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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 요시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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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벳쇼 요시하루는 벳쇼 시게무네의 아들로, 1591년 가문을 상속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과 후시미성 축성에 참여하여 다지마에서 영지를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인정받았고, 이후 단바 유라번으로 봉해졌다.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영지가 늘었지만, 1628년 참근교대를 게을리하고 매사냥을 한 죄로 개역되어 가문은 멸망했다. 이후 아들이 사면되어 가문은 존속되었으며, 요시하루는 아들 밑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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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 요시하루
인물 정보
씨명별소씨
이름벳쇼 요시하루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쇼 7년 (1579년)
사망쇼오 3년 7월 13일 (1654년8월 25일)
관위종5위 하분고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다지마야기 번 번주
가족아버지: 벳쇼 시게무네, 어머니: 후쿠시마 마사노부 딸
형제자매요시하루, 무네하루, 시게이에, 노리카네, 후쿠시마 마사유키, 후쿠시마 마사노부, 벳쇼 손지로 부인 등
배우자정실: 야마자키 가타이에 딸, 계실?: 후쿠시마 마사노부 딸
자녀모리하루

2. 생애

벳쇼 시게무네의 아들이다. 일설에는 시게무네의 조카 나가하루의 아들로, 1580년 미키성이 함락될 때 가신에 의해 구출되어 시게무네에게 보호되었다는 설도 있다.[3]

1591년 시게무네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1592년부터 1594년까지 후시미성 축성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활동하며 다지마에서 야기령을 받았다.[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참가했지만,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 이는 요시하루의 고모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였고, 처남 마고지로가 동군에 기여한 덕분이었다. 이후 다지마 야기령에서 단바 유라번으로 전봉되었다.[3]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단바 내에 5,000석을 추가로 받아 총 2만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1628년 꾀병으로 참근교대를 게을리하고 매사냥을 한 사실이 발각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벳쇼씨는 멸망했다.[3]

1648년 아들 모리하루는 사면되어 1,000섬을 받아 후손은 700석의 하타모토로 존속했다. 요시하루는 아들 밑에서 여생을 보냈다.[3]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벳쇼 시게무네의 아들이다. 다른 설로는 시게무네의 조카 나가하루의 아들이며, 1580년(덴쇼 8년) 미키성이 함락되었을 때 가신에 의해 구출되어 시게무네에게 보호되었다는 설이 있다.[3]

1591년(덴쇼 19년), 시게무네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2. 2. 도요토미 가신 시절

벳쇼 시게무네의 아들이다. 다른 설로는 시게무네의 조카 나가하루의 아들로 1580년미키성이 함락되었을 때 가신에 의해 구출되어 시게무네에게 보호되었다는 설이 있다.

1591년, 시게무네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한다. 1592년 ~ 1594년 후시미성 축성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진력했다. 공으로 다지마에서 야기령을 받았다.[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참가했지만,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왠지 모르게 소령을 안도받았다. 이는 요시하루의 고모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처남인 마고지로가 동군에 기여한 공에 의한 것이었다. 다지마 야기령에서 단바 유라번으로 전봉된다.[3]

1615년 오사카 전투 전공으로 단바 내에 5,000석이 추가되어 이시다카는 2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1628년, 꾀병으로 참근을 게을리하고, 그 뒤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발각되어 막명에 의해 개역되고,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벳쇼씨는 멸망했다.[3]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이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참가했지만,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소령을 안도받았다. 이는 요시하루의 고모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였기 때문이며, 처남인 마고지로가 동군에 기여한 공도 있었다. 이후 다지마 야기령에서 단바 유라번으로 전봉되었다.[3]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 전공으로 단바 내에 5,000석이 추가되어 이시다카는 2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간에이 5년(1628년), 꾀병으로 참근을 게을리하고 사냥을 하다가 발각되어 막명에 의해 개역되고, 다이묘가로서의 벳쇼씨는 멸망했다.[3]

게이안 원년(1648년) 장남 모리하루(守治|모리하루일본어)는 사면되고 1,000섬을 받아 후손은 700석 하타모토로 존속했다. 요시하루는 아들 밑에서 여생을 보냈다.[3]

2. 4. 오사카 전투와 개역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단바국 내에 5,000석을 추가로 받아 이시다카(石高|석고일본어)는 2만 석이 되었다.[3] 그러나 간에이 5년(1628년), 꾀병으로 참근교대(에도 시대에 다이묘가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며 쇼군을 섬기던 제도)를 게을리하고, 그 뒤에서 사냥을 하다가 발각되어 막부의 명령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는 개역을 당했다.[3] 이로써 다이묘 가문으로서의 벳쇼씨는 멸망했다.[3]

요시하루는 특별히 악정을 펼쳤다는 흔적도 없고, 개역 이유도 '병을 핑계로 매사냥을 즐기며 참근을 게을리했다'는 것 외에, 앞서 언급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를 소홀히 대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어, 개역된 정확한 연월일조차도 여러 설에서 드러나지 않는다.[3] 또 비슷한 이유로 개역된 인물도 드물다.[3]

막부가 억지스러운 이유를 붙여가면서까지 개역에 이르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동생 마사유키가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양자가 되어 있다는 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해 단고 다나베성을 공격한 경위가 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안정기에 들어간 에도 막부로부터 구 도요토미계 다이묘로 인식되어,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개역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2. 5. 만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속해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참가했지만,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왠지 모르게 소령을 안도받았다.[3] 이는 요시하루의 고모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였기 때문이며, 처남인 벳쇼 마고지로가 동군에 기여한 공도 있었다.[3] 다지마 야기령에서 단바 유라번으로 전봉되었다.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 전공으로 단바 내에 5,000석이 추가되어 이시다카는 2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간에이 5년(1628년), 꾀병으로 참근을 게을리하고, 그 뒤에서 사냥을 하다가 발각되어 막명에 의해 개역되고, 다이묘가로서의 벳쇼씨는 멸망했다.

게이안 원년(1648년) 장남 모리하루는 사면되고[3] 1,000섬을 더 주어 후손은 700석 기본으로 존속했다. 요시하루는 아들 밑에서 여생을 보냈다.

3.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벳쇼 시게무네
정실야마자키 카타이에의 딸
계실후쿠시마 마사노부의 딸
생모 불명의 자녀


참조

[1] 문서 承応元年(1652年)7月13日に死去とする説もある
[2] 문서 尾張群書系図部集
[3] 문서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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