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닛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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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닛 전투는 장미 전쟁 중 1471년 4월 14일에 벌어진 전투로,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를 상대로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위를 확고히 한 중요한 사건이다. 1470년 헨리 6세를 복위시켰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가 다시 권력을 잡았고, 랭커스터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전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며, 잉글리시 헤리티지를 통해 전장이 추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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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즈워스 전투는 1485년 8월 22일 잉글랜드에서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 간에 벌어진 장미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헨리 튜더의 승리로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바닛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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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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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요크 가문 |
교전국 2 | 랭커스터 가문 |
지휘관 및 지도자 | |
요크 가문 지휘관 | 에드워드 4세 글로스터 공 리처드 (부상) 헤이스팅스 남작 윌리엄 헤이스팅스 크롬웰 남작 험프리 바우처 (전사) |
랭커스터 가문 지휘관 |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전사) 몬태규 후작 존 네빌 (전사)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 (항복)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어 버먼 자작 윌리엄 버먼 |
병력 규모 | |
요크 가문 | 7,000–15,000명 |
랭커스터 가문 | 10,000–30,000명 |
사상자 규모 | |
요크 가문 | 1,000명 |
랭커스터 가문 | 10,000명 |
2. 배경
장미 전쟁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일련의 내전이었다. 1461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헨리 6세는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에드워드 4세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초기에는 왕의 핵심 지지자였으나, 점차 왕의 정책 방향과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 및 우드빌 가문에 대한 과도한 후원에 불만을 품게 되면서 에드워드 4세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워릭 백작은 왕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에서 워릭 백작은 과거의 적이었던 랭커스터 가문의 앙주의 마가렛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아 1470년 잉글랜드를 침공한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몰아내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에드워드 4세는 그의 매형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망명했다. 그러나 1471년 3월,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왕위 탈환을 시도했고, 이는 워릭 백작과의 피할 수 없는 결전, 즉 바닛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장미 전쟁의 발발
장미 전쟁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인 서로 다른 두 왕가를 지지하는 잉글랜드의 여러 영주와 귀족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이었다. 1461년, 이 갈등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는데, 요크 가문이 경쟁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을 몰아내고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요크 가문의 지도자였던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왕 헨리 6세로부터 왕좌를 빼앗았다. 헨리 6세는 1465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과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여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이들의 봉기를 진압하고 스코틀랜드 정부에 압력을 가해 마거릿을 추방했으며, 랭커스터 가문은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요크 가문이 잉글랜드 지배력을 강화하자,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핵심 지지자들에게 보답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수석 고문이었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들에게 더 높은 작위를 수여하고 패배한 정적들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은 점차 왕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공주 사보이의 보나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왕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와의 관계를 더 선호했으며, 1464년에는 비교적 가난한 랭커스터 가문의 미망인이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하여 워릭 백작의 분노를 샀다. 당시 요크 가문 귀족들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왕비로서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에드워드 4세는 왕비의 친척들에게 토지와 작위를 수여하고,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우드빌 가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로 인해 결혼 적령기의 귀족 남성들이 우드빌 가문의 여성들과 주로 맺어지면서, 워릭 백작의 딸들이 결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워릭 백작은 자신의 친족과 관련된 두 건의 결혼으로 인해 크게 불쾌감을 느꼈다. 첫 번째는 60세가 넘은 그의 고모 캐서린 네빌이 엘리자베스 왕비의 20세 동생인 존 우드빌과 결혼한 일이었는데, 이는 많은 이들에게 비정상적인 결합으로 비춰졌다. 다른 하나는 워릭 백작 조카의 약혼녀였던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의 딸이 에드워드 4세의 승인 하에 왕비의 아들인 토마스 그레이와 결혼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들에 격분한 워릭 백작은 우드빌 가문이 왕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점차 소외감을 느꼈고, 젊은 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에드워드 4세를 압박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를 결심하게 되었다. 워릭 백작의 대안은 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계획에 동조한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
워릭 백작은 북부에서 여러 반란을 선동하여 에드워드 4세를 남부의 주요 지지 기반에서 멀리 유인했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이 수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하던 중,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이 공개적으로 반란군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469년 7월 26일 에지콧 무어 전투에서 승리한 워릭 백작은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은 에드워드 4세를 발견하고, 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체포하여 워릭성에 감금했다. 랭커스터 가문 지지자들은 에드워드 4세의 투옥을 기회 삼아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요크 가문파 귀족들이 워릭 백작의 소집에 응하지 않자, 워릭 백작은 결국 에드워드 4세를 석방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다시 권력을 잡은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반역 행위를 공개적으로 처벌하지 않았지만, 워릭 백작은 왕이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이번에는 에드워드 4세를 폐위시키고 클래런스 공작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또 다른 반란을 계획했다. 그러나 1470년 3월 12일, 에드워드 4세가 루스코트 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자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프랑스로 도주해야 했다. 에드워드 4세는 반란군이 소지하고 있던 편지와 지도자들의 자백을 통해 워릭 백작의 배신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중재로, 워릭 백작은 오랜 숙적이었던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고 랭커스터 가문을 위해 싸우기로 합의했다. 워릭 백작은 랭커스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1470년 10월 에드워드 4세는 당시 그의 매형인 용담공 샤를이 통치하던 부르고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의 왕위는 일시적으로 헨리 6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1471년 3월 14일,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이는 한 달 뒤 바닛 전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2. 워릭 백작의 배신과 헨리 6세 복위
장미 전쟁 초기, 요크 가문은 1461년 랭커스터 가문을 몰아내고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로부터 왕위를 차지했다. 헨리 6세는 1465년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그의 아내 앙주의 마가렛과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했다가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상했는데, 그의 핵심 조력자였던 리처드 네빌(16대 워릭 백작)도 높은 작위와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공주 사보이의 보나의 결혼을 추진하여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했으나,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와의 관계를 선호하며 1464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의 가난한 미망인이었기에,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그녀를 왕비로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에드워드 4세의 독단적인 결정과 우드빌 가문에 대한 지나친 편애는 워릭 백작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에드워드 4세는 우드빌 가문 사람들에게 토지와 작위를 수여하고 유력 가문과의 혼사를 주선했는데, 이는 워릭 백작 가문의 입지를 좁혔다. 특히 워릭 백작은 두 건의 혼사로 크게 불쾌감을 느꼈다. 하나는 60세가 넘은 그의 숙모 캐서린 네빌과 왕비 엘리자베스의 20세 동생 존 우드빌의 결혼이었고, 다른 하나는 본래 조카의 약혼녀였던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의 딸이 에드워드 4세의 승인 하에 왕비의 아들 토마스 그레이와 결혼하게 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격분한 워릭 백작은 우드빌 가문이 왕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으며, 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에 소외감을 느껴 국왕을 압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우고 그와 공모했다.
워릭 백작은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를 남부의 지지 기반에서 멀어지게 유인했다. 수적 열세에 놓인 에드워드 4세는 후퇴하던 중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469년 7월 26일 에지코트 무어 전투에서 승리한 워릭 백작은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은 에드워드 4세를 체포하여 워릭성에 감금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 지지자들이 에드워드 4세의 투옥을 틈타 봉기하자, 요크 가문의 다른 귀족들이 워릭 백작의 소집에 응하지 않아 결국 에드워드 4세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죄를 공개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워릭 백작은 왕이 앙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클래런스 공작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또 다른 반란을 계획했다. 하지만 1470년 3월 12일, 에드워드 4세가 로즈코트 필드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자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프랑스로 도주했다. 에드워드 4세는 반란군에게서 압수한 서신과 자백을 통해 워릭 백작의 배신을 확인했다.
프랑스로 망명한 워릭 백작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중재로 오랜 정적이던 앙주의 마가렛과 손을 잡고 랭커스터 가문을 위해 싸우기로 합의했다. 1470년 10월, "킹메이커"로 불리던 워릭 백작은 랭커스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에드워드 4세는 매형인 용담공 샤를이 다스리는 부르고뉴로 피신해야 했다. 이로써 헨리 6세가 잠시 왕위에 복위되었다. 워릭 백작은 헨리 6세를 복위시킨 후,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부르고뉴 공작 사이의 대립에 개입하여 루이 11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부르고뉴 공작이 에드워드 4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빌미가 되었다. 1471년 3월 14일,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이는 한 달 뒤 바닛 전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이 군대를 모으고 있던 코번트리를 피해 런던으로 진군하여 수도를 장악한 뒤, 워릭 백작과 맞서기 위해 바닛으로 향했다.
2. 3. 에드워드 4세의 귀환과 바넷 전투의 발발
1470년 10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고 전 국왕 헨리 6세를 복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 사이의 분쟁에서 루이 11세를 지원하기로 약속하는 실책을 범했다. 이는 에드워드 4세의 처남이기도 했던 부르고뉴 공작이 에드워드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1471년 3월 14일, 부르고뉴의 지원을 받은 에드워드 4세의 군대는 요크셔의 라벤스푸른(Ravenspur)에 상륙했다. 병력을 모으며 내륙으로 이동한 에드워드 군대는 초기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는 그의 행군 경로가 퍼시 가문의 영지를 통과했고, 노섬벌랜드 백작이 과거 에드워드 4세로부터 북부 영지를 돌려받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에드워드는 자신이 왕위를 διεκδικήσει(διεκδικήσει)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칭호인 요크 공작 작위만을 요구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선언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에드워드의 행군을 감시하던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은 자신의 군대를 설득하여 에드워드에게 맞서지 못했다.
충분한 군세를 모으자 에드워드 4세는 본색을 드러내고 런던을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엑서터 공작과 옥스퍼드 백작의 저항을 물리치고 코번트리에서 워릭 백작을 포위하며 결전을 유도했다.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사위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군대가 합류하여 요크군을 압도하기를 기다리며 전투를 피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워드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보내 클래런스 공작에게 요크 가문으로 돌아올 것을 설득하게 했다. 클래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에드워드에게 합류했다. 화해한 요크 가문의 형제들은 코번트리로 이동했고, 클래런스는 워릭 백작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사위의 배신에 격분한 워릭 백작은 클래런스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이 시점에서 워릭과 싸울 수 없게 된 에드워드 4세는 다시 런던으로 방향을 돌렸다.

며칠 후, 몬태규 후작, 옥스퍼드 백작, 엑서터 공작의 지원을 받아 강화된 워릭 백작의 군대는 에드워드 군대를 추격했다. 워릭은 서머셋 공작이 통제하고 있던 런던이 에드워드에게 성문을 닫아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헨리 6세보다 젊은 요크 가문의 왕 에드워드 4세를 더 선호했고, 서머셋 공작은 도시를 떠나버렸다. 런던 시는 에드워드를 따뜻하게 환영하며 성문을 열었다. 폐위되었던 헨리 6세는 에드워드를 맞이하며 "[에드워드]의 손에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스스로 구금 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랭커스터 가문의 정찰대는 런던 북쪽 19km 지점인 바닛을 정찰했으나 요크군에게 격퇴당했다. 1471년 4월 13일, 랭커스터 주력군은 다음 날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바닛 북쪽의 고지대 능선에 진을 쳤다. 워릭 백작은 바닛을 통과하는 그레이트 노스 로드(Great North Road, 현재 A1 도로의 일부) 양옆으로 동서 방향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우익, 엑서터 공작은 좌익, 몬태규 후작은 중앙을 지휘했으며, 워릭 백작 자신은 예비대를 이끌 준비를 마쳤다. 워릭은 전열 전체를 약간 서쪽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는 좌익 후방의 지형적 함몰 지대가 엑서터 군대의 후퇴를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측 군대의 정확한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워릭 백작의 랭커스터군이 에드워드 4세의 요크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은 일치한다. 랭커스터군의 병력은 10,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요크군은 7,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수적 열세에 놓인 에드워드 4세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랭커스터군이 헨리 6세를 탈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전장에 데리고 나왔다. 에드워드 4세는 저녁 무렵 바넷에 도착했으며, 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요크 가문의 왕은 좌익에 헤이스팅스 남작을, 우익에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배치했다. 클래런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와 함께 중앙에 위치했는데, 이는 그의 능력을 신뢰해서라기보다는 두 번이나 배신했던 그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예비대는 후방에 배치되어 에드워드의 명령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에드워드는 다음 날 아침 기습 공격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엄격한 침묵 명령 하에 요크군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랭커스터군 진영으로 접근했다. 이 야간 기동 동안 양측 지휘관 모두 상대방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는 다음 날 전투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밤새 워릭 백작은 자신의 포병대에게 요크군 진영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향해 계속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요크군이 이미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랭커스터군의 포탄은 대부분 요크군 진영을 넘어가 버렸다. 반면, 요크군의 포병은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발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군대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몬태규 후작은 형인 워릭 백작에게 다가가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음을 알렸다. 그는 최고 지휘관인 형제들이 전투 중에 말을 타는 대신 직접 걸어서 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시 병사들은 기마 지휘관들이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 있다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네빌 형제가 직접 땅을 밟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병사들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사기를 높이고 더 용감하게 싸우도록 독려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워릭 백작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그들의 말은 후방의 로텀 숲(Wrotham Wood) 근처에 묶어두었다.
3. 전투의 경과
랭커스터파는 옥스퍼드 백작이 우익, 몬터규 후작이 중앙, 엑서터 공작이 좌익을 지휘했으며, 워릭 백작은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요크파는 에드워드 4세가 중앙군을, 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후의 리처드 3세)가 우익을, 헤이스팅스 경이 좌익을 맡았다.
전투 초반, 짙은 안개 속에서 옥스퍼드 백작이 이끄는 랭커스터군 우익이 요크군 좌익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안개로 인해 다른 부대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고, 양측 전선은 비스듬하게 형성되었다.
짙은 안개는 전투 중 큰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몬터규 후작 휘하 병사들이 옥스퍼드 백작 부대의 휘장을 에드워드 4세의 것으로 오인하여 서로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에드워드 4세가 예비대를 투입하면서 전세는 요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몬터규 후작은 전사했고(아마 옥스퍼드 백작의 병사 중 한 명에 의해), 엑서터 공작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후에 구조되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안개가 걷히고 패배를 인지한 워릭 백작은 말을 매어둔 로섬 우드로 향하려 했지만, 도주 중 요크군 보병에게 따라잡혀 살해되었다.
같은 날 잉글랜드 남서부 웨이머스에 상륙한 마거릿 왕비는 워릭 백작과 합류하려 했으나, 바닛 전투의 패배 소식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는 장미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했으며, 요크파는 랭커스터파와의 최종 결전인 튜크스베리 전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3. 1. 양측의 전력 배치
1471년 4월 13일, 전투 전날 밤, 랭커스터군 주력군은 다음 날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바닛 북쪽의 고지대 능선에 자리를 잡았다. 워릭 백작은 바닛을 통과하는 그레이트 노스 로드(Great North Road) 양쪽에 동서 방향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옥스퍼드 백작이 우익을, 엑서터 공작이 좌익을 맡았으며, 몬태규 후작은 중앙을 지휘했다. 워릭 백작 자신은 예비대를 이끌 준비를 마쳤다. 워릭 백작은 전열 전체를 서쪽으로 약간 이동시켰는데, 이는 좌익 후방의 지형적 함몰 지대가 엑서터 부대의 후퇴 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사이 워릭 백작은 요크군의 예상 위치를 향해 지속적인 포격을 명령했으나, 어둠 속에서 요크군이 예상보다 훨씬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포탄은 목표를 넘어가 버렸다. 또한 몬태규 후작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워릭 백작에게 지휘관들이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싸울 것을 제안했다. 이는 지휘관들이 불리할 때 도망가지 않고 함께 싸우다 죽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워릭 백작은 이에 동의하여 말들을 후방의 로섬 숲(Wrotham Wood) 근처에 매어두었다.
한편, 에드워드 4세는 저녁 무렵 바닛에 도착했으나, 어둠 속에서 랭커스터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전투 대열을 정비했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랭커스터군 10,000~30,000명 추정, 요크군 7,000~15,000명 추정) 에드워드는 기습을 위해 밤 동안 병사들에게 엄격한 침묵 명령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랭커스터군 진영으로 접근했다. 에드워드 4세는 헤이스팅스 경에게 좌익을 맡기고, 우익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중앙군은 에드워드 4세 자신이 직접 지휘했으며, 클래런스 공작 조지도 중앙에 배치되었다. 이는 클래런스 공작의 능력에 대한 신뢰보다는, 그의 충성심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감시하기 용이한 위치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예비대는 후방에 배치되어 국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요크군의 포병은 랭커스터군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발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밤 동안 양측 지휘관 모두 상대방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양 군의 전선은 서로 약간 어긋나게 배치되었다. 이는 다음 날 전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2. 전투의 진행
진영 | 좌익 | 중앙 | 우익 | 예비대 |
---|---|---|---|---|
랭커스터파 | 엑서터 공작 | 몬터규 후작 | 옥스퍼드 백작 | 워릭 백작 |
요크파 | 헤이스팅스 경 | 에드워드 4세 |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후의 리처드 3세) | (에드워드 4세 직속) |
1471년 4월 14일 오전 4시경, 양 군대가 잠에서 깨어났다. 에드워드 4세는 이른 공격을 계획했기에, 재빨리 병사들을 일으켜 랭커스터군과 교전하게 했다. 양측은 서로에게 접근하기 전에 대포와 화살을 발사했다. 아침 안개는 짙었고, 밤 동안의 양 군대의 이동으로 인해 서로가 옆으로 밀려났다. 어느 쪽도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고, 각각 약간 오른쪽으로 벗어났다. 이러한 위치 변화는 어느 군대의 우익도 상대방의 좌익을 우회하여 포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랭커스터군은 이점을 먼저 활용했다. 옥스퍼드의 부대는 재빨리 헤이스팅스를 압도했다. 요크군 병사들은 바닛으로 도망쳤고, 랭커스터군이 뒤쫓았다. 헤이스팅스의 병사 중 일부는 심지어 런던에 도착하여 요크군의 몰락과 랭커스터군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다. 옥스퍼드의 부대는 쓰러진 적들을 약탈하고 바닛을 약탈하기 위해 흩어지면서 붕괴되었다. 옥스퍼드는 고함을 지르고 병사들을 쫓아 800명을 다시 모아 전투로 이끌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좁아 두 주력군은 옥스퍼드가 헤이스팅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따라서 요크군 좌익의 붕괴는 양측의 사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몽태규와 에드워드의 부대 간의 싸움은 팽팽했고 치열했다. 그러나 랭커스터군 좌익은 옥스퍼드가 상대에게 가한 것과 유사한 공격을 받았고, 글로스터는 부대 간의 불일치를 이용하여 엑서터를 격퇴했다. 에드워드의 형제는 약간의 경사면을 오르며 싸웠기 때문에 진격이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랭커스터군 좌익에 가한 압력은 전체 전투선을 회전시켰다. 워릭은 이러한 변화를 보고 대부분의 예비군에게 엑서터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도록 도우라고 명령하고, 나머지 병력은 중앙에서 싸우도록 했다. 점차적으로 전투선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옥스퍼드는 안개 속에서 싸움터로 발길을 되돌렸다. 그의 부대는 예상치 못하게 몽태규의 후방에 도착했다. 안개에 가려진 옥스퍼드의 '별과 광선' 문장은 몽태규의 병사들에게 에드워드의 '화려한 태양'으로 오인되었다. 그들은 아군이 에드워드의 예비군이라고 생각하고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옥스퍼드와 그의 병사들은 즉시 반역을 외쳤다. 굳건한 랭커스터군이었던 그들은 몽태규의 최근 변절을 경계했다. 그들은 반격을 가했고 전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반역 외침은 랭커스터군 전체에 퍼져 나가, 분노, 공포, 혼란 속에서 병사들이 도망치면서 붕괴되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에드워드는 랭커스터군 중앙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예비군을 투입하여 붕괴를 가속화했다. 엑서터의 죽음에 대한 요크군 도끼 소리가 랭커스터군 좌익에서 울려 퍼졌고, 혼란 속에서 몽태규는 요크군이나 옥스퍼드의 병사 중 한 명에게 등을 맞고 죽었다.
형제의 죽음을 목격한 워릭은 전투에서 패배했음을 알았다. 그는 퇴각하기 위해 말을 향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승리가 눈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워릭이 죽는 것보다 산 채로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여 명령을 내리고 경호원들을 파견하여 백작을 생포해 오도록 했다. 몇몇 연대기 작가들은 국왕이 워릭을 요크군에 다시 합류하도록 설득하면 가치 있는 동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제안했다. 반대로, 역사가 마이클 힉스는 에드워드가 자비의 표시보다는 공개 처형을 위해 백작을 생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국왕의 의도와 관계없이 워릭은 랭커스터군의 패주 중에 죽었다. 그는 전장을 도망치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3. 3. 워릭 백작의 죽음과 랭커스터 군의 패배
1471년 4월 14일 새벽 4시경, 에드워드 4세는 조기 공격을 계획하고 부대를 움직여 랭커스터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짙은 아침 안개 속에서 양군은 서로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 채 옆으로 비껴선 상태로 전투를 시작했다. 이 때문에 각 군의 우익이 상대의 좌익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랭커스터군은 이점을 먼저 활용했다. 옥스퍼드 백작이 이끄는 랭커스터군 우익은 헤이스팅스 경이 지휘하는 요크군 좌익을 빠르게 격파했다. 요크군 병사들은 바닛 방향으로 도주했고, 일부는 런던까지 도망쳐 요크군의 패배와 랭커스터군의 승리를 알렸다. 옥스퍼드의 군대는 추격과 약탈 과정에서 흩어졌으나, 옥스퍼드 백작은 약 800명의 병력을 수습하여 전장으로 복귀했다.
반면, 요크군 우익을 이끈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엑서터 공작이 지휘하는 랭커스터군 좌익을 공격했다. 글로스터의 부대는 약간의 경사를 오르며 싸워야 했기에 진격 속도는 느렸지만, 랭커스터군 좌익에 압박을 가하며 전열을 회전시켰다. 워릭 백작은 이 변화를 감지하고 예비 병력 대부분을 투입하여 엑서터군을 지원했다. 점차 전선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짙은 안개는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전장으로 복귀하던 옥스퍼드 백작 부대의 휘장(별 문양, Star with Streams)이 안개 속에서 에드워드 4세 부대의 휘장(태양 문양, Sun in Splendour)과 비슷하게 보이자, 중앙의 몬터규 후작 휘하 병사들이 이들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배신이다!'라는 외침이 퍼지면서 랭커스터군의 전열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혼란 속에서 몬터규 후작은 (아마도 옥스퍼드 백작의 병사 중 한 명에게) 전사했다. 엑서터 공작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장에 버려졌으나, 전투 후 구조되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안개가 걷히고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깨달은 워릭 백작은 말을 타고 로섬 우드(Wrotham Wood) 방면으로 도주하려 했으나, 요크군 보병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워릭 백작의 죽음과 랭커스터군의 패배는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같은 날 잉글랜드 남서부 웨이머스에 상륙한 마거릿 왕비는 워릭 백작과 합류하여 반격을 꾀하려 했으나, 바닛 전투의 패배 소식으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전투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왕조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는 곧이어 벌어진 튜크스베리 전투로 이어졌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바닛 전투는 약 2~3시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른 아침의 짙은 안개가 걷히면서 끝이 났다. 당시 전투의 일반적인 양상처럼, 패주하는 군대가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도망치는 병사들은 추격하는 요크군에게 살해당했다. 전투의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런던 대연대기"는 1,500명의 사망자를 보고했지만, "워크워스 연대기"는 4,000명으로 기록했다. 16세기 연대기 작가인 에드워드 홀과 라파엘 홀린셰드는 최소 10,0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1] 요크군의 사상자는 랭커스터군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로일은 요크군 약 500명, 랭커스터군 약 1,000명 사망이라는 추정치를 제시한다.
워릭 백작과 그의 동생 몬터규 후작의 시신은 런던으로 옮겨졌다. 에드워드 4세는 반역자에게 통상적으로 가해지는 거열형을 집행하지 않았고, 시신을 성문에 전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두 형제의 시신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사흘간 공개적으로 전시해 그들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잠재운 뒤, 비샴 수도원의 가족 묘지에 안장하도록 허락했다.
바닛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4세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마거릿 왕비는 전투 당일 웨이머스에 상륙하여 웨일스 등지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워릭 백작의 사망 소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마거릿 왕비 아래 다시 결집했다.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5월 4일 테우크스베리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여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바닛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엑서터 공작은 살아남아 추종자들에게 발견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회복한 후 런던탑에 4년간 투옥되었다가 에드워드 4세에게 복종했다. 엑서터 공작은 이후 장미 전쟁의 주요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1475년 프랑스 원정 중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전해진다.[2]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옥스퍼드 백작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해상에서 요크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1473년 세인트 마이클 산을 점령했다가 체포되었으나, 12년 후 탈옥하여 헨리 튜더에게 합류했고,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지휘했다.
바닛 전투는 워릭 백작 등 주요 인물들의 죽음을 가져왔으며, 이는 장미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전투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부족한 편이다. 목격자 증언을 담은 주요 기록으로는 에드워드 4세 측근이 작성한 ''에드워드 4세의 도착에 대한 역사''가 있으나, 이는 요크 가문에 편향된 서술을 담고 있다. 랭커스터 측의 관점은 존 페스턴 경의 페스턴 서한 등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워크워스 연대기'' 등 다른 기록들은 단편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므로, 전투에 대한 상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4. 1. 에드워드 4세의 왕위 확립
바닛 전투는 장미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워릭 백작의 죽음을 초래했으며, 결과적으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를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많은 역사학자들은 만약 워릭 백작의 군대가 앙주의 마거릿이 이끄는 군대와 합류하여 에드워드 4세에게 맞섰다면, 연합한 랭커스터 세력이 요크 군대를 압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워릭은 단독으로 전투를 감행했고, 그의 패배는 요크 가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승리는 이후 벌어진 테우크스베리 전투와 더불어 에드워드 4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최종적으로 확보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역사학자 콜린 리치몬드는 에드워드 4세의 권력 복귀는 사실상 바닛 전투에서 결정되었으며, 테우크스베리 전투는 "단지 마무리(에필로그)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킹메이커'로 불리며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워릭 백작이 제거되면서, 젊은 요크 가문의 왕 에드워드 4세는 더 이상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잉글랜드를 통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4세의 통치기에 만들어진 발라드(노래)들은 그의 승리를 신의 뜻이자 축복으로 묘사하며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 발라드에서는 "인간은 헛되이 계획하지만, 신께서 이루시니, 책이 분명히 말해주네."라고 노래했다.
반면, 바닛 전투는 네빌 가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전투 패배 이후 네빌 가문의 광대한 영지는 몰수되었고, 정치적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네빌 가문은 이전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4. 2. 튜크스베리 전투와 랭커스터 왕조의 몰락
바닛 전투에서의 패배로 몬터규 후작과 워릭 백작이 전사하고 엑서터 공작이 사로잡히는 등 랭커스터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이 전투와 같은 날, 마가렛 오브 앙주 왕비는 웨이머스에 상륙하여 웨일스를 돌며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는 요크 왕조의 우세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워릭 백작과의 협력을 기대했으나, 바닛 전투에서 랭커스터파가 패배하면서 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바닛 전투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의 승리가 확실해졌고, 요크파는 랭커스터파와의 최종적인 결전을 벌일 튜크스베리 전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랭커스터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3. 네빌 가문의 몰락
바닛 전투는 네빌 가문에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워릭 백작을 중심으로 한 네빌 가문의 세력이 에드워드 4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전투 후 네빌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정치적 지위 또한 크게 축소되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네빌 가문은 잉글랜드 정치 무대에서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워릭 백작과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지면서, 에드워드 4세는 장미 전쟁에서 요크 가문의 최종 승리를 굳히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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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 전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 3부''(1595)에서 간접적으로 다루어진다. 희곡의 5막 1장은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며, 2장과 3장은 전투 자체와 그 결과,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이 기록한 세부적인 내용, 예를 들어 옥스퍼드 백작과 에드워드 4세의 휘장을 혼동한 사건과 같은 중요한 일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희곡은 주로 시적이고 극적인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
극 중에서 몽태규 후작은 형인 워릭 백작을 구하려다 죽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셰익스피어가 참고한 자료 중 하나인 에드워드 홀의 1548년 저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두 고귀하고 유명한 가문의 연합''의 내용을 따른 것이다.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에게 사로잡혀 옥스퍼드 백작과 서머싯 공작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워릭의 죽음은 해당 장면의 중심을 이루며, 이는 홀이 워릭의 죽음을 용감한 최후로 생생하게 묘사한 것을 반영한다. 여러 연대기에서는 에드워드 4세가 워릭을 생포하고 싶어 했다고 기록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요크 가문의 왕이 워릭의 목숨을 원했다고 묘사하여 극적인 긴장감을 높였다.
셰익스피어는 네빌 가문 형제들(워릭과 몽태규)이 서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모습으로 그린 반면, 요크 가문의 세 아들인 에드워드, 글로스터 공작(훗날 리처드 3세), 클래런스 공작은 각자의 야심과 생각 때문에 점차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관계로 묘사한다. 영어 교수 존 콕스는 셰익스피어가 에드워드의 승리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당시 전투 후 발라드의 시각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전투 직전에 클래런스 공작의 마지막 배신 행위를 배치함으로써, 에드워드의 통치가 그의 군사적 공격성, 행운, 그리고 "정책(policy)"에 기반한 것임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홀의 기록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4세를 전투 장면의 직접적인 행동에서 의도적으로 제외시킨다.
5. 2. 전장 보존

역사 유적지 보존을 담당하는 정부 기구인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바닛 타운 북쪽 800m~1600m 지역을 대략적인 전장으로 추정한다. 수 세기에 걸쳐 지형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타운의 경계와 지리에 대한 기록이 잉글리시 헤리티지나 역사가들이 전투의 정확한 위치를 결론 내릴 만큼 상세하지 않다. 당시의 묘사와 일치하는 지리적 특징을 통해 전투가 벌어진 곳을 추정할 수 있다.[1]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한자동맹 상인 게르하르트 폰 베셀의 15세기 편지가 지질학적 특징을 통해 전장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제안한다. 이 편지에는 해들리 그린에 해당하는 "넓은 녹지"가 언급되어 있으며, 요크군 측면의 늪은 몬켄 미드 브룩 계곡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편지에는 또한 거의 변하지 않고 들판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는 세인트 앨번스 로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해당 지역의 많은 부분이 건물로 채워졌다. 20세기에는 몬켄 해들리 교외가 바닛 전투가 벌어진 들판의 일부를 덮었다.[2] 앨프레드 번 중령이 제시한 대로, 지역 골프장의 울타리는 옥스퍼드 군대가 정렬하여 은폐했던 관목열일 가능성이 높다.
1740년에 제러미 샘브로크 경은 그레이트 노스 로드와 키츠 엔드 로드 교차로에서 200m 남쪽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후 두 도로 사이의 풀밭에 있는 교차로 바로 북쪽으로 옮겨졌다. 해들리 하이 스톤으로 알려진 이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5.5m이며 다음과 같은 비문으로 그 위치를 표시한다.
"여기에서 1471년 4월 14일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 사이에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전투에서 백작은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전투는 런던 바닛 자치구의 문장에 언급되어 있으며, 방패 상단에는 빨간 장미와 은색 장미가, 문장에는 두 개의 교차된 검이 그려져 있다.
매년 바닛 중세 축제가 전투가 벌어졌다고 생각되는 장소에서 열린다. 여기에는 전투 재연과 시장 가판대가 포함된다.
참조
[1]
서적
Richard III: Loyalty Binds Me
https://books.google[...]
Amberley Publishing Limited
2018-09-15
[2]
간행물
Foreword to the Yal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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