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반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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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반념은 18세기 후반 베트남의 인물로, 무술에 능하고 용감한 성품을 지녔다. 응우옌 주 막하에서 관원으로 일하다 군법을 위반하여 도주한 후 떠이선 왕조에 합류했다. 1778년 응우옌냑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부장이 되었고, 응우옌후에를 따라 자딘, 북하 지역을 정벌하는 데 참여했다. 북하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응우옌흐우찐의 반란을 진압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응우옌후에의 의심을 받아 1787년 밤중에 기습을 받고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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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반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부반념 (Vũ Văn Nhậm) |
| 출생 - 사망 | 1788년 사망 |
| 군사 정보 | |
| 소속 | 떠이선 왕조 |
2. 생애
부반념은 광남(廣南) 출신으로 무술에 능하고 기개와 용맹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응우옌 주의 관리였으나 군법 위반으로 꾸이년(歸仁)으로 도망쳤고, 이후 떠이선 왕조에 합류하여 응우옌냑의 사위가 되었다. 1786년 응우옌후에를 따라 자딘(嘉定)과 북하(北河)를 공격하여 찐 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2]
응우옌후에는 부반념을 동해(洞海, 현재 꽝빈성 동허이시)에 주둔시켜 북하를 감시하게 했으나, 응우옌흐우찐(阮有整)이 북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자 응우옌후에에게 보고하고 북벌을 단행했다.[2] 1787년 탕롱을 점령하고 레주이껀을 감국(監國)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으나, 응우옌후에의 기습으로 죽임을 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떠이선 왕조 합류
광남(廣南)에서 태어났다. 무술에 정통하였고, 기개와 용력을 갖추었다. 원래 응우옌 주의 막하에서 관원으로 일했으나 군법을 위반하자 꾸이년(歸仁)으로 도망쳤다. 회인부(懷仁府)의 지부(知府) 호딱(胡作)이 부녀자를 강간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고 떠이선 왕조의 쩐꽝지에우(陳光耀)에게 달아났다. 쩐꽝지에우는 그를 응우옌냑(Nguyễn Nhạc)에게 추천하였고, 응우옌냑의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1778년에는 응우옌냑의 딸과 결혼하였다.2. 2. 북하 정벌과 권력 장악
1786년 응우옌후에를 따라 자딘(嘉定)을 공격하고, 이어서 북하(北河)로 진격하여 찐 주를 멸망시켰다.[2] 응우옌후에는 탕롱을 점령한 뒤 레 민제로 하여금 현종의 뒤를 이어 후 레 왕조의 황제가 되도록 승인하고 개선하였다.[2] 이후 응우옌후에는 부반념을 동해(洞海, 현재 꽝빈성 동허이시)에 주둔시켜 북하 지역을 감시하게 했다.[2]그런데 응우옌흐우찐(阮有整)이 북하를 근거지로 찐 주처럼 정권을 세우려고 하자, 부반념은 이 사실을 응우옌후에에게 보고했다.[2] 응우옌후에는 부반념에게 북하 공격을 명했으나, 그를 시기하고 의심했기 때문에 응오반서(吳文楚)와 판반런(潘文璘)을 참찬군무(參贊軍務)로 파견하여 병권을 나누게 했다.[2]
1787년, 부반념은 북벌을 단행하여 탕롱을 점령했다. 응우옌흐우찐은 민제를 데리고 도주했으나 부반념의 부장 응우옌반호아(阮文和)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민제를 찾지 못한 부반념은 숭양공(崇讓公) 레주이껀을 감국(監國)으로 세우고 정권을 장악했다. 레주이껀은 매일 부반념의 군영을 오가며 정사를 상의했다.
2. 3. 최후
1787년, 부반념은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여 탕롱을 공격해 들어갔다. 응우옌흐우찐은 성을 버리고 민제를 데리고 달아났으나 부반념의 부장 응우옌반호아(阮文和)에게 사로잡혔고,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했다.[1] 민제를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부반념은 숭양공(崇讓公) 레주이껀을 감국(監國)으로 세우고 자신은 정권을 장악하였다.[1] 레주이껀은 매일 부반념의 군영을 오가며 조정의 정사를 상의하였다.[1] 응오반서(吳文楚)와 판반런(潘文璘)은 부반념이 북하 지역에서 하고 있는 일을 응우옌후에에게 보고하였고, 부반념이 모반하고 있다고 하였다.[1] 응우옌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밤새도록 가서 한밤중을 틈타 탕롱에 진입하였고, 잠을 자고 있는 부반념을 죽였다.[1]참조
[1]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wikisource.o[...]
[2]
서적
Đại Nam thực lục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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