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비상시공산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비상시공산당은 1930년 무장공산당 궤멸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재건된 일본 공산당의 한 시기이다. 카자마 죠키치가 당 재건을 주도하고, 코민테른과의 자금 및 지침 교류를 통해 활동을 이어갔으나, 밀정의 침투와 자금난으로 인해 강도 행위를 저지르는 등 혼란을 겪었다. 1932년 아타미 사건으로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붕괴되었고, 이후 린치공산당의 재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공산당의 역사 -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는 극좌 노선에서 선진국형 평화혁명 노선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노사카 산조를 제1서기로 선출하며, 51년 강령을 사실상 폐기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종결시켰으며, 이토 릿슈의 제명을 결정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 일본공산당의 역사 - 노사카 산조
    노사카 산조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유학 중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 기간에는 중국에서 활동했고, 전후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과거 동료 살해 연루 의혹으로 제명되었다.
비상시공산당
기본 정보
비상시공산당 이미지 없음
비상시공산당
개요
국가일본
약칭비상시 공산당
창립2016년 12월 25일
해산2017년 1월 17일
정치적 위치극우
이데올로기극우
일본 민족주의
반공주의
관련 인물아베 신조 (지지자)

2. 내력

1930년 7월 무장공산당 지도부가 탄압으로 궤멸되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카자마 죠키치가 당 재건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당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1월 12일 당 중앙이 재건되었고, 1월 25일에는 기관지 『적기』 34호가 재간되었다. 카자마 등 지도부는 코민테른에서 받아온 31년 정치테제 초안을 1931년 4월 『적기』 지면에 발표했다.

당시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담당했던 마츠무라 노보루(본명 이이즈카 미츠노부)는 코민테른 극동부 밀사로부터 당면 활동비 100엔과 당 대표의 상해 파견 여비 1,000엔을 받았다. 당 중앙은 콘노 요지로를 상해로 파견했고, 코민테른은 콘노에게 공작금 1,500엔을 지급하며 카자마의 상해 파견, 주 1회 보고, 밀정 대책기관 창설을 지시했다. 또한, 공작금으로 월 2,000엔을 5년 7월(무장공산당 궤멸 시점)로 소급하여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1931년 5월, 카자마는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대표인 환태평양노동조합 서기국의 일레르 눌렌스를 만나 비합법 지하기술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그 중에는 “S(밀정)는 발견되는 차제에 지워버릴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카자마는 레닌학교 및 동방노력자학교에 유학생을 보낼 것, 31년 정치테제 초안의 방침으로 갈 것 등을 지지받고 공작금 1,500엔을 받았다. 귀국 후 미후네 토메키치를 유학생으로 파견했으나, 미후네는 상해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했다. 1931년 6월,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의 대립 속에서 눌렌스가 검거되면서 코민테른과의 연락이 다시 끊겼다.

1931년 5월, 공산당은 "당의 대중화" 방침을 결정하고, 8월 회의에서 중앙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산하단체인 전국농민조합의 좌파 "전국회의파(전회파)"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를 통해 당세를 확장했다. 『적기』 발행부수는 1,000부에 이르렀고, 1932년 4월부터는 활판인쇄가 개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 이후, 공산당은 병사들을 상대로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호소했다.

2. 1. 당중앙 재건과 초기의 호조

1930년 7월 무장공산당 지도부가 탄압으로 궤멸되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카자마 죠키치가 당 재건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당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1월 12일 당 중앙이 재건되었고, 1월 25일에는 기관지 『적기』 34호가 재간되었다. 카자마 등 지도부는 코민테른에서 받아온 31년 정치테제 초안을 1931년 4월 『적기』 지면에 발표했다.

당시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담당했던 마츠무라 노보루(본명 이이즈카 미츠노부)는 코민테른 극동부 밀사로부터 당면 활동비 100엔과 당 대표의 상해 파견 여비 1,000엔을 받았다. 당 중앙은 콘노 요지로를 상해로 파견했고, 코민테른은 콘노에게 공작금 1,500엔을 지급하며 카자마의 상해 파견, 주 1회 보고, 밀정 대책기관 창설을 지시했다. 또한, 공작금으로 월 2,000엔을 5년 7월(무장공산당 궤멸 시점)로 소급하여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1931년 5월, 카자마는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대표인 환태평양노동조합 서기국의 일레르 눌렌스를 만나 비합법 지하기술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그 중에는 “S(밀정)는 발견되는 차제에 지워버릴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카자마는 레닌학교 및 동방노력자학교에 유학생을 보낼 것, 31년 정치테제 초안의 방침으로 갈 것 등을 지지받고 공작금 1,500엔을 받았다. 귀국 후 미후네 토메키치를 유학생으로 파견했으나, 미후네는 상해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했다. 1931년 6월,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의 대립 속에서 눌렌스가 검거되면서 코민테른과의 연락이 다시 끊겼다.

1931년 5월, 공산당은 "당의 대중화" 방침을 결정하고, 8월 회의에서 중앙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산하단체인 전국농민조합의 좌파 "전국회의파(전회파)"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를 통해 당세를 확장했다. 『적기』 발행부수는 1,000부에 이르렀고, 1932년 4월부터는 활판인쇄가 개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 이후, 공산당은 병사들을 상대로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호소했다.

2. 2. 코민테른과의 관계

당시 코민테른과의 연락은 이이즈카 미쓰노부(마츠무라 노보루)가 담당했다. 마츠무라는 쿠토베에서 귀국 후 전향하여 경찰의 스파이가 된 인물로, '스파이 M'이라고 불렸다. 1931년 2월 하순, 코민테른 극동부 밀사가 마츠무라와 접촉하여 당 활동비 1000엔과 당 대표의 상하이 파견 여비 100엔을 전달했다. 중앙부는 콘노 요지로를 상하이에 파견했고, 코민테른은 콘노에게 활동비 1500엔을 지급하고 카자마 조키치의 상하이 파견, 주 1회 보고, 스파이 대책 기구 설치를 지시했다. 또한, 활동 자금으로 월 2000엔을 5년 7월(무장 공산당 궤멸 시점)로 소급하여 지급할 것을 전달했다.

1931년 5월, 카자마는 상하이에서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의 이렌느 누랑을 만나 비합법 지하 기술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 여기에는 "S(스파이)는 발견 즉시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자마는 레닌 학교나 쿠토베에 사람을 보낼 것, 일본 측이 만든 31년 테제 초안의 방침으로 갈 것 등을 지지받고 활동비 1500엔을 지급받고 귀국했다.

이후 타케다라는 동지가 상하이에 갔다가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이렌느 누랑이 검거되고 일본 측 주소였던 마츠모토 신이치도 검거되어 코민테른과의 연락이 일시 중단되었다. 1931년 6월, 영국에 의한 누랑 체포로 상하이의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이 적발되어 궤멸된 이후, 코민테른과 일본 공산당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당 재정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코민테른으로부터의 자금 공여가 불가능해졌다. 코민테른으로부터의 자금이 끊어져도, 심파의 네트워크에서 자금이 모였으므로 당 활동에 그다지 영향은 생기지 않았다.

2. 3. 자금난과 강도질 노선

1931년 8월 관서지방조직, 1932년 3월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COP)에 대한 대규모 검거로 쿠라하라 코레히토, 츠보이 시게지, 쿠보카와 츠루지로, 나카노 시게하루, 미야모토 유리코, 무라야마 토모요시, 아키타 우쟈쿠 등 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미야모토 켄지와 코바야시 타키지는 체포되지 않고 지하로 잠행했다. 같은 해 큐슈대 교수 카자하야 야소지, 전 노동농민당 서기장 호소사코 카네미츠, 전 경도대 교수 카와카미 하지메, 동경상대 교수 오오츠카 킨노스케 등 거물급 동조자들이 검거되었다. 마츠무라(이이즈카 미쓰노부) 밑에서 자금 운동을 하던 스기노하라 슌이치는 체포되어 440명의 자금 제공자 명단을 경찰에 넘겼다.

자금망이 궤멸되면서 자금 조달을 담당하는 "가옥자금국"의 책임자 마츠무라 노보루(이이즈카 미쓰노부)가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마츠무라는 경찰의 밀정으로, 당 재정의 곤궁을 타개하기 위해 강도, 사기, 공갈, 미인계, 에로사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금을 조달했다. 1932년 7월부터 가옥 자금국은 "전투적 기술부"를 만들어 여자 당원을 이용해 농원 경영자에게서 600엔을 갈취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았다.[1]

마츠무라는 권총을 60정 이상 밀수하여 오오츠카 유쇼, 나카무라 류이치 등으로 하여금 은행 강도를 시켜 3만 엔을 강탈했다(적색깡패 사건). 그러나 권총 밀수 루트를 통해 이마이즈미 젠이치가 체포되고, 오오츠카 등 가옥자금국 국원들이 연이어 체포되었다.

2. 4. 32년 테제와 윤기협 암살

1932년 5월, 코민테른은 32년 테제를 발표하여 2단계 혁명론을 제시하고 "천황제 타도" 슬로건을 내걸었다.[2] 공산당은 32년 테제를 강요하여 일본 노동 조합 전국 협의회(전협) 등의 합법 조직에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2] 전협은 1933년 5월 치안 유지법 제1조 적용으로 비합법화되었다.[2]

1931년 6월, 영국에 의한 누랑 체포로 인해 상하이의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이 적발되어 코민테른과 일본 공산당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코민테른으로 부터의 자금 공여가 불가능해졌다. 자금줄이 궤멸된 결과, 당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는 「가옥 자금국」이라는 부서가 큰 권한을 갖게 되었고, 그 책임자인 마츠무라가 실질적으로 당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어 그의 지도 아래 경찰 당국을 도발하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협의 자율성 주장에 반발하여, 조선인들에게 인망이 높았던 윤기협에게 밀정 누명을 씌워 암살했다(윤기협 사살사건).

2. 5. 아타미 사건과 당 붕괴

1932년 10월, 코민테른 밀사 스즈에 겐이치가 내일하여 카자마에게 상해행을 지시했다. 상해로 가기 전 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어, 그해 10월 29일-30일에 걸쳐 아타미에서 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때 대회장을 설영했던 것이 밀정 마츠무라였고, 마츠무라는 아타미에 일본공산당 간부가 모두 집합한다고 경시청 특고과장 모리 모토이에게 통보했다. 결국 10월 30일, 32년 테제에 따른 당 방침을 정하기 위한 전국대표자회의 자리를 경찰이 급습하여 간부들이 일망타진되고, 같은 날 카자마・콘노・이와타 등도 각자의 아지트에서 검거되면서 당중앙이 다시 괴멸했다. 이것이 아타미 사건이다. 이 때 검거된 사람 수만 1,500명이 넘어서 비상시공산당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11월에 미야가와 등 검거를 면한 중앙위원들이 임시당중앙을 조직했으나 12월에 검거되어 빠르게 괴멸되었다.

아타미 사건 이후 은행강도 사건이 공산당 소행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대중에게 공산당에 대한 불신감을 주었다.

2. 6. 린치공산당

1932년 10월 30일 새벽, 경찰이 아타미시의 별장에서 열린 전국 대표자 회의를 급습하여 총격전 끝에 11명의 간부들을 검거했다(아타미 사건)[2]。같은 날, 카자마 죠키치, 콘노, 이와타 요시미치 등도 체포되어 당 중앙부가 다시 궤멸되었다(이 중 이와타는 경찰 심문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 전후의 당원, 동조자 검거자 수는 도쿄를 포함한 3부 18현에서 2200명에 달했고, 이듬해 1월 단계에서 220명 이상이 기소되어[3], "비상시공산당"은 궤멸되었다.[1]

아타미 사건 이후 1933년 1월 18일, 은행강도 사건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 보도가 해금되면서[4], 공산당이 은행강도라는 범죄 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공산당에 대한 불신을 안겨주었다. 이는 옥중의 당 간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으며, 1933년 중반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성명으로 시작되는 당원들의 대량 전향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야마모토 마사미, 노로 에이타로, 미야모토 켄지, 하카마다 사토미 등, 이른바 "린치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당 재건 시도가 이어졌지만, 조직 내부에 잠입한 스파이로 인해 상호 불신이 증폭되었다. 이는 "다수파" 분파의 형성 및 공산당 스파이 심문 사건의 중요한 복선이 되었다.

참조

[1] 뉴스 大森の銀行ギャングも計画的と判明 東京日日新聞 1933-01-18
[2] 뉴스 熱海会議出席の十一人、銃撃戦で検挙 東京日日新聞 1933-01-18
[3] 뉴스 二百二十一人を起訴 中外商業新報 1933-01-19
[4] 뉴스 一年間の検挙者、シンパ含め七千人 東京日日新聞 1933-01-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