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년 평화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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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십년 평화 조약은 기원전 446년에서 445년 사이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체결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을 막고 그리스 세계의 안정을 목표로 했다. 이 조약은 아테네가 영토를 포기하고 중립적인 폴리스의 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15년 만에 에피담누스와 코르키라 분쟁, 사미아 전쟁, 메가라에 대한 무역 제재, 포티다이아 공격 등으로 인해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조약 위반을 선언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코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은 이 조약을 시험하는 또 다른 사건이었으며, 아테네가 코르키라와 방어 동맹을 맺고 시보타 해전이 벌어지면서 조약은 더욱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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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은 기원전 387년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체결한 조약으로,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와 에게 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리스 도시들은 자율성을 보장받는 대신 페르시아에 종속되었으며, 스파르타는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최고 지위를 얻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전쟁 상태를 야기했다. - 스파르타의 조약 - 니키아스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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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스 평화조약은 기원전 450/449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체결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약으로, 델로스 동맹의 반란 진압을 도왔지만, 조약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기원전 5세기 그리스 - 고전기 그리스
고전기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문화가 발전하고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으며, 델로스 동맹으로 에게해 패권을 장악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쇠퇴하여 마케도니아에 정복당해 폴리스 중심 시대가 막을 내리고 헬레니즘 시대로 이행한 시기이다.
삼십년 평화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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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이 조약의 목적은 또 다른 전쟁 발발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 조약은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코르키라와 코린토스 간의 분쟁은 삼십년 평화 조약에 문제를 일으켰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분쟁은 에피담노스를 놓고 벌어졌다. 코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코르키라는 그리스에는 아테네, 코르키라, 코린토스 함대 등 세 개의 주목할 만한 함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코린토스가 코르키라 함대를 먼저 장악하면, 아테네는 코르키라 함대와 펠로폰네소스 함대에 동시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가 코르키라의 연합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코르키라 함대의 도움을 받아 펠로폰네소스와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4]
아테네는 기원전 435년 에피담누스와 코르키라를 둘러싼 분쟁에 개입하여 휴전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를 분노하게 했다.[4] 아테네는 코린토스-코르키라 분쟁에 참여한 스파르타 동맹국인 메가라에 대해 무역 제재를 가했다.[4] 기원전 432년, 아테네는 코린토스의 식민지이자 동맹국이었던 포티다이아를 공격했다. 이러한 분쟁으로 인해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조약을 위반했다고 선언했다. 스파르타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삼십년 평화는 무효가 되었고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4]
삼십년 평화 조약은 또 다른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1]
[1]
서적
The Inter-War Years 480-431 BC
Thomas Dunne Books
2006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영토, 즉 니사에와 파게의 메가라 항구, 트로이젠과 아르골리스의 아카이아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나우파크투스를 계속 소유하도록 허용하기로 동의했다.[1] 또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무력 충돌을 배제했다. 중립적인 폴리스는 스파르타 또는 아테네 중 한 편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각 진영에 공식적인 동맹 목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2]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중재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모든 영토를 유지하기로 했다. 또한 두 동맹을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에게 해에서 새로 형성된 아테네 제국에 대한 호재였다.
3. 조약의 시험대: 사미아 전쟁
기원전 440년, 아테네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던 사모스가 아테네와의 동맹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30년 평화 조약은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반란군은 곧 페르시아 사트라프의 지원을 확보했고, 아테네는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에 직면했다. 스파르타가 개입했다면, 취약한 상황에 놓인 아테네를 꺾을 수 있었겠지만, 스파르타는 전쟁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을 때 전쟁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코린토스는 아테네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3]
4. 코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
코린토스는 조약에 등록되지 않은 도시는 어느 편이든 원하는 편에 가입할 수 있지만, 이 조항은 다른 편에 피해를 줄 의도로 가입하는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5]
아테네는 공격과 방어를 모두 포함하는 동맹(''symmachia'')이 아닌, 방어적인 동맹(''epimachia'')만 맺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으며 알려진 최초의 사례였다.[6] 이 결정은 코린토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시보타 해전은 이 갈등에서 비롯된 전투 중 하나였다.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평화 조약을 더욱 훼손시켰다.
5. 조약의 파기
코르키라와 코린토스 간의 전쟁은 30년 평화 조약에 문제를 일으켰으며, 30년 평화 조약의 종말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다툼은 멀리 떨어진 작은 땅인 에피담노스를 놓고 벌어졌다. 코르키라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아테네로 갔다. 코르키라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에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세 개의 함대가 있는데, 그것은 아테네 함대, 코르키라 함대, 코린토스 함대였다. 만약 코린토스가 먼저 코르키라 함대를 장악하게 된다면, 아테네는 코르키라 함대와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동시에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만약 아테네가 코르키라의 연합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코르키라 함대의 도움을 받아 펠로폰네소스와 싸울 수 있을 것이다.[4] 코린토스는 조약에 등록되지 않은 도시는 어느 편이든 원하는 편에 가입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 조항은 다른 편에 피해를 입힐 의도로 한 편에 가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5]
아테네는 공격과 방어를 모두 포함하는 동맹(''symmachia'')이 아닌, 방어적인 동맹(''epimachia'')만 맺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으며 알려진 최초의 그러한 관계였다.[6] 이 결정은 코린토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시보타 해전은 이 갈등에서 비롯된 전투 중 하나였다.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평화 조약을 더욱 훼손시켰다.
6. 조약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영토, 즉 니사에와 파게의 메가라 항구, 트로이젠과 아르골리스의 아카이아를 포기해야 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나우파크투스를 계속 소유하도록 허용하기로 동의했다.[1] 또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무력 충돌을 배제했다. 중립적인 폴리스는 스파르타 또는 아테네 중 한 편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각 진영에 공식적인 동맹 목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2]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중재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모든 영토를 유지하기로 했다. 또한 두 동맹을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아테네와 에게 해에서 새로 형성된 아테네 제국에 대한 호재였다.
그러나 삼십년 평화는 단 15년 만에 끝났고,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선전 포고를 한 후 종결되었다. 평화 조약 기간 동안 아테네는 기원전 435년 에피담누스와 코르키라를 둘러싼 분쟁에 개입하여 휴전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를 분노하게 했다. 아테네는 코린토스-코르키라 분쟁에 참여한 스파르타 동맹국인 메가라에 대해 무역 제재를 가했다. 기원전 432년, 아테네는 목록에 있는 동맹국이자 코린토스 식민지였던 포티다이아를 공격했다. 이러한 분쟁으로 인해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조약을 위반했다고 선언했다. 스파르타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삼십년 평화는 무효가 되었고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조
[2]
서적
The Great Rivalry
Viking
2003
[3]
서적
Enter Athens
Viking
2003
[4]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Hackett Pub.
1998
[5]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Hackett Pub.
1998
[6]
서적
Enter Athens
Viking
2003
[7]
서적
The Inter-War Years 480-431 BC
Thomas Dunne Books
2006
[8]
서적
The Great Rivilary
Viking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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