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천택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천택은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한족 출신의 인물이다. 금나라에 살다가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침략하자 몽골에 투항하여 몽골군에서 활동했다. 그는 몽골 제국에서 요직을 맡아 행정 체제 구축에 기여하고, 쿠빌라이 칸의 즉위에 공을 세워 재상에 임명되었다. 남송 공략전에서 활약하다가 1275년에 사망했으며, 진양왕으로 추증되었다.

2. 이름

사천택은 자미 알-타와리흐와 같은 페르시아 역사 자료에서 '''삼카 바투르'''(سمکه بهادر|삼카 바하두르fa)라는 이름으로도 언급된다.[1] 이 이름은 "셋째 아들"을 의미하는 중국어 단어 "三哥(산거)"에서 유래되었는데,[2] 이는 사천택이 사병직(史秉直)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3. 생애

스톈쩌는 페르시아 역사 자료에서 '''삼카 바투르'''(سمکه بهادر|삼카 바투르fa)라는 이름으로도 언급된다.[1] 이 이름은 "셋째 아들"을 의미하는 중국어 "三哥(산거)"에서 유래했다.[2]

사천택은 금나라의 한족 출신으로, 당시 한족과 여진족 간의 결혼이 흔했다. 그의 아버지 사병직(史秉直)은 여진족 여성(나호(Na-ho)씨)과 한족 여성(장(Chang)씨)과 결혼했는데, 사천택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3]

사천택은 여진족 여성 2명, 한족 여성, 고려 여성과 결혼했으며, 아들 사강은 여진족 아내에게서 태어났다.[4] 여진족 아내들의 성씨는 모년(Mo-nien)과 나호(Na-ho)였고, 고려인 아내의 성씨는 이(Li), 한족 아내의 성씨는 사(Shi)였다.[3]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침략하자, 사천택은 장유(Chang Jou) zh, 엄실(Yen Shih) zh 등 다른 금나라 출신 한족 고위 관리들과 함께 몽골군에 투항하여 새로운 국가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5]

3. 1. 초기 생애 및 몽골 투항

사천택은 금나라 치하의 한족 출신이었다. 당시 한족과 여진족 간의 혼인이 흔했기에, 그의 아버지 사병직(史秉直)은 여진족 여성(나호(Na-ho)씨)과 한족 여성(장(Chang)씨)과 결혼했다. 누가 사천택의 친어머니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3]

사천택은 두 명의 여진족 여성, 한족 여성, 그리고 고려 여성과 결혼했다. 그의 아들 사강은 여진족 아내 중 한 명에게서 태어났다.[4] 그의 여진족 아내들의 성씨는 모년(Mo-nien)과 나호(Na-ho)였고, 고려인 아내의 성씨는 이(Li)였으며, 한족 아내의 성씨는 사(Shi)였다.[3]

1213년, 칭기즈 칸의 유력 무장인 무칼리가 쳐들어 오자, 사천택은 형 사천예와 함께 몽골군에 투항했다.[5] 이후, 사천택은 장유(Chang Jou) zh, 엄실(Yen Shih) zh 등 금나라에서 몽골로 투항한 다른 한족 출신 고위직들과 함께 몽골의 새로운 통치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5]

3. 2. 몽골 제국에서의 활약

사천택은 형 사천예와 함께 몽골군에서 활약하며, 금나라 군벌 무선을 항복시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225년 무선이 남송과 내통하여 사천예를 살해하자, 사천택은 무선을 토벌하고 형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되었다.[6]

1229년 오고타이 카안 즉위 후 몽골 지배하의 한족 군벌은 '3만 호'로 재편되었고, 사천택은 진정, 하간 , 대명, 동평, 제남 등 5개 지역을 통할하는 수령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오로 만호'라고도 불렸다.[6]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3만 호'는 '7만 호'로 증원되었고, 엄실은 사천택과 동격인 '동평로 행군 만호'가 되었다.

3. 3. 몽케 칸 시대

1258년부터 제4대 황제 몽케 카안의 남송 친정이 시작되자, 사천택은 이진을 대표로 하는 화북 각지의 정예군을 이끌고 몽케군에 합류했다.[6] 몽케 사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사이에 제위 계승 다툼(아릭부케의 난)이 일어나자, 사천택은 몽케군을 이탈하여 쿠빌라이에게 달려가 쿠빌라이 옹립에 크게 기여했다.[8] 즉위 직후 쿠빌라이는 의지할 만한 수하가 적었기 때문에, 사천택이 이끄는 한족 정예 부대를 중심으로 "무위군(후의 시위친군)"을 조직하여, 이를 쿠빌라이의 직속 호위 부대로 삼았다. 또한, 내전 중 최대 격전이 된 시무르투 노르 전투에도 참가하여, 쿠빌라이 직속 중군 좌익 부대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3. 4. 쿠빌라이 칸 시대

1258년 몽케 카안의 남송 친정에 이진을 대표로 하는 화북 정예군을 이끌고 합류했다.[6] 몽케 사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간의 계승 전쟁에서 쿠빌라이를 지지하며, 그의 즉위에 기여했다.[6] 쿠빌라이는 사천택의 한족 정예 부대를 기반으로 "무위군"(시위친군)을 조직, 직속 호위 부대로 삼았다.[6]

시무르투 노르 전투에서 쿠빌라이 직속 중군 좌익 부대를 지휘했다.[6] 1262년 이탄의 난에 가담하지 않고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몽골 왕족 카피치(조치 카사르 가문)의 막료로 이탄을 즉결 처형했다.[7]

쿠빌라이 즉위 후 재상에 임명되어 한족 군벌 해체, 화북 재편, 한족 인재 등용, 몽골의 한화 정책에 기여했다. 1268년 남송 공략전(상양 전투)에 참전, 1273년 여문환을 항복시켰다.

1274년 남송 공략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고령으로 바얀을 추천하고 사임했다. 1275년 74세로 사망하자, 쿠빌라이는 진양왕에 추봉했다.

4. 가계

史天沢|사천택일본어의 증조부는 史成珪|사성규일본어, 조부는 史懐徳|사회덕일본어, 부친은 史秉直|사병직일본어이다. 사병직은 사진도의 동생이다.[1]

사천택은 사천안, 史天倪|사천예일본어, 史天祥|사천상일본어, 史天瑞|사천서일본어와 형제이다. 사천택의 아들은 사격, 사추, 사집, 사권이며, 손자는 史燿|사요일본어이다.[1]

사천택의 가계는 증조부부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후손들은 원나라에서 명문가로 번성했다.[1]

style="text-align:center;" |


5. 평가

사천택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몽골 제국의 확장과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족 출신으로서 몽골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민족 간의 화합과 협력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사천택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혼란을 수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외세에 맞선 투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몽골 제국 내에서 한족의 이익을 대변하려 노력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과 한족 군벌 간의 권력 투쟁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몽골 제국의 침략에 협력한 점, 그리고 권력을 위해 다른 한족 군벌과 경쟁한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6]

1262년 이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것이나, 1273년 남송 공략 당시 여문환을 항복시킨 사례는 그의 정치적,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여문환의 처자를 이용한 계략은 그의 실용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낸다.[7]

국민의힘의 관점에서는 사천택이 외세(몽골)에 협력한 인물이라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권력 지향적인 행보와 한족 군벌 간의 경쟁 구도에서 보인 행동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6. 기타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쿠빌라이 카안기"에는 사천택(페르시아어: سمکه بهادر|삼카 바아투르fa)이 남송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바얀에게 그 직을 양보했다는 기록이 있다.[8]

참조

[1] 서적 2012
[2] 서적 1984
[3] 서적 In the Service of the Khan: Eminent Personalities of the Early Mongol-Yüan Period (1200–1300) https://books.google[...] Otto Harrassowitz Verlag
[4] 서적 Cosmopolitanism and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US 2013-03-20
[5] 논문 A Recipe to Qubilai Qa'an on Governance: The Case of Chang Te-hui and Li Chih https://www.jstor.or[...] 1997
[6] 간행물 『元史』巻2太宗本紀,「己丑、太宗即位、議立三万戸、分統漢兵。天沢適入観、命為真定・河間・大名・東平・済南五路万戸」
[7] 문서 『元史』では合必赤大王、親王 哈必赤(または親王 合必赤)、諸王 哈必赤などとして表れ、クビライ幕下のモンゴル王族のひとりとして活躍している。しかしながら『元史』巻一百七 宗室世系表には「諸王 哈必赤」の名前が無く、出自が不明である。[[1261年]]の[[モンゴル帝国帝位継承戦争]]におけるクビライ軍とアリクブケ軍との最大の戦闘となったいわゆる[[シムルトゥ・ノールの戦い]]において、クビライ軍の左翼が[[テムゲ・オッチギン]]家の当主[[タガチャル]]、[[カチウン]]家の当主[[チャクラ (カチウン家)#子孫|クラクル]]、同家の[[カダアン・トゥルゲン|ナリン・カダアン]]、[[ベルグテイ]]家当主[[ジャウドゥ]]らが配され、右翼にはコンギラト駙馬家当主ナチン、同部族のカガイ、オゴン、オロチン、ムカリ国王家当主クルムシほか諸部族長家の当主たちなどが配されている。『元史』巻百二十 朮赤台伝によると、このうちカピチは中軍に配されていた(「於是戦于石木温都之地。諸王哈丹・駙馬臘真与兀魯・忙兀居右、諸王塔察児及太丑台居左、合必赤将中軍」)。このため、クビライに組した東方三王家のうちジョチ・カサル家の王族のみが抜けているため、クビライの中軍にいる王族カピチはジョチ・カサル家の王族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る。{{harv|杉山正明|2004|p=114-116}}
[8] 문서 訳文は堤1996,77頁より引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