 군사적 승리를 다룬 역사 서사시이다. 로마 공화정이 확장됨에 따라 작가들은 시, 희극, 역사, 비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에서는 문학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작가들의 작품은 서점뿐만 아니라 공공 및 개인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은 지식을 증명하고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개인 도서관을 만들었다.[150] 개인 도서관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빌라 내 도서관의 이상적인 위치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다.[151] 개인 도서관 외에도 로마 제국은 초기 공공 도서관 설립을 주도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를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문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공공 도서관 설립을 계획했으나, 계획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다. 카이사르의 부관이었던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가 이 사업을 이어받아 자유의 아뜨리움에 로마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열었다.[152] 이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황제들도 로마에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거나 확장했다.[153][154][155] 대표적인 예로는 트라야누스 포룸의 울피아누스 도서관, 팔라티누스의 아폴로 신전 도서관, 로마 포럼의 평화의 신전 도서관, 디우스 아우구스투스 신전 도서관 등이 있다.[156] 일부 도서관은 기록 보관소 역할도 겸했다.[156] 서로마 제국 멸망 무렵 로마 시에는 24개가 넘는 공공 도서관이 있었다.[157] 공공 도서관은 로마뿐만 아니라 에페소스, 아테네, 팀가드 등 제국 내 다른 주요 도시와 문화 중심지에도 세워졌다.[158][159] 당시 공공 도서관들은 대부분 도서관 전용 건물이 아니라 신전, 목욕탕 등 다른 공공건물 내 공간을 활용했다.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는 연설 장소로도 사용되었다.[150] 이러한 낭독회는 사교 모임의 역할도 했으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시, 서사시, 철학 논문 등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로마 음악은 주로 그리스 음악에 기반을 두었으며, 로마인의 삶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49] 로마 군대에서는 투바(긴 트럼펫)나 코르누(뿔피리)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다양한 명령을 전달했고, 부치나(나팔 또는 뿔피리의 일종)와 리투우스(길고 J자 모양의 악기)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음악은 로마 원형극장에서 검투사 시합 중간이나 오데온(음악당)에서도 연주되었는데, 코르누와 히드라울리스(수력 오르간)가 이런 장소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종교 의식에서도 음악 공연이 포함되었으며, 일부 음악사학자들은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 음악이 동반되었을 것으로 본다.[149]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낙서, 유곽 유적, 그림과 조각 등은 로마인들이 성(性)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311]
8. 4. 음악
로마의 음악은 주로 그리스 음악에서 유래했으며, 로마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312][149]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노래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추수, 베짜기, 결혼식, 장례식, 사랑, 풍자 등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있었고, 부유한 가정에서는 저녁 식사 때 음악 연주가 곁들여지기도 했다.[313]로마 군대에서는 투바(tuba, 긴 트럼펫)나 코르누(cornu, 프렌치 호른과 유사)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다양한 명령을 전달했으며,[315] 부키나(bucina, 호른이나 트럼펫으로 추정)와 리투스(lituus, 길고 J자 모양의 악기로 추정)[314]는 의전 행사에 사용되었다.[315] 투바, 코르누, 그리고 물 오르간은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경기 중간이나 오데온(극장)에서 연주되어 행사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특히 극장에서는 물 오르간과 함께 티비아이(tibiae, 로마식 아울로스에 해당하는 더블 파이프)도 사용되었다.[316][317] 로마에서 인기 있었던 무언극(판토마임) 공연에도 합창, 기악, 무용이 정기적으로 함께했다.[316]
대부분의 종교 의식, 예를 들어 제사나 축제에서도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희생 제의에서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감추기 위해 티비아이를 연주했고, 주신(酒神) 바쿠스를 기리는 제의에서는 심벌즈와 탬버린이 사용되었으며, 여러 의식에서 방울 소리나 성가 합창이 포함되었다.[316][318]
고대 로마의 저술가들은 당대의 유명한 연주가, 대규모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성대한 음악 축제 및 경연 대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320] 직업 음악가들은 협회를 조직하여 공적인 행사나 사적인 연회에 연주자를 파견했으며, 인기 있는 연주자에게는 상당한 액수의 연주료가 지급되기도 했다.[316] 여러 황제들이 음악을 후원하고 장려했으며, 네로 황제는 스스로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고자 직접 경연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320] 일부 음악사가들은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 행사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319][149] 음악은 오락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키케로나 퀸틸리아누스와 같은 저술가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음악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320] 그러나 기원후 3~4세기경 제국의 경제적 쇠퇴와 함께 대규모 음악 활동은 점차 중단되었다.[320]
현재 고대 로마 음악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321] 다양한 그림 자료, 일부 악기 유물, 수천 건의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만, 로마 시대의 라틴어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다.[321] 이 때문에 음악사가들은 로마 음악가들이 음악 연주나 이론 발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중요한 기여를 했는지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본다.[312]
8. 5. 오락 활동
로마의 젊은이들은 점프, 레슬링, 권투, 달리기 등 다양한 신체 활동을 즐겼으며, 이는 군 복무를 위한 준비의 성격도 있었다.[322] 시골 지역의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323][170] 로마인들은 핸드볼과 유사한 여러 형태의 구기 종목도 즐겼으며,[322]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 역시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322]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유층은 저녁 만찬에서 음악, 춤, 시 낭송 등을 즐겼고,[324] 평민들은 클럽이나 협회를 통해 비슷한 모임을 갖거나 선술집에서 어울리며 여가를 보냈다.[324]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개구리 뛰기(목마 넘기)와 같은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323][324][170]

공공 오락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 중 하나는 검투사 시합이었다. 검투사들은 다양한 무기와 갑옷을 착용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죽거나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검투의 인기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최고조에 달했으며, 종종 황제의 신호로 승패나 생사가 결정되었다. 영화 등에서 흔히 묘사되는 것과 달리, 패배한 검투사를 죽이라는 신호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325] 로마의 콜로세움은 기원후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건설을 시작하여 80년에 개장했으며, 검투 시합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주요 장소였다.
이국적인 동물을 이용한 구경거리(베나티오, venatio)도 인기가 높았다. 외국에서 들여온 동물을 대중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venator)와 싸움을 붙였다. 때로는 무장하거나 비무장 상태의 죄수 또는 검투사를 경기장에 두고 맹수를 풀어 싸우게 하는 잔인한 형태의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 역시 로마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장소였다. 주로 전차 경주나 경마가 열렸으며, 때로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 모의 해전을 벌이기도 했다.[326] 이곳은 약 15만 명[172]에서 최대 38만 5천 명[326]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시설이었다. 경기장 중앙 분리대에는 각각 일곱 개의 큰 달걀과 돌고래 모양 조각상이 설치되어, 전차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하나씩 제거하며 남은 바퀴 수를 표시했다.[327] 대경기장은 단순한 경기 장소를 넘어 시장이 서고 도박이 벌어지는 복합적인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황제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도 경기를 관람했으며, 이들의 불참은 무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고위층과 기사 계급은 예약된 상단 좌석에 앉았다. 전차 경주는 색깔로 구분된 팀들 간의 경쟁이었으며, 일부 팬들은 특정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서커스 파벌을 형성하기도 했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경 세워져 천 년 이상 사용되다가, 기원후 549년 마지막 경마 경기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이러한 공공 게임과 구경거리는 로마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 본토에서는 황제가, 속주에서는 총독 등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9. 기술
고대 로마는 인상적인 기술적 업적을 자랑했으며, 이는 중세 시대에 잊혔다가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필적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이중창은 1930년대까지 재발명되지 않았다. 많은 실용적인 로마의 혁신은 초기 그리스 디자인에서 채택되었으며, 기술 발전은 종종 분리되어 장인의 기술에 기반했고 장인들은 기술을 영업 비밀로 간직하는 경향이 있었다.[173]
로마 토목 공학과 군사 공학은 로마의 기술적 우위와 유산의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수백 개의 도로, 다리, 수도교, 공중 목욕탕, 극장 및 경기장 건설에 기여했다. 콜로세움, 퐁 뒤 가르, 판테온과 같은 많은 기념물은 로마의 공학과 문화에 대한 증거로 남아 있다.
로마는 "고전 건축"으로 그리스 전통과 함께 분류되는 건축으로 유명했다. 그리스 건축과 많은 차이점이 있었지만, 로마는 엄격하고 공식적인 건축 디자인과 비율을 고수하는 데 있어 그리스에서 많이 차용했다. 두 가지 새로운 양식의 기둥, 합성 양식과 토스카나 양식과 에트루리아의 아치에서 유래한 돔[328]을 제외하고, 로마는 공화정 말기까지 비교적 적은 건축 혁신을 이루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인들은 콘크리트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발명되었다. 그것은 포졸라나에서 유래한 강력한 시멘트였으며, 곧 대리석을 주요 로마 건축 자재로 대체하여 많은 대담한 건축 형태를 가능하게 했다.[174] 또한 기원전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는 ''건축론''을 저술했는데,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건축 논문일 것이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로마는 시리아(혹은 이집트)에서 기원전 50년경 발명된 직후 취관(glassblowing)을 사용하기 시작했다.[329] 모자이크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리스 원정 중에 표본이 발견된 후 제국을 휩쓸었다.
로마인들의 건축, 조선, 연료 사용 등으로 인한 목재 수요는 로마 주변과 아페닌 산맥 대부분의 삼림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장거리 목재 무역의 최초 증거는 서기 40년에서 60년 사이에 벌채된 목재 판자의 발견에서 비롯되었는데, 프랑스 북동부의 쥐라 산맥에서 나온 목재 판자는 약 1697.85km 이상 떨어진 로마 중부의 부유한 귀족의 빌라의 넓은 현관 기초에서 발견되었다. 길이가 약 4m인 목재는 티베르 강을 통해 현재 프랑스의 리옹 시에 있는 소느 강과 론 강의 합류 지점에서 지중해를 가로질러 항해하는 배를 통해 로마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5]
견고한 기초와 우수한 배수 시설[176]을 갖춘 로마 도로는 내구성으로 유명했으며, 로마 도로 체계의 많은 구간은 서로마 제국 멸망 후 1000년이 지나도록 계속 사용되었다. 제국 전역에 걸쳐 광대하고 효율적인 여행 네트워크를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권력과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 덕분에 로마군은 계절에 상관없이 제국의 주요 거점 사이를 예측 가능한 시간 내에 신속하게 이동 및 배치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속도로는 또한 엄청난 경제적 중요성을 지녔으며, 로마가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했다. 바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의 기원이다. 로마 정부는 ''쿠르수스 푸블리쿠스''로 알려진 역참 시스템을 유지 관리했으며, 하루에 최대 80km까지 여행할 수 있는 말 중계 시스템(파발)을 구축했다.
로마인들은 도시와 산업 시설에 물을 공급하고 농업을 돕기 위해 수많은 수도교를 건설했다. 3세기까지 로마 시는 총 길이 450km에 달하는 11개의 수도교에 의해 물을 공급받았다.[332] 수도관은 대부분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으며, 아치 수도교는 매우 적었다. 때로는 50m 높이 차가 있는 수도관이 연결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이펀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또한 로마인들은 위생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로마인들은 위생 및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된 ''테르메''라고 불리는 공공 목욕탕으로 특히 유명했다. 많은 로마 주택에는 수세식 변기와 상수도가 있었고, ''클로아카 막시마''라는 복잡한 하수도 시스템은 지역 늪을 배수하고 티베리스강으로 폐기물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하수도와 배관 시스템의 납 파이프로 인해 널리 퍼진 납 중독이 출산율 저하와 사회 쇠퇴를 유발하여 로마의 멸망에 기여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관의 물이 계속 흘러나갔고 수도꼭지 사용이 적었기 때문에 실제 납 함유량은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177][178][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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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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