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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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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나(Mannaea)는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존재했던 고대 왕국으로, 현재의 이란 북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아시리아 기록에 처음 등장했으며, 우르미아호 동쪽과 남쪽에 자리 잡았다. 만나 왕국은 우라르투와 아시리아의 세력 다툼 속에서 부침을 겪었으며, 기원전 7세기에는 메디아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만나인들은 후르족 계통의 민족으로 추정되며,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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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이
지도
만나이의 역사적 영토
만나이의 역사적 영토
기본 정보
정식 명칭만나이 왕국
수도이질투
시대고대사
종교다신교
현재 국가이란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850년 - 기원전 616년
기타
오늘날 위치우르미아 호수 남쪽
관련 문화바라도스티안 문화
자르지안 문화
훌라베리-쇼무 문화
자얀데 강 문화
달마 문화

2. 명칭과 어원

만나(Mannaea)라는 이름과 최초로 기록된 통치자 우다키(Udaki)는 살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통치 30년(기원전 828년)의 비문에서 처음 언급되었다.[1] 아시리아인들은 보통 만나를 "만나인들의 땅"(the land of the Mannites)[2], 마나쉬(Manash)[3]라고 불렀고, 우라르투(Urartians)인들은 만나의 땅(the land of Manna)이라고 불렀다.[4]

성경(Bible)(예레미야 51:27)에서 만나는 "미니"(Minni)라고 불리며, 아라라트(Ararat)와 아스케나즈(Ashkenaz)와 함께 신바빌론을 파괴할 미래의 세력 중 하나로 언급된다. 유대 백과사전(The Jewish Encyclopedia (1906)은 '''미니'''를 아르메니아(Armenia)와 동일시했다.

페쉬타(Peshiṭta)와 타르굼 온켈로스(Targum Onkelos)에 따르면, 성경의 "미니"(예레미야 51:27)는 아르메니아, 또는 오히려 그 나라의 일부이며, 우라르투(Urartu) 역시 아르메니아의 일부로 언급된다(이사야 37:38; 열왕기하 19:37).[5][6] 이는 마나바세안(Manavasean)('''미니아스'''(Minyas))과 같은 고대 아르메니아 지역 중 하나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7][8] 아라라트, 아스케나즈(Ashkenaz)와 함께, 이것은 아마도 아시리아 비문에서 만네아(Mannea)에 해당하는 동일한 미니일 것이다.[9]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ḪAR Minni," 즉 "미니의 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리아어 및 우라르투어(Urartian language) 텍스트에서 발견된 지명과 고유명사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만나인들, 적어도 그들의 통치자들은 우라르투어와 관련된 비셈족 및 비인도유럽 언어를 사용했으며 현대 언어와의 연관성은 없다.[10] 그러나 하산루 테페(Hasanlu Tepe)에서 발견된 개인들의 유전학을 평가한 결과, 최근 연구에서는 아르메니아어(Armenian language)와 관련된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도유럽인들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했다.[11]

3. 지리적 위치

만나 왕국은 우르미아호의 동쪽과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1956년에 시작된 발굴 작업은 한때 만나 왕국의 유력한 지역으로 여겨졌던 지위예와 그 지류인 요새 도시 하산루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지위예의 또 다른 지류인 칼라이치 유적지에서 이 지명이 새겨진 석비가 발견되면서 만나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4. 민족 구성

《이란 백과사전》에 따르면 만네아인은 약간의 카시트 혼혈이 섞인 후르족 집단이었다. 만네아에 어떤 민족언어학적 통일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大)이란의 다른 민족들처럼, 만네아인들은 끊임없이 증가하는 이란 (즉, 인도유럽인)의 침투를 겪었다. 뵈머의 몇몇 인명과 지명에 대한 분석은 수정되고 보충될 필요가 있다. 멜리키쉬빌리 (1949, p. 60)는 만네아 내의 이란 세력을 그 주변부로 국한시키려 하였으며, 다이우쿠(cf. 슈미트, 1973)와 바그다티가 만네아 주변부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우다키와 아자, 두 명의 초기 만네아 통치자의 이름이 고대 이란어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H. 다이슨 주니어에 따르면 만네아인은 북 메소포타미아의 우라르투인 및 후르족과 언어학적으로 관련된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으로, 우르미아호 남동쪽 해안과 우르미아 산악 지역 남쪽에 정착했다.

Iosif Lazaridis 외(2022)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동안 하산루 테페와 관련된 개인들의 유전자를 검사한 후, 하산루의 주민들이 아르메니아어와 관련된 언어 또는 비(非) 인도유럽 언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5. 역사

만나 왕국은 기원전 850년경부터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정착 생활, 관개 농업, 소와 말 사육을 했다. 수도는 이르지르투(지르타)라는 요새 도시였다. 기원전 820년대에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귀족 지배 계급이 존재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우라르투아시리아의 분쟁 지역이 되었으며, 우라르투는 만나 영토에 요새를 건설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아시리아와 우라르투 간의 갈등 속에서 만나 왕국은 이란주 (기원전 725년~기원전 720년) 통치 기간 동안 전성기를 맞았다.

아쉐리의 후계자인 우알리는 아시리아의 동맹으로서, 카스피해 남서쪽 해안을 따라 동쪽에 자리 잡고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에 맞서 아시리아 편을 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의 죽음 이후 신 아시리아 제국은 내전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의 혼란은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의 종속에서 벗어나 이란의 주요 세력이 될 수 있게 했다. 기원전 616년 카블린 전투에서 아시리아와 만나의 군대는 나보폴라사르의 군대에 패배했다. 이 패배로 만나의 국경이 열리면서, 기원전 615년에서 기원전 611년 사이에 메디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5. 1. 초기 발전 (기원전 10세기 ~ 기원전 9세기)

만나 왕국은 기원전 850년경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만나인들은 정착하여 관개 농업을 하고 소와 말을 길렀다. 수도는 이르지르투(지르타)라는 요새 도시였다.

기원전 820년까지 만나에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는 왕의 권력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지배 계급으로서 유력한 귀족이 있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 지역은 우라르투가 만나 영토에 여러 요새를 건설하고, 아시리아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 지역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아시리아와 우라르투 간의 공개적인 갈등 속에서 만나에는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만나 왕국은 이란주 (기원전 725–720년경)의 통치 기간 동안 전성기를 맞았다.

5. 2. 강대국과의 각축 (기원전 9세기 ~ 기원전 8세기)

기원전 820년경, 만나이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는 왕의 권력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유력한 귀족들이 지배 계급으로 존재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만나이 지역은 우라르투와 아시리아 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우라르투는 만나이 영토에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아시리아와 우라르투 간의 갈등 속에서 만나이는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만나이 왕국은 이란주 (기원전 725년~기원전 720년)의 통치 기간 동안 전성기를 맞이했다.

기원전 716년,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는 만나이를 공격했는데, 당시 만나이의 통치자이자 이란주의 아들인 아자는 우라르투의 도움을 받은 울루수누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사르곤 2세는 이르지르투를 점령하고 파르수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아시리아인들은 이 지역을 말의 사육, 훈련 및 무역에 사용했다.

킴메르인(기미르)은 기원전 714년에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시리아가 우라르투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에 굴복하기로 결정했고, 아시리아와 우라르투는 함께 킴메르인들을 물리쳐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몰아냈다. 킴메르인들은 기원전 705년에 사르곤 2세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사르곤 2세는 그들을 몰아내던 중 사망했다. 기원전 679년까지 킴메르인들은 만나이의 동쪽과 서쪽으로 이주했다.

만나인들은 기원전 676년에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시리아와 파르수아 간의 말 무역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50년대까지 통치한 만나이의 왕 아쉐리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만나이의 영토를 계속 확장했다. 그러나 만나아는 기원전 660년경 아시리아에게 패배했고, 그 후 아쉐리의 죽음까지 내부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기원전 7세기에는 만나아는 이미 우라르투를 침략했고 아시리아에 의해 격퇴된 스키타이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만나이 왕국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5. 3.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의 간섭 (기원전 8세기 ~ 기원전 7세기)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 지역은 우라르투가 마나 영토에 여러 요새를 건설하면서 우라르투와 아시리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아시리아와 우라르투 간의 공개적인 갈등 속에서 마나는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마나 왕국은 이란주 (기원전 725–720년경)의 통치 기간 동안 전성기를 맞았다.

기원전 716년,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는 마나를 공격했는데, 그곳의 통치자 이란주의 아들 아자는 우라르투의 도움을 받아 울루수누에 의해 폐위된 상태였다. 사르곤은 이르지르투를 점령하고 파르수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아시리아인들은 이 지역을 말의 사육, 훈련 및 무역에 사용했다.

한 아시리아 비문에 따르면, 킴메르인(''기미르'')은 이 무렵 "마나의 한가운데"에 있는 고향인 ''가미르'' 또는 ''우이시디시''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킴메르인들은 기원전 714년에 기록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들은 아시리아가 우라르투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에 굴복하기로 결정했고, 이 둘은 함께 킴메르인들을 물리쳐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몰아냈다.

마나인들은 기원전 676년에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시리아와 파르수아 식민지 간의 말 무역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50년대까지 통치한 마나의 왕 아쉐리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마나의 영토를 계속 확장했다. 그러나 마나는 기원전 660년경 아시리아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 후 아쉐리의 죽음까지 내부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기원전 7세기에는 마나는 이미 우라르투를 침략했고 아시리아에 의해 격퇴된 스키타이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마나 왕국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5. 4. 쇠퇴와 멸망 (기원전 7세기)

기원전 716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만나를 공격했다. 당시 만나는 이란주의 아들 아자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우라르투의 도움을 받은 울루수누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사르곤 2세는 이르지르투를 점령하고 파르수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아시리아는 이 지역을 말 사육, 훈련, 무역의 중심지로 활용했다.

아시리아 기록에 따르면, 킴메르인(''기미르'')은 이 시기 "만나의 한가운데"에 있는 ''가미르'' 또는 ''우이시디시''에서 처음 나타났다. 킴메르인들은 기원전 714년에 아시리아가 우라르투를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이후 우라르투는 아시리아에 복종했고, 양국은 함께 킴메르인들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705년에 킴메르인들은 사르곤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그들을 몰아내던 중 사망했다. 기원전 679년까지 킴메르인들은 만나의 동쪽과 서쪽으로 이주했다.

만나인들은 기원전 676년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에게 반란을 일으켜 아시리아와 파르수아 간의 말 무역을 방해하려 했다.

기원전 650년까지 통치한 만나의 왕 아쉐리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만나는 기원전 660년경 아시리아에게 크게 패했고, 이후 아쉐리가 죽을 때까지 내부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7세기에는 이미 우라르투를 침략했던 스키타이에게 패배하면서, 만나 왕국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아쉐리의 후계자인 우알리는 아시리아의 동맹으로서, 당시 카스피해 남서쪽 해안을 따라 동쪽에 자리 잡고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에 맞서 아시리아 편을 들었다. 그러나 300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던 신 아시리아 제국은 기원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의 죽음 이후 내전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시리아의 혼란은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의 종속에서 벗어나 이란의 주요 세력이 될 수 있게 했다. 기원전 616년 카블린 전투에서 아시리아와 만나의 군대는 나보폴라사르의 군대에 패배했다. 이 패배로 만나의 국경이 열리면서, 기원전 615년에서 기원전 611년 사이에 메디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New Evidence for Mannean Art: An Assessment of Three Glazed Tiles from Qalaichi (Izirtu) Eisenbrauns 2011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Том 2 https://books.google[...]
[3] 문서 ARAB, I, 637, 739
[4] 문서 UKN №28
[5] 웹사이트 Armenia http://www.jewishenc[...] Funk and Wagnalls 1906
[6] 서적 The Biblical Geography off Central Asia: With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Sacred Geography, including the Antediluvian Period Nabu Press 2011
[7] 서적 Missionary Researches in Armenia: Including a Journey Through Asia Minor, and Into Georgia and Persia, with a Visit to the Nestorian and Chaldean Christians of Oormiah and Sarmas
[8] 서적 Cyclopa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Volume 1 Nabu Press 2010
[9] 문서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s.v. Minni
[10] 간행물 Iranian Identity in Ancient Times Richard N. Frye Iranian Studies, Vol. 26, No. 1/2 (Winter - Spring, 1993), pp. 143-146
[11] 논문 A genetic probe into the ancient and medieval history of Southern Europe and We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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