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즈워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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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즈워스 전투는 1485년 8월 22일 레스터셔의 보즈워스 평원에서 벌어진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가 맞붙어, 헨리 튜더의 승리로 끝났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즉위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고, 이 전투는 장미 전쟁의 종식을 알렸다. 전투 결과 리처드 3세는 전사했고, 그의 왕관은 헨리 7세에게 넘겨졌다. 전투 장소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 묘사되어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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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잉글랜드 바닛에서 벌어진 바닛 전투는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가문을 격파하고 워릭 백작을 죽임으로써 왕위를 재확립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부활을 좌절시킨 장미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보즈워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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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전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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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명 | 보즈워스 전투 |
일부 | 장미 전쟁 |
날짜 | 1485년 8월 22일 |
장소 | 잉글랜드, 레스터셔, 마켓 보즈워스 남쪽 암비온 언덕 근처 |
결과 | 튜더 왕조와 그 동맹 세력의 승리 요크 가문의 완전한 몰락 마지막 플랜태저넷 왕가 군주, 리처드 3세 전사 튜더 왕조의 등장 |
교전 세력 | |
교전 1 | 요크 가문 |
교전 2 | 튜더 왕조 (랭커스터 가문) |
지원 세력 |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
추가 지원 | 스탠리 가문 |
지휘관 및 지도자 | |
요크 가문 지휘관 | 리처드 3세 노퍽 공작 존 하워드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서리 백작 토마스 하워드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 로벨 자작 프랜시스 로벨 리처드 래트클리프 |
튜더 가문 지휘관 | 헨리 튜더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비어 펨브로크 백작 자스퍼 튜더 리스 압 토마스 길버트 탤벗 경 존 새비지 경 필리베르 드 샹데 경 |
스탠리 가문 지휘관 | 스탠리 남작 토마스 스탠리 윌리엄 스탠리 경 |
병력 규모 | |
요크 가문 병력 | 7,500–12,000명 |
튜더 가문 병력 | 5,000–8,000명 (프랑스 용병 2,000명 포함) |
스탠리 가문 병력 | 4,000–6,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요크 가문 사상자 | 알려지지 않음 |
튜더 가문 사상자 | 100명 |
스탠리 가문 사상자 | 알려지지 않음 |
2. 배경
15세기 후반, 잉글랜드는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의 왕위 쟁탈전인 장미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1483년 10월, 국왕 리처드 3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반란군은 대부분 리처드를 찬탈자로 여긴 에드워드 4세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었다.[3] 그들의 계획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후에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에 의해 조정되었으며, 가장 높은 지위의 음모자는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였다. 역사가 찰스 로스는 버킹엄이 점점 인기가 없어지고 있는 국왕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려고 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연대기도 공작이 음모에 가담한 동기를 설명하지 않는다.[3]
이 계획은 짧은 시간 안에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에서 봉기를 일으켜 리처드의 군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버킹엄은 웨일스에서 침략하여 반란군을 지원하고, 헨리는 바다를 통해 들어올 예정이었다.[3] 그러나 나쁜 시기와 날씨로 인해 음모는 실패했다. 켄트에서 10일이나 일찍 봉기가 시작되어 리처드가 왕실 군대를 소집하고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했다. 리처드의 스파이는 버킹엄의 활동을 알렸고, 국왕의 부하들은 세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버킹엄과 그의 군대가 강에 도착했을 때, 10월 15일에 발생한 격렬한 폭풍우 때문에 강이 불어나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3] 버킹엄은 갇혔고, 안전하게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는 계획을 포기하고 웨임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자신의 종에게 배신당해 리처드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11월 2일에 처형되었다.[3] 헨리는 10월 10일(또는 10월 19일)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그의 함대는 폭풍우에 의해 흩어졌다. 잉글랜드 해안(플리머스 또는 풀)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그에게 상륙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사실 리처드의 부하들이었고 헨리가 잉글랜드 땅을 밟는 순간 그를 체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헨리는 속지 않고 침략을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갔다.[3] 버킹엄이나 헨리가 없는 상황에서 반란은 리처드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3]
실패한 봉기의 생존자들은 브르타뉴로 도망쳐 헨리의 왕위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3] 크리스마스에 헨리 튜더는 렌느 대성당에서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서했다.[3] 헨리의 부상은 그를 리처드에게 큰 위협으로 만들었고, 요크 가문의 국왕은 어린 랭커스터 가문의 사람을 넘겨주도록 브르타뉴 공작에게 여러 차례 제안했다. 프랑수아 2세는 리처드로부터 더 나은 조건을 얻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거절했다.[3] 1484년 중반 프랑수아 2세가 병으로 무능해지자, 그의 재무장관 피에르 랑데가 정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랑데는 군사 및 재정 지원과 교환으로 헨리와 그의 삼촌을 돌려보내는 데 리처드와 합의를 보았다. 플랑드르의 주교인 존 모턴은 이 계획을 알고 튜더 가문에게 경고했고, 튜더 가문은 프랑스로 도망쳤다.[3] 프랑스 궁정은 그들이 머물도록 허락했고, 튜더 가문은 리처드의 잉글랜드가 브르타뉴 합병 계획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다.[3] 1485년 3월 16일 리처드의 왕비인 앤 네빌이 사망했고,[3] 리처드가 그의 조카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그러나 후속 조사에서 리처드가 포르투갈의 조안나와 결혼하고 엘리자베스를 베자 공작 마누엘과 결혼시키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 그 소문은 영국 해협 건너편 헨리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3]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이 무산되면 헨리를 지지하는 랭커스터 가문과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동맹이 무너질 수 있었다.[3] 헨리는 신부를 확보하기 위해 이전에 프랑스에서 복무했던 용병들을 모집하여 망명자들을 보충하고 8월 1일에 프랑스에서 출항했다.[3]
15세기 잉글랜드에서는 기사도 정신에 따른 왕에 대한 자기희생적인 봉사는 타락하였다.[3] 무장 세력은 주로 개별 영지의 소집을 통해 모집되었는데, 모든 장정은 영주에게서 무기를 들라는 호출에 응답해야 했고, 각 귀족은 자신의 민병대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개인 민병대를 모을 수 있었지만, 귀족들의 지지 없이는 대규모 군대를 소집할 수 없었다. 리처드 3세는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선물을 주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러한 인물들을 포섭해야 했다.[3] 강력한 귀족들은 영주 측에 남아 있기 위해 더 큰 유인책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3] 보스워스 필드에는 각자의 목표를 가진 세 집단, 즉 리처드 3세와 그의 요크 가문 군대, 랭커스터 가문을 지지하며 그에게 도전한 헨리 튜더, 그리고 중립을 유지한 스탠리 가문이 있었다.[3]
2. 1. 장미 전쟁의 전개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대패한 후, 프랑스로 망명했던 헨리 튜더는 그해 8월 7일 잉글랜드 왕이 되기 위해 소수의 병력(대부분 프랑스 용병)과 함께 고향인 펨브룩셔에 상륙했다. 헨리는 군사 경험은 부족했지만, 숙부인 펨브룩 백작 자스퍼 튜더와 옥스퍼드 백작 등 경험이 풍부한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1]헨리는 아버지의 고향인 웨일스를 돌며 지지자들을 모았고, 중부 지방에 도착했을 때는 약 5,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이에 맞서 리처드 3세는 약 8,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1]
전투의 승패는 스탠리 형제(윌리엄 스탠리 경과 토마스 스탠리 남작)의 동향에 달려 있었다. 토마스 스탠리는 헨리의 계부였기에 리처드 3세는 그를 신뢰하기 어려웠지만, 형제들의 충성심에 의존했다.[1]
전투는 레스터셔의 서튼 체니와 마켓 보즈워스 근처에서 벌어졌다. 상세한 장소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리처드 3세가 전투 전날 밤 야영했던 장소가 앰비온 힐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다만, 실제 전장이 이곳에서 약 10km 서쪽인 워릭셔의 에서스톤 북쪽에 있던 메어베일이라는 의견도 있다. 확실한 것은, 전투 후 국왕 측에서 에서스톤 마을에 배상금을 지불했다는 것이다.[1]
전투는 리처드 3세의 본대와 헨리의 프랑스 용병대와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스탠리 형제의 군대는 양쪽 진영의 주력군에게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투의 승패를 지켜보면서,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리처드 3세는 스탠리 형제가 아군이 되지 않더라도 중립을 지키게 하기 위해 인질을 붙잡고 있었다.[1]
2. 2. 헨리 튜더의 등장
1471년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프랑스로 피신했던 헨리 튜더는 그해 8월 7일 잉글랜드 왕이 되기 위해 소수의 병력(대부분 프랑스 용병)과 함께 고향인 펨브룩셔에 상륙했다. 헨리는 군사 경험은 부족했지만, 숙련되고 재능도 뛰어났던 숙부 자스퍼 튜더(베드퍼드 공작)와 존 드 비어(옥스퍼드 백작)를 데리고 있었다.[1]헨리는 부친의 고향인 웨일스를 돌아다니며 지지자들을 모았고, 중부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약 5,000명의 병사를 모았다. 이에 대항해 리처드 3세는 약 8,000명을 동원했다.[1]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윌리엄 스탠리 경과 토마스 스탠리 남작 형제의 행방이었다. 토마스 스탠리는 헨리의 계부였기에 리처드 3세측에서 본다면 신용하기엔 위험이 있었지만, 리처드는 그 배려를 잊고, 형제의 지속적인 충성심에 의존하고 있었다.[1]
헨리 7세(헨리 튜더)는 전쟁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고, 정복하려는 땅에도 낯설었다. 그는 생애의 처음 14년을 웨일스에서, 다음 14년을 브르타뉴와 프랑스에서 보냈다. 마르지만 강하고 결단력 있는 헨리는 전투에 대한 기호가 부족했고, 그다지 용감한 전사는 아니었다. 폴리도레 베르길과 같은 연대기 작가들과 페드로 데 아얄라와 같은 대사들은 그가 상업과 재정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기에,[2] 헨리는 그의 군대를 지휘할 몇몇 베테랑들을 모집했다.[3]
존 드 비어는 헨리의 주요 군사 사령관이었다.[4] 그는 전쟁 기술에 능숙했다. 바넷 전투에서 그는 랭커스터군 우익을 지휘하여 맞서 싸우는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신원 확인의 혼란으로 인해 옥스퍼드의 부대는 랭커스터군 본대의 아군 사격을 받고 전장에서 후퇴했다. 백작은 해외로 도피하여 요크 가문과의 싸움을 계속했고, 선박을 약탈하고 결국 1473년에 세인트 마이클 산 섬 요새를 점령했다. 그는 아무런 지원이나 증원을 받지 못하고 항복했지만, 1484년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그의 전 간수였던 제임스 블런트 경을 데리고 프랑스에 있는 헨리의 궁정에 합류했다.[5] 옥스퍼드의 존재는 헨리 진영의 사기를 높였고 리처드 3세를 곤혹스럽게 했다.[6]
헨리의 초기 병력은 헨리 주위에 모인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망명자들과 샤를 8세가 제공한 용병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스코틀랜드 작가 존 메이저(1521년 출판)의 역사서에는 샤를이 헨리에게 5,000명의 병력을 제공했고, 그중 1,000명은 알렉산더 브루스 경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대 영국 역사가들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7]
1485년 헨리의 영국 해협 횡단은 아무런 사건 없이 이루어졌다. 8월 1일 아플뢰르에서 30척의 배가 출항하여 순풍을 타고 8월 7일 고향인 웨일스의 밀 베이(데일 근처)에 있는 밀포드 헤이븐 북쪽에 상륙하여 인근 데일 성을 손쉽게 점령했다.[8] 헨리는 현지 주민들로부터 미온적인 반응을 받았다. 해변에서 그를 환영하는 기쁨은 없었고, 처음에는 그의 군대가 내륙으로 진군할 때 몇몇 웨일스인만이 합류했다.[9] 역사가 제프리 엘턴은 헨리의 열렬한 지지자들만이 그의 웨일스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한다.[10] 그의 도착은 다피드 두와 그리피드 앱 다피드와 같은 당대 웨일스의 음유시인들에 의해 진정한 왕자이자 "브르타뉴의 청년이 색슨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나라를 영광으로 되돌리기 위한 자로 묘사되었다.[10][11] 헨리가 펨브룩셔의 군청 소재지인 해버퍼드웨스트로 이동했을 때, 남웨일스의 리처드 부관인 월터 허버트 경은 헨리에게 대항하지 못했고, 그의 부관인 리처드 그리피스와 에반 모건은 부하들과 함께 헨리에게 망명했다.[12]
이 전투 초기에 헨리에게 망명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서웨일스의 지도자였던 리스 앱 토머스였을 것이다.[12] 리처드는 버킹엄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리스에게 서웨일스의 부관직을 맡겼고, 그의 아들인 그리피드 앱 리스 앱 토머스를 인질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리스는 이 조건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헨리는 리스를 성공적으로 회유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웨일스 전역의 부관직을 제안했다. 헨리는 아베리스트위스를 통해 진군하는 동안 리스는 남쪽 경로를 따라 웨일스인들을 모집하여 세픈 디골(웰시풀)에서 재회할 때 헨리의 군대를 500명 또는 2,000명으로 늘렸다.[13] 8월 15일 또는 8월 16일까지 헨리와 그의 군대는 잉글랜드 국경을 넘어 슈루즈베리로 향했다.[14]
3. 전투의 전개
1485년 8월 22일에 벌어진 보즈워스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초반에는 리처드 3세의 군대가 유리했다. 리처드 3세는 앰비온 언덕에 먼저 도착하여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한 반면, 헨리 튜더의 군대는 울퉁불퉁한 지형 때문에 제대로 정렬하기조차 어려웠다. 리처드 3세는 혼란에 빠진 랭커스터 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헨리 튜더는 준비를 마치고 대포와 궁수를 이용한 간접 공격으로 리처드 3세를 언덕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다. 리처드 3세는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전투 참가를 명령했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중립을 지키며 명령을 거부했다.[31]
이때, 윌리엄 스탠리 경과 토마스 스탠리 경이 헨리 튜더 측에 가담하면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31] 노포크 공작 존 하워드가 전사하고, 스탠리 경과 노섬벌랜드 백작마저 헨리 튜더 측에 가담하자,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의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의 기수 윌리엄 브랜던을 죽였지만, 결국 스탠리 경의 군대에 포위되어 살해당했다.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전장에서 사망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다(첫 번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1세에게 살해당한 해럴드 2세). 리처드 3세의 시신은 승리자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매장되었다.
보즈워스 전투는 장미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결정적인 전투였지만, 실제로 장미 전쟁은 2년 후 스토크 필드 전투를 통해 완전히 종식되었다.
3. 1. 헨리 튜더의 잉글랜드 상륙
1471년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프랑스로 피신했던 헨리 튜더는 그해 8월 7일 잉글랜드 왕이 되기 위해 소수의 병력(대부분 프랑스 용병)과 함께 고향인 펨브룩셔에 상륙했다. 헨리는 군사 경험은 부족했지만, 숙련되고 재능도 뛰어났던 숙부 펌브룩 백작 자스퍼 튜더와 옥스퍼드 백작을 데리고 있었다.[31]헨리는 부친의 고향인 웨일스를 돌아다니며 지지자들을 모았고, 중부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약 5,000명의 병사를 모았다.
3. 2. 리처드 3세의 대응
Henry Tudor영어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리처드 3세는 1485년 6월 22일에 영주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명령했다.[31] 헨리의 상륙 소식은 8월 11일에 리처드에게 전해졌지만, 그의 사자들이 영주들에게 왕의 동원령을 알리는 데는 3~4일이 걸렸다. 8월 16일, 요크 가문의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했고, 노퍽 공작은 그날 밤 집결지인 레스터로 출발했다. 리처드 가문의 역사적 거점인 요크 시는 왕에게 지시를 요청했고, 사흘 후 답신을 받고 80명의 병사를 왕에게 합류시켰다. 동시에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노섬벌랜드 백작은 그의 병력을 모아 레스터로 향했다.[31]8월 20일, 리처드는 노팅엄에서 레스터로 이동하여[5] 노퍽 공작과 합류했다. 그는 블루 보어 여관(1836년 철거됨)에서 밤을 보냈다.[5] 노섬벌랜드 백작은 다음 날 도착했다. 왕실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런던으로 향하는 헨리의 행군을 저지했다. 서튼 체니를 지나 리처드는 전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앰비언 언덕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진을 쳤다.[31] 리처드의 수면은 편안하지 않았고, ''크로이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아침에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하고 섬뜩했다".[31]
요크 가의 군대는 7,500명에서 12,000명으로 추산되는데,[31][6]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언덕 위에 배치되었다. 노퍽의 부대(전투)는 창병들로 구성되어 우익에 위치하여 대포와 약 1,200명의 궁수들을 보호했다. 리처드의 부대는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중앙에 배치되었다. 노섬벌랜드의 부대는 좌익을 지켰는데, 약 4,000명의 병력을 지휘했고, 그중 상당수는 기병이었다.[6] 언덕 위에 서 있던 리처드는 넓고 시야가 트인 지역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는 스탠리와 그의 4,000~6,000명의 병력이 댈링턴 언덕과 그 주변에 위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남서쪽에는 헨리의 군대가 있었다.[31]
헨리가 슈루즈베리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길버트 탈봇 경과 리처드 군대의 탈영병을 포함한 다른 영국 동맹군을 합류시켰다.[31] 헨리는 영국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스탠리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31] 스탠리 가문은 헨리의 상륙 소식을 듣고 병력을 동원했다. 그들은 헨리의 영국 횡단 행군 앞에 자리를 잡았고,[31] 스태퍼드셔를 통과하는 헨리와 두 차례 비밀리에 만났다.[31] 두 번째 만남은 애서스톤(워릭셔)에서 이루어졌고, 그들은 "그들이 가까이 있다고 들은 리처드 왕과 어떻게 전투를 벌일 것인가"에 대해 논의했다.[31] 8월 21일, 스탠리 가문은 대들링턴 북쪽 언덕 비탈에 진영을 구축한 반면, 헨리는 그들의 진영 북서쪽에 있는 화이트 무어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31]
헨리의 군대가 언덕 남서쪽 기슭의 습지를 지나 진격하자, 리처드는 스탠리에게 전령을 보내 즉시 헨리 공격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의 아들 스트레인지 경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스탠리는 다른 아들들도 있다고 답했다. 격분한 리처드는 스트레인지 경을 참수하라고 명령했지만, 그의 장교들은 전투가 임박했고 나중에 처형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말하며 시간을 끌었다.[31] 헨리도 스탠리에게 사자를 보내 충성을 선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답변은 회피적이었다. 스탠리들은 헨리가 군대에 명령을 내리고 전투 준비를 마친 후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헨리는 리처드의 부대와 단독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31]
3. 3. 보즈워스 평원의 전투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초반은 리처드 3세의 군대가 유리했다. 윌리엄 스탠리 경과 토마스 스탠리 경은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헨리 튜더측으로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31]리처드 군대는 먼저 앰비온 힐에 도착해 병사들을 충분히 쉬게 한 반면, 헨리 군대는 발밑이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 정렬해야 했다(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리처드는 혼란에 빠진 랭커스터 가문을 밀어붙이기 위해 돌격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헨리는 준비가 끝나자, 리처드를 언덕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기 위해 대포와 화살을 통한 간접공격을 가했다. 리처드 군대가 돌격할 때, 리처드는 우익군을 지휘하던 노섬벌랜드 백작에게 전투에 참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백작은 중립을 지키며 자신의 군대를 저지하고, 이 명령을 거부했다.[31] 근처에서 대기하던 스탠리 경의 결정은 전투의 향방을 헨리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었다.
리처드의 부대 지휘관이었던 노포크 공작 존 하워드가 전사하고, 중립을 지키던 스탠리 경과 노섬벌랜드 백작도 상대편에 붙었기 때문에, 리처드는 전황을 돌리기 위해 주전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던 헨리의 부대에 용감한(자살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 돌격을 감행했다. 이 돌격에서 리처드는 헨리의 기수였던 윌리엄 브랜던을 죽일 정도로 깊숙이 침투했다. 하지만, 리처드의 시야에 헨리가 들어왔을 때, 스탠리 경의 군대가 밀어닥쳐 리처드를 포위했다.
결국 리처드 3세는 이곳에서 살해당했다. 향년 32세였다.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전사한 사람은 리처드가 두 번째이자(첫 번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2세가 노르망디 공작 기욤에게 살해당했다), 마지막 왕이었다. 리처드의 시체는 승리자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매장되었다.
이 전투로 장미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는 2년 후 스토크 필드 전투가 벌어진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헨리 7세는 정복으로 왕위에 올랐다. 전투 후, 리처드의 관(왕관의 일부)이 발견되어 헨리에게 전해졌고, 그는 스톡 골딩 마을 근처 크라운 힐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15] 헨리의 공식 역사가 버질에 따르면, 스탠리 경이 그 관을 발견했다. 역사학자 스탠리 크라임스와 시드니 앵글로는 산사나무 덤불에서 관이 발견되었다는 전설을 당시 기록에 없다는 이유로 일축한다.[15] 그러나 로스는 산사나무 덤불이 헨리의 문장에 포함된 것을 들어 이 전설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15] 볼드윈은 산사나무 덤불 문양이 이미 랭커스터 가문에서 사용되었고, 헨리는 단지 왕관을 추가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15]
버질의 연대기에 따르면, 전투에서 헨리 측 100명, 리처드 측 1,000명이 사망했는데, 크라임스는 이 비율이 과장되었다고 본다.[15] 전사자들의 시신은 데들링턴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로 옮겨져 매장되었다.[15] 헨리는 리처드에게 즉각적인 안식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 요크 왕조 왕의 시신은 옷이 벗겨진 채 말에 묶여 레스터로 옮겨져, 그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개 전시되었다. 초기 기록에 따르면 이 일은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종교 재단인 뉴어크 성모 영보 사원에서 이루어졌다.[15] 이틀 후, 시신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내부에 평범한 무덤에 매장되었다.[15] 1538년 수도원 해체 이후 교회는 파괴되었고, 리처드의 묘소 위치는 오랫동안 불확실했다.[15]
2012년 9월 12일, 레스터의 한 주차장 지하에서 척추 기형과 머리 부상을 입은 해골이 발견되어 리처드 3세의 유해라는 의심을 받았다.[16] 2013년 2월 4일, 레스터 대학교 과학자들과 연구원들은 DNA 검사 결과 리처드 3세의 유해임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확인했다고 발표했다.[17] 2015년 3월 26일,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공식적으로 매장되었고,[18] 다음 날 리처드의 묘소가 공개되었다.[19]
헨리는 용병들을 해산하고 소수의 현지 병사들로 "근위대"를 편성하여[15] 통치를 시작했다. 의회는 헨리의 몰수 판결을 뒤집고 리처드의 왕위를 불법으로 기록했지만, 요크 왕조의 통치는 영국 역사 연대기에 공식적으로 남았다.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을 사생아로 선포한 것이 번복되어 엘리자베스의 왕녀 지위가 회복되었다.[15] 요크 가문의 상속녀 엘리자베스와 랭커스터 가문의 수장 헨리의 결혼은 두 가문 간의 싸움을 끝내고 튜더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왕실 결혼은 헨리가 왕위에 대한 주장을 확고히 할 때까지 연기되었다.[15] 헨리는 의회를 설득하여 통치 시작일을 전투 전날로 소급하여,[15] 보즈워스 전투에서 자신과 싸운 사람들을 반역자로 만들었다.[15] 중립을 지켰던 노섬벌랜드는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헨리의 이름으로 북부를 진정시켰다.[15] 헨리는 이전 충성심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15]
헨리는 스탠리 가문에게 가장 후하게 보상했다.[15] 윌리엄 스탠리를 측근으로 삼고, 스탠리 경에게 더비 백작 작위와 영지를 주었다.[15] 옥스퍼드에게는 요크 가문이 몰수한 토지와 작위를 돌려주고 탑 수장과 영국, 아일랜드, 아키텐의 제독으로 임명했다. 재스퍼 튜더는 베드퍼드 공작이 되었다.[15]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에게는 리처드가 빼앗았던 토지와 영지를 돌려주고 궁궐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주었다. 의회는 마거릿을 ''독신 여성''으로 선포하여 실질적인 권한을 주었고, 더 이상 스탠리를 통해 영지를 관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15] 엘턴은 헨리의 초기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은 단기간만 총애를 받았으며, 후년에는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승진시켰다고 지적한다.[15]
헨리는 이전 왕들처럼 반대 세력에 직면했다. 보즈워스 전투 2년 후, 램버트 시므넬이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지넷이라고 주장하며 첫 반란이 일어났다. 링컨 백작이 그를 지지하며 요크 가문의 이름으로 반군을 이끌었다.[15] 반군은 노섬벌랜드 군의 공격을 막아낸 후 1487년 6월 16일 스톡 필드 전투에서 헨리의 군대와 싸웠다.[15] 옥스퍼드와 베드퍼드가 헨리의 군대를 이끌었고,[15] 리처드 3세의 이전 지지자들도 포함되었다.[15] 헨리는 쉽게 승리했지만, 다른 불만과 음모가 이어졌다.[15] 1489년 반란은 노섬벌랜드의 살해로 시작되었는데, 군사 역사가 아담스는 노섬벌랜드 시신 옆 메모 작성자가 리처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고 말한다.[15]
4. 1. 튜더 왕조의 시작
헨리 튜더는 대관식을 거쳐 헨리 7세가 되었고, 이로써 잉글랜드에는 118년 동안 지속될 튜더 왕가가 세워졌다.[15] 헨리는 보즈워스에서 요크 왕가에 가담했던 병사들에게 반역죄를 묻기 위해 즉위 후 통치 개시일의 일부를 이 전투 이전으로 소급했다.헨리 7세는 1485년 즉위 시점에 과거의 반역죄로 권리 박탈 상태였고, 유산 상속권도 동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즉위하면서 소멸되었다. 이후 의회는 "보즈워스에서 헨리 국왕에 대항한 자들은 반역자들이다"라고 선언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1489년 4월 28일 요크셔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서 살해되었다. 프랑스에서 브르타뉴 방위[32]를 위해 무거운 세금을 거둔 것에 항의하는 폭도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나, 요크셔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리처드 3세의 실각과 죽음에 노섬벌랜드 백작의 배신이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4. 2. 장미 전쟁의 종식
헨리 튜더는 대관식을 거쳐 헨리 7세가 되었고, 잉글랜드는 118년 동안 지속될 튜더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 헨리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왕가에 가담했던 병사에게 반역죄를 묻기 위해 즉위한 이후 통치 개시일을 이 전투 이전으로 소급했다.[32]헨리 7세는 1485년 즉위 당시, 과거 반역죄로 권리가 박탈된 상태였으며, 자신의 상속권도 동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즉위하면서 소멸되었다. 그 후 의회는 "보즈워스에서 헨리 국왕에 대항한 자들은 반역자들이다"라고 선언했다.
1489년 4월 28일 요크셔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이 살해되었다. 프랑스에서 브르타뉴 방위[32]를 위해 무거운 세금을 거둔 것에 항의하는 폭도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나, 또 다른 이유로는 요크셔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리처드 3세의 실각과 죽음에 노섬벌랜드 백작의 배신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4. 3. 정치적, 사회적 변화
헨리 7세는 대관식을 거쳐 튜더 왕조를 세웠다.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에서 118년 동안 지속되었다. 헨리 7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요크 왕가에 가담했던 병사에게 반역죄를 묻기 위해 즉위 후 통치 개시일을 전투 이전으로 소급했다.[32]헨리 7세는 1485년 즉위 당시 과거의 반역죄로 권리가 박탈된 상태였고, 유산 상속권도 동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즉위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후 의회는 "보즈워스에서 헨리 국왕에게 대항한 자들은 반역자들이다"라고 선언했다.
1489년 4월 28일, 요크셔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서 노섬벌랜드 백작이 살해되었다. 프랑스에서 브르타뉴 방위[32]를 위해 무거운 세금을 거둔 것에 항의하는 폭도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요크셔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던 리처드 3세의 실각과 죽음에 노섬벌랜드 백작의 배신이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4. 4. 역사적 의의
보즈워스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세가 끝나고 근대 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는 왕위의 중요성과 배신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역사가들과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헨리 7세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알리려 했다. 그는 연대기 작가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통치가 시작된 1485년을 "근대"로 묘사하도록 했다. 힉스는 튜더 정권에 의해 홍보된 베르길리우스와 맹인 역사가 베르나르 아네의 저작들이 그 후 400년 동안 작가들에게 권위 있는 자료가 되었다고 말한다.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윌리엄 정복자의 1066년 정복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해도 영국 역사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튜더 시대 역사가들은 리처드 3세를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폭군으로 묘사함으로써 전투에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선과 악의 대결이었고,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피터 사치오 교수는 이 전투가 영국 역사에서 독특한 충돌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승리는 싸운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승리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싸우기를 미룬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애덤스와 호록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리처드 3세가 신화적인 이유가 아니라 군대 내부의 사기와 충성도 문제 때문에 전투에서 패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일반 병사들은 자신이 불신하는 군주를 위해 싸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일부 귀족들은 리처드 3세가 폐위되면 자신의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엘턴은 보스워스 전투가 진정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믿으며, 20세기 영국 대중이 500주년 기념 행사가 있을 때까지 전투를 대부분 무시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엘턴은 이 전투를 헨리 7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한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며, 젊은 왕이 자신의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10년 이상 파벌과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강조한다.
맥키는 회고적으로 보스워스 전투는 100년 이상 영국을 지배할 왕조를 확립한 결정적인 전투로 주목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5. 전투 장소 논쟁
보즈워스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전투 직후에는 "리드모어 전투"라고 불렸는데, 이는 앰비언 언덕이 아닌 다른 지역의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리디 무어)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았다.[21] 21세기 초까지도 전투 장소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전투 장소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라이스터셔 주 의회와 역사가 다니엘 윌리엄스는 마켓 보스워스 마을 인근, 특히 앰비언 언덕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보았다. 반면, 역사가 피터 포스와 경관 고고학자 글렌 포드는 앰비언 언덕 남서쪽으로 약 약 3.22km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전투 명칭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 지형 및 지질학적 증거, 고고학적 발견물 등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특히, 배틀필드 트러스트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실시한 지질 조사와 고고학적 조사는 전투 장소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며 논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 1. 전통적인 견해
이 전투는 [보즈워스 전투]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리드모어 전투'''(Battle of Redemore)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전투가 앰비언 힐이 아닌, 같은 지역의 갈대(reedy)와 황무지(moor)가 있는 곳(리디 무어: reedy moor)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전투가 실제로 벌어진 장소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21세기 초까지 이어졌다.[21]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라이스터셔 주 의회에 의해 마켓 보스워스 마을 인근으로 여겨진다. 의회는 역사가 다니엘 윌리엄스에게 전투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고, 1974년 그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보스워스 전투 유산 센터와 그곳에 전시된 자료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해석은 이후 의문을 제기받았다. 1985년 전투 500주년 기념 행사를 계기로,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이 윌리엄스 이론의 정확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옛 영국 전투터를 보호하고 연구하는 자선 단체인 배틀필드 트러스트가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실시한 지질 조사에 따르면, 앰비언 언덕의 남쪽과 동쪽 사면은 15세기에 윌리엄스의 주장과 달리 넓은 습지가 아닌 단단한 땅이었다. 조사를 이끈 경관 고고학자 글렌 포드는 수집된 토양 샘플과 중세 군사 장비의 발견물을 통해 전투가 앰비언 언덕 남서쪽 약 약 3.22km 지점(북위 52°34′41″, 서경 1°26′02″)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전투가 언덕 기슭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상반된다.
영국 문화유산(English Heritage)은 보즈워스 전투의 명칭이 마켓 보스워스(Market Bosworth)에서 유래한 이유를, 당시 전투터와 가장 가까운 중요한 정착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필립 모건 교수가 밝힌 바와 같이, 전투는 처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 및 역사 기록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주목할 만한 전투를 식별할 필요성을 느끼고, 보통 지명(toponymy)적인 성격을 지니고 전투원이나 목격자로부터 유래한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 그 이름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의심 없이 사용된다. 초기 기록들은 보즈워스 전투를 "브라운히스(Brownehethe)", "''벨룸 미라발렌세스(bellum Miravallenses)''", "샌드포드(Sandeford)", "대들링턴 필드(Dadlyngton field)" 등과 연관짓고 있다. 요크(York)에서 1485년 8월 23일에 작성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시 기록에는 전투가 "레드모어(Redemore) 들판"에서 벌어졌다고 적혀 있다. 이는 "레드스모어(Redesmore)"를 전투 장소로 언급하는 1485~86년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역사가 피터 포스(Peter Foss)에 따르면, 기록에서 "보즈워스(Bosworth)"와 전투를 연관짓기 시작한 것은 1510년 이후라고 한다.
영국 문화유산은 포스를 전투 장소로 "레드모어(Redemore)"를 주장하는 주요 옹호자로 언급한다. 그는 이 이름이 "''흐레오드 모어(Hreod Mor)''"라는 앵글로색슨어 구절에서 유래했으며, "갈대가 무성한 습지"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13세기와 16세기 교회 기록을 근거로 그는 "레드모어(Redemore)"가 앰비언 언덕(Ambion Hill)과 대들링턴(Dadlington) 마을 사이에 있는 습지대였으며, 이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로마 도로인 펜 레인(Fenn Lanes)과 가까웠다고 믿는다. 포드(Foard)는 이 도로가 양군이 전장에 도착하기 위해 이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로라고 생각한다.
윌리엄스(Williams)는 "레드모어(Redmore)"를 특정한 장소로 보는 견해를 일축하고, 이 용어는 넓은 적갈색 토양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스는 윌리엄스의 자료가 지역 이야기와 기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윌리엄스가 윌리엄 허튼(William Hutton)(버밍엄 역사가)의 1788년 저서 ''보즈워스 필드 전투(The Battle of Bosworth-Field)''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허튼이 전투가 센스 강(River Sence) 북쪽 앰비언 언덕(Ambion Hill) 서쪽에서 벌어졌다는 생각을 퍼뜨렸다고 비난한다. 포스의 주장에 따르면 허튼은 그의 자료인 라파엘 홀린셰드(Raphael Holinshed)의 1577년 ''연대기(Chronicle)''의 구절을 잘못 해석했다. 홀린셰드는 "리처드 왕은 앤 비임(Anne Beame)이라는 언덕에 진영을 치고, 병사들을 재충전하고 휴식을 취했다"라고 썼다. 포스는 허튼이 "진영"을 "전투터"로 잘못 해석하여 전투가 앤 비임(Ambion) 언덕에서 벌어졌다는 생각을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포스가 명확히 하듯이, "진영을 치다([pitch] his field)"는 당시 야영지를 설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포스는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1550년 ''연대기(Chronicle)''를 인용하여 자신의 "레드모어(Redemore)" 이론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홀은 리처드의 군대가 다음 날 진영을 풀고 평원으로 진입했다고 기술했다. 더 나아가, ''레스터셔 묘사(Description of Leicestershire)''(1622)의 저자인 윌리엄 버튼(William Burton)(고고학자)은 전투가 "보즈워스(Bosworth)에서 약 4.83km 떨어진 션턴(Shenton), 서튼(Sutton)[체니(Cheney)], 대들링턴(Dadlington), 스토크(Stoke)[골딩(Golding)] 마을 사이의 넓고 평평한 땅에서 벌어졌다"라고 썼다. 포스의 견해로는 두 자료 모두 대들링턴(Dadlington) 북쪽의 평평한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잉글랜드 유산(English Heritage)은 잉글랜드의 역사 유적지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두 가지 이론을 모두 사용하여 보스워스 필드 전투터를 지정했다. 두 이론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윌리엄스(Williams)와 포스(Foss)가 제시한 위치를 모두 포함하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전투터 경계를 설정했다. 이 지역은 전투 이후부터 수년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겪었다. 홀린셰드(Holinshed)는 그의 연대기에 자신이 습지를 예상했던 곳에서 단단한 땅을 발견했다고 기록했고, 버턴(Burton)은 16세기 말까지 전투터의 일부 지역이 둘러싸여 농업 생산성을 높이도록 개량되었음을 확인했다. 개량 앰비언 힐(Ambion Hill) 남쪽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앰비언 우드(Ambion Wood)를 이루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애쉬비 운하(Ashby Canal)가 앰비언 힐의 서쪽과 남서쪽 땅을 관통했다. 운하를 따라 약간 떨어진 곳에 애쉬비와 뉴니튼 합동 철도(Ashby and Nuneaton Joint Railway)가 제방 위로 지나갔다. 지형의 변화는 너무 광범위하여 허튼(Hutton)이 1788년 방문 이후 1807년에 다시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보스워스 전투 유산 센터(Bosworth Battlefield Heritage Centre)는 앰비언 힐에 있는 리처드의 우물 근처에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리처드 3세는 전투 당일 이 지역의 여러 샘 중 하나에서 물을 마셨다. 1788년에 한 지역 주민이 허튼에게 전설에 나오는 샘이라고 지적했다. 나중에 그 자리에 돌 구조물이 세워졌다. 우물에 새겨진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곳 근처에서 1485년 8월 22일, 32세의 나이로 리처드 3세 국왕은 자신의 왕국과 왕관을 헨리 튜더의 침략으로부터 용감하게 지키다 전사했습니다.
>
>이 돌무덤은 1813년 새뮤얼 파 박사가 국왕이 전투 중 물을 마셨다고 알려진 샘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습니다.
>
>이곳은 흰멧돼지 동지회(Fellowship of the White Boar)에서 관리합니다.
앰비언 힐 북서쪽, 센스 강(Sence River)의 북쪽 지류 건너편에는 깃발과 기념비가 리처드의 들(Richard's Field)을 표시하고 있다. 1973년에 세워진 이곳은 윌리엄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선택되었다. 대들링턴(Dadlington)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St James's Church)는 보스워스 전투와 확실하게 관련된 이 지역의 유일한 구조물이며,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이 이곳에 매장되었다.
5. 2. 새로운 연구 결과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실제 전투 장소는 앰비언 힐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이 새로운 발견은 전투의 전개 과정과 전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21]2005년부터 2009년까지 글렌 포드가 이끄는 배틀필드 트러스트는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핵심 전투 지역의 실제 위치가 밝혀졌다.[22] 이는 피터 포스가 제시한 위치보다 약 1km 서쪽에 있으며, 전투 당시 여러 마을의 경계가 만나는 비옥하지 않은 땅이었다. 습지와 황야의 존재를 암시하는 여러 필지 이름들이 밀집해 있었다. 체계적인 금속 탐지 결과 34개의 납제 원형탄[23](이는 이전에 발견된 다른 모든 15세기 유럽 전장의 총 발견 수보다 많다)[24]과 멧돼지를 묘사한 작은 금박 은 배지 등 다른 중요한 유물들도 발견되었다.[24] 전문가들은 이 멧돼지 배지가 리처드 3세의 사망 장소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개인 문장이 새겨진 이 고급 배지는 그의 측근이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25]

전투에 대한 새로운 해석[26]은 이제 역사적 기록과 전투터 유물, 그리고 지형 역사를 통합한다. 새롭게 밝혀진 지역은 펜 레인 로마 도로의 양쪽에 위치하며, 펜 레인 농장과 가깝고 앰비온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다.
원형탄의 분포, 리처드 3세 군대의 추정 규모, 그리고 지형을 바탕으로 글렌 포드와 앤 커리는 리처드가 폭스 커버트 레인 바로 동쪽, 추정되는 중세 습지 뒤에 있는 완만한 구릉에 병력을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27][28] 리처드의 선봉대는 노퍽 공작이 지휘했고, 리처드 전열의 우측(북쪽)에 위치했으며, 랭커스터 백작은 리처드의 좌측(남쪽)에 있었다.
튜더 군대는 로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현재의 펜 레인 농장 서쪽에 전열을 갖추었고, 워릭셔의 미어베일 부근에서 진군해왔다.
잉글랜드 역사유적 보호청은 새롭게 확인된 지역을 포함하도록 등록된 보즈워스 전투터의 경계를 재정의했다. 향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26][29]
6. 대중 문화 속의 보즈워스 전투
이 전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창작으로 보인다. 희곡에서 리처드는 돌격 후 낙마하여 "말을! 말을 주거라! 대신 내가 왕국을 주겠노라!"라고 외치고, 그의 왕관은 산사 나무 가지 위에 올려져 헨리가 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실제 리처드는 병사들이 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투구에 장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관은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9]
6. 1.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전투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극중에서 리처드 3세는 돌격 후 낙마하여 "말을! 말을 가져오라! 대신 내 왕국을 주겠다!"라고 외친다. 그의 왕관은 산사나무 덤불에서 발견되어 헨리 튜더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묘사된다.[9] 하지만 실제 리처드 3세는 병사들이 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투구에 장식을 했을지는 몰라도, 왕관을 쓰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9] 이러한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9]6. 2. 기타 작품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전투를 극적으로 묘사한다. 극중 리처드 3세는 돌격 후 낙마하여 "말을! 말을 주거라! 대신 내가 왕국을 주겠노라!"라고 외치는데, 이는 셰익스피어의 창작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리처드 3세가 왕관을 착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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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즈워스 전투 당시 지역의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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