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코린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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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로, 기원전 65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도리아인 정착 이후 도시로서 발전했다. 바키아다이 왕조, 참주 정치 시대를 거치며 번성했지만, 고전 시대에는 아테네, 테베와 경쟁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아카이아의 중심 도시로 재건되었고, 사도 바울의 방문으로 기독교의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지진과 외침으로 쇠퇴했지만, 비잔틴 시대에 부활하여 실크 산업으로 번성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쳐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현대 도시로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고고학 유적과 함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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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코린토스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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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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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그리스어) | Κόρινθος |
현지 이름 (도리스 그리스어) | Ϙόρινθος |
현지 이름 (라틴어) | Corinthus |
위치 | 그리스 본토 |
면적 | 약 5km² |
언어 | 도리스 그리스어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역사 | |
건국 | 기원전 900년경 |
키프셀루스 시대 | 기원전 657년–627년 |
멸망 | 기원전 146년 |
주요 사건 | 로마에 의해 점령 및 파괴됨 |
정치 | |
정치 체제 | 과두정 |
통화 | |
사용 통화 | 은화 (기원전 345–307년경) |
시대 | |
시대 | 고대 |
기타 | |
현재 국가 | 그리스 |
2. 역사
신석기 시대 도자기 파편은 코린토스 유적이 기원전 6500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청동기 시대 초기까지 지속적으로 거주했음을 보여준다.[2] 이는 정착지가 무역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그러나 초기 헬라드 II기에는 도자기 유물이 크게 감소하고, EHIII 및 MH 기에는 도자기 유물이 희소하므로, 미케네 시대 직전에는 이 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카이오 근처 해안에는 코린토스 만을 가로질러 무역을 하던 정착지가 있었으며, 코린토스 자체는 기원전 900년경 도리아인들이 정착하기 전까지는 크게 점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
파우사니아스가 전하는 신화에 따르면, 코린토스는 신 제우스의 후손인 코린토스에 의해 건립되었다.[5] 다른 신화에서는 티탄 오케아노스의 딸인 여신 에피라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도시의 고대 이름도 에피라였다.
코린토스는 미케네, 티린스, 파일로스와 같은 청동기 시대 미케네 궁전 도시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고대 왕족의 시조였다. 아르고 원정대의 지도자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버린 곳도 바로 코린토스였다.[6]
파우사니아스에게 2세기 AD에 전해진 코린토스 신화에 따르면,[7] 헤카톤케이르 중 하나인 브리아레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헬리오스 사이의 분쟁에서 중재자였다. 그의 판결은 바다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코린토스 지협은 포세이돈에게 속하고, 하늘에 가장 가까운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아크로코린토스)는 헬리오스에게 속한다는 것이었다.[8]
상부 피레네 샘은 아크로폴리스 성벽 안에 위치해 있다. 파우사니아스(2.5.1)는 아소포스가 제우스에게 아이기나를 납치한 정보를 알려준 시시포스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곳에 설치했다고 말한다.[9] 전설에 따르면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가 이 샘에서 물을 마셨으며,[10] 코린토스의 영웅 벨레로폰에 의해 사로잡혀 길들여졌다.
바키아다이( Βακχιάδαι|Bakkhiadaigrc )는 8세기와 7세기에 코린토스 문화가 발전하던 시기에 고대 코린토스를 다스린 도리아인 씨족이자 지배 혈족 집단이었다. 기원전 747년, 귀족정이 바키아다이 프뤼타네스를 몰아내고 왕정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는 리디아 왕국이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리디아의 왕 멜레스가 즉위한 시기와 일치한다. 바키아다이는 성인 남자가 수백 명 정도였으며, 코린토스에서 마지막 왕 텔레스테스( 시시포스 가문 출신)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12] 바키아다이는 왕정을 폐지하고 집단으로 통치했으며, 매년 ''프뤼타니스''(짧은 임기 동안 왕의 역할을 수행)를[13][14] 선출하여 도시를 다스렸고, 평의회와 군대를 이끌 ''폴레마르코스''를 선출했다.
기원전 747년부터 650년까지 바키아다이의 통치 기간 동안 코린토스는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대규모 공공 건물과 기념물이 건설되었다. 기원전 733년,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730년경, 코린토스는 최소 5,000명의 인구를 가진 고도로 발전된 그리스 도시로 부상했다.[15]
기원전 657년, 폴레마르코스 킵셀루스는 델포이에서 신탁을 얻었고, 이를 자신이 도시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17]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바키아다이를 추방했다.[18]
킵셀루스(또는 킵셀로스, Κύψελοςel)는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의 첫 번째 참주였다. 그는 기원전 658년부터 628년까지 바키아드 귀족들을 몰아내고 30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650년에 아폴론과 포세이돈 신전을 지었다.
킵셀루스는 30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627년에 아들 페리안드로스가 참주로 계승했다.[22] 페리안드로스는 그리스 7현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23]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최초의 코린토스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는 이스트미스를 가로질러 코린토스만과 사로니크만을 연결하는 해로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디오르코스 (돌로 지어진 육상 램프)를 만들었다. 킵셀리드 시대는 코린토스의 황금기였으며, 페리안드로스의 조카 Psammetich|프삼메티히de로 끝났다.
기원전 581년, 페리안드로스의 조카이자 후계자가 암살되면서 코린토스의 참주 정치는 막을 내렸다.[27] 같은 해, 이스티미아 경기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570년, 코린토스 주민들은 '콜트(colts)' 또는 '폴스(foals)'라고 불리는 은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50년, 코린토스에서는 아폴로 신전이 건설되었고,[27]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고전 시대 직전 코린토스인들은 삼단 노선을 개발했는데, 이는 로마 시대 말기까지 지중해의 표준 군함이 되었다.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 헬레니즘 도시를 상대로 기록상 최초의 해전을 벌였다.[29] 또한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육상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부유했다.[30]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 코린토스는 이스트미아 지협의 교통과 무역을 기반으로 고전 아테네, 테베와 부를 겨루었다.
고전기 그리스 시대와 그 이전에도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약 1,000명의 헤타이라 (신전 창녀)가 고용되었다(참고).[31] 호라티우스는 "''non licet omnibus adire Corinthum''" ("모두가 코린토스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도시의 사치를 언급했다.[31]
코린토스는 이스토미아 경기를 주최했으며, 도리스와 이오니아에 이어 고전 건축의 세 번째 주요 양식인 코린트 양식을 개발했다.
이 도시는 레카이온과 켄크레아이 두 개의 주요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레카이온은 서부 식민지와 마그나 그라키아를, 켄크레아이는 아테네, 이오니아, 키프로스, 레반트를 연결했다.
기원전 481~480년 동안 코린토스 이스트모스 회의는 전쟁에서 페르시아에 맞서기 위해 헬레니 협회를 설립했다. 코린토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 400명의 군인을 파견했고,[32] 살라미스 해전에 40척의 군함을, 플라타이아 전투에 5,000명의 중장 보병을 공급했다.[33] 헤로도토스는 코린토스인들이 아테네인 다음으로 훌륭한 전사였다고 언급했다.[36]
기원전 435년, 코린토스와 그 식민지인 코르키라는 에피다무스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37] 기원전 433년, 아테네는 코르키라와 동맹을 맺었다.[38] 코르키라를 상대로 한 코린토스의 전쟁은 당시까지 가장 큰 해상 전투였다.[39]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 중 하나는 코린토스와 아테네 간의 분쟁이었다.[40]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는 아테네 파괴를 거부하여 코린토스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코린토스는 고대 아르고스, 보이오티아, 아테네와 함께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섰다.
데모스테네스는 과거 아테네인들이 코린토스인과 테베인들의 행위에 대해 혐오했지만,[43] 악의를 품지 않았다고 언급했다.[44]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와 테베는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아테네를 지원했다.[45][46]
이러한 갈등은 도시 국가인 펠로폰네소스의 약화를 심화시켰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정복 발판을 마련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의 군사력이 아테네보다 우월하다며 시민 군대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코린토스의 용병들을 예로 들었다.[49]
338 BC,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를 통일하기 위해 코린토스 동맹을 창설하고, 동맹의 패권자로 지명되었다.
337 BC 봄, 제2차 코린토스 회의에서 공동 평화가 확립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동안, 코린토스는 다른 많은 그리스 도시들처럼 자치권을 거의 갖지 못했다. 기원전 308년, 도시는 안티고노스 왕조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그는 안티고노스 왕조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304년에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의해 도시가 다시 점령되었다.[50]
기원전 243년, 아라토스는 기습 공격을 사용하여 아크로코린토스 요새를 점령하고 시민들을 설득하여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시켰다.
아라토스와의 동맹 협정에 힘입어,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224년에 코린토스를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197년 로마의 개입 이후, 도시는 영구적으로 아카이아 동맹에 편입되었다. 필로포이멘의 지도 아래, 아카이아인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코린토스를 연합의 수도로 만들었다.[51]
기원전 146년, 로마는 아카이아 동맹에 전쟁을 선포했다. 일련의 로마의 승리는 코린토스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고, 이후 루키우스 뭄미우스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 점령하고 불태웠다. 뭄미우스는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으며, 이후 아카이아 동맹을 정복한 자로서 코그노멘 ''아카이쿠스''를 받았다.[52] 그 후 몇 년 동안 최소한의 거주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지만, 코린토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직전인 기원전 44년에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아 코린티엔시스'' (율리우스의 영광을 위한 코린토스 식민지)로 재건될 때까지 거의 버려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에 원형극장이 건설되었다.
로마 시대에 코린토스는 남부 그리스 또는 아카이아의 주요 도시로 재건되었다. 로마인, 그리스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대규모 인구가 있었다.[53] 이 도시는 로마 황제 숭배 활동의 중요한 장소였다.
고린도는 신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는데, 주로 사도 바울의 선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카이사르가 도시를 재건한 것이 성공했음을 증언한다. 전통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고린도를 사도좌로 만든다.
사도 바울은 서기 49년 또는 50년에 처음 이 도시를 방문했는데, 당시 갈리오는 세네카의 형제였으며, 아카이아의 총독이었다.[56] 바울은 이곳에서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사도행전 18장 11절) 여기서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다.
365년과 375년의 지진, 그리고 396년 알라릭 1세의 침략으로 고대 코린토스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후 도시는 기념비적인 규모로 재건되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작은 지역을 차지했다. 네 개의 교회가 도시 내부에, 또 다른 교회는 아크로코린토스 요새에, 기념비적인 바실리카는 레차이온 항구에 있었다.[62]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통치 기간 동안, 사로니코스 만에서 코린토스 만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도시를 북쪽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석조 성벽이 세워졌다. 헥사밀리온(6마일)이라고 불린 이 석조 성벽의 길이는 약 10km였다.
코린토스는 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7세기 초에는 야만족에게 함락되었을 수도 있다. 주요 정착지는 낮은 도시에서 아크로코린토스로 옮겨졌다. 헬라스 테마의 수도였고, 800년경에는 펠로폰네소스 테마의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9세기에 들어서야 도시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11세기와 12세기에 비잔틴 실크 산업이 번성하며 절정에 달했다.[62]
856년 11월, 코린토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약 45,000명이 사망했다.[63]
시칠리아의 로저 2세 휘하의 이탈로-노르만족은 도시의 부에 관심을 가졌고, 1147년 도시를 약탈하여 많은 포로, 특히 비단 직공들을 끌고 갔다. 코린토스는 노르만족의 약탈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62]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프랑스인 기사 윌리엄 드 샹플리트와 제프리 1세 드 빌르아르두앵이 이끄는 십자군이 펠로폰네소스 정복을 수행했다. 코린토스인들은 1205년부터 1210년까지 레오 스구로스의 지휘 아래 아크로코린토스 요새에서 프랑크족의 정복에 저항했다. 1210년, 요새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코린토스는 아카이아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5년 후인 1458년에 코린토스와 그 강력한 성을 점령했다.[14] 오스만 제국은 도시 이름을 '괴르데스'(Gördes)로 바꾸고 룸엘리 에얄레트 내의 산자크 (구) 중심지로 만들었다.[14] 베네치아인들은 모레아 전쟁 중인 1687년에 도시를 점령했으며, 1715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재탈환할 때까지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었다.[14] 코린토스는 1715년부터 1731년까지 모라 에얄레트의 수도였으며, 1821년까지 다시 산자크의 수도였다.[14]
그리스 독립 전쟁 (1821–1830) 동안 코린토스는 오스만 제국 군대와 대립했다. 1832년 런던 조약 이후 코린토스는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1833년, 코린토스는 역사적 중요성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새로 건국된 그리스 왕국의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처음에는 나프플리오가, 그 다음에는 아테네가 수도로 선택되었다.
2. 1. 선사 시대 및 건국 신화
신석기 시대 도자기 조각은 코린토스 유적이 기원전 6500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점유되었고, 청동기 시대인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점유되었음을 시사하며,[2] 이는 정착지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 그러나 초기 헬라드 II기에는 도자기 유물이 크게 감소하고, EHIII 및 MH 기에는 도자기 유물이 희소하므로, 미케네 시대 직전에는 이 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카이오 근처 해안에는 코린토스 만을 가로질러 무역을 하던 정착지가 있었으며, 코린토스 자체는 기원전 900년경 도리아인들이 정착하기 전까지는 크게 점유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파우사니아스가 전하는 코린토스 신화에 따르면, 이 도시는 신 제우스의 후손인 코린토스에 의해 건립되었다.[5] 그러나 다른 신화에서는 티탄 오케아노스의 딸인 여신 에피라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도시의 고대 이름도 에피라였다.
코린토스는 미케네, 티린스, 파일로스와 같은 청동기 시대 미케네 궁전 도시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코린토스의 고대 왕족의 시조였다. 아르고 원정대의 지도자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버린 곳도 바로 코린토스였다.[6] 일리아스의 선박 목록에는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는 코린토스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파우사니아스에게 2세기 AD에 전해진 코린토스 신화에 따르면,[7] 헤카톤케이르 중 하나인 브리아레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헬리오스 사이의 분쟁에서 중재자였다. 그의 판결은 바다에 가장 가까운 지역인 코린토스 지협은 포세이돈에게 속하고, 하늘에 가장 가까운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아크로코린토스)는 헬리오스에게 속한다는 것이었다.[8]
상부 피레네 샘은 아크로폴리스 성벽 안에 위치해 있다. 파우사니아스(2.5.1)는 아소포스가 제우스에게 아이기나를 납치한 정보를 알려준 시시포스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곳에 설치했다고 말한다.[9] 전설에 따르면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가 이 샘에서 물을 마셨으며,[10] 코린토스의 영웅 벨레로폰에 의해 사로잡혀 길들여졌다.
2. 2. 바키아다이 왕조 시대
바키아다이( Βακχιάδαι|Bakkhiadaigrc )는 8세기와 7세기에 코린토스 문화가 발전하던 시기에 고대 코린토스를 다스린 도리아인 씨족이자 지배 혈족 집단이었다. 기원전 747년, 귀족정이 바키아다이 프뤼타네스를 몰아내고 왕정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는 리디아 왕국이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리디아의 왕 멜레스가 즉위한 시기와 일치한다. 바키아다이는 성인 남자가 수백 명 정도였으며, 코린토스에서 마지막 왕 텔레스테스( 시시포스 가문 출신)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12] 바키아다이는 왕정을 폐지하고 집단으로 통치했으며, 매년 ''프뤼타니스''(짧은 임기 동안 왕의 역할을 수행)를[13][14] 선출하여 도시를 다스렸고, 아마도 평의회와 군대를 이끌 ''폴레마르코스''를 선출했다.기원전 747년부터 650년까지 바키아다이의 통치 기간 동안 코린토스는 통일된 국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대규모 공공 건물과 기념물이 건설되었다. 기원전 733년,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730년경, 코린토스는 최소 5,000명의 인구를 가진 고도로 발전된 그리스 도시로 부상했다.[15]
아리스토텔레스는 테베의 법률가였던 코린토스의 바키아다이인 필롤라오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디오클레스의 연인이 되었다. 그들은 평생을 테베에서 함께 살았다. 그들의 무덤은 서로 가까이 지어졌고, 필롤라오스의 무덤은 코린토스 지방을 향하고, 디오클레스의 무덤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16]
기원전 657년, 폴레마르코스 킵셀루스는 델포이에서 신탁을 얻었고, 이를 자신이 도시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17]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바키아다이를 추방했다.[18]
2. 3. 참주 정치 시대
킵셀루스(또는 킵셀로스, Κύψελοςel)는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의 첫 번째 참주였다. 그는 기원전 658년부터 628년까지 바키아드 귀족들을 몰아내고 30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650년에 아폴론과 포세이돈 신전을 지었다.킵셀루스는 에티온의 아들이자 라브다라는 기형적인 여성의 아들이었다. 그는 바키아드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어머니의 고대 모계 권리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바키아다이들은 델포이의 신탁으로부터 에티온의 아들이 그들의 왕조를 전복할 것이라는 두 가지 예언을 들었고, 아기가 태어나면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을 죽이러 온 남자들 각각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들 중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 후 라브다는 아기를 상자에 숨겼고,[19]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를 죽이러 돌아왔을 때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페르세우스의 유년기와 비교) 킵셀루스의 상아 상자는 호화롭게 장식되었고 금으로 치장되었다. 그것은 올림피아에 봉헌된 제물이었으며, 파우사니아스는 서기 2세기의 여행 안내서에서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다.[20]
킵셀루스는 성장하여 예언을 이루었다. 코린토스는 아르고스 및 코르키라와의 전쟁에 휘말렸고, 코린토스인들은 통치자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킵셀루스는 당시(기원전 657년경) 군대를 책임지는 폴레마르크이자 집정관이었으며, 군인들과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왕을 몰아냈다. 그는 또한 다른 적들을 추방했지만, 그들이 그리스 북서부에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식민지와의 무역을 늘렸다. 그는 인기 있는 통치자였으며, 많은 후대 참주와 달리 경호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자연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코린토스의 킵셀루스는 도시의 주인이 되면 코린토스인들의 모든 재산을 제우스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따라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반환하도록 명령했다."라고 보고한다.[21]
기원전 7세기에 킵셀루스(기원전 657–627년 통치)와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기원전 627–587년 통치)의 통치하에 도시는 에피담노스 (오늘날의 두러스, 알바니아), 시라쿠사, 암브라키아, 코르키라 (오늘날의 코르푸 마을), 아나크토리움등의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자들을 보냈다. 페리안드로스는 또한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 (오늘날의 피에르, 알바니아)와 포티데아 (칼키디케)를 건설했다. 코린토스는 또한 고대 이집트의 나우크라티스 식민지를 건설한 9개의 그리스 후원 도시 중 하나였으며, 이는 그리스 세계와 이집트 파라오 시대 사이의 무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파라오 프삼메티코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설립되었다.


킵셀루스는 30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627년에 아들 페리안드로스가 참주로 계승했다.[22] 킵셀루스가 델포이에 지은 보물 창고는 헤로도토스 시대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킵셀루스의 상자는 서기 2세기에 파우사니아스에 의해 올림피아에서 발견되었다. 페리안드로스는 기원전 600년에 코르키라를 질서 있게 만들었다.
페리안드로스는 그리스 7현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23]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최초의 코린토스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는 이스트미스를 가로질러 코린토스만과 사로니크만을 연결하는 해로를 만들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극심한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이 시도를 포기했지만, 대신 디오르코스 (돌로 지어진 육상 램프)를 만들었다. 킵셀리드 시대는 코린토스의 황금기였으며, 페리안드로스의 조카 Psammetich|프삼메티히de (헬레니즘을 숭배한 이집트 파라오 프삼메티코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로 끝났다.
페리안드로스는 아내 멜리사를 죽였다. 그의 아들 리코프론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피했고, 페리안드로스는 아들을 코르키라로 추방했다.[24] 페리안드로스는 나중에 리코프론이 코린토스의 통치자로 자신을 대신하기를 원했고, 페리안드로스가 코르키라로 가는 조건으로 그를 코린토스로 돌아오도록 설득했다. 코르키라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페리안드로스를 막기 위해 리코프론을 죽였다.[25][26]
2. 4. 고전 시대
기원전 581년, 페리안드로스의 조카이자 후계자가 암살되면서 코린토스의 참주 정치는 막을 내렸다.[27] 같은 해, 주요 가문들에 의해 이스티미아 경기가 만들어졌다.기원전 570년, 코린토스 주민들은 '콜트(colts)' 또는 '폴스(foals)'라고 불리는 은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50년, 코린토스에서는 아폴로 신전이 건설되었고,[27]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525년에는 아르고스를 상대로 스파르타와 화해 동맹을 맺었으며, 기원전 519년에는 아테네와 테베 사이를 중재했다.
기원전 500년경, 아테네인과 코린토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에게 참주를 복원시켜 아테네를 해치지 않도록 간청했다.[28]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고전 시대 직전 코린토스인들은 삼단 노선을 개발했는데, 이는 로마 시대 말기까지 지중해의 표준 군함이 되었다.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와 헬레니즘 도시를 상대로 기록상 최초의 해전을 벌였다.[29] 또한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육상 교통 요충지에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부유했다.[30]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 코린토스는 이스트미아 지협의 교통과 무역을 기반으로 고전 아테네, 테베와 부를 겨루었다. 기원전 6세기 중반까지 코린토스는 그리스 세계 주변의 도시 국가에 흑색 그림 도기를 수출했지만, 이후 아테네에 시장을 잃었다.
고전기 그리스 시대와 그 이전에도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약 1,000명의 헤타이라 (신전 창녀)가 고용되었다(참고).[31] 가장 유명한 헤타이라였던 라에스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고 한다. 호라티우스는 "''non licet omnibus adire Corinthum''" ("모두가 코린토스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도시의 사치를 언급했다.[31]
코린토스는 이스토미아 경기를 주최했으며, 도리스와 이오니아에 이어 고전 건축의 세 번째 주요 양식인 코린트 양식을 개발했다.
이 도시는 레카이온과 켄크레아이 두 개의 주요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레카이온은 서부 식민지와 마그나 그라키아를, 켄크레아이는 아테네, 이오니아, 키프로스, 레반트를 연결했다.
기원전 491년, 코린토스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겔라 사이에서 중재했다.
기원전 481~480년 동안 코린토스 이스트모스 회의는 전쟁에서 페르시아에 맞서기 위해 헬레니 협회를 설립했다. 코린토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 400명의 군인을 파견했고,[32] 살라미스 해전에 40척의 군함을, 플라타이아 전투에 5,000명의 중장 보병을 공급했다.[33]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 이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코린토스 지협 북쪽의 본토 그리스 대부분이 휩쓸린 상황에 이르렀다.[34][35]
헤로도토스는 코린토스인들이 아테네인 다음으로 훌륭한 전사였다고 언급했다.[36]
기원전 458년, 코린토스는 메가라에서 아테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435년, 코린토스와 그 식민지인 코르키라는 에피다무스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37] 기원전 433년, 아테네는 코르키라와 동맹을 맺었다.[38] 코르키라를 상대로 한 코린토스의 전쟁은 당시까지 가장 큰 해상 전투였다.[39]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 중 하나는 코린토스와 아테네 간의 분쟁이었다.[40]
시라쿠사인은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에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 원정에 맞서 동맹을 구했다.[41] 코린토스인들은 시라쿠사인을 돕기로 결정했고,[42] 스파르타의 지원을 촉구했다. 알키비아데스의 설득으로 스파르타는 시칠리아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는 아테네 파괴를 거부하여 코린토스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코린토스는 고대 아르고스, 보이오티아, 아테네와 함께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섰다.
데모스테네스는 과거 아테네인들이 코린토스인과 테베인들의 행위에 대해 혐오했지만,[43] 악의를 품지 않았다고 언급했다.[44]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와 테베는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아테네를 지원했다.[45][46]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92년 코린토스 장벽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맞서 싸운 아르고스인들의 사례를 들었다.[47] 379 BC, 코린토스는 스파르타와 연합하여 테베를 격파하고 아테네를 점령하려 했다.
366 BC, 아테네 민회는 카레스에게 동맹국을 점령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라고 명령했지만, 코린토스, 플리우스, 에피다우루스가 보이오티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실패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가 코린토스 근처에서 스파르타와 벌인 전투에 대해 설명하며, 코린토스가 패배한 아테네 군대를 받아들여 그들을 구했다고 언급했다.[48]
이러한 갈등은 도시 국가인 펠로폰네소스의 약화를 심화시켰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정복 발판을 마련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의 군사력이 아테네보다 우월하다며 시민 군대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코린토스의 용병들을 예로 들었다.[49]
338 BC,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를 통일하기 위해 코린토스 동맹을 창설하고, 동맹의 패권자로 지명되었다.
337 BC 봄, 제2차 코린토스 회의에서 공동 평화가 확립되었다.
2. 5.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 시대 동안, 코린토스는 다른 많은 그리스 도시들처럼 자치권을 거의 갖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들 아래에서, 그리스는 분쟁 지역이었고, 코린토스는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와 다른 헬레니즘 강국들 사이의 다툼의 전장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308년, 도시는 안티고노스 왕조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그는 안티고노스 왕조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304년에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의해 도시가 다시 점령되었다.[50]코린토스는 반세기 동안 안티고노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원전 280년 이후, 충실한 총독 크라테로스가 통치했지만, 기원전 253/2년에 그의 아들 코린토스의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보조금에 감동하여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무너뜨리고 참주로서 독립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기원전 247년에 독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죽음 이후,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45/44년 겨울에 도시를 다시 점령했다.
마케도니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43년, 아라토스는 기습 공격을 사용하여 아크로코린토스 요새를 점령하고 시민들을 설득하여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시켰다.
아라토스와의 동맹 협정에 힘입어,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224년에 코린토스를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197년 로마의 개입 이후, 도시는 영구적으로 아카이아 동맹에 편입되었다. 필로포이멘의 지도 아래, 아카이아인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코린토스를 연합의 수도로 만들었다.[51]
2. 6. 로마 시대
기원전 146년, 로마는 아카이아 동맹에 전쟁을 선포했다. 일련의 로마의 승리는 코린토스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고, 이후 루키우스 뭄미우스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 점령하고 불태웠다. 뭄미우스는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으며, 이후 아카이아 동맹을 정복한 자로서 코그노멘 ''아카이쿠스''를 받았다.[52] 그 후 몇 년 동안 최소한의 거주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지만, 코린토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직전인 기원전 44년에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아 코린티엔시스'' (율리우스의 영광을 위한 코린토스 식민지)로 재건될 때까지 거의 버려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에 원형극장이 건설되었다.로마 시대에 코린토스는 남부 그리스 또는 아카이아의 주요 도시로 재건되었다. 로마인, 그리스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대규모 인구가 있었다.[53] 이 도시는 로마 황제 숭배 활동의 중요한 장소였으며, 사원 E[54]와 율리우스 바실리카[55] 모두 황제 숭배 활동의 장소로 추정되었다.
고린도는 신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는데, 주로 사도 바울의 선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카이사르가 도시를 재건한 것이 성공했음을 증언한다. 전통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고린도를 사도좌로 만든다.
사도 바울은 서기 49년 또는 50년에 처음 이 도시를 방문했는데, 당시 갈리오는 세네카의 형제였으며, 아카이아의 총독이었다.[56] 바울은 이곳에서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사도행전 18장 11절) 여기서 그는 나중에 함께 여행하게 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여기서 천막 제작자(여기에서 현대 기독교의 텐트 메이킹 개념이 파생됨)로 함께 일했으며, 정기적으로 회당에 참석했다.
서기 51/52년에 갈리오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재판을 주재했다. 이 사건은 성경 안에서 사도행전의 확실한 연대를 제공한다. 실라와 디모데는 여기서 바울과 다시 만났는데, 마지막으로 베레아에서 그를 만났다. (사도행전 18장 5절) 사도행전 18장 6절은 유대인들이 여기서 그의 설교를 거부하자 바울이 더 이상 그가 여행하는 회당에서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시사한다.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에게로 갈 것입니다".[57] 그러나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사도행전 18장 19절),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설교하기 위해 회당에 갔다.
바울은 기독교 교회에 최소 두 개의 서신을 썼는데, 고린도 전서 (에베소에서 씀)와 고린도 후서 (마케도니아에서 씀)이다. 고린도 전서는 번성하는 기독교 교회와 주변 사회 간의 갈등을 가끔 반영한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첫 번째 서신과 두 번째 서신 사이에 중간 "고통스러운 방문"을 위해 고린도를 방문했다고 믿는다. (고린도후서 2장 1절) 두 번째 서신을 쓴 후, 그는 늦겨울에 고린도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렀고,[58] 거기서 로마서를 썼다.[59]
고린도 서신 자체의 단서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네 개의 서신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60] 단 두 개만 기독교 정경에 포함되어 있다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 나머지 두 편지는 유실되었다. (유실된 편지들은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쓴 첫 번째 편지와 세 번째 편지를 나타낼 것이며, 따라서 정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서신은 네 편이 쓰여졌다면 두 번째와 네 번째가 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 번째 편지(일명 "눈물의 편지"; 고린도후서 2장 4절 참조)가 정경 고린도 후서 (10–13장)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편지는 바울의 사후 여러 해 후에 쓰여진 위경인 고린도 삼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브루스 윈터의 추측에 따르면,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그들 자신의 음식을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바울은 기독교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식단 규정에 따라 유대인들의 음식 접근을 유지하도록 지시했다. 이 추측은 루돌프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그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바울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이방인 공동체 내에 동화되어 유대인 식단 절차를 채택하지 않기를 바랐다고 주장한다.[61]
2. 7. 중세 시대
365년과 375년의 지진, 그리고 396년 알라릭 1세의 침략으로 고대 코린토스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후 도시는 기념비적인 규모로 재건되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작은 지역을 차지했다. 네 개의 교회가 도시 내부에, 또 다른 교회는 아크로코린토스 요새에, 기념비적인 바실리카는 레차이온 항구에 있었다.[62]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통치 기간 동안, 사로니코스 만에서 코린토스 만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도시를 북쪽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석조 성벽이 세워졌다. 헥사밀리온(6마일)이라고 불린 이 석조 성벽의 길이는 약 10km였다.
코린토스는 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7세기 초에는 야만족에게 함락되었을 수도 있다. 주요 정착지는 낮은 도시에서 아크로코린토스로 옮겨졌다. 헬라스 테마의 수도였고, 800년경에는 펠로폰네소스 테마의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9세기에 들어서야 도시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11세기와 12세기에 비잔틴 실크 산업이 번성하며 절정에 달했다.[62]
856년 11월, 코린토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약 45,000명이 사망했다.[63]
시칠리아의 로저 2세 휘하의 이탈로-노르만족은 도시의 부에 관심을 가졌고, 1147년 도시를 약탈하여 많은 포로, 특히 비단 직공들을 끌고 갔다. 코린토스는 노르만족의 약탈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62]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프랑스인 기사 윌리엄 드 샹플리트와 제프리 1세 드 빌르아르두앵이 이끄는 십자군이 펠로폰네소스 정복을 수행했다. 코린토스인들은 1205년부터 1210년까지 레오 스구로스의 지휘 아래 아크로코린토스 요새에서 프랑크족의 정복에 저항했다. 1208년 레오 스구로스는 아크로코린토스 꼭대기에서 말을 타고 떨어져 자살했지만, 저항은 2년 더 지속되었다. 1210년, 요새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코린토스는 아카이아 공국의 일부가 되어 엘리스의 안드라비다에 수도를 둔 빌르아르두앵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코린토스는 아카이아 공국의 북쪽 국경에 있는 아테네 공국과의 경계에 있는 마지막 주요 도시였다. 오스만 제국은 1395년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모레아 전제공국의 비잔틴인들이 1403년에 재탈환했고, 전제군주 테오도르 2세 팔레올로고스는 1415년에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질러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원했다.
2. 8.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5년 후인 1458년에 코린토스와 그 강력한 성을 점령했다.[14] 오스만 제국은 도시 이름을 '괴르데스'(Gördes)로 바꾸고 룸엘리 에얄레트 내의 산자크 (구) 중심지로 만들었다.[14] 베네치아인들은 모레아 전쟁 중인 1687년에 도시를 점령했으며, 1715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재탈환할 때까지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있었다.[14] 코린토스는 1715년부터 1731년까지 모라 에얄레트의 수도였으며, 1821년까지 다시 산자크의 수도였다.[14]2. 9. 독립 이후
그리스 독립 전쟁 (1821–1830) 동안 코린토스는 오스만 제국 군대와 대립했다. 당시 알바니아인 부족은 코린토스 지협 북쪽에 살면서 코린토스 아크로폴리스를 공격했으며, 약 2,000명의 머스킷 총병으로 오스만 군대에 맞섰다.[64] 1832년 런던 조약 이후 코린토스는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1833년, 코린토스는 역사적 중요성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새로 건국된 그리스 왕국의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처음에는 나프플리오가, 그 다음에는 아테네가 수도로 선택되었다.3. 문화
고전기 그리스 시대에 코린토스인들은 도리스와 이오니아에 이어 고전 건축의 세 번째 주요 양식인 코린트 양식을 개발했다.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으며, 약 1,000명의 헤타이라 (신전 창녀)가 고용되었다.[31] 이 도시는 부유한 상인과 권력자들에게 봉사했던 신전 창녀들로 유명했다. 호라티우스는 도시의 과도한 사치를 언급하며 "''non licet omnibus adire Corinthum''" ("모두가 코린토스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1]
코린토스는 이스토미아 경기를 주최하기도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고린도가 여러 번 언급된다. 전통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사도 바울은 서기 49년 또는 50년에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하여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고, 회당에 참석했다.
서기 51/52년에 갈리오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재판했다. 사도행전 18장 6절은 유대인들이 그의 설교를 거부하자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고 언급한다.[57]
바울은 기독교 교회에 고린도 전서 (에베소에서 씀)와 고린도 후서 (마케도니아에서 씀) 등 최소 두 개의 서신을 썼다. 그는 첫 번째 서신과 두 번째 서신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했을 수 있다. 두 번째 서신을 쓴 후, 늦겨울에 고린도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렀고,[58] 거기서 로마서를 썼다.[59]
3. 1. 코린트 양식
고전기 그리스 시대 동안 코린토스인들은 도리스와 이오니아에 이어 고전 건축의 세 번째 주요 양식인 코린트 양식을 개발했다. 코린트 양식은 세 가지 양식 중 가장 복잡했으며 도시의 부와 사치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반면, 도리스 양식은 스파르타인들의 엄격한 단순성을 연상시켰고, 이오니아 양식은 아테네인과 같은 코스모폴리탄 철학에 따라 이 두 가지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었다.3. 2. 종교
고전기 그리스 시대와 그 이전에도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으며, 약 1,000명의 헤타이라 (신전 창녀)가 고용되었다.[31] 이 도시는 부유한 상인과 권력자들에게 봉사했던 신전 창녀들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헤타이라였던 라에스는 그녀의 특별한 호의에 대해 엄청난 대가를 청구했다고 전해진다. 호라티우스는 도시의 과도한 사치를 언급하며 "''non licet omnibus adire Corinthum''" ("모두가 코린토스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31]코린토스는 이스토미아 경기를 주최하기도 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고린도가 여러 번 언급된다. 전통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고린도를 사도좌로 만든다.
사도 바울은 서기 49년 또는 50년에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하여 18개월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처음 만났고, 함께 천막 제작자로 일하며 회당에 참석했다.
서기 51/52년에 갈리오는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재판했다. 실라와 디모데는 여기서 바울과 다시 만났다. 사도행전 18장 6절은 유대인들이 그의 설교를 거부하자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고 언급한다.[57]
바울은 기독교 교회에 고린도 전서 (에베소에서 씀)와 고린도 후서 (마케도니아에서 씀) 등 최소 두 개의 서신을 썼다. 그는 첫 번째 서신과 두 번째 서신 사이에 "고통스러운 방문"을 위해 고린도를 방문했을 수 있다. 두 번째 서신을 쓴 후, 늦겨울에 고린도에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렀고,[58] 거기서 로마서를 썼다.[59]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네 개의 서신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60]
4. 유적
'''코린토스 발굴'''은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가 1896년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거의 중단 없이 진행하고 있다. 고대 도시 바로 위에 현대 고대 코린토스 마을이 있어 발굴이 제한되었지만, 연구소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아폴론 신전 주변에 집중했다. 이 웅장한 기념물은 고대부터 유일하게 눈에 띄는 유적이었다.[66] 버트 호지 힐, 칼 블레겐, 윌리엄 딘스무어 시니어, 오스카 브로니어, 리스 카펜터 등 여러 고고학자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발굴했다.
이후 헨리 로빈슨(1959-1965), 찰스 K. 윌리엄스 2세(1965-1997), 가이 D. R. 샌더스(1997–현재) 소장들의 지도 아래 발굴을 통해 도시의 고고학적 역사가 밝혀졌다. 발굴 결과 초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6500-5750년)부터 근세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적 작업은 마을 중심지 밖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아크로코린토스 경사면에 위치한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 도공 지구,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지, 켄크레아 문 바실리카 등에서 진행되었다.[67] 현재 발굴은 포럼 남동쪽에 위치한 파나이야 필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 고전 연구소와 관련된 발굴 및 프로젝트는 코린토스 주변의 코라쿠, 켄크레아이, 이스티미아 정착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사했다. 이 작업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고대 코린토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1. 아크로코린토스
'''아크로코린토스'''는 고대 코린토스의 아크로폴리스로, 고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사람들이 계속 거주했던 거대한 바위산이다. 이 도시는 지형 덕분에 방어하기 쉬운 곳이었는데,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이곳에 머물면서 더욱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65] 제4차 십자군 이후에는 프랑크족, 베네치아인, 오스만 투르크의 요새로 사용되었다.아크로코린토스는 수원(水源)이 풍부하여 코린토스 지협을 장악하고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적이 진입하는 것을 막는 남부 그리스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했다.[65] 세 개의 성벽이 언덕을 둘러싸 방어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이후 기독교 교회로, 그 후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65] 1929년 미국 학교가 이곳에서 발굴을 시작했고, 현재 아크로코린토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중세 성 유적 중 하나이다.[65]
4. 2. 아폴론 신전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는 1896년부터 현재까지 코린토스 발굴 작업을 거의 중단 없이 진행해 왔다. 현대 고대 코린토스 마을이 고대 도시 바로 위에 위치하여 발굴이 제한되었지만, 연구소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아폴론 신전 주변 지역에 발굴을 집중했다. 아폴론 신전은 고대부터 유일하게 눈에 띄는 웅장한 기념물이었다.[66]버트 호지 힐, 칼 블레겐, 윌리엄 딘스무어 시니어, 오스카 브로니어, 리스 카펜터와 같은 고고학자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발굴했다.[66]
4. 3. 기타 유적
아테네 미국 고전 연구소의 코린토스 발굴은 1896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거의 중단 없이 진행되고 있다. 현대 고대 코린토스 마을이 고대 도시 바로 위에 위치하여 발굴이 제한된 상황에서, 기원전 6세기 중반 fi 주변 지역에 발굴이 집중되었다. 이 웅장한 신전은 고대부터 유일하게 눈에 띄는 유적이었다.[66] 버트 호지 힐, 칼 블레겐, 윌리엄 딘스무어 시니어, 오스카 브로니어, 리스 카펜터와 같은 고고학자들이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 지역의 많은 부분을 발굴했다. 이후 헨리 로빈슨(1959-1965), 찰스 K. 윌리엄스 2세(1965-1997), 가이 D. R. 샌더스(1997–현재) 소장들의 지도 아래 발굴을 통해 도시의 고고학적 역사가 밝혀졌다. 발굴 결과 초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6500-5750년)부터 근세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고학적 작업은 마을 중심지 밖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아크로코린토스 경사면에 위치한 데메테르와 코레 신전, 도공 지구, 아스클레피에이온 (Korintti)fi 유적지, 켄크레아 문 바실리카 등에서 진행되었다.[67] 현재의 발굴은 포럼 남동쪽에 위치한 파나이야 필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 고전 연구소와 관련된 발굴 및 프로젝트는 또한 코린토스 주변의 코라쿠, 켄크레아이, 이스티미아 정착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사했다.
5. 현대 도시 코린토스
1858년, 고대 코린토스 유적을 둘러싼 마을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고대 도시에서 북동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코린토스가 새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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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dotus relates that [[Arion]] the harpist was sailing home on a Corinthian vessel when the crew decided to rob and kill him. He begged them to let him sing a last song before killing him. He threw himself overboard and escaped to [[Cape Matapan|Taernarus]] on the back of a dolphin. He presented himself to [[Periander]], who then condemned the sailors (Herodotus ''Histories'' Book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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