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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르-니라리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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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슈르-니라리 5세는 아다드-니라리 3세의 아들로, 신 아시리아 제국 쇠퇴기에 통치했다. 그의 치세는 지방 관리들의 권력 강화와 왕권 약화로 특징지어진다. 아슈르-니라리 5세는 즉위년과 기원전 748-747년에 원정을 나섰으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국내에 머물렀다. 그는 아르파드의 왕 마티일루와 조약을 맺었으며,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과 대립했다. 아슈르-니라리 5세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745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후계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왕위 계승 과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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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르-니라리 5세
기본 정보
칭호아시리아의 왕
이름아슈르-니라리 5세
원어 이름Aššur-nārāri
원어아카드어
로마자 표기Asyur-narari
통치
즉위기원전 755년
퇴위기원전 745년
이전아슈르-단 3세
이후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가문
아버지아다드-니라리 3세
자녀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생애
사망기원전 745년

2. 치세

아슈르-니라리 5세는 아다드-니라리 3세(기원전 811-783년 재위)의 아들로, 기원전 755년에 형 아슈르-단 3세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아시리아 역사에서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불분명한 시기에 해당하여 알려진 바가 매우 적다.

이 시기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던 때로, 왕의 권력은 강력한 지방 관리들의 등장으로 인해 도전을 받았다. 이들 관리는 왕처럼 자신들의 활동을 기록한 설형 문자 비문을 남겼으며, 이 시기에는 왕의 비문보다 이들의 비문이 더 흔하게 발견된다. 또한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이 강성해지는 등 외부의 위협도 커지고 있었다.

아슈르-니라리 5세의 치세에 대한 정보는 주로 후대의 기록인 '아시리아 왕 목록'과 당대의 연대기 기록인 림무 표를 통해 알려져 있다. 동시대 기록으로는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가 아슈르-니라리 5세를 전투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는 비문[2], 아르파드의 왕 마티일루와 맺은 조약 문서의 일부, 그리고 아슈르-니라리 5세 자신이 남긴 유일한 비문으로 알려진, 신하 마르두크-사라-우수르(Marduk-sarra-usur|마르두크-사라-우수르akk)에게 토지와 면세 혜택을 부여한 기록 등이 있다.

림무 표에 따르면 그의 치세 동안 군사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수도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3] 이는 당시 아시리아 내부의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다른 아시리아 왕들과 달리 그가 추진한 건축 사업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

2. 1. 왕권 약화와 내부 혼란

아슈르-니라리 5세의 치세는 신아시리아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매우 강력한 지방 관리들이 등장하여 왕의 권력을 위협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왕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최고 권한을 행사하며 왕들처럼 자신들의 건축 및 정치 활동에 대한 쐐기 문자 비문을 남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왕의 비문보다 이들 관리들의 비문이 더 흔하게 발견된다.

동시에 아시리아의 적들도 더욱 강성해져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 아시리아의 쇠퇴기는 북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왕국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는 아슈르-니라리 5세를 전투에서 물리쳤다고 주장하는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2]

림무 표(에포님 목록)에 따르면, 아슈르-니라리 5세의 통치는 군사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시리아의 왕은 매년 원정을 나가는 것이 관례였으나[3], 그는 재위 기간 대부분 "본국에 머물렀다"(즉, 원정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정을 나간 것은 단 세 해(기원전 755년 아르파드, 기원전 748년–747년 남리)뿐이었다. 왕이 이렇게 수도에 머무른 것은 국내 정세가 불안정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3] 또한, 대부분의 아시리아 왕들이 건축 사업을 벌였던 것과 달리, 아슈르-니라리 5세 치하에서 이루어진 건축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다.

2. 2. 대외 관계

아슈르-니라리 5세의 치세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쇠퇴기와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 전성기가 겹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아시리아의 적들은 강성해졌고, 특히 우라르투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동시대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이 남긴 비문에서 아슈르-니라리 5세를 전투에서 물리쳤다고 주장했다[2]. 아슈르-니라리 5세 역시 기원전 748년부터 기원전 747년까지 우라르투의 남리 시를 상대로 원정을 나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아슈르-니라리 5세는 즉위년인 기원전 755년에 시리아의 아르파드로 원정을 떠났다[3]. 이 원정의 결과로 아르파드의 왕 마티일루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조약 문서의 단편은 거의 전부가 마티일루에 대한 저주로 채워져 있다.

림무 표 기록에 따르면, 아슈르-니라리 5세의 치세 동안 군사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다. 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원정 없이 "본국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3], 이는 아시리아 왕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외정 기록은 즉위년의 아르파드 원정과 기원전 748-747년의 남리 원정 단 두 차례뿐이다[3]. 아시리아 왕이 매년 원정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당시 아시리아 내부의 불안정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2. 3. 군사 활동

림무 기록에 따르면 아슈르-니라리 5세의 치세는 군사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본국에 머물렀다"(즉, 원정에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외정에 나선 것은 단 세 해뿐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해인 기원전 755년에 아르파드로 원정을 나섰다.[3] 이 원정의 결과로 아르파드의 왕 마티일루와 조약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조약의 현존하는 부분은 거의 모두 마티일루에 대한 저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기원전 748년부터 기원전 747년까지는 우라르투남리 시로 원정을 갔다.

아시리아의 왕은 매년 원정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아슈르-니라리 5세가 원정을 거의 나가지 않고 아시리아 본국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정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아시리아 왕들은 대부분 건축 사업을 벌였지만, 아슈르-니라리 5세 치세 하에서 이루어진 건축 사업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우라르투의 왕 사르두리 2세는 자신의 비문에서 아슈르-니라리 5세를 전투에서 물리쳤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 또한 아슈르-니라리 5세가 남긴 유일한 비문으로 알려진 것에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관료 Marduk-sarra-usur|마르두크-사라-우수르akk에게 토지와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3. 왕위 계승

아슈르-니라리 5세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745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의 후계자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 정확한 경위는 명확하지 않아 여러 논란이 있다. 고대 기록에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의 혈통에 대한 설명이 엇갈리고(), 기원전 746년 또는 745년에 수도 님루드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기록[3] 등으로 인해 그가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면, 그가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을 수도 있다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왕위 계승 과정의 불확실성은 『아시리아 왕 목록』 기록의 해석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3. 1.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의 관계

아슈르-니라리 5세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745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의 후계자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한 해이기 때문이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왕위에 오른 정확한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고대 자료에서 그의 혈통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왕 목록』은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를 아슈르-니라리 5세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본인은 자신의 비문에서 아다드-니라리 3세의 아들이자 아슈르-니라리 5세의 형제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746년 또는 745년에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님루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3]. 또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자신의 비문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왕족 혈통 덕분이 아니라 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설명하는 점 때문에, 그가 아슈르-니라리 5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트레이시 데이븐포트(Tracy Davenport)는 2016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짧은 기간 동안 아슈르-니라리 5세와 공동 통치자였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데이븐포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몇 가지를 들었다. 첫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시대의 연명관(림무) 목록 순서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 둘째, 기원전 744년 이후 연명관 목록에 나타나는 특이한 수평선 표시가 아슈르-니라리 5세의 사망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 셋째, 『아시리아 왕 목록』이 아슈르-니라리 5세의 통치 기간을 1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리아에서는 왕의 통치 기간을 즉위 해 다음의 첫 번째 완전한 해부터 계산했으므로, 아슈르-니라리 5세의 통치 첫 해는 기원전 754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가 10년간 통치했다면 기원전 744년에 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 목록』 자체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일부 초기 왕들의 기록은 왕 목록의 다른 판본들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3. 2. 계승 관련 논란의 여파

아슈르-니라리 5세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745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해가 그의 후계자인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대 기록들이 그의 계보에 대해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왕명표』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를 아슈르-니라리 5세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정작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본인의 비문에는 자신을 아다드-니라리 3세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슈르-니라리 5세의 형제가 된다.

기원전 746년 또는 745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님루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고[3],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자신의 비문에서 즉위 과정을 왕가의 혈통보다는 신의 선택 덕분이라고 강조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아슈르-니라리 5세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트레이시 데번포트(Tracy Davenport)는 2016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다른 주장을 펼쳤다. 그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으며, 심지어 짧은 기간 동안 아슈르-니라리 5세와 공동으로 통치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데번포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시대 림무(연도 eponym) 순서의 특이성, 기원전 744년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매우 드문 수평선 표시(이는 아슈르-니라리 5세의 사망을 의미할 수 있음), 그리고 『아시리아 왕명표』가 아슈르-니라리 5세의 통치 기간을 1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아시리아에서는 왕이 즉위한 해의 다음 해부터 통치 연수를 계산했으므로, 기원전 754년이 아슈르-니라리 5세의 통치 제1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가 10년간 통치했다면 기원전 744년에 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명표』 자체에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왕명표의 여러 판본에서 일부 왕들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Assyrian King List https://www.livius.o[...] 2017-07-26
[2]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10-18
[3] 웹사이트 Limmu List (858-699 BCE) https://www.livius.o[...]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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