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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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동 전투는 1951년 4월,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춘계 공세 당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이 미 제3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필리핀은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율동 전투는 필리핀군의 용맹함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전투 결과, 필리핀군은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의 후퇴를 지원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를 통해 필리핀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으며, 율동 전투는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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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동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분쟁 | 중국 춘계 공세의 일부, 한국 전쟁 | 
| 날짜 | 1951년 4월 22일–23일 | 
| 장소 |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율동 (현재) | 
| 결과 | UN군 승리 | 
| 세부 결과 | 중공군 공세 지연 영국 제29여단 성공적 철수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UN 사령부 | 
| 참가국 1 | 필리핀 | 
| 교전국 2 | 중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디오니시오 S. 오헤다 | 
| 추가 지휘관 1 | 콘라도 얍 | 
| 추가 지휘관 1 | 호세 아르티아가 2세 | 
| 지휘관 2 | 펑더화이 | 
| 추가 지휘관 2 | 유타이중 | 
| 부대 규모 | |
| 부대 1 | PEFTOK 제10대대 전투단 | 
| 부대 2 | PVA 제12군 제34사단 (UN군 측 기록) | 
| 추가 부대 2 | PVA 제15군 제44사단 (중국 측 기록) | 
| 전력 | |
| 전력 1 | 900명 | 
| 전력 2 | 15,000명 | 
| 사상자 및 피해 | |
| 사상자 1 | 12명 사망 | 
| 추가 사상자 1 | 38명 부상 | 
| 추가 사상자 1 | 6명 실종 | 
| 사상자 2 | 500명 이상 사망 | 
| 추가 사상자 2 | 2명 포로 | 
| 추가 사상자 2 | 1명 실종 | 
| 지리 정보 | |
2. 배경
1951년 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임박하면서 임진강 일대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유엔군과 중공군은 이 지역에서 격전을 앞두고 있었다.
미국 육군 제3보병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BCT)은 이전 전투에서의 사상자와 손실로 인해 전력이 감소한 상태였다.[1][2][3] 중공군 공세에 대비하여, 미국 제65보병연대는 제3대대와 제2대대를 각각 임진강 서쪽과 북서쪽에 배치했다.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33번 국도 근처에서 연대의 우측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필리핀 부대 바로 동쪽에는 터키 여단이 위치했다.[4]
이 지역에서 유엔군과 맞선 중공군은 제3집단군 소속의 제12군, 제15군, 제60군이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제12군과 제15군을 투입하여 각각 터키 여단과 미국 제3보병사단을 공격, 포위할 계획이었다.[5] 임진강 근처에서 제15군은 강과 33번 국도 사이의 좁은 지역을 통해 제65연대가 방어하는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33번 국도 동쪽에서는 제12군과 제60군이 제3사단의 우측 측면에 있는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 방어 지역과 터키 여단, 그리고 제24보병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포개산(Pogae-san) 산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6]
2. 1. 한국 전쟁 발발과 국제 정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1] 북한의 남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형성된 냉전 체제하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2]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강화했고, 김일성은 무력 통일을 목표로 남침을 계획했다.[3] 반면, 한국은 국군의 전력이 약했고, 미국의 군사적 지원도 제한적인 상황이었다.[4]
전쟁 초기, 북한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앞세워 빠르게 남진했다.[5] 한국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으며,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6]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들이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7]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즉각 미군의 참전을 명령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의 파병을 결의했다.[8]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9] 이후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10]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여간 지속되었으며,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11] 이 전쟁은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분쟁으로,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2. 2. 필리핀군의 한국 전쟁 참전
필리핀은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국가 중 하나이다. 필리핀군의 참전 결정 배경에는 당시 필리핀의 국내 정치 상황과 국제 관계,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2] 1950년 9월 19일, 필리핀은 5개의 보병대대로 구성된 필리핀 원정군(PEFTOK)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들은 율동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당시 필리핀은 후크발라합(Hukbalahap) 반군과의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세력을 진압하고 국가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전쟁 발발은 필리핀에게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12]
필리핀군의 규모, 장비, 훈련 수준은 당시 필리핀의 경제적, 군사적 여건에 따라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필리핀군은 용맹함과 헌신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참전 당시 필리핀 국내 여론은 대체로 한국 전쟁 참전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며, 이는 필리핀 정부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12]
2. 3. 율동 전투 직전 상황
1951년 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임진강 일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엔군과 중공군은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미국 육군 제3보병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BCT)은 이전 전투에서의 사상자와 손실로 인해 전력이 감소한 상태였다.[1][2][3] 중공군 공세에 대비하여, 미국 제65보병연대는 제3대대와 제2대대를 각각 임진강 서쪽과 북서쪽에 배치했다.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33번 국도 근처에서 연대의 우측 측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필리핀 부대 바로 동쪽에는 터키 여단이 위치했다.[4]
이 지역에서 유엔군과 맞선 중공군은 제3집단군 소속의 제12군, 제15군, 제60군이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제12군과 제15군을 투입하여 각각 터키 여단과 미국 제3보병사단을 공격, 포위할 계획이었다.[5] 임진강 근처에서 제15군은 강과 33번 국도 사이의 좁은 지역을 통해 제65연대가 방어하는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33번 국도 동쪽에서는 제12군과 제60군이 제3사단의 우측 측면에 있는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 방어 지역과 터키 여단, 그리고 제24보병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포개산(Pogae-san) 산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6]
3. 전투 경과
1951년 4월 22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터키 여단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율동 전투를 개시했다. 자정 직후, 미 제3사단 전선 전체에 걸쳐 포병, 박격포, 소화기, 기관총 사격이 이어졌다.[1] 터키 여단이 격전 중인 사이, 율동 지역에 배치된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BCT)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근접전을 벌였다.[2] 제65연대와의 통신은 일시적으로 두절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5] 한편, 미 제65연대 제2대대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에 밀려 재편성을 위해 후퇴해야 했다.[1]
전투의 상세한 경과는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1951년 4월 22일
1951년 4월 22일 20시, 중국 인민지원군이 터키 여단에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자정 직후, 포병과 박격포 포격에 이어 소화기와 기관총 사격이 미 제3사단 전선 전체를 강타했다.[1] 터키 여단이 치열한 전투에 휘말리는 동안, 터키 여단 좌측 율동 지역에 배치된 필리핀 제10 기갑전투단은 23시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상공격을 받아 자체 진지 내에서 일련의 근접전을 벌였다.[2] 적의 포격으로 미 제65보병연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으나, 00시 30분에 복구되었다.[5] 자정 무렵, 터키 여단은 한탄강 남쪽 캔사스 선(Line Kansas)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
4월 23일 01시, 중국 인민지원군 제15군 제29사단과 제44사단이 미 제65보병연대를 포위하여 후퇴를 차단했다.[6] 이 전투로 제10 기갑전투단의 운전병, 타이피스트, 사무원, 의무병, 요리사, 심지어 군목까지도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7][5] 각 중대는 분산되어 부대 간 접촉 없이 혼란 속에서 싸웠다.[5][1]
호세 아르티아가 주니어 중위가 지휘하는 B 중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율동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중국 인민지원군이 이들의 진지를 점령했다. B 중대의 좌측 소대는 03시에 진지에서 밀려났고, 4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 후 중국 인민지원군은 예비 지역에 있는 C 중대 진지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이 중대는 아르티아가 중위를 포함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8] 대대 대대장인 디오니시오 S. 오헤다 대령은 후퇴 명령을 내렸고, 중(重)화기 중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이 명령에 따랐다.[9] 중(重)화기 중대장 콘라도 Yap 대위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B 중대 전사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고지로 역공격을 이끌었다. Yap 대위는 역공격 중 전사했지만, 중(重)화기 중대는 목표를 달성하고 생존자 분대를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5][10][11]
제10 기갑전투단은 새벽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미 제3사단의 후퇴를 지원했다. 첫 햇살이 비치자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는 점차 줄어들었고, 대대는 B 중대가 잃어버린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역공격을 시작했다.[2] 정찰 중대의 M24 샤피 경전차 두 대와 연합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은 C 중대가 역공격을 이끌었다.[8] 4월 23일 09시, 미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제1군단과 제9군단의 많은 부대가 중국 인민지원군에 포위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고 캔사스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2] 12시 15분, 제10 기갑전투단은 로버트 소울 장군으로부터 캔사스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8] 안흥리(Anhung-ri)로 철수했다.[2]
3. 2. 1951년 4월 23일
1951년 4월 23일 자정 직후, 중국 인민지원군은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미 제3사단 전선 전체를 공격했다.[1] 터키 여단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터키 여단 좌측 율동 지역의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상공격을 받아 근접전을 벌였다.[2] 적의 포격으로 제65연대와의 통신이 두절되기도 했으나, 0시 30분에 복구되었다.[3] 자정 무렵, 터키 여단은 한탄강 남쪽 캔사스 선(Line Kansas)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1951년 4월 23일 새벽 1시, 중국 인민지원군 제15군 제29사단과 제44사단이 제65연대를 포위하여 후퇴를 막았다.[4] 이로 인해 제10 기갑전투단의 운전병, 타이피스트, 사무원, 의무병, 요리사, 군목까지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5] 각 중대는 분산되어 혼란 속에서 싸웠다.[6] B중대는 율동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중국 인민지원군에게 진지를 빼앗겼다. B중대 좌측 소대는 새벽 3시에 진지에서 밀려났고, 4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 후 중국 인민지원군은 C중대 진지까지 침투했다. B중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대대장 디오니시오 S. 오헤다 대령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7] 중(重)화기 중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이 명령에 따랐다.[8] 중(重)화기 중대장 콘라도 Yap 대위는 역공격을 이끌어 B중대 전사자들을 수습하고 생존자를 구출하려 했으나, 역공격 중 전사했다.[9]
날이 밝으면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가 약화되자, 제10 기갑전투단은 B 중대가 잃었던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역공격을 감행했다.[2] 정찰중대의 M24 샤피 경전차 두 대와 연합 포병 부대의 지원을 받은 C중대가 역공격을 이끌었다.[7]
1951년 4월 23일 오전 9시, 미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많은 부대가 중국 인민지원군에 포위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여 캔사스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 12시 15분, 제10 기갑전투단은 로버트 소울 장군으로부터 캔사스 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안흥리(Anhung-ri)에 있는 진지로 철수했다.[11]
4. 전투 결과 및 영향
율동 전투에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팀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용감하게 싸웠다. 이 전투에서 콘라도 D. Yap(콘라도 Yap) 대위는 사후에 필리핀 무공훈장과 미국 뛰어난 공로 십자훈장을, 호세 아르티아가(Jose Artiaga) 중위는 사후에 필리핀 명예 훈장을 받았다.[4] 2018년 7월 27일, 한국 휴전 협정 65주년을 기념하여 Yap 대위는 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1등급을 추가로 받았다.[4][5]
율동 전투는 임진강 전투 중 글로스터셔 연대 구출 작전에 영향을 주었다. 1951년 4월 24일, 제10전투여단(BCT)은 예비군으로 영국 제29여단에 배속되어 해당 작전에 참여했다.[6]
1966년 4월 22일, 중공군 춘계 공세 1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연천에 율동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6][7]
4. 1. 인명 피해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전사자 12명, 부상자 38명, 실종자 6명으로 보고되었다.[6] 중공군은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명이 포로로 잡혔다.[6]한국 전쟁에는 총 7,740명의 필리핀 장교와 병사가 참전하였다. 이들은 전사자 116명, 부상자 299명, 실종자 57명(전쟁포로 교환 중 41명이 본국으로 송환됨)의 피해를 보았다. 마지막 필리핀 군대는 1955년 5월 13일 한국을 떠났다.
4. 2. 전술적/전략적 영향
율동 전투는 중공군의 춘계 공세와 유엔군의 대응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압도적인 중공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율동 지역에서 용감하게 싸워, 미 제3보병사단의 안전한 철수를 엄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중공군은 율동 전투에서 필리핀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초기의 빠른 진격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는 유엔군, 특히 미 제3보병사단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 작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2]
결과적으로, 율동 전투는 중공군 춘계 공세의 전반적인 기세를 꺾는 데 기여했으며, 유엔군이 전선을 안정화하고 이후의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3]
4. 3. 필리핀군의 사기 및 대한민국과의 관계
율동 전투는 필리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전투는 필리핀군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필리핀군의 용맹함은 대한민국과 필리핀 양국 간의 굳건한 유대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이 전투에서 전사한 콘라도 Yap(콘라도 Yap) 대위는 사후 필리핀 무공훈장과 미국 뛰어난 공로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4] 한국 휴전 협정 65주년인 2018년 7월 27일, Yap 대위는 대한민국 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5] 이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호세 아르티아가(Jose Artiaga) 중위는 사후 필리핀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4] 이들의 희생은 필리핀 군인들의 용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6년 4월 22일, 중국 춘계 공세 1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연천에 율동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6][7] 이 기념비는 율동 전투에서 필리핀 군인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 그리고 한국 전쟁에서 필리핀이 대한민국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기리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5. 한국과 필리핀의 관계
한국 전쟁 당시 율동 전투는 대한민국과 필리핀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은 한국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며, 특히 율동 전투에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4][5] 율동 전투를 통해 맺어진 양국의 군사적 협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한국 전쟁 참전을 계기로 양국은 외교,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5. 1. 참전용사 및 기념사업
콘라도 D. Yap 대위는 사후에 필리핀 무공훈장과 뛰어난 공로 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호세 아르티아가 중위는 사후에 필리핀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4][5] 2018년 7월 27일, 한국 휴전 협정 65주년을 기념하여 Yap 대위는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4][5]제10대대 전투팀은 약 12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 6명이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 중국 인민지원군(PVA)은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보고되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군인은 총 7,740명(장교 및 병사)이며, 전사 116명, 부상 299명, 실종 57명(전쟁포로 교환 중 41명이 본국으로 송환됨)의 피해를 입었다. 마지막 필리핀 군대는 1955년 5월 13일 한국을 떠났다.
1966년 4월 22일, 중국 춘계 공세 1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연천에 율동 전투 기념비가 세워졌다.[6][7]
6. 평가 및 논란
율동 전투는 한국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유엔군 소속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들은 중공군의 공세를 늦추고 유엔군이 후퇴할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1]
제공된 자료에서는 율동 전투에 대한 부정적 평가나 논란은 구체적으로 찾기 어렵다. 전투 과정의 전술적 문제나 지휘관의 결정에 대한 비판적 내용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6. 1. 긍정적 평가
율동 전투에서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중공군 제44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웠다.[1] 이들의 희생정신과 분투는 중공군의 공세를 늦추고 유엔군이 후퇴할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특히, 율동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필리핀 군이 보여준 헌신과 용기를 상징하는 전투로 평가받는다.6. 2. 부정적 평가 또는 논란
제공된 자료에서는 율동 전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논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제공된 자료는 주로 전투의 경과와 결과, 참여 부대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전투 과정에서의 전술적 오류나 지휘관의 판단 착오 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7. 같이 보기
- 콘라도 얍[1]
- 호세 아르티아가[2]
- 제임스 밴 플리트[3]
- 펑더화이[4]
- 임진강 전투[1]
- 중국 인민지원군 제39군[1]
-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4]
- 필리핀군 제10대대전투단[5]
- 미국 육군 제3보병사단[6], 제65보병연대[7]
- 연천군 율동 전투 기념비[1]
7. 1. 관련 인물
- 콘라도 얍 (Conrado Yap): 율동 전투에서 전사한 필리핀군 대위.[1]
- 호세 아르티아가 (Jose Artiaga): 율동 전투에서 전사한 필리핀군 중위.[2]
- 제임스 밴 플리트 (James Van Fleet): 미 제8군 사령관.[3]
- 펑더화이 (Peng Dehuai): 중공군 사령관.[4]
7. 2. 관련 사건
1951년 4월 22일, 중국인민지원군은 한국 전쟁에서 춘계 공세의 일환으로 임진강 전투를 개시했다.[1] 이 전투는 율동 전투와 관련된 주요 사건이다.7. 3. 관련 부대
율동 전투에는 다음과 같은 부대가 관련되어 있다.7. 4. 관련 장소
율동 전투와 관련된 장소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근처이다. 이곳에는 율동 전투 기념비가 있다.[1]참조
[1] 
웹사이트
 
Speech of President Ramos on the 42nd anniversary of the Battle of Yultong
 
https://www.official[...] 
1993-04-22
 
[2] 
서적
 
Philippine Army: The First 100 Years
 
Philippine Army
 
1997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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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 gets Sokor's highest medal for bra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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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ady on … honoring a Filipino hero of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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