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승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승사는 당나라 황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측천무후의 조카였다. 그는 측천무후 집권 시기에 재상으로 임명되었으며, 무씨 가문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황태자 책봉을 시도했으나 적인걸 등의 반대로 실패했고, 결국 698년에 병사했다. 이후 그의 아들 무연기, 영태공주 등이 처형되었으며, 드라마 《대조영》 등에서 무승사의 역할을 다루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승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우 청쓰 | 
| 작위 | 위왕, 주공 | 
| 출생일 | 649년 | 
| 사망일 | 698년 7월 22일 | 
| 아버지 | 무원상(武元爽) | 
| 본관 | 무씨(武氏) | 
| 휘 | 청쓰(承嗣) | 
| 자 | 봉선(奉先) | 
| 자녀 | 무연기, 위왕 무연의, 위왕 무연수, 회양왕 | 
| 관직 | |
| 문창 좌상 | 상서복야(文昌左相) | 
| 재임 기간 | 690년–692년 | 
| 동봉각난대삼품 | 동중서문하삼품(同鳳閣鸞臺三品) | 
| 재임 기간1 | 685년, 690년–692년, 697년 | 
2. 가계
무승사의 가계는 당나라 황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무원상 | |
| 어머니 | 미상 | 
683년 고종이 사망하자 이철이 즉위했으나, 황태후가 된 측천무후가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684년 중종이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자 측천무후는 그를 폐위하고 이단을 황제로 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이때 무승사는 측천무후의 측근이 되어, 그해 말 예부상서 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으나, 3개월 후 해임되었다.[1]
무승사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무원상은 무측천의 이복 형제였다. 무사확은 무원상과 무원경 형제의 아버지이자, 무측천의 아버지였다. 무원상과 무원경은 무사확의 첫 번째 부인 상리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무측천과 그녀의 두 여동생은 무사확의 두 번째 부인 양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무측천이 655년 고종의 황후가 된 후, 무원상과 무원경, 그리고 무사확의 조카인 무유량과 무회운은 이전에 양 부인을 자주 무시했었다. 그럼에도 고종은 종종 무측천의 형제와 사촌들을 승진시켰고, 무원상은 궁궐 물품을 담당하는 관청인 소부소감으로 승진했다.[1] 그러나 666년 이전에, 무측천은 자신의 형제와 사촌들이 승진에 감사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들을 모두 좌천시켰고, 무원상은 호주(濠州, 대략 현재의 추저우, 안후이성)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결국, 추가적인 고발 이후, 무원상은 진주(振州, 대략 현재의 싼야, 하이난성)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 무원상이 유배되었을 때, 오승사는 아버지와 함께 진주로 갔다.[1]
674년, 무측천은 오승사를 유배에서 불러와 고종이 무사확에게 추증한 주공(Duke of Zhou)의 작위를 상속하게 했다. 그는 또한 황실 종친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3. 생애
무승사는 무씨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5대에 걸친 조상들을 왕이나 공작으로 추증하고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했다. 또한, 사촌 무삼사와 함께 이원가, 이령괴 등 황족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685년, 무승사는 다시 재상(동봉각란대삼품)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 만에 해임되었다. 686년에는 이효일을 모함하여 좌천시켰고, 687년에는 그를 유배 보내 죽게 만들었다.[1]
688년, 무승사는 낙수(洛水)에 "성모가 세상에 임하시니, 황제의 권위는 영원히 빛나리라"는 글귀를 새긴 돌을 던져 측천무후의 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 사건으로 이씨 황족들은 측천무후가 자신들을 숙청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측천무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흥을 시켜 이원가, 이령괴 등 많은 황족들을 숙청했다.[1]
689년, 무승사는 내언(納言)에 임명되었다. 690년에는 문창좌상(文昌左相)에 임명되었으며, 주흥을 시켜 이상금, 이사개 등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말, 예종이 측천무후에게 양위하자 측천무후는 황제에 즉위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무승사를 위왕(魏王)으로 봉했다.[1]
무승사는 황태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장가부는 평민 왕경지(王慶之)에게 청원자들을 조직하게 하여 무승사를 황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무씨 가문의 황제가 있는데 이씨 가문의 황태자를 두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었다.[2] 그러나 재상 참장건과 극부원은 반대했고, 곧 래준신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이지조는 측천무후에게 이단이 그녀의 아들이며 조카보다 더 가깝다고 지적했다. 또한 고종 황제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무승사가 황제가 된다면 고종에 대한 숭배가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2] 측천무후는 그의 말에 동의했고, 한동안 무승사를 황태자로 삼는 것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2]
692년, 래준신은 임지구, 적인걸 등 여러 대신을 모함했으나, 적인걸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무렵, 이지조는 측천무후에게 무승사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경고했고, 측천무후는 무승사를 재상직에서 해임했다.[2]
697년 무승사는 관료 조지지의 후궁 비옥(碧玉)을 빼앗았고, 비옥은 자결했다. 무승사는 조지지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2]
698년 무렵, 무승사와 무삼사는 다시 황태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적인걸 등의 반대로 이철이 황태자로 복귀했다. 무승사는 황태자가 될 기회를 잃고 실의에 빠져 죽었다.[2]
3. 1. 측천무후 집권 이전
무승사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 무원상은 무측천의 이복 형제였다. 무원상과 그의 형제 무원경은 무사확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무측천은 무사확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655년 당 고종의 황후가 된 무측천은, 이전의 좋지 않은 가족 관계에도 불구하고—무원경과 무원상, 그리고 무사확의 조카인 무유량과 무회운은 이전에 무측천의 어머니 양 부인을 자주 무시했다—고종은 종종 무측천의 형제와 사촌들을 승진시켰고, 무원상은 궁궐 물품을 담당하는 관청인 소부소감으로 승진했다.[1] 그러나 666년 이전에, 무측천은 자신의 형제와 사촌들이 승진에 감사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들을 모두 좌천시켰고, 무원상은 안후이성 추저우에 해당하는 호주(濠州)의 태수로 좌천되었다.[1] 결국, 추가적인 고발 이후, 무원상은 하이난성 싼야에 해당하는 진주(振州)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1] 무원상이 유배되었을 때, 무승사는 아버지와 함께 진주로 갔다.[1]
674년, 무측천은 무승사를 유배에서 불러와 고종이 무사확에게 추증한 주공(Duke of Zhou)의 작위를 상속하게 했다.[1] 그는 또한 황실 종친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3. 2. 측천무후 집권 시기
683년 고종이 사망한 후, 이철이 황제에 올랐으나 황태후가 된 측천무후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684년 중종이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자 무후는 그를 폐위하고 이단을 황제로 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무후에게 있었다. 이때 무승사는 측천무후의 측근이 되어, 그해 말 예부상서 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으나, 3개월 후 해임되었다.[1]
무승사는 무씨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5대에 걸친 무씨 조상들을 왕이나 공작으로 추증하고 사당을 세우도록 요청했다. 또한, 사촌 무삼사와 함께 이원가, 이령괴 등 황족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685년, 무승사는 다시 재상(동봉각란대삼품)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 만에 해임되었다. 686년에는 이효일을 모함하여 좌천시켰고, 687년에는 그를 유배 보내 죽게 만들었다.[1]
688년, 무승사는 낙수(洛水)에 "성모가 세상에 임하시니, 황제의 권위는 영원히 빛나리라"는 글귀를 새긴 돌을 던져 측천무후의 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씨 황족들은 측천무후가 자신들을 숙청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무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흥을 시켜 이원가, 이령괴 등 많은 황족들을 숙청했다.[1]
689년, 무승사는 내언(納言)에 임명되었다. 690년에는 문창좌상(文昌左相)에 임명되었으며, 주흥을 시켜 이상금, 이사개 등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말, 예종이 무후에게 양위하자 측천무후는 황제에 즉위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무승사를 위왕(魏王)으로 봉했다.[1]
3. 3. 황태자 책봉 시도와 좌절
장가부는 평민 왕경지(王慶之)에게 청원자들을 조직하게 하여 무승사를 황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 이유는 무씨 가문의 황제가 있는데 이씨 가문의 황태자를 두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이었다.[2] 그러나 재상 참장건과 극부원은 이 움직임에 반대하여 청원자들을 꾸짖고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의 주장은 측천무후를 분노하게 했다. 참장건과 극부원은 곧 비밀 경찰 관료 래준신에게 체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다른 재상 구양통은 처형되었다.[2] 한동안 측천무후가 무승사를 황태자로 삼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종종 왕경지를 만나 무승사의 황태자 지위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들었기 때문이다.[2] 그러나 나중에 왕경지가 측천무후를 불쾌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무승사에 반대하는 재상 이지조는 기회를 틈타 왕경지를 때려죽이고 청원자들을 해산시켰다.[2] 그리고 그는 측천무후에게 이단이 그녀의 아들이며 조카보다 그녀에게 더 가깝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인 고종 황제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으며, 만약 무승사가 황제가 된다면 고종에 대한 숭배가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2] 측천무후는 그의 말에 동의했고, 한동안 무승사를 황태자로 삼는 것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2]
692년, 래준신은 임지구, 적인걸, 배행본과 다른 관리 최선례(崔宣禮), 노헌(盧獻), 위원충, 이사진(李嗣真)을 반역죄로 거짓 고발했다. 이 관료들은 고문을 피하기 위해 반역을 자백했지만, 적인걸이 비밀 청원을 써서 이불 속에 숨겨 가족에게 밀반출하도록 하여 죽음을 면했다. 그들은 측천무후에게 청원을 전달했고, 측천무후는 그들을 죽음에서 살려주고 유배 보냈다. 이는 래준신과 무승사가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2]
이 무렵, 이지조는 측천무후에게 무승사의 권력이 너무 커져 곧 그녀의 권력과 맞먹을 것이라고 몰래 제안했다. 측천무후는 이에 동의했고, 무승사에게 매우 명예로운 칭호인 특진(特進)을 내렸지만, 재상직에서 해임했다.[2] 무승사는 이후 이지조를 죄로 고발하려 했으나, 측천무후는 그를 믿지 않았다.[2]
698년 무렵, 무승사와 무삼사는 다시 황태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종종 사람들을 시켜 측천무후에게 "옛날부터 다른 가문의 사람을 황태자로 삼은 황제는 없었다"라고 말하게 했다.[2] 그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이때 복귀하여 다시 재상이 된 적인걸은 측천무후의 아들들을 끊임없이 옹호했으며, 망명 중이던 이전 중종이었던 이철을 소환할 것을 조언했다. 다른 재상 왕방경과 왕기산, 그리고 측천무후의 측근 길서와 그녀의 연인 장의지와 장창종도 같은 의견을 내면서, 이철은 망명에서 소환되었다. 무승사는 황태자가 될 기회를 잃어가자, 그해 말 실의에 빠져 죽었다.[2]
4. 사망 이후
무승사의 장남 무연기는 중종의 딸인 영태공주와 결혼하였다. 701년, 무연기는 장씨 일가에 대해 사적으로 논의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중종의 장남이자 그의 매형인 이충윤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태공주가 이때 함께 처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녀 역시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차남 무연의는 위왕 작위를 계승했고, 막내 아들 무연수는 회양왕으로 봉해졌다.[1]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 
문서
 
Lüzhu was the name of a beautiful concubine of the [[Jin dynasty (266–420)]] official [[Shi Chong]], who offended the powerful official [[Sun Xiu (Jin dynasty)|Sun Xiu]] (a close associate of [[Sima Lun]]) by refusing to give Lüzhu to Sun. Subsequently, when Sun was set to arrest and execute Shi on false accusation of treason, Lüzhu committed suicid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