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다나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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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다나오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벌어진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이다. 1945년 2월, 레이테 전투와 루손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민다나오 섬에 고립되었고, 연합군은 섬의 험준한 지형과 일본군의 방어 체계 강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연합군은 삼보앙가, 이라나 만, 다바오 등지에서 상륙 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격파했고, 일본군은 지휘 체계의 혼란과 보급 부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민다나오 전투는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큰 의미가 없었고, 섬에 고립된 일본군 잔존 병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전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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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나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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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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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명 | 민다나오 전투 |
전역 |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
분쟁 | 태평양 전쟁 |
날짜 | 1945년 3월 10일 ~ 8월 15일 |
장소 | 필리핀 민다나오섬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관련 전투 | 필리핀 (1944-1945) 루손 민도로 링가옌만 바구이오 베상 통로 키랑 통로 바크실 능선 카바나투안 바탄 마닐라 코레히도르 습격 팔라완 비사야스 레이테섬 비사야 제도 시마라 네그로스 세부시 민다나오 술루 제도 부키드논 코타바토-마구인다나오 다바오 히71함단 신요마루 사건 포르모사 레이테만 오르모크만 남중국해 1945년 7월 24일 |
교전 세력 | |
연합군 | 미국 필리핀 자치령 |
일본군 | 일본 제국 필리핀 제2공화국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로버트 L. 아이켈베르거 프랭클린 C. 시버트 앨버트 G. 노블 로스코 B. 우드럽 클래런스 A. 마틴 바실리오 J. 발데스 웬델 W. 페르티그 살리파다 K. 펜다툰 페데리코 G. 우부자 파일리노 산토스 |
일본군 지휘관 | 모로즈미 교사쿠 하라다 지로 도이 나오지 스즈키 소사쿠 료카쿠 교사쿠 북조 후지키치 |
병력 규모 | |
연합군 | 60,000명 (미군) + 32,000명 (게릴라) |
일본군 | 65,000명 (12,000명의 민간인 포함) |
피해 규모 | |
연합군 | 삼보앙가 반도: 전사 221명, 부상 665명 동부 민다나오: 전사 820명, 부상 2,880명 |
일본군 | 삼보앙가 반도: 전사 6,400명, 포로 1,100명 동부 민다나오: 전사 12,865명, 포로 600명, 실종 8,235명 |
참여 부대 | |
연합군 | 제6군 제10군단 제24보병사단 제8군 제11군단 제31보병사단 |
일본군 (지상군) | 제35군 제30사단 제100사단 제54혼성여단 |
일본군 (해군) | 제32해군기지대 |
2. 배경
1945년 2월, 레이테 전투는 사실상 끝나고, 루손 전투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필리핀 주둔 일본군은 전력 대부분을 잃었고, 연합군은 필리핀 일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민다나오섬을 비롯한 세부섬, 네그로스섬 등 필리핀 중남부 섬들에는 여전히 고립된 일본군이 남아 있었다.
민다나오 작전이 연합군에게 가장 큰 난관으로 다가온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섬의 혹독한 지형, 둘째, 일본군의 강화된 방어 체계, 셋째, 필리핀에 남아있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의 전력과 상태였다.
필리핀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민다나오는 길고 불규칙한 해안선을 가졌으며, 험준하고 산악 지형이었다. 열대 우림과 수많은 악어 서식 강이 지형을 덮고 있었고, 나머지는 호수, 늪 또는 초원이었다. 이러한 초원 지대와 마닐라삼 섬유의 원천인 울창한 마닐라삼 숲은 시야를 제한하고 군인의 체력을 소모시키는 최악의 장애물이었다.
민다나오의 몇 안 되는 도로는 이동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고속도로 1번'은 섬의 남쪽 부분을 가로질러 서쪽의 일라나 만 근처 파랑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디고스를 거쳐 다바오 만으로 이어지고, 북쪽의 다바오까지 뻗어 있었다. 다른 주요 남북 도로인 '세이어 고속도로'는 일라나 만과 다바오 만 중간 지점인 카바칸에서 시작하여 부키드논주 산과 북쪽 해안의 마카잘라르 만 (미사미스 오리엔탈 주)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일본군의 가장 강력한 방어는 상륙 작전에 대비하여 광범위하게 지뢰가 매설된 다바오 만 지역과 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인 다바오 주변에 집중되었다. 해안선 방어에는 포병과 대공포대가 광범위하게 배치되었다. 미국군이 결국 다바오 만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결국 도시에서 몰려날 것을 예상한 일본군은 가능한 한 작전을 연장하려는 의도로, 도시 외곽 뒤쪽 내륙에 퇴각하여 재집결할 수 있는 방어 벙커도 준비했다.
2. 1. 연합군의 전략
필리핀 전역의 군사적 해방을 강력히 희망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의 지시에 따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부대는 민다나오 섬 소탕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일련의 "빅터 작전"이 입안되었는데, 그 중 4호와 5호가 민다나오 섬에 관한 작전이었다. 맥아더 대장은 군공을 쌓아 일본 본토 침공 작전에서 사령관 지위를 획득하고 싶어했다고 한다.[21] 이 작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일본 간의 자원 항로를 차단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의 침공 거점을 확보한다는 군사적 의의도 있었다.2. 2. 일본군의 전략
1945년 당시 일본 육군은 민다나오섬을 레이테섬과 함께 제35군(사령관: 스즈키 소사쿠 중장)의 담당 구역으로 설정하고, '영구 항전' 태세를 갖출 중요 거점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제30사단(사단장: 스즈키 소사쿠 중장), 제100사단(사단장: 하라다 지로 중장), 독립혼성 제54여단(여단장: 기타후지 요시 소장) 등 루손 섬을 제외한 필리핀 내 최대 병력을 민다나오 섬에 배치했다.[6]그러나 레이테 전투 등으로 인해 제30사단은 예하 3개 보병연대 중 2개를 잃어 전력이 절반으로 줄었고, 나머지 부대들도 치안 유지 임무를 맡았던 경무장 부대여서 전력이 약했다. 또한, 섬 내부에서는 필리핀 게릴라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일본군의 연락과 작전 수행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6]
일본군은 삼보앙가에 독립혼성 제54여단, 다바오에 제100사단을 배치하고, 제30사단은 북쪽의 카가얀데오로에서 중부 일대에 분산 배치했다. 이 외에도 제32특별근거지대와 육군 제2비행사단이 있었지만, 함정과 항공기는 대부분 손실된 상태였다. 제32특별근거지대 예하의 제33 경비대가 삼보앙가를 방어했고, 공병대 등을 개편한 해병대 4개 대대가 다바오 부근에 배치되어 지상전에 대비했다.[6]
하지만 민다나오 섬 방어를 위한 통일된 지휘 체계는 확립되지 못했다. 원래 제35군 사령부가 총괄해야 했지만, 레이테섬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3월 24일에야 세부에 도착했고, 4월 19일에는 군사령관 스즈키 소사쿠 중장이 전사하는 등 지휘 체계에 큰 공백이 생겼다. 군 참모장인 토모치카 미하루 소장만이 민다나오섬에 합류하여 섬 장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육군 항공 부대는 지상의 제35군과는 별개로 항공 부대만을 지휘했다. 네그로스섬 북부에서 온 제2비행사단장 테라다 즈미이치 중장의 지휘 하에 민다나오 섬에는 약 8,000명의 인원과 전투기 1대가 있었으나, 5월 14일에 제2비행사단 사령부가 해체될 때까지 이러한 복잡한 지휘 체계가 유지되었다.
결국 제30사단 사령부와 제100사단 사령부가 각 담당 지역 내의 항공대와 해군 부대를 함께 지휘하게 되었지만, 섬 전체에 통일적인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민다나오 섬에 거주하던 5000명 이상의 일본인 민간인 보호에도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7]
2. 3. 일본군 지휘 체계 문제
민다나오섬 방어를 담당하는 일본군 부대 간 지휘 계통 문제는 작전 수행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1] 제35군 사령부는 레이테섬에서 이동하지 못했고, 육군 항공 부대는 별도로 움직였다.[1]원래 제35군 사령부가 민다나오섬 전체를 총괄해야 했지만, 사령부가 레이테섬에서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 미군 상륙 후인 3월 24일에야 세부에 도착했고, 카누를 이용해 네그로스섬을 거쳐 민다나오해 횡단을 시도했지만, 연합군의 공격으로 4월 19일 스즈키 소사쿠 군사령관이 전사했다.[1] 토모치카 미하루 군 참모장만이 민다나오섬에 합류하여 섬 장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
육군 항공 부대는 지상군과 별개로 테라다 세이이치 제2비행사단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1] 제2비행사단은 민다나오섬에 약 8,000명의 병력과 전투기 1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5월 14일 사령부가 97식 중폭격기로 수용되고 17일에 사단이 해산될 때까지 복잡한 지휘 계통이 유지되었다.[1]
결국 제30사단과 제100사단 사령부가 각 담당 지역 내 항공대와 해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섬 전체의 통일된 작전은 불가능했다.[1] 이는 일본계 민간인 보호에도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3. 전투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민다나오섬에서 벌어진 민다나오 전투는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 '''삼보앙가 상륙''': 미군은 삼보앙가를 공격해 일본군을 몰아냈다. 일본군 제54독립혼성여단은 큰 피해를 보았고, 여단장은 자결했다.[12]
- '''이라나 만 상륙''': 미군은 다바오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라나 만에 상륙, 다바오 배후를 공격하는 전략을 폈다. 민다나오 강을 보급로로 활용, 일본군 제30, 제100사단을 분단시켰다.
- '''북부 전투''': 이라나 만에 상륙한 미군 제31보병사단은 북상하여 섬 중앙부로 진격했다. 일본군 제30사단은 저항했으나, 남북 협공에 큰 피해를 입고 아구산 강 유역으로 후퇴했다.
각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3. 1. 삼보앙가 상륙
1945년 3월, 미국군 사령부는 필리핀 게릴라가 민다나오섬 북서 해안의 디폴로그에 가설 비행장(현재의 디폴로그 공항)을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군은 즉시 제24보병사단 제21보병연대의 2개 증강 중대를 보내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 해병대 항공 부대를 배치했다.[9]3월 7일, 미 함대가 삼보앙가에 함포 사격을 시작했다. 3일간의 폭격으로 시가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3월 10일, 항공 지원을 받은 미 육군 제41사단 소속 제162, 제163보병연대가 삼보앙가 부근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해안 배치를 피했기 때문에 저항은 산발적이었고, 미군은 다음 날 밤까지 도시와 공항을 포함한 평야를 점령했다.[10]
그러나 미군이 평야 뒤쪽 구릉지에 진입하자, 일본군 독립혼성 제54여단 주력과 해군 제33경비대 등이 격렬하게 저항했다.[11] 일본군은 3월 14일에는 포탄이 소진되는 등 물자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2주 가까이 미군의 전진을 막았다. 복잡한 지형 때문에 전차를 사용할 수 없어 미군은 고전했지만, 3월 23일에 방어선 중앙을 돌파하고 3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팔라완 섬 공략을 마친 제186보병연대가 도착하여 제163보병연대를 대신해 공격에 참가했다. 4월 1일에 일본군이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삼보앙가 주변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독립혼성 제54여단은 638명이 전사했고, 다른 부대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도 220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삼보앙가에 도착 즉시 공병대를 투입하여 여러 비행장을 정비했다. 이 비행장이 이후 민다나오 전투에서 항공 지원에 큰 역할을 했다.
일본군 독립혼성 제54여단은 패주 중이던 5월 말, 유력한 미군 부대에 포위되어 여단장 호조 소장은 부대 해산을 명령하고 자결했다. 독립혼성 제54여단의 생존자는 10월 항복 시점에서 총 5,200명 중 1,200명이었다.[12]
한편, 민다나오섬에 포함된 술루 제도도 제41사단의 일부에 의해 점령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술루 제도 전투 참조)
3. 2. 이라나 만 상륙
3월 11일, 삼보앙가에 도착한 다음 날, 미군 제8군은 민다나오섬 잔존 병력 진압 임무를 받았다. 주요 목표는 다바오 공략이었지만, 다바오에는 강력한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다바오에서 약 100km 떨어진 이라나 만 코타바토 부근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육로로 침공하여 다바오의 배후를 치는 계획이었다.4월 17일, 제78.2 임무부대의 엄호를 받은 미국 육군 제10군단의 제24보병 사단이 상륙했다. 이라나 만에는 일본군 제100사단의 독립 보병 제166대대 (제30사단에 배속 중) 밖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정면 대결은 불가능했다. 이라나 만 말라방에는 비행장이 정비되어 22일에는 해병대 기체 항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24보병 사단은 도로 외 민다나오 강을 타고 동진하면서, 교통의 요충지 카바칸을 장악하고, 일본군 제30사단과 제100사단을 분단했다.
미군의 예상대로, 다바오를 지키는 일본군은 해상 상륙에 대비한 방어 체제는 견고했지만, 육로에서의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군의 상륙 정보를 받은 제100사단장 하라다 중장은 반신반의했지만, 20일 코타바토에서 진격로에 있는 다바오 만 남부 디고스의 수비대에 뒤늦은 전투를 지시했다. 이어 26일 다바오의 육해군 부대에 방위 배치를 발령하고 민간인은 섬의 중앙부로 피신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다바오 시 외곽에 배치된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점차 일본군은 북서쪽 산지로 압박당했다. 5월 29일, 일본군 제100사단 사령부는 다바오 강 상류로 철수했고, 6월 19일에는 전면 후퇴를 시작했다. 추격이 약해진 7월 상순부터 자활 태세에 들어갔고,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그 외 다바오 만에 남겨진 여러 일본군 소부대에 대해서도 항공기와 어뢰정의 엄호 하에 주정 기동에 의한 소탕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400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하고 25명이 포로가 되었다.[16] 미군의 피해는 사망자 27명이었다.
3. 2. 1. 다바오 전투
1945년 4월 27일, 미군 제24 보병 사단이 다바오 만 디고스에 도착했다. 디고스에는 일본군 독립 보병 제163대대와 해병대 1개 대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군 제100사단장 하라다 중장이 의도한 전투는 치르지 못하고 아포산에 고립되었다. 다바오 만을 북상한 미군은 4월 30일 다바오를 방어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고, 5월 3일에 다바오 시내로 진입했다.[2]이후 다바오 시 교외에 배치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다바오를 방어하는 일본군은 육군 18,000명, 해군 5,400명으로 병력은 많았지만, 제대로 된 전투 부대는 제100사단뿐이었다. 일본군은 점차 북서쪽 산지로 밀려났다. 5월 29일, 일본군 제100사단 사령부는 다바오 강 상류로 철수했고, 6월 19일 전면 후퇴를 시작했다. 추격이 약해진 7월 상순부터 자활 태세에 들어갔고,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다바오 지역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육군 12,000명, 해군 3,400명이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4,600명에 달했다. 미군 제24보병 사단의 피해는 6월 주요 전투 종료 시점에서 전사 350명, 전상 1,600명이었으며, 이후 소탕전에서 제19보병 연대장 토마스 클리포드 대령이 전사했다.[3][4]

제24사단 연대기 작가는 다바오 시 외곽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제24보병대 병사들은 다바오 이후의 작전을 10개의 섬 캠페인 중 가장 힘들고, 격렬하며, 가장 소모적인 전투로 여겼다. 일본군의 끈질긴 방어 외에도, 전투의 또 다른 고통스러운 측면은 마닐라 삼(아바카) 밭의 확산이었다. 다바오 지방에서 싸우는 보병들에게 아바카라는 단어는 지옥과 동의어였다...
전투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미군은 진전을 보였다. 다바오 시에서 서쪽으로 약 약 8.05km 떨어진 리비 비행장과 민탈 마을에서 제21보병 연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2] 5월 17일, 제24사단은 공세를 재개했고, 제19보병 연대가[2] 페르티그의 게릴라 지원을 받아 5월 29일 타쿠난, 울라, 마티나 비아오, 마그투드, 만두그 마을을 점령하며 일본군의 동쪽 측면을 돌파했다. 일본 제100사단은 붕괴되어 후퇴했다.
3. 3. 북부 전투
미국 제8군의 로버트 L. 아이첼버거 중장은 1945년 3월 10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민다나오의 잔여 지역을 정리하라는 작전명 빅터 5호(VICTOR V)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은 4개월로 예상되었으나, 아이첼버거는 이에 우려를 표했다. 그의 제8군 참모진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서부 이라나 만에 상륙한 후, 동쪽으로 약 160.93km 이상 진격하여 후방을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기습 성공과 신속한 진격이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2]프랭클린 C. 시버트 소장이 지휘하는 제10군단이 지상 작전을 담당했으며, 로스코 B. 우드러프 소장의 제24보병사단과 클래런스 A. 마틴 소장의 제31보병사단이 주력 부대였다. 앨버트 G. 노블 제독이 지휘하는 제78.2 상륙 임무 부대는 4월 17일까지 제24사단과 제10군단 사령부를 말라방 인근에 상륙시켜 비행장을 확보하고, 5일 후 제31사단을 파랑에 배치할 예정이었다.[2]
4월 22일, 제31보병사단이 이라나 만에 상륙했고, 제124 및 제155보병 연대를 북상시켜 섬 중앙부로 진격했다. 민다나오 섬 중앙부에서 북쪽까지는 일본군 제30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제30사단은 보병 제74연대의 2개 대대와 공병 제30연대 등을 남하시켜 요격에 나섰다. 4월 27일 밤,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는 카바칸 부근에서 미군 제124보병 연대와 격렬한 조우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다리를 파괴하여 미군은 중화기를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없었고, 보병 간 근접전이 발생했다. 특히 마라마그 주변에서는 5월 7일 일본군 보병 제74연대 제3대대가 매복 공격으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5월 15일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미군 제124보병 연대는 69명이 전사하고 177명이 부상당했다.[17]
5월 10일, 북쪽의 카가얀데오로에 미군 제40보병 사단 소속 제108보병 연대가 상륙했다. 일본군 수색 제30연대 등이 응전했지만, 17일에 퇴각했고, 23일 이후 통신이 두절되었다.
남북에서 협공을 받은 일본군 제30사단 주력은 6월 2일 동부 아구산 방면으로 후퇴하여 지구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아구산 강 유역의 와로에에 도달했지만, 이동 중 많은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했다. 또한 와로에 부근에는 6월 24일 아구산 강 하구에 상륙한 미군 제155보병 연대 1개 대대가 있어 일본군은 추가 공격을 받았다. 제30사단은 와로에에서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존슨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제30사단의 전체 피해는 전사 2500명, 병사 2100명, 행방불명 5600명이었고, 생존자는 약 3000명이었다.
4. 결과
민다나오섬의 일본군 기지는 모두 연합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일본군 수비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산으로 피신한 일본군과 일본계 민간인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다가 게릴라의 손에 의해 죽어갔다.[2]
그러나 연합군의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결과였다. 연합군의 군사적 목적 중 ‘일본군의 남방 항로 차단’은 루손섬에 상륙하면서 이미 달성되었으며, 3월 중순의 남호작전 중단과 하순의 히 88J 선단의 전멸을 끝으로 남방 항로는 폐쇄되었다.[19] 또 하나의 목적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 상륙 작전도 실시되지 못하고 끝났다.
아이켈버거 장군은 조직적인 일본군의 저항이 끝났음을 발표했다. 민다나오 전역에서, 섬의 탐험되지 않은 정글 지형에 의해 보호받던 일본군 잔존 부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했고, 약 22,250명의 병력과 11,900명의 민간인이 항복하기 위해 나타났다.[2] 이는 필리핀의 완전한 해방을 알리는 신호였다. 약 12,865명의 일본군이 사망했고, 8,235명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 미국군은 전체 작전에서 820명의 사망자와 2,880명의 부상자를 냈다.[2]
민다나오 작전에서 미국군의 전사자 수가 비교적 적었던 것은, 제8군 참모진과 지휘관들의 역량 외에도, 필리핀 게릴라들의 증가하는 지원 덕분이었다. 이는 군사적 측면에서 제8군 부대에게 귀중한 "전력 증강" 요인이 되었다. 상륙 작전 전에 게릴라들은 일본군 부대를 괴롭히고, 적의 배치와 상륙 해변의 상대적 적합성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각 상륙 이후, 필리핀인들은 미국군과 함께 싸우며 섬 내부에서 일본군을 추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U.S. Army recognition Program of Philippine Guerri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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