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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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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도청은 남송 이종의 황후이자 도종, 공제 시기 태황태후로, 남송 멸망기에 섭정을 수행했다. 사심보의 손녀로, 양씨 황후의 간택을 받아 이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어 조카 도종이 황위를 계승했다. 도종 사후에는 어린 공제를 보좌하며 수렴청정했으나, 원나라의 침략으로 가사도를 처형하고 항복을 모색했다. 결국 원나라에 항복하여 수춘군부인으로 격하되었으며, 1283년 원나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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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수춘군부인(壽春郡夫人)
원래 이름壽春郡夫人(謝道淸)
별호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 귀비(貴妃)
존호수화성복황태후(壽和聖福皇太后)
사도청(謝道淸)
출생일1210년 5월 2일
출생지남송 천태(天台)
사망일1283년
사망지원나라 대도(大都)
가족 관계
아버지위왕(魏王) 사거백(謝渠伯)
배우자이종(理宗) 조윤(趙昀)
자녀기왕(祁王) 조유(趙維), 도종(度宗) 조기(趙禥) (양자)
남송 황후
재위 기간1231년 1월 14일 ~ 1264년 11월 17일
즉위소정(紹定) 3년 12월 10일 (1231년 1월 14일)
이전공성인열황후 양씨
이후황후 전씨
남송 황태후
재위 기간1264년 11월 17일 ~ 1274년 8월 15일
즉위경정(景定) 5년 10월 27일 (1264년 11월 17일)
이전수명황태후 양씨(공성인열황후)
이후황태후 전씨
남송 태황태후
재위 기간1274년 8월 15일 ~ 1276년 2월 4일
즉위함순(咸淳) 10년 7월 12일 (1274년 8월 15일)
이전수성태황태후 사씨(성숙황후)

2. 생애

사도청은 영종 때 재상을 지낸 사심보의 손녀였다. 사심보는 영종이 황후를 고를 때 양황후가 책봉되도록 도왔는데, 양황후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사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간택했다. 이종가사도의 누이 가씨를 더 마음에 들어했지만, 어머니의 압력으로 사씨를 통의군부인으로 봉했다가 귀인을 거쳐 황후로 책봉했다.[1]

1274년 도종이 사망하고 공제가 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공제의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군권을 비롯한 국정 전반은 가사도가 쥐고 있었다.[1]

당시 원나라 군대는 중국 북부와 남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상양 일대를 점령한 뒤, 양쯔강을 건너 주요 전략지점을 획득하고 남송의 수도 임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황태후는 백성들에게는 황제를 중심으로 나라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한편으로는 남진하는 원나라와 화평을 모색했다.[1]

1275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가 가사도가 이끄는 송나라 군대를 격퇴하면서, 태황태후는 군신과 여론의 압박에 굴복하여 가사도를 처형했다. 송나라는 육수부 등을 파견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원나라는 남송의 항복 외에는 모든 요구를 거절하였다.[1]

1276년 원나라 군대가 임안을 함락하자, 사태황태후와 황태후는 공제와 함께 바얀에게 항복했다.[2] 이후 남송의 잔존 세력들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공제의 형을 새 황제로 옹립하여 광동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2]

원나라는 공제와 태후들을 대도로 압송하였고, 사태황태후는 수춘군부인(壽春郡夫人)으로 격하되었다.[2]

2. 1. 황후 시절

사도청은 영종 대에 재상을 지낸 사심보의 손녀였다. 사심보는 영종이 황후를 고를 때 양황후가 책봉되도록 도와준 인물이었는데, 양황후는 그 은혜를 보답할 겸 사씨 집안에서 며느리를 간택했다. 이종은 본래 가사도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다운 가씨를 더 마음에 들어했지만, 어머니의 압력에 사씨를 통의군부인으로 봉했다가 귀인을 거쳐 황후로 책봉했다.[1]

이종은 황후보다는 가씨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을 더 총애했지만, 사씨는 자신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질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씨의 태도는 공성황후는 물론 이종에게도 호감을 갖게 했다.[1]

2. 2. 태황태후 시절과 섭정

1274년 도종이 붕어하고 공제가 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공제의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군권을 비롯한 국정 전반은 가사도가 쥐고 있었다.[1]

이 시기 원나라의 군대는 이미 중국 북부와 남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상양 일대를 점령한 뒤, 양쯔강을 건너 주요 전략지점을 획득하고,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을 향해 가고 있었다. 태황태후는 백성들에게는 뜻을 모아 황제의 뒤에 나라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하는 원나라와 화평을 모색하는 이중적인 해결책을 추구했다.[1]

1275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가 가사도가 이끄는 송나라 군대를 격퇴하면서, 군신과 여론의 압박에 굴한 태황태후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가사도를 처형한다. 송나라는 육수부를 비롯해 대신을 파견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원나라는 남송의 항복 이외에 모든 요구를 거절하였다.[1]

2. 3. 남송의 멸망

1276년 원나라 군대가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하자, 사태황태후와 황태후는 공제와 함께 바얀에게 항복했다.[2]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였으나, 남송의 남은 세력들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공제의 형을 새 황제로 옹립하여 광동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2]

원나라는 공제와 태후들을 대도로 압송하였고, 사태황태후는 수춘군부인(壽春郡夫人)으로 격하되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China Female Heads of State http://www.guide2wom[...]
[2]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1644
[3] 서적 송사
[4] 서적 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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