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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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소는 오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 《오서》 편찬에 참여했으나 손호의 역사 왜곡 요구를 거부하여 처형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했으며, 손량, 손휴, 손호 삼대에 걸쳐 관직을 지냈다. 특히 《오서》 편찬 과정에서 손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 했으나, 결국 손호의 미움을 받아 투옥된 후 처형되었다. 그는 또한 《국어주》, 《변석명》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저서들은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위소는 오군 운양현(현재의 장쑤성 전장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승상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서안 현령과 상서랑을 거쳐 태자중서자에 이르렀다. 그는 황태자 손화를 섬기며, 그의 명으로 『박역론』을 저술해 박역(육박이나 바둑)을 비판하기도 했다.
손휴에 의해 남경 국자감의 전신인 최초의 박사제주(博士祭酒, 즉 총장)로 임명되었다.[1] 그는 오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오서''(吳書)의 주 편집자였다.[1] ''오서''를 편찬하는 동안 오나라 4대 황제 손호는 책의 특정 부분을 다시 쓰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위소는 그러한 수정이 역사의 원칙을 침해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1] 역사적으로 정확한 ''오서''를 제작하려는 위소의 주장은 손호에 의해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1] 위소는 또한 ''국어주''(國語注)와 ''변석명''(辯釋名)과 같은 여러 다른 작품을 저술했다.[1]
진수의 《삼국지》 오지 부분은 韋昭 등이 집필한 《오서》(呉書)를 바탕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오서》는 편찬자들이 잇따라 처형되고 오나라가 멸망하는 등의 이유로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진수의 《삼국지》 오지에서 열전의 일부가 잘려 있거나, 중요 인물의 열전이 세워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으로 여겨진다.[1]
위소는 258년 오나라 3대 황제 손휴에 의해 남경 국자감의 전신인 최초의 박사제주(博士祭酒, 총장)로 임명되었다. 그는 오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오서의 주 편집자였다. 위소가 '''오서'''를 편찬하는 동안 오나라 4대 황제 손호는 책의 특정 부분을 다시 쓰도록 강요하려 했지만, 위소는 그러한 수정이 역사의 원칙을 침해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오서''를 제작하려는 위소의 주장은 손호에 의해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생애
손량 즉위 후 제갈각의 추천으로 태사령이 되어 화핵, 설형 등과 함께 《오서》 편찬에 참여했다. 손휴 시대에는 중서랑 및 박사좨주로 임명되어 서적을 교감하고 바로잡는 역할을 맡았다. 손휴는 그를 시강(侍講)으로 삼으려 했으나, 장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손호 즉위 후, 위소는 고릉정후로 봉해지고 중서복야로 승진했다. 그러나 곧 강등되어 시중이 되었고, 오랫동안 좌국사(左國史)를 겸했다. 손호는 상서로운 징조에 대해 물었을 때, 위소는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일 뿐'이라는 알쏭달쏭한 답변을 내놓았다.[1] 그는 남경 국자감의 전신인 박사제주(총장)로 임명되었고, 《오서》의 주 편집자였으나, 손호가 역사의 원칙을 침해하는 수정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결국 처형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오군 운양현(현재의 장쑤성 전장시)에서 태어난 위소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다. 승상부의 관리를 시작으로, 서안 현령, 상서랑을 지냈으며, 태자중서자에 올라 당시의 황태자인 손화를 섬겼다.[1] 이때 손화의 명을 받아, 『박역론』을 저술하여 박역(육박이나 바둑)을 비판했다. 이후 상서령을 거쳐 태자중서자로 승진했다.[1]
2. 2. 《오서》 편찬과 손휴 시대
손량 즉위 후 제갈각이 표를 올려 위소를 태사령으로 삼고 화핵, 설형 등과 함께《오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손휴는 위소를 중서랑 및 박사좨주로 삼았고 서적들을 교감하여 바로잡으라 하였다. 또한 성충과 함께 시강(侍講)으로 임명되기를 바랐지만, 정치를 전횡하던 측근인 장포에 의해 저지되었다.
2. 3. 손호 시대와 갈등
손호가 즉위하자 위소는 고릉정후로 봉해지고 중서복야로 승진했으나, 뒤에 강등되어 시중이 되었고 오랫동안 좌국사(左國史)를 겸했다.[1]
손호는 즉위 후에 상서로운 징조가 보이자 위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위소는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일 뿐입니다'라고 답했다.[1]
위소는 손휴에 의해 남경 국자감의 전신인 최초의 박사제주(博士祭酒, 총장)로 임명되었다.[1] 그는 오나라의 공식 역사서인 오서의 주 편집자였다. 손호는 오서의 특정 부분을 다시 쓰도록 강요했으나, 위소는 역사의 원칙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위소는 손호에 의해 처형되었다.[1]
2. 3. 1. 손호와의 불화
손호가 즉위한 후, 위소는 고릉정후로 봉해지고 중서복야로 승진했다. 그러나 곧 강등되어 시중이 되었고, 오랫동안 좌국사(左國史)를 겸했다.[1]
손호는 위소에게 아버지 손화를 위해 기(紀)를 만들 것을 명했다. 그러나 위소는 손화가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전(傳)으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위소는 점차 손호의 질책과 노여움을 샀다.[1] 그는 손호에게 바른 말을 자주 하고, 그의 뜻에 거스르는 언행을 했기 때문에 점차 냉대를 받았다.
위소는 오서에서 손화의 본기를 세우라는 손호의 명령을 거부하고, 태자로 끝난 손화에게는 전을 세워야 한다고 답했다.
술을 싫어하는 위소에게 술을 좋아하던 손호는 음주를 강요했다. 또한 손호는 측근들을 술자리에 동석시켜 군신의 결점을 논하게 했으나, 위소는 이러한 풍조를 좋게 여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
봉황 2년(273년), 위소는 투옥되었다. 그는 『관직훈』과 『변석명』을 헌상하고 사면을 청했다. 화핵도 위소가 『오서』를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인재라며 여러 차례 구명 탄원을 했지만, 결국 위소는 처형되었다. 그의 가족은 영릉으로 유배되었다.
2. 4. 죽음
손호는 위소가 명령에 따르지 않고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273년 위소를 감옥에 보냈다. 위소는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화핵 또한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손호는 위소를 죽이고 그의 가족들을 영릉으로 귀양 보냈다. 향년은 70세 이상으로 추정된다.
위소는 손호의 질책과 노여움으로 쇠약해져 시중과 좌국사 관직을 사직하기를 요청했으며, 편찬 중이던 책을 마친 뒤 직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어했지만 손호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3. 저술 활동
손량이 즉위하자, 제갈각의 추천을 받아 태사령이 되었고, 화핵과 설형 등과 함께 『오서』의 편찬을 담당했다.[1] 손호 시대에는 『오서』에서 손호의 아버지인 손화의 본기를 세우도록 명해졌을 때, 태자로 끝난 손화에게는 전을 세워야 한다고 답변하며, 이를 거부했다.[1]
봉황 2년(273년)에 투옥되었다.[1] 위소는 『관직훈』·『변석명』을 헌상하고 사면을 청했으며, 화핵도 "위소는 『오서』를 완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인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여러 번 구명 탄원했지만, 결국 처형되었다.[1]
저서로는 『모시답잡문』·『효경해찬』·『변석명』·『오서』·『동기』·『한관전직의식선용』·『국어주』가 있다.[1] 『국어주』는 현존하며, 춘추 외전 『국어』의 주로 중요한 책이다.[1] 또한 당대에 성립된 정사 『송서』의 "악지"에는, 역대 왕조의 병사의 사기 앙양과 위안을 겸한 군악인 고취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위소'''가 지은 곡이 12편 포함되어 있다.[1]
韋昭 등이 집필한 《오서》(呉書)는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의 참고 자료 중 하나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오지 부분은 韋昭 등의 《오서》를 바탕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
4. 평가
오나라 초대 승상이었던 손소의 열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韋昭가 손소에게 적대적인 파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
5. 《오서》에 대하여
손량이 즉위하자, 제갈각의 추천을 받아 태사령이 되었고, 화핵과 설형 등과 함께 오서 편찬을 담당했다.
손호 시대에는 처음에는 총애를 받아 고릉정후, 시중, 좌국사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바른 말을 잘하고 손호의 뜻에 거스르는 언동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점차 냉대받게 되었다. 『오서』에서 손호의 아버지인 손화의 본기를 세우도록 명해졌을 때, 태자로 끝난 손화에게는 전을 세워야 한다고 답변하며 이를 거부한 것이 그 한 예이다.
봉황 2년(273년)에 투옥되었다. 위소는 『관직훈』, 『변석명』을 헌상하고 사면을 청했으며, 화핵도 "위소는 『오서』를 완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인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여러 번 구명 탄원했지만, 결국 처형되었다.
위소가 집필한 오서는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의 참고 자료 중 하나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오지 부분은 위소 등의 《오서》를 바탕으로 편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오서》는 편찬자들의 잇따른 처형과 오나라의 멸망 등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한 듯하며, 진수의 《삼국지》 오지에서 열전의 일부가 잘려 있거나, 중요 인물의 열전이 세워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오나라 초대 승상이었던 손소의 열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위소가 손소에 적대적인 파벌의 흐름에 있었기 때문에 붓을 꺾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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