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 공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 공작은 1337년 프라하에서 태어난 룩셈부르크 가문의 인물로, 보헤미아 왕 요한의 아들이자 룩셈부르크 백국과 그 부속 영토를 상속받았다. 1354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룩셈부르크 공작으로 승격되었으며, 브라반트 여공 요안나와 결혼하여 브라반트와 림부르크 공국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플랑드르 백작과의 분쟁, 바에스바일러 전투에서의 패배 등을 겪었으며, 룩셈부르크 백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여 79편의 시를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보헤미아의 귀족 -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30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해 활약한 보헤미아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했으나 독자적인 행보로 인해 암살당했다. - 보헤미아의 귀족 - 요한 폰 클레나우
오스트리아 제국군 장군인 요한 폰 클레나우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의 공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 1337년 출생 - 신의왕후
신의왕후는 안변 한씨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자 정종과 태종의 생모이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사망하여 왕비로 책봉되지는 못했으나 사후 왕후로 추존되어 왕태후로 격상되는 등 칭호에 대한 논란을 겪기도 했다. - 1337년 출생 - 정몽주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을 보급하고 이성계와 함께 왜구 및 여진족을 토벌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이방원에게 암살당한 고려의 문신이다. - 1383년 사망 - 가네요시 친왕
가네요시 친왕은 겐무 신정 붕괴 후 규슈로 파견되어 정서대장군으로 아시카가 막부에 대항했으나 세력을 잃고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왜구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묘켄사에 보협인탑을 봉납하고 구마모토현 야시로시에 묘소가 있다. - 1383년 사망 - 페르난두 1세
페르난두 1세는 1367년부터 1383년까지 포르투갈을 통치한 국왕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 주장, 레오노르 텔레스와의 결혼으로 국내 반발을 샀으며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를 초래했다.
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 공작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벤첼 1세 |
원어 이름 | Wenzel I. |
작위 | |
작위 | 룩셈부르크 백작 아를롱 백작 뒤르뷔 백작 |
통치 기간 | 1353년 - 1354년 3월 13일 |
이전 | 카를 4세 황제 |
작위 | 룩셈부르크 공작 |
통치 기간 | 1354년 3월 13일 - 1383년 12월 7일 |
계승 | 벤첼 4세 |
작위 | 브라반트 공작 림뷔르흐 공작 |
공동 통치 | 요하나와 함께 |
통치 기간 | 1355년 - 1383년 |
이전 | 얀 3세 |
계승 | 요하나 |
가문 | |
가문 | 룩셈부르크 가 |
아버지 | 요한 |
어머니 | 베아트리스 드 부르봉 |
결혼 | |
배우자 | 요하나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337년 2월 25일 |
출생지 | 프라하 |
사망일 | 1383년 12월 7일 |
사망지 | 룩셈부르크 |
매장지 | 오르발 수도원, 벨기에 |
2. 생애
벤첼 1세는 보헤미아 왕 요한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부르봉의 베아트리스 사이의 외아들로 1337년 2월 25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의 혼인 계약에 따라 그는 아버지의 부계 유산인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다.[1] 1353년, 이복형인 카를 4세는 당시 보헤미아 왕이자 룩셈부르크 백작이었는데,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벤첼에게 맡겼다. 이듬해인 1354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를 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
1352년 벤첼은 요안나(1322–1406)와 결혼했다. 그녀는 브라반트 공작 요한 3세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1355년 장인인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아내 요안나가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고, 벤첼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브라반트 영지의 분할을 막기 위해 벤첼과 요안나는 1356년의 환희 입성(Joyous Entry) 협정에 서명했지만, 요안나의 매형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상속권을 주장하며 브라반트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벤첼은 이 과정에서 브뤼셀이 플랑드르 군대에 점령되는 것을 막지 못했으나, 시민 에버라드 '트 세르클라스의 활약으로 도시를 되찾기도 했다.
이후 영지 내 분쟁 해결에 힘써야 했으며, 1371년에는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하여 율리히 공작 빌헬름 2세와 바에스바일러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군대의 일부와 귀족들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포로로 잡혀 11개월 동안 감금되었다.
벤첼은 후원자로서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 작성을 지원했으며, 직접 서정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시는 발라드 11편, 비르레 16편, 론도 52편 등 총 79편이 전해진다.
1383년 룩셈부르크에서 사망했으며, 나병(한센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심장을 꺼내 당시 브뤼셀에 머물던 아내 요안나에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 오르발 수도원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벤첼과 요안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룩셈부르크 공작위는 조카이자 카를 4세의 아들인 벤첼 2세가 계승했다. 아내 요안나는 벤첼 사후 브라반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2. 1. 가계 및 초기 생애
벤첼 1세는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보헤미아 왕 요한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부르봉의 베아트리스 사이의 외아들이다. 그의 부모의 혼인 계약에는 이 결혼에서 아들이 태어날 경우, 룩셈부르크 백국(요한 왕의 부계 유산)과 그에 속한 영지를 물려받기로 명시되어 있었다.[1] 벤첼은 1337년 2월 25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1352년, 벤첼은 요안나(1322년–1406년)와 결혼했다. 요안나는 브라반트 공작 요한 3세와 마리 데브뢰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이듬해인 1353년, 벤첼의 이복형이자 당시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 그리고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던 카를 4세는 부친의 유산인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벤첼에게 맡겼다.
2. 2. 브라반트 여공과의 결혼
1352년 벤첼은 잔(1322년–1406년)과 결혼했다. 그녀는 요한 3세 공작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이 결혼을 통해 벤첼은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1355년 잔의 아버지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잔은 브라반트와 림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고 벤첼은 아내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브라반트 공국의 분할을 막고 영토의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벤첼과 잔은 1356년 환희 입성(Joyous Entry)으로 알려진 협정에 서명하여 브라반트의 불가분성을 보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잔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결혼한 매형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분할 상속을 요구하며 브라반트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벤첼은 전쟁 중에 브뤼셀이 플랑드르 군대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나, 시민 에버라드 '트 세르클라스의 용감한 활약 덕분에 도시를 되찾을 수 있었다.
2. 3. 플랑드르와의 분쟁
1355년 장인 브라반트 공작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아내 요안나는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다. 벤첼과 요안나는 브라반트 영지의 분할을 막기 위해 1356년의 환희 입성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요안나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결혼한 매형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공작령의 일부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분쟁이 발생했고, 벤첼은 루이 2세와 군사적으로 대립해야 했다.플랑드르 군대가 브뤼셀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에버라드 '트 세르클라스라는 인물의 활약 또는 브뤼셀 시민들의 도움으로 1356년 10월 도시를 되찾았다.
1356년 8월, 벤첼과 요안나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카를 4세는 마스트리흐트에서 관련 당사자들을 만나 중재를 시도했지만, 회의 결과 룩셈부르크 가문에게 불리하게 일부 협정이 무효화되었다. 결국 룩셈부르크 가문은 브라반트 상속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고, 요안나 사후에는 여동생 마르그리트가 상속하기로 결정되었다(단, 마르그리트는 1368년에 먼저 사망했다).
이후 벤첼은 영지 내의 여러 분쟁 처리에 집중해야 했다. 1371년에는 율리히 공작 빌헬름 2세와의 바에스바일러 전투에서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하여 참전했다가 큰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군대의 일부와 여러 귀족을 잃었으며, 자신도 포로로 잡혀 11개월 동안 감금되었다.
2. 4. 룩셈부르크 통치와 사망
1353년 이복형인 카를 4세로부터 부친의 유산인 룩셈부르크 백국의 통치를 위임받았다. 1354년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를 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1352년 요안나(1322–1406)와 결혼했다. 그녀는 브라반트 공작 요한 3세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1355년 장인 요한 3세가 사망하자 아내 요안나는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다. 벤첼과 요안나는 브라반트의 분할을 막기 위해 1356년의 환희 입성(Joyous Entry) 협정에 서명했으나, 요안나의 여동생 마르가레테의 남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공작령에 대한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브라반트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벤첼은 플랑드르 군대가 브뤼셀을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에버라드 '트 세르클라스의 활약으로 도시를 되찾았다. 1356년 8월에는 카를 4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회의 결과 룩셈부르크 가문에 불리하게 협정의 일부가 수정되어 브라반트 상속권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벤첼은 주로 영지 내 분쟁 해결에 힘썼다. 1371년 자신의 군사력을 과신하여 율리히 공작 빌헬름 2세와 전쟁을 벌였으나, 바에스바일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군대의 상당수와 귀족들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11개월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벤첼은 1383년 룩셈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한센병(나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심장을 꺼내 당시 브뤼셀에 머물던 아내 요안나에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 오르발 수도원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벤첼과 요안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룩셈부르크 공작위는 조카이자 카를 4세의 아들인 벤첼 2세가 계승했다. 아내 요안나는 벤첼 사후 브라반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3. 유산
벤첼 1세는 룩셈부르크 백국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요안나는 브라반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룩셈부르크 공작위는 보헤미아의 벤첼 4세가 계승했다. 벤첼 1세는 나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심장을 시신에서 꺼내 브뤼셀에 머물고 있던 아내 요안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벨기에 오르발 수도원의 지하 묘지에 묻혔다.
룩셈부르크의 벤첼 1세는 문학적인 유산도 남겼다. 그는 장 프루아사르의 서사시 ''멜리아도르''에 삽입된 서정시를 직접 썼는데, 이는 1890년대 오귀스트 롱뇽에 의해 그의 작품임이 밝혀졌다. 벤첼은 이 연대기 작가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서정시는 총 79편으로, 11편의 발라드, 16편의 비르레, 52편의 론도로 구성되어 있다.
4. 가계도
세대 | 번호 | 이름 | 관계 (부모 번호) |
---|---|---|---|
본인 | 1 | 룩셈부르크 공작 벤첼 1세 | - |
부모 (1대조) | 2 | 보헤미아의 요한 | 아버지 (1의 부) |
3 | 부르봉의 베아트리스 | 어머니 (1의 모) | |
조부모 (2대조) | 4 |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 | 친할아버지 (2의 부) |
5 | 브라반트의 마르가레테 | 친할머니 (2의 모) | |
6 |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 외할아버지 (3의 부) | |
7 | 아베스느의 마리 | 외할머니 (3의 모) | |
증조부모 (3대조) | 8 |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6세 | 증조부 (4의 부) |
9 | 아베스느의 베아트리스 | 증조모 (4의 모) | |
10 | 브라반트 공작 요한 1세 | 증조부 (5의 부) | |
11 |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테 | 증조모 (5의 모) | |
12 |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 | 증조부 (6의 부) | |
13 | 부르봉의 베아트릭스 | 증조모 (6의 모) | |
14 | 홀란트 백작 요한 2세 | 증조부 (7의 부) | |
15 | 룩셈부르크의 필리파 | 증조모 (7의 모) | |
고조부모 (4대조) | 16 |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 | 고조부 (8의 부) |
17 | 바르의 마르가레테 | 고조모 (8의 모) | |
18 | 아베스느의 발두인 | 고조부 (9의 부) | |
19 | 쿠시의 펠리시테 | 고조모 (9의 모) | |
20 |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3세 | 고조부 (10의 부) | |
21 |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 | 고조모 (10의 모) | |
22 | 다마르탱의 기 | 고조부 (11의 부) | |
23 | 베튄의 마틸다 | 고조모 (11의 모) | |
24 | 프랑스의 루이 9세 | 고조부 (12의 부) | |
25 |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 고조모 (12의 모) | |
26 | 부르고뉴의 요한 | 고조부 (13의 부) | |
27 | 다마르탱의 아그네스 | 고조모 (13의 모) | |
28 | 아베스느의 요한 1세 | 고조부 (14의 부) | |
29 | 홀란트의 아델라이드 | 고조모 (14의 모) | |
30 |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 (= 16) | 고조부 (15의 부) | |
31 | 바르의 마르가레테 (= 17) | 고조모 (15의 모)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