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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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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키성은 1492년 벳쇼 노리하루가 축성한 일본의 성이다. 157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으로 시작된 미키 전투에서 1580년 함락되었으며, 이후 천수가 증축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메지성의 지성이 되었으나, 1617년 일국일성령에 따라 폐성되었고, 1619년 아카시성 축조에 사용되었다. 벳쇼 나가하루가 농성하며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했다. 현재는 미키시립 도서관, 호리미츠 미술관 등이 위치해 있으며, 미키 전투와 관련된 유적과 부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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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성
개요
미키성 재건된 석벽
미키성 재건된 석벽
본명부산성, 별소성
종류야마지로식 성곽
위치아이오이시, 효고현, 일본
상태폐허
문화재 지정국가 지정 사적
역사
축성1492년 경
축성자벳쇼 나가하루
주요 전투미키성 전투
철거1616년
주요 인물벳쇼 나가하루
구조
구조해발 산성, 구릉성
천수각 구조불명 (천수각이라고 불리는 땅이 있음)
건축 자재구루와
토루
해자
우물
천수대 등
개축마에노 나가야스, 나카가와 히데마사
소유 및 통제
소유벳쇼씨
통제벳쇼씨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무장

2. 역사

1578년부터 1년 10개월 동안 오다 가문의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 지역 소영주 벳쇼 나가하루간의 전투(미키 전투)로 익히 잘 알려진 성이다. 미키 전투 당시 하리마 동부 지역은 벳쇼 가문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하시바 히데요시의 집요한 공격으로 히데요시가 승리했다.

본래 성곽은 현재 미키 시가지 부분도 포함하고 있지만, 혼마루 주변만 우에노마루 공원(上の丸公園)으로 정비되었다. 공원 내에는 벳쇼 나가하루의 동상과 그를 기리는 가비가 세워져 있다. 또, 성 밖과 연결되어 있다는 간칸이도(かんかん井戸: 간칸 우물)가 있다. 공원 주변에는 미키시립도서관과 나메라 상가(滑原商店街)가 있다.

매년 5월 5일에는 벳쇼 나가하루를 기리는 벳쇼 공(公) 봄 축제가 열린다.

미키성은 미키시 중심부의 가코강 지류인 미노강을 마주보는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있었다.[2] 이 지역은 하리마국 동부의 중심지였으며, 롯코 산맥에 의해 고베시와 분리되어 있었다. 강과 도로를 통해 가능해진 교통과 상업의 흐름 때문에, 미키시는 당시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자 산업의 중심지로 여겨졌다.[3] 성은 산, 계곡, 절벽과 같은 자연적 방벽으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의 남동쪽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다.[8]

성터는 미노 강 남안의 대지에 있으며, 아카시 북쪽 약 19km, 히메지 동쪽 약 3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비옥한 토지는 아니었지만, 교토-아리마는 예로부터 정비된 교통의 요지(유야마 가도)였다.

덴쇼 6년(1578년)부터 2년(20개월)에 걸쳐, 오다 측의 하시바 히데요시벳쇼 나가하루 사이에서 병량 공세, 미키 합전(미키의 말라 죽이기)을 포함해, 격렬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 미키 합전 당시에는 칸키 성(이나미 군), 시카타 성(이나미 군), 오고 성(미노 군), 다카사고 성(가코 군), 하타니 성(아카시 군) 등 동파리마 각지의 성이 지성으로서 벳쇼 측에 따랐다.

'하시바 히데요시 미키 성 포위도'


2014년 대하 드라마 "군사 칸베"가 방영된 이후, 미키성 유적과 주변 지역 방문객이 증가했다. 이 드라마는 히메지와 미키에서 센고쿠 시대 장군 구로다 요시타카의 삶을 다룬다. 미키시의 주민과 지방 정부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성 유적을 홍보하고 기념품을 판매하여 도시의 역사 유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9] 그 해, 미키시 자원봉사자들은 성 유적, 재건된 외벽, 성터 주변의 시대 건물 등을 포함한 미키 포위 공격 현장 투어를 시작했다.[10]

미키 포위 공격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키성에 토루를 건설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2013년 일본 정부에 의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1]

'''역대 미키 성주'''
대수성주
1벳쇼 노리하루
2벳쇼 노리사다
3벳쇼 나리하루
4벳쇼 야스하루
5벳쇼 나가하루
6스기하라 이에쓰구
7마에노 나가야스
8나카가와 히데마사
9나카가와 히데나리
10스기하라 나가후사 (도요오카성 성주 겸임)
11이키 타다쓰구 (이케다 테루마사의 가로)
12이키 타다시게


2. 1.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1492년 벳쇼 나가하루의 고조부인 벳쇼 노리하루가 가마야마 성을 축성하였다.[2] 1530년 아카마쓰 가문에 반기를 든 우라가미 무라무네에게 성이 함락되어, 미키 성주 벳쇼 나리하루는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2] 1531년 우라가미 무라무네가 죽자 벳쇼 나리하루는 성을 탈환하였다.[2]

벳쇼 씨는 아카마쓰 씨의 분가였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아카마쓰 씨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였다.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암살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가문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오닌의 난 이후 아카마쓰 씨는 하리마를 되찾았고 벳쇼 씨를 하리마 동부의 부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벳쇼 씨는 곧 이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1530년 우라가미 씨가 미키 성을 공격하여 벳쇼 나리하루를 일시적으로 몰아냈지만, 그해 말 벳쇼 나리하루는 아마고 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550년경, 벳쇼 씨는 미요시 씨의 침략에 직면하여 항복했지만, 미요시 나가요시가 사망한 후 독립을 되찾았다. 이 기간 동안 미키 성은 크게 확장되었다.[2]

1578년 오다 노부나가의 서일본 정복이 시작되었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의 지원을 받아 하리마를 통일했다. 그러나 벳쇼 씨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미키 전투가 발생했다.[2]

미키 성의 축성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492년 전후로 추정된다. 벳쇼 노리하루는 아카마쓰 마사노리를 옹호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도움을 받아 가독을 부활시켰고, 그 후 미키 성을 축성하여 벳쇼 씨는 아카마쓰 씨 가신단 중에서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벳쇼 나리하루 시대에 미키 성은 전장이 되었고, 우라가미 무라무네와의 내분으로 1530년 함락되었지만, 이듬해 나리하루는 미키 성을 되찾고 세력을 확장했다.

1538년1539년에는 아마고 하루히사가 미키 성을 공격했지만, 벳쇼 나리하루는 이를 막아내고 아카마쓰 씨로부터 호소카와 하루모토 파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공격을 받아 1554년 미키 성의 지성 7개가 함락되었고, 1555년 벳쇼 나리하루는 미요시 군과 화의를 맺었다. 그 후 벳쇼 나리하루는 미요시 삼인중 군에 편입되어 야마토 국까지 출진했고, 1559년에는 의등 씨를 멸망시켰다.

벳쇼 야스하루 시대인 1568년에는 삼인중을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 편에 섰다. 1569년 벳쇼 야스하루는 오다 군으로서 니시하리마로 쳐들어갔지만, 우라가미 무네카게가 미키 성을 습격했다. 1570년 다시 니시하리마로 쳐들어갔고, 벳쇼 나가하루 시대에는 기타하리마의 아리타 씨를 멸망시키고 센고쿠 다이묘화 해 갔다.

1578년 벳쇼 나가하루는 모리 씨 공격의 선봉을 맡겠다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약속했지만, 돌연 미키 성에 농성하여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오다 군은 미키 성을 포위하고 군량을 끊는 전술을 썼고, 1580년 벳쇼 나가하루는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그 후 히데요시는 히메지 성을 거성으로 삼고, 미키 성에는 조다이를 두었다. 1585년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입성했지만, 1592년 조선 출병에서 전사하자 동생 나카가와 히데나리가 뒤를 이었고, 1594년 분고 국으로 이봉되었다. 그 후 도요토미 씨의 직할지가 되어 성번이 들어갔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케다 테루마사가 하리마 52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히메지 성주가 되자, 미키 성도 6개의 지성 중 하나가 되었고, 이키 타다쓰구가 3만 석을 지행하고 미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 후 이키 타다시게가 이었지만 1615년 일국일성령에 의해 파각되었다.

이키타다시게는 국替え로 인해 물러났고, 아카시 성 축성 시에 미키 성의 고재도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연호서력주요 사건
메이오 원년1492년벳쇼 노리하루에 의해 축성.
교로쿠 3년1530년우라가미 무라무네에 의해 함락. 성주인 벳쇼 나리하루는 도주.
교로쿠 4년1531년오모노 붕괴로 우라가미 무라무네가 사망함에 따라 나리하루가 미키 성을 탈환.
덴쇼 6년1578년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한 미키 전투가 시작됨.
덴쇼 8년1580년하시바 히데요시의 "미키 말려 죽이기"로 함락.



'''역대 성주'''
초대2대3대4대5대6대
성주명벳쇼 노리하루벳쇼 노리사다벳쇼 나리하루벳쇼 야스하루벳쇼 나가하루스기하라 이에쓰구
7대8대9대10대11대12대
성주명마에노 나가야스나카가와 히데마사나카가와 히데나리스기하라 나가후사
(도요오카 성 성주가 영유)
이키 타다쓰구
(이케다 테루마사의 가로)
이키 타다시게


2.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157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의 미키 성 공격이 시작된다. (미키 전투)[2]

1580년 히데요시에게 성이 함락되었고, 이 무렵 천수각이 증축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한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일국에 이봉되어 이 지역을 다스린다. 이때 미키 성은 히메지성의 지성(枝城)으로 되었다.

1617년 일국일성령으로 성은 폐성된다.

1619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령에 따라 아카시 성이 축조되었고, 이때 미키 성의 부재가 사용되었다.

덴쇼 6년(1578년) 3월 7일, 모리씨 공격의 선봉을 맡는다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약속한 벳쇼 나가하루는 돌연 미키 성에 농성,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가코가와 회담에서 의견 대립이 원인으로 생각되지만, 『일본 성곽 대계』에서는 그 전에 모리 테루모토와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고, 테루모토의 외교상 승리라고 해설하고 있다.

당초 오다군은 당황한 듯하지만, 미키 성의 조카마치를 불태우고, 감시하는 번성만을 두고, 벳쇼 나가하루 군에 속해 있는 을 하나하나 함락시켜 갔다. 이듬해 덴쇼 7년(1579년) 5월 말에는 완전히 미키 성을 포위하여 군량을 끊는 전술을 썼다. 하시바 히데요시 부대는 튀어나온 말뚝을 치는 듯한 전술로 스스로 쳐들어가는 일은 없이, 같은 해 2월과 9월에 벳쇼 나가하루 군은 합전을 걸어왔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듬해 덴쇼 8년(1580년) 1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공성을 시작하고, 같은 해 1월 15일에 개성을 권고했고, 나가하루도 이에 응하여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장기전이 되었지만, 미키 성에 대한 공성전은 반 달 만에 결착이 났다.

:''이 때의 자세한 합전의 모습은 미키 전투를 참조.''

그 후 히데요시는 히메지성을 거성으로 삼고, 미키 성에는 조다이를 들였다. 덴쇼 13년(1585년) 8월에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입성하지만, 분로쿠 원년(1592년)에 히데마사가 조선 출병에서 전사하자 동생 나카가와 히데나리가 뒤를 잇고, 분로쿠 3년(1594년)에 분고로 이봉되었다. 그 후는 도요토미씨의 직할지가 되어 성번이 들어갔다. 성번에는 가스야 내선, 후쿠하라 시치로자에몬, 후쿠하라 우마노스케, 아사히 우에몬다이후, 아오키 쇼칸, 스기하라 호키노카미의 이름이 역대로 전해지지만, 실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도요오카성 주인 스기하라가 미키 성번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서가 남아 있다[15]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 이케다 테루마사가 하리마 52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히메지 성주가 되자, 미키 성도 6개의 지성 중 하나가 되어, 숙로 이키 타다쓰구가 3만 석을 지행하고 미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 후 이키 타다시게가 잇지만 겐나 원년(1615년), 일국일성령에 의해 파각되었다.

이키 타다시게는 국替え로 인해 물러났고, 아카시성 축성 시에 미키 성의 고재도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미키 성 역대 성주'''
대수성주
1벳쇼 노리하루
2벳쇼 노리사다
3벳쇼 나리하루
4벳쇼 야스하루
5벳쇼 나가하루
6스기하라 이에쓰구
7마에노 나가야스
8나카가와 히데마사
9나카가와 히데나리
10스기하라 나가후사 (도요오카성 성주 겸임)
11이키 타다쓰구 (이케다 테루마사의 가로)
12이키 타다시게


2. 3. 현대

1492년벳쇼 나가하루가 가문의 주요 거점으로 이 지역에 처음 축성했다. 벳쇼 씨는 아카마쓰 씨의 분가였으며, 아카마쓰 씨를 대신하여 셋쓰국하리마국의 일부를 지배했다. 오닌의 난 동안, 이전 아카마쓰 씨의 영토 대부분은 야마나 씨에게 주어졌지만, 많은 갈등 끝에 아카마쓰 씨는 하리마를 되찾았고 벳쇼 씨를 하리마 동부의 부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벳쇼 씨는 곧 이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1530년, 우라가미 씨가 미키 성을 공격하여 벳쇼 나리하루(벳쇼 나가하루의 손자)를 일시적으로 몰아냈으나, 그해 말 벳쇼 나리하루는 아마고 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550년경, 벳쇼 씨는 동쪽에서 미요시 씨의 침략을 받았으나, 미요시 나가요시가 사망한 후 벳쇼 씨는 독립을 되찾았다. 이 기간 동안 미키성은 크게 확장되었다.[2]

1577년, 오다 노부나가는 서일본 정복을 시작했고, 하시바 히데요시를 자신의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히데요시는 벳쇼 나리하루의 손자인 벳쇼 나가하루의 지원을 받아 하리마를 빠르게 통일했다. 그러나 1578년 3월, 벳쇼 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미키성 전투가 발생했다.[2]

1568년, 벳쇼 야스하루는 미요시 삼인중을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 편에 섰다. 1569년, 야스하루는 오다 군으로서 니시하리마로 쳐들어갔지만, 반대로 삼인중 군으로서 우라가미 무네카게가 미키 성으로 습격해 왔다. 1570년, 야스하루는 다시 니시하리마로 쳐들어갔다. 이후 당주가 벳쇼 나가하루로 바뀌고, 기타하리마의 아리타 씨도 멸망시키면서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해 갔다.

1578년 3월 7일, 모리 씨 공격의 선봉을 맡는다고 노부나가에게 약속한 나가하루는 돌연 미키 성에 농성하며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가코가와 회담에서 의견 대립이 원인으로 생각되지만, 『일본 성곽 대계』에서는 그 전에 모리 테루모토와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고, 테루모토의 외교상 승리라고 해설하고 있다.

당초 오다군은 당황한 듯했지만, 미키 성의 조카마치를 불태우고, 감시하는 번성만을 두고, 벳쇼 나가하루 군에 속해 있는 을 하나하나 함락시켜 갔다. 1579년 5월 말에는 완전히 미키 성을 포위하여 군량을 끊는 전술을 썼다. 하시바 히데요시 부대는 튀어나온 말뚝을 치는 듯한 전술로 스스로 쳐들어가는 일은 없이, 같은 해 2월과 9월에 벳쇼 나가하루 군은 합전을 걸어왔지만, 모두 패배했다. 이듬해 1580년 1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공성을 시작하고, 같은 해 1월 15일에 개성을 권고했고, 나가하루도 이에 응하여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장기전이 되었지만, 미키 성에 대한 공성전은 반 달 만에 결착이 났다.

:''이 때의 자세한 합전의 모습은 미키 전투를 참조.''

그 후 히데요시는 히메지성을 거성으로 삼고, 미키 성에는 조다이를 들였다. 1585년 8월에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입성하지만, 1592년에 히데마사가 조선 출병에서 전사하자 동생 나카가와 히데나리가 뒤를 잇고, 1594년분고로 이봉되었다. 그 후는 도요토미 씨의 직할지가 되어 성번이 들어갔다. 성번에는 가스야 내선, 후쿠하라 시치로자에몬, 후쿠하라 우마노스케, 아사히 우에몬다이후, 아오키 쇼칸, 스기하라 호키노카미의 이름이 역대로 전해지지만, 실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도요오카성 주인 스기하라가 미키 성번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서가 남아 있다.[15]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52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히메지 성주가 되자, 미키 성도 6개의 지성 중 하나가 되어, 숙로 이기 타다쓰구가 3만 석을 지행하고 미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 후 이기 타다시게가 잇지만 1615년, 일국일성령에 의해 파각되었다.

이기타다시게는 국替え로 인해 물러났고, 아카시성 축성 시에 미키 성의 고재도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2014년 대하 드라마 "군사 칸베"가 방영된 이후, 미키성 유적과 주변 지역 방문객이 증가했다. 이 드라마는 히메지와 미키에서 센고쿠 시대 장군 구로다 요시타카의 삶을 다룬다. 미키시의 주민과 지방 정부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성 유적을 홍보하고 기념품을 판매하여 도시의 역사 유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9] 그 해, 미키시 자원봉사자들은 성 유적, 재건된 외벽, 성터 주변의 시대 건물 등을 포함한 미키 포위 공격 현장 투어를 시작했다.[10]

미키 포위 공격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키성에 토루를 건설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2013년 일본 정부에 의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1]

3. 구조

1578년부터 1년 10개월 동안 오다 가문의 하시바 히데요시와 이 지역 소영주 벳쇼 나가하루간의 전투(미키 전투)로 익히 잘 알려진 성이다.

미키성은 혼마루, 니시노마루, 신성 구루와, 운룡사, 매의 꼬리 구루와, 하치만 산 구루와, 히라야마마루 구루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조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가 축조한 부성군이 30곳, 토루선이 10km로 잇따라 발견되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3. 1. 주요 시설

미키성은 견고한 성이지만, 미키 전투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함락된 적이 있어, 그 때마다 확장하고 방비를 강화하여 일본 유수의 견고한 성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미키성터에는 당시를 짐작게 하는 물건은 매우 적다. 벳쇼 나가하루 공 400주년을 기념하여 콘크리트 담장이 축조되었지만, 이는 근세 성곽의 담장으로, 적어도 벳쇼 나가하루 시대의 담장은 토루와 담장을 연계한 듯한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혼마루 서쪽 절벽에는 허리 구루와와 같은 것이 있었지만 콘크리트로 굳혀 버렸다.

  • '''혼마루'''


천수대


이나리 신사


보육원


본환 우물터


본환은 해발 58.2m, 비고 약 20m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이나리 신사, 미키 시립 금속 자료관, 보육원이 있으며, 우물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본환 북쪽에는 간간 우물이라고 불리는 본환 우물이 있으며, 직경은 3.6m, 깊이는 25m이며, 쇼와 초기에 다시 파졌다. 이 우물에서 벳쇼 씨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등자가 출토되어 운룡사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본환에는 천수대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지만, 『미키성 복원도』에 따르면 이 장소는 "야구라"로 기재되어 있다. 보육원이 있는 장소는 "어전"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보육원 건설 시에 초석으로 보이는 석열과 다량의 숯이 출토되어 어전터로 추정된다. 『미키성 복원도』에는 어전 옆에 천수라고 불리는 구루와가 있지만, 『대공성전』에 따르면 벳쇼 나가하루 시대까지는 "천수는 축조되지 않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 '''니시노마루'''


혼마루와 니시노마루 사이의 빈 해자 터


이곳에는 미키 고등학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미키 역사 자료관(구 미키 시립 도서관)과 호리미츠 미술관이 건설되어 있다. 해발 57m로 에도 시대까지는 혼마루에 면한 장소에 야구라가 있었고, 높이 3.5m의 토루이가 있으며, 삼방에 빈 해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키 시립 도서관과 호리미츠 미술관 건설 전 발굴 조사에서는, 미키성의 창고 터로 보이는 장소에서 21개의 비젠야키 대옹이 발굴되었다. 탄화된 보리 알갱이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 저장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대옹의 복원품은 미키 시립 도서관에서 전시되어 있다. 발굴 조사에서는 문, 건물, 내해자, 외해자 터 등의 유구토기, 처마 둥근 기와, 동전, 짐승 뼈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 '''신성 구루와'''


택지화된 신성 곡륜 터


신성 곡륜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비교적 후세(미키 전투 이후가 아닌가 생각된다)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쇼와 35년(1960년)까지는 거의 원형을 유지했지만, 해자를 메우고 토루를 무너뜨려 도로로 만들고 택지화되었다. 토루의 높이는 2간으로 동쪽과 남쪽에 축조되었으며, 그 주위에는 빈 해자를 둘렀다. 특히 남쪽의 토루는 매의 꼬리 곡륜을 의식하여, 해자 바닥에서 토루의 최장부는 9m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구는 남서쪽에 있으며, 토루가 끊기는 장소에는 "시토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 '''운룡사'''


벳쇼 나가하루 공상


운룡사는 미키성의 성곽의 일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키 전투에서 개성(開城)할 때 벳쇼 나가하루가 운룡사의 승려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평소에 애용하던 물건들을 하사했는데, 그것들이 현재도 절의 보물로 남아있다. 이 절의 남쪽에는 벳쇼 나가하루와 테루코 부인의 목무덤이 남아있다. 벳쇼 나가하루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테루코 부인과 세 살 된 아들을 찔러 죽이고, 그 후 할복을 했다고 전해진다.

  • '''매의 꼬리 구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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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루와는 별명으로 "매의 꼬리 산성(鷹尾山城)"이라고도 불리며,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성 구루와보다 18m 높은 곳에 있어 혼마루, 니시노마루, 신성 구루와를 잘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는 토루와 해자가 있지만, 서쪽 구릉은 무너져 현재는 미키시청이 건설되어 있다.

  • '''하치만 산 구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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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루와는 별명으로 "미야노우에 요새"라고도 불리며, 운류지에서 남쪽으로 250m 떨어진 곳에 하치만 산 구루와가 있었다. 매의 꼬리 구루와와의 비고는 15m이며,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곳에 진을 치고 미키성을 내려다보았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미키시의 정수장이 있으며 유구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 '''히라야마마루 구루와'''


이 구루와는 미키성의 북동쪽 모서리에 있으며, 당주 벳쇼 나가하루의 둘째 동생인 지테이의 저택터로 전해진다. 게이초 6년(1601)에 이키 타다츠구가 성주가 되자, 선군 이케다 쓰네오키(쇼닌사이)의 추선을 위해 이 땅에 고코쿠산 쇼닌지(현·고코쿠산 쇼닌사)를 건립했다.

4. 미키 전투 (미키 공성전)

1578년부터 1580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가 벳쇼 나가하루가 지키는 미키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전투이다. (미키 전투)[2]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벳쇼 나가하루는 미키 성에 농성하며 저항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성을 포위하고 군량을 끊는 전술을 폈다. 히데요시 부대는 벳쇼 군의 공격을 모두 격퇴하며 미키 성을 압박했다.


  • 전투의 배경, 경과, 결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의 하위 문서를 참조.*

4. 1. 전투의 배경

미노강을 마주보는 가파른 절벽에 위치한 미키성은 하리마국 동부의 중심지였으며, 롯코 산맥에 의해 고베시와 분리되어 있었다.[2] 강과 도로를 통한 교통과 상업의 발달로, 미키시는 당시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자 산업의 중심지로 여겨졌다.[3] 성은 산, 계곡, 절벽과 같은 자연적 방벽으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의 남동쪽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다.[8]

1492년경 벳쇼 나가하루가 처음 축성한 이래, 벳쇼 씨는 아카마쓰 씨의 분가로서 셋쓰국과 하리마 일부를 지배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아카마쓰 씨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고,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요시노리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아카마쓰 씨는 하리마를 되찾고 벳쇼 씨를 하리마 동부의 부지사로 임명했다. 약화된 아카마쓰 씨는 벳쇼 씨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벳쇼 씨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2]

1530년, 우라가미 씨가 미키성을 공격하여 벳쇼 나리하루(벳쇼 나가하루의 손자)를 일시적으로 몰아냈으나, 나리하루는 북쪽에서 온 아마고 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550년경, 미요시 씨가 하리마를 침략하자 벳쇼 나리하루는 항복했지만,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 벳쇼 씨는 독립을 되찾았다. 이 기간 동안 미키성은 크게 확장되었다.[2]

1577년, 오다 노부나가는 서일본 정복을 시작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히데요시는 벳쇼 나리하루의 손자인 벳쇼 나가하루의 지원을 받아 하리마를 통일했다. 그러나 1578년 3월, 벳쇼 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미키성 전투가 발생했다.[2]

4. 2. 전투의 경과

1578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미키 전투가 시작되었다.[4] 히데요시는 성을 포위하고 벳쇼 나가하루의 식량 보급을 끊는 전략을 폈다.[5] 벳쇼는 서쪽의 모리 씨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히데요시의 군대는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히데요시는 서쪽에서 코즈키성을 공격받고, 벳쇼가 후방에서 위협하는 겹포위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코즈키 성을 포기하고 미키 성에 병력을 집중하는 결정을 내렸다.

1578년 11월, 키즈가와강 해전에서 모리 수군이 패배하면서 미키 성으로의 보급로는 결정적으로 끊겼다.[7] 1579년 10월, 비젠국의 우키타 씨족이 모리 씨족에서 히데요시 측으로 전향하면서 미키 성에 대한 외부 지원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7][4]

덴쇼 6년(1578년)부터 2년(20개월)에 걸쳐, 오다 측의 하시바 히데요시벳쇼 나가하루 사이에 병량 공세, 미키 합전(미키의 말라 죽이기)을 포함해 격렬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1580년 1월, 히데요시는 나가하루에게 항복을 권고했고, 나가하루는 이를 받아들여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미키 성은 함락되었고, 장기전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났다.

:''이 때의 자세한 합전의 모습은 미키 전투 문서를 참조.''

4. 3. 전투의 결과

157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의 미키 성 공격이 시작되어, 1580년 히데요시에게 함락되었다. (미키 전투)[2]

벳쇼 나가하루오다 노부나가에게 서일본 정복의 선봉을 맡기로 약속했지만, 1578년 3월 7일 돌연 미키 성에 농성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는 가코가와 회담에서의 의견 대립이 원인으로 추정되지만, 모리 데루모토와의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15]

오다 군은 초기에는 당황했지만, 미키 성의 조카마치를 불태우고 감시 초소를 설치한 뒤, 벳쇼 나가하루 군에 속한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1579년 5월 말에는 미키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군량을 끊는 전술을 사용했다. 벳쇼 나가하루 군은 1579년 2월과 9월에 합전을 시도했지만 모두 패배했다.

1580년 1월 6일부터 본격적인 공성이 시작되었고, 1월 15일 히데요시는 개성을 권고했다. 나가하루는 이에 응하여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장기전이었지만, 미키 성 공성전은 보름 만에 끝났다.[4][5][7]

이후 미키 성은 히데요시의 히메지 성 거점화에 따라 조다이가 관리하게 되었다. 1585년 8월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입성했지만, 1592년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전사하자 동생 나카가와 히데나리가 뒤를 이었다. 1594년 히데나리가 분고 국으로 이봉된 후에는 도요토미 씨 직할지가 되었고, 여러 성번이 번갈아 관리했지만, 그 실태는 명확하지 않다.[15]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52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히메지 성주가 되자, 미키 성은 6개의 지성 중 하나가 되었다. 숙로 이기 다다쓰구가 3만 석을 지행하며 성주가 되었으나, 이기 다다시게 대인 1615년 일국일성령에 의해 파각되었다.

이기 다다시게는 구니가에로 인해 물러났고, 아카시 성 축성 시 미키 성의 자재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5. 교통


  • 고베 전철 미키우에노하루 역 하차, 도보 3분
  • 전철 이용 시
  • * 고베 전철 아오 선 미키카미노마루역 하차 후, 도보 약 5분
  • 자동차 이용 시
  • * 산요 자동차도 미키오노 나들목 → 국도 175호선 → 효고현도 20호선
  • * 가미노마루 공원 내에 주차장 있음


; 고베에서 출발하는 경우

신고베역 또는 산노미야역에서 세이신·야마테선 지하철을 타고 미나토가와 공원역에서 하차, 신테쓰 아리마선으로 환승하여 스즈란다이역으로 이동한다. 스즈란다이역에서 신테쓰 아오선을 타고 미키 우에노마루역에서 하차하면 미키성 유적까지 도보로 5분 거리이다.[12]

신고베역은 도쿄에서 출발하는 신칸센을 이용할 수 있으며, 산노미야역은 오사카역에서 출발하는 산요 본선을 이용할 수 있다.

; 고베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산노미야역에 있는 산노미야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카미히메 니시와키 익스프레스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에노마루 버스 정류장에서 성터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이다.

; 미키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경우

산요 자동차도의 미키오노 나들목 톨게이트에서 국도 175호선 및 효고현도 20호선을 통해 미키성 터로 접근할 수 있다. 미키성의 주요 해자였던 우에노마루 공원에는 무료 주차장이 있다.

6. 주변 정보

미키성은 미키시 중심부의 가코강 지류인 미노강을 마주보는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있었다.[2] 이 지역은 하리마국 동부의 중심지였으며, 롯코 산맥에 의해 고베시와 분리되어 있었다. 강과 도로를 통해 가능해진 교통과 상업의 흐름 때문에, 미키시는 당시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자 산업의 중심지로 여겨졌다.[3] 성은 산, 계곡, 절벽과 같은 자연적 방벽으로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의 남동쪽 일부만 노출되어 있었다.[8]

성터는 미노 강 남안의 대지에 있으며, 아카시 북쪽 약 19km, 히메지 동쪽 약 3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비옥한 토지는 아니었지만, 교토-아리마는 예로부터 정비된 교통의 요지(유야마 가도)였다.

본래의 성곽은 현재의 미키 시가지 부분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혼마루 주변만 우와노마루 공원으로 남아 있다. 공원 내에는 벳쇼 나가하루의 사세구 "이제는 그저 원망도 없으리 모든 사람의 목숨과 바꿀 내 몸이라고 생각하니"의 노래비와, 성 밖으로의 탈출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간칸 우물", 그리고 최근 세워진 나가하루의 상이 있다. 공원에 인접하여 미키 역사자료관(구 미키 시립 도서관), 성곽 터 아래에는 나메라 상점가가 있다.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 미키 시립 호리미츠 미술관
  • 미키 시립 도서관
  • 미키 시립 금속 공예 자료관

참조

[1] 웹사이트 三木城跡及び付城跡・土塁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1-10-16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서적 日本の中世城館調査報告書修正 Tōyō Shorin Press 2003
[4] 웹사이트 Miki City Cultural hall http://www.miki-bunk[...] Miki City Cultural Hall 2014-12-13
[5]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6] 웹사이트 http://www.city.miki[...] City of Miki 2014-07-03
[7] 서적 Japanese Castles 1540-1640 Osprey Publishing 2011-12-20
[8] 서적 三木城跡・付城跡群・多重土塁の縄張りと現状 Yokoyama Press 2010
[9] 웹사이트 「官兵衛」にちなみ土産品2品 兵庫・三木市の助成で2業者が開発 http://sankei.jp.msn[...] 2019-04-08
[10] 웹사이트 市民ボランティアが三木合戦無料ガイド 29日から来月25日まで 兵庫 http://www.sankei.co[...] 2019-04-08
[11] 웹사이트 「三木城跡」など国史跡指定 記念シンポで基調講演 https://www.kobe-np.[...] 2019-04-08
[12] 웹사이트 三木城跡 http://www.city.miki[...] 2019-04-08
[13] 웹사이트 「三木市指定文化財一覧」 https://web.archive.[...]
[14]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28 兵庫県」
[15] 서적 『三木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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