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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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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베르성은 중세 포르투갈에서 구호기사단이 건설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성으로, 타구스 강 북쪽 지역을 구호기사단에 기증한 포르투갈의 산초 1세의 명에 따라 1194년에 건설되었다. 1336년부터 1341년까지 구호기사단의 지휘 아래 있었지만, 이후 지방 요새로 사용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개조 및 재건되었으며, 19세기에는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대대적인 재건축을 거쳐 1992년 IPPAR로 이관되었다. 성은 직사각형 요새와 르네상스 시대 예배당을 포함하며, 성벽과 탑, 내부 구조, 상 브라스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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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투갈의 성 - 상조르즈성
    상조르즈성은 포르투갈 리스본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성으로, 로마 시대 요새로 건설되어 여러 민족의 지배를 거쳐 포르투갈 왕국 왕궁으로도 사용되었으나 지진 등으로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며 현재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2. 역사

벨베르성은 중세 시대 포르투갈에서 구호기사단이 건설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이다.[1] 테주강 유역의 방어를 목적으로 포르투갈의 산초 1세가 기사단에게 땅을 기증하여 1194년 건설이 시작되었고, 1212년에 완공되었다.[1][2] 초기에는 국경 방어의 핵심 역할을 했으며 국가의 주요 재산 보관소 중 하나로 지정될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다.[1][4]

이후 수 세기 동안 성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군사적 특징을 보존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개조되었다.[1] 특히 14세기 포르투갈의 주앙 1세 통치 시기에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분쟁에 대비해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방어 시설 확장 및 재건이 이루어졌다.[1][2] 16세기에는 성벽 외부에 상 브라스 소성당이 추가로 건설되었다.[2]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성은 점차 잊혀져 한때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1][2] 1909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39년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복원 및 보수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1][2] 1992년부터는 포르투갈 건축 유산 연구소(IPPAR) 및 그 후신 기관의 관리하에 체계적인 복원과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다.[2]

2. 1. 초기 역사 (12세기 ~ 13세기)

성 입구로 이어지는 주 계단


테주강이 내려다보이는 성벽의 세부 모습


벨베르성은 중세 시대 포르투갈에서 구호기사단이 건설한 첫 번째 성이자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이다.[1] 이 성은 테주강을 따라 들어오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포르투갈의 산초 1세가 성을 짓는다는 조건으로 땅을 기증하면서 건설이 시작되었다.[1]

1194년, 산초 1세는 당시 '귀딘테스타(Guidintesta)' 또는 '귀디 인 테스타(Guidi in Testa)'(혹은 코스타(Costa))로 알려진 테주강 북쪽 지역을 구호기사단의 수도원장이었던 아폰수 파에스에게 넘겨주었다.[1][2] 이를 통해 왕은 테주강을 따라 형성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사이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템플 기사단이 다른 국경 지역에서 영향력을 거의 독점하도록 하는 동시에 구호기사단에게는 이 지역의 방어를 맡기고자 했다.[1][3] 왕은 새로 지어질 성과 그 주변 지역을 '벨베르(Belver)'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산초 1세는 유언을 통해 성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구호기사단에게 넘겼다.[2]

1210년경에는 성의 건설이 상당히 진행되어 사람들이 상주하며 방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1] 산초 1세의 유언장에는 벨베르성이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는 중요한 여섯 곳 중 하나로 명시되어 있어, 국경 지대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1][4] 성의 최종 건설은 1212년에 완료되었다.

2. 2.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와 벨베르 성 (14세기)

1336년부터 1341년까지 벨베르는 구호기사단의 중요한 지휘 거점 중 하나였으나, 공식적인 본부나 거처는 아니었으며 기사단은 여전히 레사 두 발리오 마을에 머물렀다.[2] 기사단 수장이 크라투 시립 자치구의 플로르 다 로사 교구로 본거지를 옮겨 크라투 수도원장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벨베르 성과 그 공동체는 지방의 요새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2]

그러나 14세기 후반, 주앙 1세가 왕위에 오른 후 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의 지휘 아래 1390년 벨베르 성의 방어 시설을 확장하고 재건하도록 했다.[1][2] 이는 당시의 군사적 상황에 맞추어 성을 개조하고 병영 시설을 개선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1]

2. 3. 근세 및 현대 (16세기 ~ 현재)

성벽 밖에 위치한 상 브라스 소성당


16세기에 성벽 밖에 상 브라스 소성당이 완공되었다.[2] 17세기에도 코스만데르에 의해 비슷한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다.[2]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성은 벨베르 교구 위에 자리한 웅장한 모습 외에는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1846년에는 정착촌의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1][2]

1909년 발생한 지진은 요새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1] 이후 1939년부터 1946년 사이에 대대적인 재건축이 진행되었으며, 포르투갈의 건축 및 기념물 관리국(DGEMN - ''Direcção Geral dos Edifícios e Monumentos Nacionais'')은 성 부지에서 매년 작업을 계속하며 성의 주요 부분을 재건, 철거, 건설하는 작업을 이어갔다.[1][2] 1976년에는 성벽과 지붕이 수리되었고, 소성당의 문과 제단도 개조되었다. 1986년에는 부지 내 조명이 현대화되었고 지붕이 다시 한번 수리되었다.[2] 1987년부터 1988년 사이에는 돈전(주탑)의 석고, 석조, 포장 도로 등에 대한 수리가 완료되었다.[2]

1992년 6월 1일, 벨베르 성은 법령 106F/92에 따라 포르투갈 건축 유산 연구소(IPPAR - ''Instituto Português do Património Arquitectónico'')로 관리 주체가 이전되었다. IPPAR은 이후 건축 및 고고학 유산 관리 연구소(IGESPAR)에 흡수되었으며, 이 기관들이 성의 완전한 복원과 보존을 책임지게 되었다.[2]

3. 건축

벨베르성은 타구스강 오른쪽 강변, 리베이루 데 벨베르 강 합류 지점 근처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2] 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언덕 위 공간을 둘러싼 직사각형 요새 형태이며, 내부에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예배당을 포함한다.[2][5]

성의 주요 방어 시설로는 돈존(킵)과 이를 둘러싼 성벽, 그리고 여러 개의 탑이 있다.[2] 성벽은 돈존 주변을 반원형으로 감싸며, 난간과 작은 탑들로 강화되었다.[2] 성 내부에는 과거 알카이데(성주)의 거주지와 수비대 막사, 그리고 저수조 등의 시설 유적이 남아 있다.[2][1][6] 성의 중앙 동쪽에는 상 브라스 예배당이 위치한다.[2]

3. 1. 성벽과 탑

성은 언덕 꼭대기의 공간을 둘러싸는 벽으로 둘러싸인 주요 직사각형 요새 형태를 띤다.[2][5] 성문은 남쪽에 있으며, 앞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있고 양쪽으로는 디니스 왕 시대의 디자인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탑이 서 있다.[2][5] 입구를 지나면 둥근 아치 3개로 이루어진 출입구가 나온다.[2]

성을 둘러싼 성벽과 흉벽은 킵 주변을 반원형 타원 형태로 따라가며, 난간과 작은 탑들로 덮여 있다. 또한 입구 주변과 동서남북 각 방향에는 전략적으로 배치된 큐비클 타워(작은 방어탑)가 있다.[10][2] 성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입구인 '배신자의 문'은 성의 절벽 쪽에 있으며, 둥근 탑이 이 문을 보호하고 있다.[11][1][7]

3. 2. 내부 구조

성의 계획은 언덕 꼭대기 공간을 둘러싼 벽으로 이루어진 주요 직사각형 요새와 르네상스 시대의 예배당을 포함한다. 성문은 남쪽에 위치하며, 앞에는 돌로 만든 계단이 있고 양쪽으로는 드니 왕 시대의 디자인으로 추정되는 탑 두 개가 서 있다.[2][5]

성문 입구를 지나면 둥근 아치 형태의 출입구 세 개가 있으며, 이를 통해 성 내부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완성된 구조물의 중심에는 돈존이 자리 잡고 있다. 돈존의 1층에는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격자형 출입구가 있다.[2] 돈존의 입구 홀에는 직사각형 창문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2] 2층 홀 역시 직사각형 창문과 아치형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과거 베란다가 있었던 흔적으로 연결된다. 또 다른 출입구는 성벽으로 접근할 수 있는 상층부로 이어진다.[1][2][6]

성을 둘러싼 성벽은 돈존 주위를 반원형으로 따라가며, 파라펫(난간)과 작은 탑들로 덮여 있다. 또한 입구 주변과 각 방향에는 전략적으로 배치된 큐비클 타워(cubicle tower)가 있다.[2] 성으로 들어가는 두 번째 입구인 '배신자의 문'은 성의 절벽 쪽에 위치하며, 둥근 탑이 이를 보호하고 있다.[1][7]

알카이데의 거주지와 수비대 막사의 유적은 성의 남동쪽, 남쪽, 남서쪽 부분에 남아 있으며, 세 개의 아치형 통로가 있는 공간에 자리한다.[2] 북쪽에는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가 성을 개조할 때 건설한 수비대용 저수조 유적이 있다.[1][6]

성의 중앙 근처 동쪽, 돈존 옆에는 상 브라스 예배당이 있다.[2] 예배당 내부에는 높은 제단이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가져온 여러 흉상과 성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크라투의 대수도원장이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아들인 루이스 왕자에게 헌정한 것이다.[1] 이 유물들은 이탈리아의 유사 유물들과 비교되며 성지의 전설적인 유물과 관련된 종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1]

3. 3. 상 브라스 예배당 (Capela de São Brás)

성의 중앙 근처 동쪽, 요새 옆에 상 브라스 예배당이 자리 잡고 있다.[2] 예배당 내부에는 대제단이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온 여러 흉상과 성유물이 있다. 이 유물들은 크라투의 대수도원장이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아들인 루이스 왕자에게 헌정한 것이다.[1] 또한, 이탈리아 양식을 따르면서도, 성스러운 땅에서 온 유물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식들이 특징이다.[1]

참조

[1] 간행물 Castelo de Belver http://www.igespar.p[...] IGESPAR - Instituto Gestão do Patrimonio Arquitectónico e Arqueológico 2011-08-13
[2] 웹사이트 Castelo de Belver http://www.monumento[...] SIPA – Sistema de Informação para o Património Arquitectónico 2011-08-13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웹인용 Castelo de Belver http://www.monumento[...] SIPA – Sistema de Informação para o Património Arquitectónico 2011-08-13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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