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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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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인황후는 북송 휘종의 후궁이자 남송 고종의 생모로, 개봉 출신이다. 소송의 첩으로 시작했으나 휘종의 후궁이 되었고,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에 끌려갔다가 남송으로 돌아와 황태후가 되었다. 금나라에서 흠종의 귀환 요청을 묵살하고 유복공주를 사칭한 여인을 처형하는 등 고종의 황위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흠종의 귀환 요청을 외면한 냉혹한 모습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80세에 사망하여 현인의 시호를 받았으며, 휘종과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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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배 칭호남송의 추증 황후
다른 칭호현인황후
자녕황태후
이름위비
생애
출생일원풍 3년 10월 25일 (1080년 12월 8일)
출생지개봉부
사망일소흥 29년 9월 20일 (1159년 11월 1일)
사망지임안부, 자녕궁
매장지영우릉
가족 관계
배우자휘종
자녀고종
아버지위안례
어머니진국부인 송씨
기타 정보
경력
정배 칭호송나라의 황후(추존)
황태후 즉위소흥(紹興) 7년 3월 17일(1137년 4월 9일)
황태후 임기 시작1137년 4월 9일
황태후 임기 종료1159년 11월 1일
이전 황태후융우황태후 맹씨(소자성헌황후)
다음 황태후수성황태후 오씨(헌성자열황후)
황후 즉위건염(建炎) 원년 5월 4일(1127년 6월 15일) (형식상)
선화황후 재위 시작'1127년 6월 15일'
선화황후 재위 종료1137년 4월 9일
추존/시호
시호현인(顯仁)
존호자녕황태후
기타
별호평창군군(平昌郡君)
현비(賢妃)

2. 생애

현인황후는 휘종의 후궁이자 고종의 생모이다. 휘종이 즉위하기 전 단왕(端王)이었을 때 그의 시녀였으며, 같이 시녀로 있던 교씨와 의자매처럼 막역하게 지냈다. 이후 교귀비가 휘종의 총애를 받아 귀비에 책봉되었고, 교귀비의 추천으로 위씨는 휘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 조구를 낳았다. 현비(賢妃)에 책봉되었지만 휘종의 총애는 받지 못했다.

1126년 금나라의 침공이 격화되자, 아들 조구가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여 금나라와의 화의에 나섰다. 흠종은 기뻐하며 조구의 생모인 위씨에게 용덕궁을 하사하였다. 1127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면서 위씨를 비롯한 황족들은 금나라로 끌려갔다. 그 사이 아들 강왕이 강남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 송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고종은 어머니 위현비를 선화황후(宣和皇后)로 추숭하였다.

1142년 남송금나라 사이에 소흥의 화의가 맺어지면서 강화 조건으로 남송에 송환되었다. 송환되기 전 흠종은 눈물을 흘리며 위씨에게 자신을 남송으로 보내줄 것을 고종에게 전달해달라고 하였으나, 흠종이 송환될 경우 아들 고종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침묵하였다.

남송으로 돌아온 위씨는 황태후로 추앙받으며 윤택한 노후를 보냈고, 1159년 음력 9월,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말년에 병을 앓아 양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사후 '현인(顯仁)'의 시호를 받고 황후로 추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입궁

휘종의 후궁으로, 휘종이 즉위하기 전 단왕(端王)이었을 때 그의 저택에 들어가 시녀가 되었다. 위씨는 본래 재상 소송의 첩이었으나, 야뇨증 때문에 쫓겨났다.[3] 시녀 시절 교씨와 자매처럼 지냈는데, 교귀비는 훗날 휘종의 총애를 받아 많은 아들을 낳고 귀비에 책봉되었다. 교귀비의 추천으로 위씨는 휘종의 후궁이 되었고, 평창군군(平昌郡君)에 봉해졌다. 이후 훗날 고종이 되는 조구를 낳아 수용빈(修容嬪)이 되었다. 그러나 휘종의 총애는 받지 못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였다.[4]

1126년 금나라의 침공이 격화되자 아들 조구가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여 금나라와의 화의에 나섰다. 흠종은 기뻐하며 조구의 생모인 위씨에게 용덕궁을 하사하고 현비(賢妃)로 책봉하였다.

2. 2. 정강의 변과 금나라에서의 삶

1126년, 금나라의 침공이 격화되자, 아들 강왕 조구가 금나라와의 화의를 위해 스스로 인질을 자처하였다. 흠종은 이에 기뻐하며 강왕의 생모인 위씨에게 용덕궁(龍德宮)을 하사하였다.[4]

1127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면서, 위씨를 비롯한 황제와 황족들은 금나라로 끌려갔다. 그 사이 아들 강왕은 강남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으며, 어머니 위씨를 선화황후(宣和皇后)로 추숭하였다. 금나라로 끌려간 위씨는 다른 여성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세의원(洗衣院)에 보내졌다.[3] 이후 금나라 종실 완안종현의 첩이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2. 3. 남송 귀환과 황태후 시절

1127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면서 황족들과 함께 금나라로 끌려갔다. 그 사이 아들 강왕이 강남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 송나라의 명맥을 이었다. 고종은 어머니 위현비를 선화황후(宣和皇后)로 추숭하였다. 금나라로 끌려간 위씨는 다른 여성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세의원에 들어갔다.[3]

1142년 남송금나라 사이에 소흥의 화의가 맺어지면서 강화 조건으로 남송에 송환되었다. 송환되기 전 흠종은 눈물을 흘리며 위씨에게 자신을 남송으로 보내줄 것을 고종에게 전달해달라고 하였으나, 흠종이 송환될 경우 아들 고종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침묵하였다.[5]

한편 금나라에서 탈출하여 남송으로 온 휘종의 20황녀인 유복공주(柔福帝姬)를 자처하는 여인이 나타났고, 고종은 유일하게 남은 혈육에게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유복공주는 약 12년간 고종의 배려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는데, 남송으로 송환된 위현비가 고종에게 '유복공주는 금나라에서 이미 죽었다'고 말하였고, 가짜 유복공주는 황족을 사칭하고 황실을 능멸한 죄로 처형당했다.

남송으로 돌아온 위씨는 황태후로 추앙받으며 윤택한 노후를 보냈고, 1159년 음력 9월,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말년에 병을 앓아 양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사후 '현인(顯仁)'의 시호를 받고 황후로 추존되었다.[1]

3. 가계

현인황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
아버지魯王 韋安禮|노왕 위안례중국어
어머니益國夫人 宋氏|익국부인 송씨중국어
남편북송 휘종
아들남송 고종


3. 1. 부모


  • 아버지 : 魯王 韋安禮|노왕 위안례중국어
  • 어머니 : 益國夫人 宋氏|익국부인 송씨중국어

3. 2. 남편

휘종(1082년 ~ 1135년)은 북송의 제8대 황제였다.[1]

3. 3. 자녀

고종 (조구, 1107년 ~ 1187년) : 남송의 초대 황제

4. 평가

현인황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정강의 변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아들 고종남송의 황제로 만든 강인한 여성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고종의 황위를 지키기 위해 흠종의 귀환 요청을 묵살하고 가짜 유복공주를 처형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5]

반면, 흠종의 귀환 요청을 외면하고, 유복공주 사건에 개입한 것은 혈육보다 권력을 중시하는 냉혹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5] 금나라에서 완안종현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4. 1. 긍정적 평가

정강의 변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아들 고종남송의 황제로 만든 강인한 여성으로 평가받는다. 흠종의 귀환 요청을 묵살하고 가짜 유복공주를 처형한 것은,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고종의 황위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5]

4. 2. 부정적 평가

흠종이 귀환을 요청했으나 이를 외면하고, 유복공주 사건에 개입한 것은 혈육보다 권력을 중시하는 냉혹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5] 금나라에서 완안종현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 행동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5. 기타

정강의 변을 전후로 한 위현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5. 1. 대중문화

정강의 변을 전후로 한 위현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매력적인 소재로 다루어졌다.

참조

[1] 서적 『宋会要輯稿』巻12, 后妃一 顕仁韋皇后
[2] 서적 『宋史』巻31, 高宗紀八 紹興二十九年九月庚子条
[3] 서적 『思陵録』・『南宋相眼』
[4] 문서 太上皇
[5] 서적 『宋史』巻23, 欽宗紀
[6] 서적 《송사》(宋史) 권30 〈본기〉(本紀) 제30 고종(高宗) 7 - 소흥(紹興) 12년 10월 갑신(甲申) 기사
[7] 서적 《송사》(宋史) 권243 〈열전〉(列傳) 제2 후비(后妃) 하 - 위현비(韋賢妃)
[8] 서적 《송사》(宋史) 권31 〈본기〉(本紀) 제31 고종(高宗) 8 - 소흥(紹興) 29년 9월 경자(庚子) 기사
[9] 서적 『송사(宋史)』 卷二百四十三 列傳第二 后妃下 위현비(韋賢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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