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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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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창리 전투는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맞서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이 겪은 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공격과 온정리 전투의 경험으로 인한 공포심으로 인해 무질서하게 후퇴하면서 많은 장비와 통신 장비를 손실했다. 미군 포병부대 또한 다수의 화기를 버리고 철수했다. 결국 사단은 가평 계곡으로 철수하여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부대를 재편성했다. 이 전투는 국군과 영연방군의 협력 사례로 평가받으며, 한국 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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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중공군 춘계공세
날짜1951년 4월 22일 - 4월 24일
장소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
결과중국인민지원군의 승리
결과 상세제6사단의 궤멸 상태
중국인민지원군의 가평 공격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장도영
지휘관 2원유첸
병력
군대 1제6보병사단
군대 2제40군
사상자
사상자 1알려지지 않음
사상자 2알려지지 않음
기타 정보
사창리 전투 전적비
사창리 전투 전적비

2. 전투 발발 배경

1951년 4월, 중공군은 춘계 공세를 계획하고 국군 제6사단을 주 공격 목표로 설정하였다.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춘천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이전 온정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했던 경험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3. 전투 전개 과정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9병단은 춘계 공세 계획에 따라 국군 제6사단 방어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 전방 연대들은 사단장의 진지 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후방 지역에서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온정리 전투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중공군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에 빠져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사단은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막히고 통신까지 끊겨 혼란이 커지고 부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좌측의 제19연대는 적진에 고립되었고, 우측의 제2연대와 예비대인 제7연대는 차량과 장비를 버리고 일부는 좌우 인접 부대로, 일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흩어져 철수했다. 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은 제7연대 후방의 포병 부대를 공격했고, 이들은 유일한 철수로인 사창리-춘천 도로를 따라 철수했다. 국군 제6사단이 주 저항선에서 철수하자, 이 지역에서 사단을 화력 지원하던 미군 포병 부대들도 동쪽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서둘렀으나, 사창리에서 철수한 부대와 합류하면서 보병과 포병 부대로 인해 큰 혼잡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적의 기습 공격을 받자 미군 포병 부대들도 많은 화기를 버리고 철수했다.

국군 제6사단은 철수 중 통신 장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중공군의 추격이 멈춘 자정 무렵에도 지휘 통제가 어려웠고, 전방 연대의 상황 파악도 불가능했다. 다음 날(23일) 새벽에 겨우 2,500여 명 정도가 이틀 전 공격을 준비했던 석룡산-화악산 후방에 집결할 수 있었다. 날이 밝아 중공군의 공격이 둔화되자, 미 제9군단장은 국군 제6사단에 신속히 부대를 재편하여 석룡산-화악산의 캔사스 선에서 적을 저지하도록 했다. 사단은 명령에 따라 부대를 배치했으나, 어둠이 내리고 작전 주도권을 잡은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방어 진지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사기가 떨어진 사단 장병들이 적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단은 다시 가평 계곡을 향해 철수하여 연방 제27여단의 엄호 아래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에서 부대를 재편했다. 이때까지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인치 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보았다. 사단을 화력 지원한 미군 포병 부대도 105mm 곡사포 15문을 포함하여, 4.2인치 박격포 13문과 무전기 242대, 차량 73대의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낙오병들이 계속 부대로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했다.

4. 국군 및 연합군의 피해

국군 제6사단은 철수 과정에서 통신장비를 유기하여 지휘 통제가 어려웠고, 다음 날 새벽에야 겨우 2,500여 명이 석룡산-화악산 후방에 집결했다. 이후 미 제9군단장의 명령으로 캔사스선에서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적의 파상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평 계곡으로 철수하여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부대를 재편했다.

이때까지 국군 제6사단은 상당한 장비 손실을 입었다.

장비 종류손실량
소총2,263정
자동화기168정
2.36" 로케트포66문
대전차포2문
박격포42문
곡사포13문
차량87대



국군 6사단을 화력 지원하던 미 포병부대 역시 105밀리 곡사포 15문, 4.2인치 박격포 13문, 무전기 242대,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낙오병들이 계속 복귀하여 4월 25일에는 6,313명이 집결했다.

5. 전투 결과 및 영향

1951년 4월 23일, 영연방군의 엄호를 받으며 대한민국 국군이 철수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가평에 주둔하고 있던 영연방군과 직접 전투를 벌였다. (가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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