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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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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오카 공습은 1945년 6월 19일, 미국 육군 항공대 제XXI 폭격사령부가 일본의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한 폭격 작전의 일환으로 감행되었다. 이 작전은 연소폭탄을 사용하여 후쿠오카 시의 1/3에 해당하는 지역을 파괴했으며, 당시 인구 32만 명의 후쿠오카는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도시였다. B-29 폭격기 239기가 투입되어 하카타와 덴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이루어졌고, 6월 20일에는 B-29 승무원 4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900명 이상이 사망하고 6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으며, 시가지의 21.5%가 초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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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후쿠오카 공습
일부일본 본토 공습, 태평양 전쟁
날짜1945년 6월 19일
장소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결과미국의 폭격 성공
교전 세력
군대 1제XXI 폭격사령부
병력
병력 1폭격기 239기 발진
224기 폭격 시행
사상자
사상자 1없음
사상자 2953명 사망
1,087명 부상
후쿠오카시 21.5% 파괴
기타

2. 6월 19일 공습



후쿠오카 공습은 1945년 6월부터 종전까지 이어진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XXI 폭격사령부의 일본 중소도시 폭격작전 중 하나였다. 이 작전은 연소폭격(Firebombing)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 대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대도시 공습 작전"의 후속 작전으로 수행되었다. 당시 인구 323,200명의 후쿠오카시는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도시였다.

대부분의 중소규모 도시 공습은 B-29 폭격기 단일 비행단으로 시행되었으나, 후쿠오카와 오무타시는 도시 규모가 커 한 도시당 2개 비행단으로 폭격하기로 결정되었다.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배치되어 B-29 폭격기 239기를 투입, 이 중 223기가 1차 목표물 폭격을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편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에 주둔한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서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미국 폭격기의 등장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가 격추를 시도했으나 일본 항공기의 요격 시도는 없었다.[10] 당시 후쿠오카시 내부의 방공은 규슈무기(현 와타나베 철강 본사 공장)와 하카타항 등 북부와 동부에 몰려있었고, 미나미큐슈의 방공을 위해 일부 고사포 부대가 이동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남은 고사포들도 유효사격고도가 낮아 대부분이 명중하지 않아 후쿠오카시 남쪽 세후리산에서 진입한 폭격기 부대는 방공 부대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10]

일본 시각 기준 1945년 6월 19일 23시 11분부터 소이탄이 투하되기 시작했다.[10] 하카타덴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수행되어 동쪽의 미카사강에서부터 서쪽으로 히이카강까지, 북쪽의 하카타만에서부터 남쪽으로 구시다 신사오호리 공원 인근 지역까지 완전히 소실되었다. 약 2시간 동안 이뤄진 공습으로 후쿠오카시의 1/3 가까이가 파괴되었다.[10]

전후 조사에 따르면 시내에서도 특히 나라야, 레이센마치, 오마하, 다이묘, 스노코 5개 지역이 피해가 제일 심해 사상자수의 90%를 차지했고, 특히 스노코 지역은 폭격 후 단 2채의 집만 남기고 전부 파괴되고 평지화되었다.[10] 이 가운데 1931년 건설된 나라야 소학교(현 하카타 소학교)의 철근 콘크리트제 건물 하나가 불이 꺼진 이후인 다음날 아침부터 시신 안치소 역할을 했다.[10]

주우고은행 후쿠오카지점(현재의 하카타자 위치)의 지하실이 정전으로 문이 오작동해 피난민이 갇혀버리고 여기에 공습의 고열로 수도관이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 뜨거운 물이 되어버린 상수도물이 대피소 지하실에 유입되어 62명이 뜨거운 물에 끓여져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0]

후쿠오카 외에 임기표적인 도미타카, 지치지마섬, 미야자키시까지 총 4개 도시를 폭격했다. 다음 날인 20일 0시 53분에 폭격을 종료하고 모든 B-29기가 손실 없이 기지로 복귀했다. 폭격 과정에서 세후리산 지역에 있는 사와라군, 이토시마군, 지쿠시군의 마을도 폭격당했는데 세후리산의 그림자를 하카타만의 해안선으로 오인하여 잘못 폭격해 발생했다.[11] 이 가운데 이토시마군 라이잔촌(현재의 이토시마시 라이잔산)에서는 건물 30채가 전소했고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1] 또한 지쿠시군 안토쿠촌(현재의 나카가와시 안토쿠)에서는 3가구만 살고 있는 세토지구에 공습이 일어나 그 중 1개 가옥의 안채와 헛간이 파괴되었다.[11]

6월 20일에는 후쿠오카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B-29 승무원 4명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살해 사건은 공습으로 피해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와 관련해 일본군 내부에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벌어졌다. 1945년 8월 종전까지 후쿠오카에서 미군 포로 29명이 살해당했다.

2. 1. 공습 배경

후쿠오카 공습은 1945년 6월부터 종전 시까지 이어진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XXI 폭격사령부의 일본 중소도시 폭격 작전 중 하나였다. 이 작전은 연소폭격(Firebombing)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 대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대도시 공습 작전"의 후속 작전으로 수행되었다. 당시 인구 323,200명의 후쿠오카시는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도시였다.

대부분의 중소규모 도시 공습은 B-29 폭격기 단일 비행단으로 시행되었으나, 후쿠오카와 오무타시는 도시 규모가 커 한 도시당 2개 비행단으로 폭격하기로 결정되었다.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배치되어 B-29 폭격기 239기를 투입, 이 중 223기가 1차 목표물 폭격을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편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에 주둔한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서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미국 폭격기의 등장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가 격추를 시도했으나 일본 항공기의 요격 시도는 없었다.[10] 당시 후쿠오카시 내부의 방공은 규슈무기(현 와타나베 철강 본사 공장)와 하카타항 등 북부와 동부에 몰려있었고, 미나미큐슈의 방공을 위해 일부 고사포 부대가 이동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남은 고사포들도 유효사격고도가 낮아 대부분이 명중하지 않아 후쿠오카시 남쪽 세후리산에서 진입한 폭격기 부대는 방공 부대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10] 일본 시각 기준 6월 19일 23시 11분부터 소이탄이 투하되기 시작했다.[10]

6월 20일, 후쿠오카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B-29 승무원 4명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살해 사건은 공습으로 피해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와 관련해 일본군 내부에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벌어졌다. 1945년 8월 종전까지 후쿠오카에서 미군 포로 29명이 살해당했다.

2. 2. 공습 부대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XXI 폭격사령부는 일본 중소도시 폭격작전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공습을 실시했다. 후쿠오카시는 당시 인구 323,200명의 도시로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제일 규모가 큰 도시였다. 이 작전은 일본 주요 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공습에 이어, 연소폭격(Firebombing) 전술을 이용하여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배치되었다. 두 폭격단은 도시 공습에 총 B-29 폭격기 239기를 투입했으며, 이 중 223기가 1차 목표물 폭격을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히가시히라오에 본부를 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편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에 주둔한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또한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서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당시 미국 폭격기의 등장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가 격추를 시도했으나 일본 항공기의 요격 시도는 없었다.[10]

후쿠오카 외에 임기표적인 도미타카, 지치지마섬, 미야자키시까지 총 4개 도시를 폭격했다. 다음 날인 20일 0시 53분에 폭격을 종료하고 모든 B-29기가 손실 없이 기지로 복귀했다.

2. 3. 일본 측 방어

2. 4. 공습 진행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XXI 폭격사령부는 일본 대도시 대부분을 파괴한 "대도시 공습 작전"의 후속작전으로 일본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폭격작전을 수행하였다. 후쿠오카시는 당시 인구 323,200명의 도시로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제일 규모가 큰 도시였다. 후쿠오카 공습을 맡은 비행단으로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배치되어 B-29 폭격기 239기를 투입, 이 중 223기가 1차 목표물 폭격을 시행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

일본 시각 기준 1945년 6월 19일 23시 11분부터 소이탄 투하가 시작되었다.[10] 하카타덴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이루어졌으며, 동쪽 미카사강에서 서쪽 히이카강까지, 북쪽 하카타만에서 남쪽 구시다 신사오호리 공원 인근 지역까지 소실되었다. 약 2시간 동안의 공습으로 후쿠오카시의 1/3 가까이가 파괴되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히가시히라오에 본부를 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편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에 주둔한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또한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서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당시 미국 폭격기의 등장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가 격추를 시도했으나 일본 항공기의 요격 시도가 없었다. 후쿠오카시 내부의 방공은 규슈무기(현 와타나베 철강 본사 공장)와 하카타항 등 북부와 동부에 몰려있었고 여기에 미나미큐슈의 방공을 위해 일부 고사포 부대가 이동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남은 고사포들도 유효사격고도가 낮아 대부분이 명중하지 않아 후쿠오카시 남쪽 세후리산에서 진입한 폭격기 부대는 방공 부대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폭격 과정에서 세후리산 지역에 있는 사와라군, 이토시마군, 지쿠시군의 마을도 폭격당했는데 세후리산의 그림자를 하카타만의 해안선으로 오인하여 잘못 폭격해 발생했다.[11] 이 가운데 이토시마군 라이잔촌(현재의 이토시마시 라이잔산)에서는 건물 30채가 전소했고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한 지쿠시군 안토쿠촌(현재의 나카가와시 안토쿠)에서는 3가구만 살고 있는 세토지구에 공습이 일어나 그 중 1개 가옥의 안채와 헛간이 파괴되었다.[11]

전후 조사에 따르면 시내에서도 특히 나라야, 레이센마치, 오마하, 다이묘, 스노코 5개 지역이 피해가 제일 심해 사상자수의 90%를 차지했고, 특히 스노코 지역은 폭격 후 단 2채의 집만 남기고 전부 파괴되고 평지화되었다.[10] 이 가운데 1931년 건설된 나라야 소학교(현 하카타 소학교)의 철근 콘크리트제 건물 하나가 불이 꺼진 이후인 다음날 아침부터 시신 안치소 역할을 했다.[10] 주우고은행 후쿠오카지점(현재의 하카타자 위치)의 지하실이 정전으로 문이 오작동해 피난민이 갇혀버리고 여기에 공습의 고열로 수도관이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 뜨거운 물이 되어버린 상수도물이 대피소 지하실에 유입되어 62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10]

다음 날인 20일 0시 53분에 폭격을 종료하고 모든 B-29기가 손실 없이 기지로 복귀했다.

2. 5. 피해 상황

1945년 6월 19일의 후쿠오카 공습으로 시내 나라야, 레이센마치, 오마하, 다이묘, 스노코 5개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전체 사상자의 90%가 발생했다.[10] 특히 스노코 지역은 단 2채의 집만 남기고 전부 파괴되었다.[10] 나라야 소학교(현 하카타 소학교)의 철근 콘크리트제 건물은 시신 안치소로 사용되었다.[10] 주우고은행 후쿠오카지점 지하실에서는 62명이 뜨거운 물에 끓여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0]

후쿠오카시 외곽의 세후리산 지역에 있는 사와라군, 이토시마군, 지쿠시군의 마을도 폭격을 당했다.[11] 이토시마군 라이잔촌(현재의 이토시마시 라이잔산)에서는 건물 30채가 전소하고 8명이 사망했으며, 지쿠시군 안토쿠촌(현재의 나카가와시 안토쿠)에서는 가옥 1채가 파괴되었다.[11]

후쿠오카 공습으로 인한 전체 피해는 다음과 같다.

  • 피해 면적: 3.771평방킬로미터
  • 피해 가구 수: 12,693가구(시 전체의 33%)
  • 피해자 수: 60,599명(시 전체의 44%)
  • * 사망자 수: 902명
  • * 중상자 수: 586명
  • * 경상자 수: 492명
  • * 실종자 수: 244명
  • 전화의 79%가 소실
  • 9개의 초등학교를 포함한 16개교가 전소 또는 일부 소실

2. 6. 미군 포로 살해

1945년 6월 20일, 후쿠오카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B-29 승무원 4명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살해 사건은 공습으로 피해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와 관련해 일본군 내부에서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벌어졌다. 1945년 8월 종전까지 후쿠오카에서 미군 포로 29명이 살해당했다.

3. 기뢰 부설 작전

후쿠오카항은 미군의 대규모 항공 기뢰 부설 작전의 주요 표적 중 하나였다. 1945년 5월 25일, 제9폭격집단 소속 B-29 15기가 투입되어 후쿠오카항 기뢰 매설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 중 14기가 작전에 참여했다. 모든 폭격기들은 피해 없이 기지에 복귀했다. 5월 27일, 제9폭격집단이 후쿠오카항에 추가로 기뢰를 투하했다.

1945년 6월에도 후쿠오카항은 B-29 폭격기의 기뢰 부설 작전의 목표가 되었다. 6월 7일,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10기가 투입되어 기뢰 6개를 매설했다. 6월 15일에는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8기가 추가로 기뢰를 투하했다. 6월 23일,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9기가 다시 기뢰를 투하했으며, 이 과정에서 폭격기 1기를 손실했다.

1945년 7월에도 후쿠오카항에 대한 기뢰 부설 작전이 계속되었다. 7월 13일, 제6폭격집단 소속 B-29 3기가 후쿠오카항 인근에 기뢰를 부설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맨은 당시 얼마나 많은 항공기가 어느 정도의 기뢰를 부설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7월 29일에는 제504폭격집단 소속 B-29 6기가 기뢰 부설 작전에 참여했지만, 맨은 당시 투하된 기뢰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3. 1. 1945년 5월

후쿠오카항은 대규모 항공 기뢰 부설 작전의 표적 중 하나였다. 1945년 5월 25일, 제9폭격집단 소속 B-29 15기가 투입되어 후쿠오카항 기뢰 매설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 중 14기가 작전에 참여했다. 모든 폭격기들은 피해 없이 기지에 복귀했다. 5월 27일, 제9폭격집단이 후쿠오카항에 추가로 기뢰를 투하했다.

3. 2. 1945년 6월

1945년 6월에도 후쿠오카항은 B-29 폭격기의 기뢰 부설 작전의 목표가 되었다. 6월 7일,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10기가 투입되어 기뢰 6개를 매설했다. 6월 15일에는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8기가 추가로 기뢰를 투하했다. 6월 23일, 제505폭격집단 소속 B-29 9기가 다시 기뢰를 투하했으며, 이 과정에서 폭격기 1기를 손실했다.

3. 3. 1945년 7월

1945년 7월에도 후쿠오카항에 대한 기뢰 부설 작전이 계속되었다. 7월 13일, 제6폭격집단 소속 B-29 3기가 후쿠오카항 인근에 기뢰를 부설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맨은 당시 얼마나 많은 항공기가 어느 정도의 기뢰를 부설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7월 29일에는 제504폭격집단 소속 B-29 6기가 기뢰 부설 작전에 참여했지만, 맨은 당시 투하된 기뢰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4. 기타 작전

후쿠오카시는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투기 공격을 두 차례 받았다. 6월 23일 제7공군 소속 P-47 선더볼트 전투기가 후쿠오카시 하카타구 비행장을 공격했다. 7월 3일에는 제5공군 소속 P-51 머스탱 전투기가 후쿠오카항을 공격하여 수상 항공기 수 기를 파괴했다.

7월 17일에는 제39폭격단 소속 B-29 기가 후쿠오카를 향해 레이더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4. 1. 전투기 공격

후쿠오카시는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투기 공격을 두 차례 받았다. 6월 23일 제7공군 소속 P-47 선더볼트 전투기가 후쿠오카시 하카타구 비행장을 공격했다. 7월 3일에는 제5공군 소속 P-51 머스탱 전투기가 후쿠오카항을 공격하여 수상 항공기 수 기를 파괴했다.

4. 2. 레이더 정찰 임무

7월 17일, 제39폭격단 소속 B-29 기가 후쿠오카를 향해 레이더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5. 결과

6월 19일 공습으로 후쿠오카 시가지의 약 21.5%에 달하는 3.5 km²영역으로 초토화되었다. 일본의 전시 보고서에 따르면 953명이 사망, 586명이 중상, 492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244명이 실종되었다.

1945년 6월 19일 공습으로 후쿠오카 시가지의 3.55km²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시 전체 면적의 21.5%에 해당한다. 당시 일본 측 보고서에 따르면 후쿠오카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는 총 953명이었다.

하카타와 텐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이루어졌고, 동서로는 미가사가와에서 히이가와까지, 남북으로는 하카타만 해안선에서 쿠시다 신사·오오호리 공원까지의 일대가 소실되었다. 약 2시간의 공습으로 후쿠오카시의 3분의 1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 전후 조사에 따르면, 시내에서도 특히 나라야·레이젠·오오하마·다이묘·스코의 5개 교구의 피해가 심했고, 사상자의 9할을 차지했으며, 스코 교구는 2채를 제외하고 모든 가옥이 전소하는 등 그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931년에 건설된 나라야 소학교(현재 하카타 소학교의 위치)의 철근콘크리트 제 1교사는 주민들의 소화 활동 덕분에 불타지 않고 남아, 이튿날부터 시체 안치소로 사용되어 시체의 신원 확인이 이루어졌다.

피난처였던 구 십오은행 후쿠오카 지점(현재 하카타자의 위치)의 지하실은 정전으로 인해 문이 작동하지 않아 피난민들이 갇혔을 뿐만 아니라, 공습의 고열로 수도관이 파열되어 뜨거운 물이 된 상수가 지하실로 흘러들어가 62명이 열사하는 참사도 일어났다.

상술한 지역 외에도, 야쿠인, 토닌, 신류정(현재 키요카와), 히라오, 록폰마츠, 타지마, 메이하마 등 많은 곳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 시설 중에서는 후쿠오카성 터의 서부군 사령부와 보병 제124연대의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활주로가 완성된 세키타 비행장(현재 후쿠오카 공항)에는 피해가 없어, 종전 후 같은 해 10월에 미군 이타즈키 기지로 접수되었다.

공습 다음 날, 서부군 사령부에 수감되어 있던 연합국포로가 보복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처형은 원자폭탄 투하 후 8월 10일, 종전인 8월 15일 무렵에도 행해졌다.

전재로 인한 인적 피해뿐만 아니라 각 류의 야마카사대와 법피 등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같은 해의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는 중지되었다. 종전 후 다음 해 1946년 5월 25일에는 「제1회 나라야 부흥제」가 개최되어, 베니어판에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그린 어린이 야마카사가 폐허를 돌아다녔지만, 야마카사의 본격적인 재개는 1948년까지 걸렸다.

5. 1. 피해 규모

6월 19일 일어난 후쿠오카 공습으로 후쿠오카 시가지의 약 21.5%에 달하는 3.5 km² 영역이 초토화되었다. 일본 측 보고서에 따르면 953명이 사망, 586명이 중상, 492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244명이 실종되었다. 피해 면적은 3.771평방킬로미터이고, 피해 가구 수는 12,693가구(시 전체의 33%), 피해자 수는 60,599명(시 전체의 44%)에 달했다. 전화의 79%가 소실되었고, 9개의 초등학교를 포함한 16개교가 전소 또는 일부 소실되었다.

5. 2. 전후 복구 및 추모

1965년 이토 켄지(伊藤研之)가 제작한 전재기념비가 레이젠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6월 19일 오전 11시에는 기념비 앞에서 "후쿠오카시 전재 인양 사망자 추도식"이 거행된다. 후쿠오카시립 하카타 소학교(福岡市立博多小学校)에는 전쟁 자료를 수집한 평화기념실이 있으며, 입구는 전재로 불에 탄 옛 나라야 소학교의 벽과 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토시마시 라이잔 지구에는 공습으로 불탄 건물의 벽과 머리가 없는 지장, 방공호가 1999년 당시 남아 있었다.[7] 니시구(西区) 이마슈쿠로 이전한 에이쇼지에는 "총후(銃後)" "자유고(自由御)" 그리고 "십오(은행)(十五(銀行))"라는 이름을 붙인 "쥬고지장(じゅうご地蔵)"이 있다. 후쿠오카시 각지에는 그 외에 스코 공원에 전재위령비가 있으며, 하카타구를 중심으로 여러 전재 지장보살이 건립되었다. 또한 후쿠오카시립 초중학교 일부에서는 6월 19일에 평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5. 3. 전후 작품

단일웅의 『리츠코, 그 사랑』(1950년), 하세가와 마치코의 『사자에상 속마음 이야기』(1979년), 요네쿠라 사이카네의 『어른이 되지 못한 남동생들에게…』(1983년), 오카마츠 카즈오의 『시가섬』(1976년) 등이 후쿠오카 공습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아리하라 세이지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비의 불꽃이 내린다』(1988년)도 제작되었다.

6. 미군의 작전 내용 (임무 제211호)

1945년 6월 19일, 미국 육군 항공대 제XXI 폭격사령부는 '임무 제211호'로 명명된 후쿠오카 공습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일본의 주요 대도시를 파괴한 "대도시 공습 작전"에 이어, 연소폭격 전술을 통해 중소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인구 323,200명의 후쿠오카시는 이 작전의 대상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투입되어 총 239대의 B-29 폭격기가 동원되었다. 이 중 223대가 1차 목표물인 후쿠오카 시내를 폭격했고, 나머지 4대는 도미타카, 지치지마섬, 미야자키시 등 다른 지역의 표적을 공격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들은 규슈를 거쳐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달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구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 주둔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미군 폭격기가 등장하자 고사포 진지에서 격추를 시도했지만, 일본 항공기의 요격은 없었다. 당시 후쿠오카시 내부의 방공은 규슈무기(현 와타나베 철강 본사 공장)와 하카타항 등 북부와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미나미큐슈 방어를 위해 일부 고사포 부대가 이동하여 전투를 수행 중이었다. 남은 고사포들도 유효사격고도가 낮아 대부분 명중하지 못했고, 후쿠오카시 남쪽 세후리산에서 진입한 폭격기 부대는 방공 부대의 위협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일본 시각 기준 6월 19일 23시 11분부터 소이탄 투하가 시작되었다.[10] 하카타덴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진행되어, 동쪽 미카사강에서 서쪽 히이카강까지, 북쪽 하카타만에서 남쪽 구시다 신사오호리 공원 인근 지역까지 광범위한 지역이 파괴되었다. 특히 나라야, 레이센마치, 오마하, 다이묘, 스노코 5개 지역의 피해가 극심하여 전체 사상자의 90%가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10] 스노코 지역은 폭격 이후 단 2채의 집만 남고 모두 파괴되어 평지가 되었다.[10]

후쿠오카 외에도 도미타카, 지치지마섬, 미야자키시가 폭격을 받았다. 다음 날인 20일 0시 53분, 폭격이 종료되었고 모든 B-29 폭격기는 손실 없이 기지로 복귀했다. 폭격 과정에서 세후리산 지역의 사와라군, 이토시마군, 지쿠시군 마을들도 폭격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세후리산의 그림자를 하카타만의 해안선으로 오인하여 발생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이토시마군 라이잔촌(현재의 이토시마시 라이잔산)에서는 건물 30채가 전소하고 8명이 사망했으며, 지쿠시군 안토쿠촌(현재의 나카가와시 안토쿠)에서는 3가구 중 1개 가옥의 안채와 헛간이 파괴되었다.[11]

6. 1. 투입 부대

미국 육군 항공대(USAAF) 제XXI 폭격사령부의 일본 중소도시 폭격작전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배치되었다.[9] 두 폭격단은 도시 공습에 총 B-29 폭격기 239기를 투입했다.[9] 이 중 223기가 1차 목표물 폭격을 시행했다.[9]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9]

제73항공단은 유도대기 12기, 폭격기 130기, 기타 2기로 구성되었고, 기본 폭격 고도는 2,700m였다. 제313항공단은 유도대기 11기, 폭격기 84기로 구성되었고, 기본 폭격 고도는 2,400m였다. 이들은 AN-M47A 탄두 순시발신관 부착 소이탄과 M69 집속 소이탄을 1대1 비율로 1평방킬로미터당 78톤, 총 1,358톤을 투하했다. 표적은 구 하카타역(현재의 기온역부터 상공회의소 교차로 부근) 및 텐진의 2곳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2킬로미터의 원내였다.

6. 2. 폭격기 및 폭탄

후쿠오카 공습에는 미국 공군 제20항공군 제21폭격병단 소속 제73 및 제313항공단이 참여했다. 두 항공단은 마리아나 제도, 티니안, 사이판 기지에서 출격하여 규슈를 북상했다.

제73항공단은 유도대기 12기, 폭격기 130기, 기타 2기로 구성되었으며, 기본 폭격 고도는 2,700m였다. 제313항공단은 유도대기 11기, 폭격기 84기로 구성되었으며, 기본 폭격 고도는 2,400m였다.

투하된 폭탄은 AN-M47A 탄두 순시발신관 부착 소이탄과 M69 집속 소이탄으로, 1대1 비율로 총 1,358톤이 투하되었다. 1평방킬로미터당 78톤의 폭탄이 투하된 셈이다. 폭격 목표는 구 하카타역(현재의 기온역부터 상공회의소 교차로 부근) 및 텐진의 2곳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2km의 원내였다.

6. 3. 작전 경과

1945년 6월 19일, 미국 육군 항공대 제XXI 폭격사령부는 일본 중소도시 폭격작전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공습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연소폭격 전술을 사용하여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후쿠오카시는 당시 인구 323,200명으로 중소 규모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도시였다. 후쿠오카 공습에는 제73폭격단과 제313폭격단이 투입되어 B-29 폭격기 239기를 동원했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발한 폭격기는 규슈를 지나 후쿠오카현 상공에 도착했다. 당시 후쿠오카시에는 제4고사사단 하카타구대와 고사포 6문으로 편성된 중대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고, 지쿠시군 가스가촌(현 가스가시)에 주둔한 독립조공제21대대 고사포부대 4개도 배치되어 있었다.[9] 주오구 데루쿠니와 이토시마군 다카스산에서도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10]

일본 시각 기준 6월 19일 15시 55분, 첫 번째 비행기가 기지를 이륙했다. 후쿠오카 지역에는 22시 32분경 공습 경계 경보가, 22시 58분경에는 공습 경보가 발령되었다. 23시 11분, 소이탄 투하와 함께 폭격이 시작되었다.[10] 하카타덴진을 중심으로 폭격이 이루어져 동쪽의 미카사강에서 서쪽의 히이카강까지, 북쪽의 하카타만에서 남쪽의 구시다 신사오호리 공원 인근 지역까지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나라야, 레이센마치, 오마하, 다이묘, 스노코 5개 지역의 피해가 심각하여 전체 사상자의 90%를 차지했다.[10]

23시 30분경에는 이토시마군 라이잔촌(현재의 이토시마시 라이잔산)에서 건물 30채가 전소하고 8명이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했다.[11]

다음 날인 20일 0시 53분에 폭격이 종료되었고, 8시 12분에는 마지막 비행기가 기지로 귀환했다.

참조

[1] 서적 本土決戦準備(2)九州の防衛 朝雲新聞社 1972
[2] 서적 福岡の戦争遺跡を歩く 海鳥社 2010
[3] 간행물 福岡大空襲で焼失した図書館 福岡大学 2005
[4] 간행물 大学昇格への第一歩 -戦災図書復旧充実運動- 福岡大学 2006
[5] 서적 村に火の雨が… -六月十九日雷山空襲の記録- 雷山空襲を記録する会 1999
[6] 서적 郷土誌那珂川 那珂川町 1976
[7] 서적 村に火の雨が… -六月十九日雷山空襲の記録-
[8] 서적 村に火の雨が… -六月十九日雷山空襲の記録-
[9] 서적 本土決戦準備(2)九州の防衛 朝雲新聞社 1972
[10] 서적 福岡の戦争遺跡を歩く 海鳥社 2010
[11] 서적 郷土誌那珂川 那珂川町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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