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질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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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질 코드는 영국의 군인으로, 1906년 9월 27일에 태어나 펠스테드 학교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하여 우수 서비스 훈장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여 제27 보병 여단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제2 사단을 지휘했으며, 1954년에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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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질 코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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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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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배질 오브리 코드 |
출생일 | 1906년 9월 27일 |
출생지 | 영국 햄프셔주 포츠머스 |
사망일 | 1980년 3월 26일 |
사망지 | 영국 윌트셔주 |
군 복무 | |
소속 | 영국 육군 |
복무 기간 | 1926년 ~ 1957년 |
군번 | 34667 |
최종 계급 | 영국 육군 소장 |
지휘 | 제2보병사단 영연방 제27여단 제30보병여단 윌트셔 연대 제2대대 제130보병여단 도싯 연대 제5대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 (1936년~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서훈 | 바스 훈장 대영 제국 훈장 무공 훈장 & Bar 미국 훈공장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윌트셔 연대, 이후 에든버러 공작 왕립 연대의 대령 윌트셔주 부지사 |
2.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배질 코드는 1906년 9월 27일 햄프셔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펠스테드 학교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 샌드허스트를 졸업한 그는 1926년 2월 4일 영국 육군의 윌트셔 연대에서 소위로 장교 임관했다.[2] 곧 인도로 가서 제1대대에 합류했고, 몇 년 동안 그곳에서 복무한 후, 1929년 1월에 상하이로 파견되었다.[1][3] 그는 2월 4일에 중위로 진급했고, 그 해 12월부터는 부 헌병감으로 임명되었다.[1][3]
코드는 1934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제2대대 윌트셔 연대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아랍 반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대대와 함께 복무했다.[4] 1937년 1월 22일 그는 제4대대, 즉 육군 예비군(TA) 부대로 전출되어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동시에 TA에서 대위의 임시 계급을 받았다.[5][6] 그는 1938년 3월 18일에 정식 대위로 진급했다.[7]
2. 1. 초기 생애
배질 코드는 1906년 9월 27일 햄프셔 포츠머스에서 태어났다.[1] 펠스테드 학교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 샌드허스트를 졸업한 그는 1926년 2월 4일 영국 육군의 윌트셔 연대에서 소위로 장교 임관했다.[2] 곧 인도로 가서 제1대대에 합류했다.[1] 몇 년 동안 그곳에서 복무한 후, 1929년 1월에 조계지 중 하나였던 상하이로 파견되었다.[1][3] 그는 2월 4일에 중위로 진급했고, 그 해 12월부터는 부 헌병감으로 임명되었다.[1][3]1934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제2대대 윌트셔 연대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아랍 반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대대와 함께 복무했다.[4] 1937년 1월 22일 제4대대, 즉 육군 예비군(TA) 부대로 전출되어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동시에 TA에서 대위의 임시 계급을 받았다.[5][6] 1938년 3월 18일에 정식 대위로 진급했다.[7]
2. 2. 군 경력 초기
배질 코드는 1906년 9월 27일 햄프셔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펠스테드 학교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 샌드허스트를 졸업한 그는 1926년 2월 4일 영국 육군의 윌트셔 연대에서 소위로 장교 임관했다.[2] 곧 인도로 가서 제1대대에 합류했고, 몇 년 동안 그곳에서 복무한 후, 1929년 1월에 상하이로 파견되었다.[1][3] 그는 2월 4일에 중위로 진급했고, 그 해 12월부터는 부 헌병감으로 임명되었다.[1][3]코드는 1934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제2대대 윌트셔 연대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아랍 반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대대와 함께 복무했다.[4] 1937년 1월 22일 그는 제4대대, 즉 육군 예비군(TA) 부대로 전출되어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동시에 TA에서 대위의 임시 계급을 받았다.[5][6] 그는 1938년 3월 18일에 정식 대위로 진급했다.[7]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코드는 임시 소령으로 진급하여 43 (웨섹스) 보병 사단의 교관으로 복무했으며, 1940년 2월 1일 임시 소령이 되었다.[1][8] 1941년 1월 그는 제2 윌트셔 연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까지 그는 당시 아이보 토마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43사단의 전투 학교의 임시 중령이었다.[1] 그는 이후 1943년 초에 제5 도셋 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1] 1943년 2월 4일 정식 소령으로 진급했다.[9]
제5 도셋은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전역)에 130 보병 여단, 제43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4년 7월 10일, 주피터 작전의 시작 동안, 부대는 퐁텐-에투푸르 근처의 샤토 드 퐁텐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샤토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그 후 추가 목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드는 심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지역을 가로지르는 경로를 직접 정찰했다. 공격이 시작되어 목표가 점령되었지만, 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코드는 가장 전진한 두 개의 소대를 철수시키고 샤토를 방어 위치로 준비했다.[10] 이 사건에서 그의 지휘력으로 코드는 1944년 10월 19일 우수 서비스 훈장(DSO)을 받았다.[11]
여단은 파리에서 라인강까지의 연합군 진격에 참여했으며, 1944년 9월에는 불운한 마켓 가든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 10월 7일, 코드는 임시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30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12] 1년 후, 그는 1945년 10월 11일 그 기간 동안의 그의 지휘력에 대해 DSO에 대한 약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독일 서부 연합군 침공을 포함했다.[13]
이후 코드는 정식 중령으로 진급했고 (준장의 임시 계급을 유지했다). 그 후 1946년 1월 28일, 그는 라인강 영국군의 일부가 된 제43 (웨섹스) 보병 사단을 임시 소장으로 지휘하게 되었다.[1][14] 그는 지휘권을 포기하고 1946년 3월 10일 임시 준장으로 복귀했다.[15] 그는 제130여단으로 돌아갔고, 그 후 중령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연대로 돌아가 제2 윌트셔를 지휘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준장이 되어 제30 보병 여단을 지휘한 후 다시 제2 윌트셔로 돌아갔다.[1] 그는 1948년 2월 8일 정식 중령으로 진급했다.[16]
3. 1. 초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코드는 임시 소령으로 진급하여 43 (웨섹스) 보병 사단의 교관으로 복무했으며, 1940년 2월 1일 임시 소령이 되었다.[1][8] 1941년 1월 그는 제2 윌트셔 연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까지 그는 당시 아이보 토마스 소장이 지휘하는 제43사단의 전투 학교의 임시 중령이었다.[1] 그는 이후 1943년 초에 제5 도셋 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1] 1943년 2월 4일 정식 소령으로 진급했다.[9]제5 도셋은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전역)에 130 보병 여단, 제43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4년 7월 10일, 주피터 작전의 시작 동안, 부대는 퐁텐-에투푸르 근처의 샤토 드 퐁텐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샤토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그 후 추가 목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코드는 심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지역을 가로지르는 경로를 직접 정찰했다. 공격이 시작되어 목표가 점령되었지만, 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코드는 가장 전진한 두 개의 소대를 철수시키고 샤토를 방어 위치로 준비했다.[10] 이 사건에서 그의 지휘력으로 코드는 1944년 10월 19일 우수 서비스 훈장 (DSO)을 받았다.[11]
3. 2.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서유럽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배질 코드는 130 보병 여단 소속 제5 도셋 연대를 지휘했다.[1] 1944년 7월 10일 주피터 작전에서 퐁텐-에투푸르 근처 샤토 드 퐁텐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하여 1944년 10월 19일 우수 서비스 훈장(DSO)을 받았다.[10][11] 코드는 심한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에도 불구, 직접 정찰을 감행하여 공격 성공에 기여했다.[10]이후 파리에서 라인강까지의 연합군 진격과 마켓 가든 작전에 참여했다. 1944년 10월 7일, 임시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30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12] 독일 서부 연합군 침공에서의 리더십을 인정받아 1945년 10월 11일 DSO에 대한 약장을 수여받았다.[13]
4. 한국 전쟁
### 참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18] 초기 영국 내각은 말라야 비상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과 홍콩 방어에 대한 우려로 인해 한국 파병을 주저했다.[20][21] 그러나 7월 25일, 영국은 자국의 국제적 위상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육군 파병을 결정했다.[20][22] 이 결정은 다음 날 하원에서 매니 신웰 국방부 장관에 의해 발표되었다.[23]
배질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 보병 여단은 홍콩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극동 육군(FARELF)의 전략 예비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1][17][18] 초기에는 제29 보병 여단이 파병될 예정이었으나, 한국 상황이 악화되자 더 가까운 곳에 주둔 중인 제27 보병 여단이 선정되었다.[24] 코어드 여단은 1950년 8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여 푸산 교전 지역 방어에 합류했다.[20][24][26][27][28]
### 제27여단 지휘와 낙동강 방어선 전투
배질 코드는 1948년 영국으로 돌아와 임시 준장으로 제27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1949년 6월 여단은 홍콩에 도착하여 영국 전략 예비군으로 지정되었다.[1][17][18] 1950년 4월 6일에는 정식 대령으로 진급했다.[19]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영국 내각은 육군 파병을 결정하지 않았으나,[20][21] 7월 25일,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육군 파병을 결정하였다.[20][22]
코어드가 이끄는 제27 보병 여단은 1950년 8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여 푸산 교전 지역 방어에 합류했다.[20][24][26][27][28] 당시 여단은 포병과 수송 장비가 거의 없었고, 식량을 포함한 대부분의 보급을 미군에 의존해야 했다.[18] 또한, 병력 부족 문제와 19세 미만 전투 참여 불가 결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8]
9월 3일 첫 전투를 시작으로, 9월 5일 여단은 대구 남서쪽 낙동강을 따라 전선을 담당했다.[24] 9월 6일, 미들섹스 연대의 레지날드 스트리터 일병과 아르가일 연대의 닐 부캐넌 대위, 그의 하인인 탐 테일러 일병이 전사하며 여단의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18]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여단은 서울 탈환을 위한 미군을 지원했다. 9월 22일, 여단은 낙동강을 건너 제24 보병 사단 (미국)에 배속되어 고지 점령 작전을 수행했다. 미들섹스 연대는 "자두 푸딩 언덕"과 "미들섹스 언덕"을 점령했으나, 아르가일 연대는 언덕 282 전투에서 아군 사격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8] 이 전투에서 케네스 뮤어 소령은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29] 9월 24일, 여단은 제19 보병 연대 (미국)과 협력하여 송주를 점령하고 제8 미국 육군 지휘 하에 들어갔다.[18]
9월 28일,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가 여단에 배속되었고, 여단은 제27 영연방 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24][30]
### 서울 탈환 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압박이 완화되면서,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 보병 여단은 푸산에서 탈출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는 미군 주력 부대의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24] 9월 22일, 여단은 급하게 건설된 다리를 통해 낙동강을 건넜다. 이 다리는 병사들이 한 줄로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불안정했다.[18]
강을 건넌 후, 제24 보병 사단에 배속된 제27여단은 도로 양쪽의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로 오른쪽에는 "자두 푸딩 언덕"(여단 병사들이 붙인 이름)이 있었고, 그 뒤로는 송주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900피트 높이의 미들섹스 언덕이 있었다.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는 두 대의 미국 탱크 지원을 받아 총검 돌격으로 자두 푸딩 언덕을 점령한 후, 미들섹스 언덕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18]
9월 23일, 아가일 앤 서더랜드 하이랜더스 제1대대는 도로 왼쪽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언덕 282 전투를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과 더불어 통신 장애로 인한 아군 오폭 사건까지 발생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8] 특히, 부대대장 케네스 뮤어 소령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9] 아가일 대대는 장교 2명과 사병 11명이 사망하고, 장교 4명과 사병 70명이 부상당했으며, 2명이 실종되었다. 이 중 약 40%의 사상자는 미군 공습으로 인한 것이었다.[18]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제27여단은 9월 24일 미 제19 보병 연대 제1대대와 협력하여 송주를 점령했다.[18]
9월 28일,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가 한국에 도착하여 제27여단에 배속되면서 여단의 병력이 보강되었다. 호주군은 일본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하다가 2주간의 짧은 훈련만 받고 한국전에 투입되었다.[20][24][30] 이로써 여단은 제27 영연방 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
4. 1. 참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18] 초기 영국 내각은 말라야 비상 사태에 대한 군사적 개입과 홍콩 방어에 대한 우려로 인해 한국 파병을 주저했다.[20][21] 그러나 7월 25일, 영국은 자국의 국제적 위상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육군 파병을 결정했다.[20][22] 이 결정은 다음 날 하원에서 매니 신웰 국방부 장관에 의해 발표되었다.[23]배질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 보병 여단은 홍콩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극동 육군(FARELF)의 전략 예비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1][17][18] 초기에는 제29 보병 여단이 파병될 예정이었으나, 한국 상황이 악화되자 더 가까운 곳에 주둔 중인 제27 보병 여단이 선정되었다.[24] 코어드 여단은 1950년 8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여 푸산 교전 지역 방어에 합류했다.[20][24][26][27][28]
4. 2. 제27여단 지휘와 낙동강 방어선 전투
배질 코드는 1948년 영국으로 돌아와 임시 준장으로 제27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1949년 6월 여단은 홍콩에 도착하여 영국 전략 예비군으로 지정되었다.[1][17][18] 1950년 4월 6일에는 정식 대령으로 진급했다.[19]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영국 내각은 육군 파병을 결정하지 않았으나,[20][21] 7월 25일,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육군 파병을 결정하였다.[20][22]
코어드가 이끄는 제27 보병 여단은 1950년 8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여 푸산 교전 지역 방어에 합류했다.[20][24][26][27][28] 당시 여단은 포병과 수송 장비가 거의 없었고, 식량을 포함한 대부분의 보급을 미군에 의존해야 했다.[18] 또한, 병력 부족 문제와 19세 미만 전투 참여 불가 결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8]
9월 3일 첫 전투를 시작으로, 9월 5일 여단은 대구 남서쪽 낙동강을 따라 전선을 담당했다.[24] 9월 6일, 미들섹스 연대의 레지날드 스트리터 일병과 아르가일 연대의 닐 부캐넌 대위, 그의 하인인 탐 테일러 일병이 전사하며 여단의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18]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여단은 서울 탈환을 위한 미군을 지원했다. 9월 22일, 여단은 낙동강을 건너 제24 보병 사단 (미국)에 배속되어 고지 점령 작전을 수행했다. 미들섹스 연대는 "자두 푸딩 언덕"과 "미들섹스 언덕"을 점령했으나, 아르가일 연대는 언덕 282 전투에서 아군 사격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8] 이 전투에서 케네스 뮤어 소령은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29] 9월 24일, 여단은 제19 보병 연대 (미국)과 협력하여 송주를 점령하고 제8 미국 육군 지휘 하에 들어갔다.[18]
9월 28일,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가 여단에 배속되었고, 여단은 제27 영연방 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24][30]
4. 3. 서울 탈환 작전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압박이 완화되면서,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 보병 여단은 푸산에서 탈출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는 미군 주력 부대의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24] 9월 22일, 여단은 급하게 건설된 다리를 통해 낙동강을 건넜다. 이 다리는 병사들이 한 줄로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불안정했다.[18]강을 건넌 후, 제24 보병 사단에 배속된 제27여단은 도로 양쪽의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로 오른쪽에는 "자두 푸딩 언덕"(여단 병사들이 붙인 이름)이 있었고, 그 뒤로는 송주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 900피트 높이의 미들섹스 언덕이 있었다.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는 두 대의 미국 탱크 지원을 받아 총검 돌격으로 자두 푸딩 언덕을 점령한 후, 미들섹스 언덕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18]
9월 23일, 아가일 앤 서더랜드 하이랜더스 제1대대는 도로 왼쪽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언덕 282 전투를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과 더불어 통신 장애로 인한 아군 오폭 사건까지 발생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8] 특히, 부대대장 케네스 뮤어 소령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9] 아가일 대대는 장교 2명과 사병 11명이 사망하고, 장교 4명과 사병 70명이 부상당했으며, 2명이 실종되었다. 이 중 약 40%의 사상자는 미군 공습으로 인한 것이었다.[18]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제27여단은 9월 24일 미 제19 보병 연대 제1대대와 협력하여 송주를 점령했다.[18]
9월 28일,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가 한국에 도착하여 제27여단에 배속되면서 여단의 병력이 보강되었다. 호주군은 일본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하다가 2주간의 짧은 훈련만 받고 한국전에 투입되었다.[20][24][30] 이로써 여단은 제27 영연방 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0]
5. 전후 경력
6. 유산
참조
[1]
뉴스
Maj-Gen B. A. Coad—British role in Korean War
The Times
1980-03-28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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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2-05
[3]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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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02-19
[4]
웹사이트
2nd Bn, the Wiltshire Regiment: Service
https://web.archive.[...]
2006-01-17
[5]
간행물
London Gazette
1937-01-29
[6]
간행물
London Gazette
1937-02-05
[7]
간행물
London Gazette
1938-04-01
[8]
뉴스
War Office Orders—List of Promotions
The Times
1940-04-30
[9]
간행물
London Gazette
1943-02-02
[10]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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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United Kingdom)
2009-09-18
[11]
간행물
London Gazette
1944-10-17
[12]
웹사이트
Bar to Recommendations for Honours and Awards (Army)—Image details—Coad, Basil Aubrey—Distinguished Service Order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United Kingdom)
2009-09-18
[13]
간행물
London Gazette
1945-10-09
[14]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6-11
[15]
간행물
London Gazette
1946-06-18
[16]
간행물
London Gazette
1948-05-18
[17]
뉴스
News In Brief
The Times
1949-06-15
[18]
논문
Korean War: British 27th Brigade Take Hill 282
http://www.historyne[...]
HistoryNet.com/[[Weider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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