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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초 비링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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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노초 비링구초는 1480년 시에나에서 태어난 야금 기술자이자 건축가로, 페트루치 가문의 추종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1515년 시에나 봉기로 망명했다가 1523년 귀환하여 초석 생산 독점권을 얻었지만, 1526년 다시 축출되었다. 이후 시에나에서 활동하며 시의회 의원을 역임했고, 1538년에는 교황청 주조소 책임자 겸 군수품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비링구초는 《피로테크니아》라는 저서를 통해 주조 기술을 상세히 기록하여 "주조 산업의 아버지"로 불리며, 비밀 결사 단체인 '프라테르니타 디 산타 바르바라'의 회원이었다. 그는 또한 철 광산, 조폐창, 병기창을 관리했으며,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위해 대포를 주조하는 등 다양한 기술적 활동을 펼쳤다. 비링구초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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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초 비링구초
기본 정보
피렌체 스페콜라 박물관에 묘사된 반노초 비링구초
피렌체 스페콜라 박물관에 묘사된 반노초 비링구초
국적이탈리아
출생지시에나
사망(58세 또는 59세)
부모파올로 비링구초와 루크레치아 디 바르톨로메오 비링구초
분야금속학자
저서피로테크니아

2. 생애

반노초 비링구초는 건축가로 추정되는 파올로 비링구초와 루크레치아 디 바르톨로메오 비링구초의 아들로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1480년 10월 20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페트루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판돌포 페트루치의 추종자였으며, 야금 기술자로 고용되었다. 판돌포가 사망한 후에도 비링구초는 페트루치 가문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아들 보르게세 페트루치에게 고용되었다.

1515년 시에나에서 발생한 봉기로 보르게세 페트루치가 축출되자, 비링구초도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했고, 1517년에는 시칠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중재로 페트루치 가문이 복귀하면서 비링구초도 시에나로 돌아왔다. 1524년에는 시에나 전역에서 초석 생산 독점권을 얻었으나, 1526년 다시 페트루치 가문이 축출되면서 이 권한을 잃었다. 페트루치 가문은 비링구치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시에나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530년 시에나의 정세가 안정되자 비링구초는 다시 돌아와 1531년 1월과 2월,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1536년 교회로부터 로마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고, 1538년에는 교황청 주조소 책임자 겸 군수품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반노초 비링구초의 정확한 사망 장소와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539년 문서에 그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페트루치 가문과의 관계

반노초 비링구초는 건축가로 추정되는 파올로 비링구초와 루크레치아 디 바르톨로메오 비링구초의 아들로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1480년 10월 20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페트루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판돌포 페트루치의 추종자였으며, 야금 기술자로 고용되었다. 판돌포가 사망한 후에도 비링구초는 페트루치 가문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아들 보르게세 페트루치에게 고용되었다.

2. 2. 망명과 귀환

1515년 시에나에서 발생한 봉기로 보르게세 페트루치가 축출되자, 비링구초도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했고, 1517년에는 시칠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중재로 페트루치 가문이 복귀하면서 비링구초도 시에나로 돌아왔다. 1524년에는 시에나 전역에서 초석 생산 독점권을 얻었으나, 1526년 다시 페트루치 가문이 축출되면서 이 권한을 잃었다. 페트루치 가문은 비링구치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시에나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2. 3. 시에나에서의 활동과 로마로의 이주

반노초 비링구초는 시에나에서 태어나 페트루치 가문의 수장 판돌포 페트루치에게 야금 기술자로 고용되었다. 판돌포 사망 후에도 페트루치 가문과 관계를 맺고 그의 아들 보르게세 페트루치를 섬겼으나, 1515년 봉기로 함께 시에나를 떠나야 했다.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중재로 페트루치 가문이 복귀하면서 비링구초도 시에나로 돌아왔고, 1524년에는 초석 생산 독점권을 얻었다. 하지만 1526년 시민 봉기로 페트루치 가문이 다시 축출되면서 비링구초는 이들을 도와 시에나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30년 시에나의 정세가 안정되자 비링구초는 다시 돌아와 1531년 1월과 2월,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1536년 교회로부터 로마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고, 1538년에는 교황청 주조소 책임자 겸 군수품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2. 4. 사망

반노초 비링구초의 정확한 사망 장소와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539년 문서에 그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다.

3. 업적

''피로테크니아''


비린구초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주조 산업의 아버지로 여겨지는데, 그의 저서 《피로테크니아》가 적절한 주조 기술에 대한 최초의 인쇄 기록이기 때문이다.[2] 또한 광업 기술, 다양한 금속, 합금 (예: 황동), 그리고 주조 및 폭발물에 사용되는 화합물의 추출 및 정련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이 책은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의 《De re metallica》보다 14년 먼저 출판되었다.

비린구초는 비밀 결사 단체인 ''프라테르니타 디 산타 바르바라''의 멤버였다.[2] 그의 책 출판 이전에는 금속 공학 및 군사 기술에 대한 정보가 극비로 유지되었지만, 그의 저서는 과학 및 기술 문헌 전통을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

그는 경력 동안 시에나 근처의 철 광산을 관리했으며, 또한 그곳의 조폐창과 병기창을 관리했다. 그는 베네치아와 나중에는 피렌체를 위해 대포주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3. 1. 《피로테크니아(De la pirotechnia)》

비링구초는 주조 산업의 아버지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의 저서 《피로테크니아》가 주조 기술에 대한 최초의 인쇄 기록이기 때문이다.[2] 이 책은 광업 기술, 다양한 금속, 합금 (예: 황동), 주조 및 폭발물에 사용되는 화합물의 추출 및 정련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며,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의 《De re metallica》보다 14년 먼저 출판되었다.[2]

그는 비밀 결사 단체인 ''프라테르니타 디 산타 바르바라''의 멤버였다.[2] 그의 책 출판 이전에는 금속 공학 및 군사 기술에 대한 정보가 극비로 유지되었지만, 그의 저서는 과학 및 기술 문헌 전통을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 그는 시에나 근처의 철 광산과 조폐창, 병기창을 관리했으며, 베네치아피렌체를 위해 대포주조하기도 했다.

《피로테크니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기술적 문헌 중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저작물 중 하나이며, 저술 당시의 기술적 실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1540년 베네치아에서 인쇄되어 여러 차례 재판되었다.

이 책은 광물, 준금속, 분석, 제련, 금과 은의 분리, 합금, 금속 주조 기술 (특히 교회 종과 대포), 연금술에 관한 10개의 책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자는 최종 제품의 모양을 위한 패턴을 만드는 방법을 포함하여, 결함을 피하기 위해 주조를 위한 주형을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3. 2. 비밀 결사 활동

비링구초는 비밀 결사 단체인 '프라테르니타 디 산타 바르바라'의 회원이었다.[2] 그의 저서 《피로테크니아》 출판 이전에는 금속 공학 및 군사 기술에 대한 정보가 극비로 유지되었으나, 《피로테크니아》를 통해 이러한 정보가 공개되면서 과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3. 3. 기타 활동

비링구초는 시에나 근처의 철 광산을 관리[2]했고, 그곳의 조폐창과 병기창도 관리했다.[2] 또한 베네치아피렌체에서 대포주조하는 일을 맡았다.[2] 이러한 활동을 통해 실용적인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참조

[1] 서적 The Pirotechnia of Vannoccio Biringuccio https://archive.org/[...] Dover 1990-01
[2] 웹사이트 Pirotechnia https://mitpress.mit[...]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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