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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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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벌어진 고대 그리스의 대규모 전쟁이다. 아테네의 성장과 스파르타의 불안감, 특히 델로스 동맹의 해상력 강화가 주요 원인이 되었다. 전쟁은 아르키다모스 전쟁, 니키아스 평화, 시칠리아 원정, 데켈레아 전쟁으로 진행되었으며,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의 황금기는 종식되었고, 그리스의 패권은 스파르타로 넘어갔지만, 이후 테베와 마케도니아에게 차례로 패권을 빼앗겼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등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통해 기록되었으며, 1996년 현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시장의 평화 조약 서명으로 종식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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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페로폰네소스 전쟁
영어 명칭Peloponnesian War
전쟁 기간
시작기원전 431년 4월 4일
종료기원전 404년 4월 25일
주요 지역
장소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칠리아
결과
결과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승리
영향델로스 동맹 해체
스파르타의 아테네 및 동맹국에 대한 패권 확립
교전 세력
교전국 1델로스 동맹 (아테네 주도)
교전국 2펠로폰네소스 동맹 (스파르타 주도)
지원 세력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제국)
지휘관 (델로스 동맹)
지휘관 1페리클레스 (기원전 429년 사망)
클레온 (전사)
니키아스 (처형)
알키비아데스 (배신 후 사망)
데모스테네스 (처형)
지휘관 (펠로폰네소스 동맹)
지휘관 2아르키다모스 2세
브라시다스 (전사)
뤼산드로스
알키비아데스 (망명 후 사망)
사상자
델로스 동맹최소 18,070명 전사, 민간인 사상자 수 불명
펠로폰네소스 동맹불명
주요 전투
주요 전투 목록쉬보타 해전
포티다이아 전투
스파르톨로스 전투
리온 전투
나우파크토스 전투
플라타이아이 공방전
미틸레네 반란
타나그라
아이톨리아 원정
올파이 전투
이도메네 전투
필로스 전투
스파크테리아 전투
메가라 전투
델리움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만티네이아
휘시아이 전투
오르네아이 전투
멜로스 공방전
시칠리아 원정
쉬메 전투
에레트리아 전투
퀴노세마 전투
아비도스 전투
퀴지코스 전투
노티움 전투
미틸레네
아르기누사이 해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관련 정보
관련 전쟁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대 그리스의 전쟁
페르시아 전쟁

2. 원인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스파르타는 내심 불만을 가지며 위기가 고조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토스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토스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부딪히게 된다.[8]

투키디데스는 전쟁 이전 상황을 "아테네의 권력 성장과 이로 인해 라케다이몬에 갖게 된 우려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라고 요약했다.[9] 전쟁 이전 약 50년 동안 아테네는 지중해 세계의 주요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테네 제국은 처음에는 델로스 동맹이라 불리는 소규모 도시 국가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끝내고자 델로스 섬에서 연합을 맺었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 제2차 페르시아 침략을 물리친 후, 아테네는 에게 해와 이오니아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공격하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계속한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을 이끌었다. 그 결과 투키디데스가 펜테콘타에티아라고 부른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 시대에 아테네는 제국으로 점점 더 성장했고,[10] 페르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전쟁을 수행하며 다른 도시 국가들을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지배하게 되어 현재 아테네 제국이라 불리는 시대를 열었다. 중세기가 되자 페르시아는 에게 해에서 쫓겨났고 아테네에 광대한 영토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아테네는 자체적인 힘을 크게 증가시켰고,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많은 동맹국들이 한 세기 동안 델로스 동맹의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 조공은 강력한 함대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고, 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테네의 대규모 공공 사업에 사용되어 불만을 야기했다.[11]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한 펠로폰네소스 지역 국가들 간의 마찰은 펜테콘타에티아 초기에 시작되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에서 철수한 후, 스파르타는 사절을 보내 아테네에 성벽을 재건하지 말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성벽이 없다면 아테네는 육지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스파르타의 통제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12]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당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비밀리에 분개했다"고 한다.[13] 스파르타에서 헤롯 반란이 일어난 기원전 465년에 국가 간의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포함한 모든 동맹국에게 반란 진압을 위한 병력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상당한 병력(4,000명의 호플리테스)을 파병했지만, 도착하자 스파르타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다른 모든 동맹국의 병력은 남게 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편을 바꿔 헤롯을 지원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 불쾌감을 느낀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했다.[14] 반란을 일으킨 헤롯들이 마침내 항복하고 국가를 떠나는 것을 허락받자, 아테네는 그들을 코린트 만의 전략적 요충지인 나우팍토스에 정착시켰다.[15]

기원전 459년에는 아테네의 이웃 국가인 스파르타 동맹국 메가라와 코린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이 전쟁을 이용하여 메가라와 동맹을 맺어 코린트 지협에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일반적으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알려진 15년간의 전쟁이 이어졌고, 아테네는 스파르타, 코린트, 아이기나 및 여러 다른 국가와 간헐적으로 싸웠다. 이 갈등 기간 동안 아테네는 메가라뿐만 아니라 보이오티아도 통제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대규모 스파르타군의 아티카 침공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본토에서 얻은 땅을 할양해야 했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의 동맹 시스템을 통제할 권리를 상호 인정했다.[16] 이 전쟁은 기원전 446/5년 겨울에 체결된 30년 평화로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기원전 435년, 코린토스인이 건설한 그리스 북서부의 식민 도시 케르퀴라(당시 이미 코린토스와 분리)를 모시는 식민 도시 에피담노스는 계속되는 내분과 주변 민족과의 항쟁으로 피폐해졌다. 에피담노스는 내부의 중재와 군사 지원을 모시는 도시 케르퀴라에 요청했지만, 케르퀴라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궁핍해진 에피담노스는 코린토스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답한 코린토스는 수비병과 행정관을 파견하여 식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케르퀴라인은 에피담노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각지의 코린토스 식민 도시를 약탈했다.

보복의 기회를 노리는 코린토스의 군비 증강을 우려한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했고, 기원전 432년 이를 곧 일어날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을 위한 전력 증강의 호기로 본 아테네가 응답하여 원군을 보내 전투가 벌어졌다(쉬보타 해전). 이듬해, 그리스 북부에 있는 코린토스인의 식민 도시 포티다이아가 아테네의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델로스 동맹 탈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보호와 가입을 요청하자, 아테네가 군대를 파견하여 포위 공격했고, 일부 코린토스인이 개인적으로 구원했다(포티다이아 전투).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대립하게 된다.

이 무렵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패자로서 에게 해에 패권을 확립하고, 속국과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자치 독립을 중시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의 호전적인 확장 정책이 전 그리스 세계에 미칠 상황을 우려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흥성하는 패권주의 세력과 기존의 자치 독립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폴리스 간의 권익과 이해 다툼과 결합된 결과, "델로스 동맹 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는 대리 전쟁적 구도가 만들어졌고, 기원전 432년 펠로폰네소스 동맹 회의는 아테네 군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에 대한 약탈과 침략을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아테네와의 개전을 결의했다.

3. 과정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에피담노스 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피담노스는 이오니오스 만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시로, 케르퀴라의 식민시였지만 건설자는 코린토스인 팔리오스였고, 초기 정착민 중 일부는 코린토스인이었다. 코린토스인들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시로 여겼고, 에피담노스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민중파와 귀족 간의 분쟁이 발생해 민중파가 귀족을 추방했다. 추방된 귀족들은 에피담노스 주변의 비(非)헬라스인들과 연대했다.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델포이 신탁을 명분으로 코린토스에 도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코린토스는 케르퀴라와의 갈등을 이유로 이를 수용하여 군대를 파병했다.[51]

양국은 에피담노스를 두고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충돌했다. 코린토스는 75척의 선단에 2000명의 중무장보병을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케르퀴라는 80척의 선단으로 맞서 악티온 곶에서 해전을 벌였다. 케르퀴라는 이 해전에서 승리하여 15척의 코린토스 선박을 파괴하고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장악하여 코린토스의 식민시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했다. 1년간 대치하던 중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시작하자,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했고, 코린토스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52]

아테네는 두 번의 민회 끝에 케르퀴라가 침공당할 시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고, 1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이후 코린토스와 동맹국은 150척의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하여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코린토스가 우세했지만, 아테네 함대(10척+증원군 10척)가 개입하면서 코린토스는 후퇴했다. 코린토스는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 이유를 물었고, 아테네는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을 설명했다. 코린토스는 아테네와의 전쟁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퇴각했고, 해전은 승패 없이 끝났다.[53]

초기에는 해군 경험이 풍부한 아테네가 유리했다. 스파르타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했고, 아테네는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 해안을 습격했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아테네 해군이 큰 피해를 입어 양측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양측은 휴전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델로스 동맹 국가 간 분열이 계속되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 측에 휴전을 제안하며 재공격 기회를 노렸다. 결국 펠로폰네소스에서 양측의 충돌로 니키아스 평화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시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군 지도자로 추천되었으나, 정적들의 모함으로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의 군사 정보를 넘겨주었다. 이는 아테네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고, 원정군 전체가 궤멸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고 흑해 차단에 나섰다.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 국가들의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404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켜 해상권을 빼앗았고, 이듬해 아테네는 항복했다. 스파르타는 도시 성벽 파괴를 강요했고, 아테네는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아테네를 둘러싼 성벽


투키디데스암피폴리스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가했다가 패배하여 20년간 추방당했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 지역에 체류하며 양측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전쟁에 일병으로 참전하여 데리온 전투에서 분전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알키비아데스크리티아스 등이 전쟁과 혼란의 원인이 된 것으로 인해 민중의 반발을 사, 후일 사형의 원인이 되었다.

3. 1. 아르키다모스 전쟁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기원전 431년-기원전 421년)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의 이름을 따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31년 4월 4일, 테베군이 아테네의 플라타이아 전초기지를 최초로 공격했다.[26]

페리클레스 흉상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코린토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육군이 강했고, 특히 스파르타 군은 매우 강력했다. 반면 아테네 제국은 아티카 반도를 중심으로 에게 해의 여러 섬에 걸쳐 있었고, 섬들로부터 받는 조공으로 부를 쌓았다.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을 통해 제국을 유지했다. 따라서 양측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기 어려웠다.

스파르타의 전략은 아테네 주변의 땅을 침략하는 것이었다. 이 침략으로 아테네인들은 농지를 잃었지만, 바다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많은 아티카 시민들은 농장을 버리고 아테네와 항구인 피라이에우스를 연결하는 장성 안으로 피신했다. 전쟁 첫 해가 끝날 무렵, 페리클레스는 유명한 장례 연설을 했다.

스파르타군은 한 번에 3주 정도만 아티카를 점령했다. 당시 병사들은 수확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헬로트라고 불리는 스파르타 노예들을 오랫동안 통제하지 않으면 반란의 위험이 있었다. 기원전 430년 가장 긴 스파르타의 침공도 40일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전략은 스트라테고스페리클레스가 주도했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훨씬 더 강력한 스파르타 군대와의 전투를 피하고 해군에 의존할 것을 조언했다. 아테네 함대는 나우팍토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등 해상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기원전 430년, 역병이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역병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를 휩쓸었고, 결국 아테네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페리클레스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3만 명이 넘는 시민, 선원, 병사들이 사망했다.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사망했다. 아테네의 인력은 크게 감소했고, 외국 용병들조차 역병이 도는 도시에 오기를 꺼렸다. 역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자 스파르타는 아티카 침공을 중단했다.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인들은 그의 방어적인 전략에서 벗어나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게 더 공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인물은 클레온이었는데,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강경파 지도자였다. 데모스테네스 장군의 지휘 아래, 아테네인들은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해상 공격을 계속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테네는 군사 활동을 보이오티아와 아이토리아로 확장하고, 미틸레네 반란을 진압하고, 펠로폰네소스 주변에 요새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 요새 중 하나는 스파크테리아 섬의 피로스 근처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첫 번째 전쟁이 아테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피로스의 요새는 헬로트 도망자들을 끌어들였다. 또한, 아테네인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에 고무된 헬로트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은 스파르타인들이 그 요새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기원전 425년 피로스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을 제압하고 스파르타 병사들을 스파크테리아에 가두었다. 그러나 몇 주 후 그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대신, 클레온은 자신이 그 일을 끝낼 수 있다고 의회에서 자랑했고, 스파크테리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테네군에 포위된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항복했다. 스파르타의 무적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아테네인들은 스파크테리아 인질들을 아테네에 감금하고, 스파르타 군이 다시 아티카를 침략하면 포로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들 이후,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는 동맹군과 헬로트로 군대를 모아 그리스 전역을 아테네 식민지인 트라키아의 암피폴리스까지 행군했다. 암피폴리스는 아테네 전쟁 자금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인근 은광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투키디데스가 이끄는 부대가 파견되었지만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투키디데스는 이 때문에 추방되었고, 이 경험을 통해 전쟁 양측과의 대화를 통해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은 모두 암피폴리스를 탈환하려는 아테네의 노력에서 사망했다(암피폴리스 전투 참조).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브라시다스가 점령한 도시를 인질과 교환하기로 합의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다음은 아르키다모스 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주요 전투들이다.

연도전투결과
기원전 433년시보타 해전코린토스의 승리
기원전 432년포티다이아 전투아테네의 승리
기원전 429년스파르톨로스 전투칼키디키 동맹의 승리
기원전 429년나우팍토스 해전, 리온 해전아테네의 승리
기원전 426년타나그라 전투 (기원전 426년), 아이톨리아 원정, 올파이 전투, 이도메네 전투아테네 및 동맹국의 승리
기원전 425년피로스 전투, 스파크테리아 전투아테네의 승리
기원전 424년메가라 전투 (기원전 424년), 데리온 전투보이오티아의 승리
기원전 422년암피폴리스 전투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의 승리, 양군 지휘관 클레온, 브라시다스 전사


3. 2. 니키아스 평화조약 (기원전 421년 ~ 기원전 415년)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으면서, 양국 모두 호전적인 인물들을 잃게 되어 니키아스의 평화는 6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안팎에서는 끊임없는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스파르타는 직접적인 행동을 삼갔지만, 그들의 동맹국 중 일부는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의 강력한 국가이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해 온 아르고스의 지원을 받았다. 아테네의 지원을 받은 아르고스인들은 만티네이아엘리스를 포함하여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여러 민주 국가들의 연합을 결성했다. 초기 스파르타의 연합 분열 시도는 실패했고, 스파르타 왕 아기스의 지도력은 의문에 휩싸였다. 기세가 오른 아르고스인들과 그들의 동맹국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지휘하에 소규모 아테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스파르타 근처 도시 테게아를 장악하려 했다.[53]

만티네이아 전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지상 전투였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이웃 테게아인들과 함께 아르고스, 아테네, 만티네이아, 아르카디아의 연합군과 맞섰다. 전투에서 연합군은 초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이는 스파르타 정예 부대가 그들을 패배시킬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의 도시는 전략적 패배의 위기에서 구출되었다. 민주 동맹은 해체되었고, 대부분의 회원국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재편입되었다.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스파르타는 완전한 패배의 위기에서 벗어나 펠로폰네소스 전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재확립했다.

평화를 원하는 아테네 장군 니키아스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원하는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주도하에 이듬해 기원전 421년에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에 평화가 성립되었다(니키아스의 평화).[53] 그러나 양국 모두 결정된 영토 반환 사항을 지키지 않아 니키아스의 평화가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3. 3. 시칠리아 원정 (기원전 415년 ~ 기원전 413년)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의 주도로 시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스파르타로 망명하였고,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53]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며 큰 타격을 입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17년째,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인 시라쿠사이가 시칠리아의 아테네 동맹국 중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시라쿠사 사람들은 민족적으로 도리아인(스파르타인들과 마찬가지)이었고, 아테네인들과 그들의 시칠리아 동맹국은 이오니아인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동맹국을 도울 의무감을 느꼈다. 또한,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에 고무되어 시칠리아 전체를 정복한다는 야망을 품었다. 시라쿠사는 아테네보다 규모가 크게 작지 않았고, 시칠리아 전체를 정복하면 아테네는 막대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출발 준비 마지막 단계에서 아테네의 헤르마이(종교적 조각상)가 알 수 없는 자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종교적 범죄 혐의를 받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에 나서기 전에 자신을 변호할 수 있도록 즉시 재판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를 재판 없이 원정에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후, 알키비아데스는 재판을 받기 위해 아테네로 소환되었다.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였고, 니키아스가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망명 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아테네인들이 시칠리아를 이탈리아와 카르타고 정복의 발판으로 사용할 계획이며, 이러한 새로운 정복으로 얻은 자원과 병력을 사용하여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할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군은 100척이 넘는 함선과 약 5,000명의 보병 및 경장병으로 구성되었다. 기병은 약 30마리의 말로 제한되었는데, 이는 시라쿠사의 대규모이고 훈련이 잘 된 기병대에 비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몇몇 도시들이 즉시 아테네 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공격 대신 시간을 끌었고, 기원전 415년의 전투 시즌은 시라쿠사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끝났다. 겨울이 다가오자 아테네인들은 막사로 철수하여 겨울 동안 동맹국을 모았다.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고, 스파르타는 그들의 장군 길리푸스를 지원군과 함께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도착한 길리푸스는 여러 시칠리아 도시에서 병력을 모아 시라쿠사를 구원했다. 그는 시라쿠사 군대의 지휘권을 잡고 일련의 전투에서 아테네군을 패퇴시켜 도시 침략을 막았다.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소식을 보냈다. 데모스테네스가 선출되어 또 다른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와서 니키아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더 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다시 시라쿠사와 그 동맹국이 아테네군을 물리쳤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로 후퇴할 것을 주장했지만, 니키아스는 처음에는 거부했다. 추가적인 패배 후, 니키아스는 후퇴에 동의하는 듯했으나, 월식이라는 불길한 징조로 인해 철수가 지연되었다. 이 지연은 큰 손실을 가져왔고 아테네인들은 시라쿠사 대항만에서 대규모 해전을 치르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완전히 패배했다.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내륙으로 진격하여 우호적인 동맹국을 찾았다. 시라쿠사 기병대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추격하여 결국 강력했던 아테네 함대의 나머지 병력을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시라쿠사에서 아테네 군대의 궤멸

3. 4. 데켈레아 전쟁 (기원전 413년 ~ 기원전 404년)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스파르타는 아테네 근처 데켈레아를 요새화하여 아테네를 압박했다. 데켈레아 요새화로 아테네는 육로 보급이 차단되고 모든 보급품을 비싼 해상 운송에 의존해야 했다. 또한, 인근 은광이 파괴되고, 데켈레아의 스파르타 중장보병에 의해 2만 명에 달하는 아테네 노예들이 해방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25] 재정 악화로 아테네는 속국 동맹국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했고, 이는 제국 내 긴장과 반란 위협을 고조시켰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하며 흑해 차단에 나서 아테네를 더욱 압박했다. 아테네는 에게 해와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는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아테네는 몇 차례 해전에서 승리하며 저항했다. 기원전 411년 시메 전투에서는 무승부를, 키노스세마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기원전 410년 아뷔도스 전투와 키지쿠스 해전에서도 승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 함대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뤼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는 식량 조달을 위해 상륙해 휴식 중이던 아테네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해전으로 흑해 방면의 제해권을 장악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식량 공급로를 차단했다. 이듬해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포위 끝에 스파르타에 항복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종결되었다.[25]

4. 결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다.[54] 스파르타는 테바이에 패배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배자 지위는 잃었지만, 유력한 폴리스로서 계속 존재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지역 지배에 저항하는 스파르타에 대항하여, 아테네나 테베, 후에는 코린토스 등 스파르타와 적대하는 폴리스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였고, 여러 폴리스들이 연합을 반복하며 스파르타에 대항했다(예를 들어 코린토스 전쟁, 왕의 평화).[54] 기원전 379년에 이르러 스파르타가 그리스와 에게 해에서 패권을 잡았지만, 해상 무역이 가져온 부가 시민들 사이에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주로 소작농으로 구성된 병역을 담당하는 자유 시민이 700명 정도로 감소했기 때문에, 질박하고 강건함을 목표로 하는 리쿠르고스 제도(Λυκούργος|Lycurgusgrc)는 타격을 받았다.

5. 영향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결과 델로스 동맹은 해체되었고,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이 붕괴되고 스파르타 지배하에 삼십인 정권이 들어서 공포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9개월 후 트라쉬불로스가 이끄는 민주정파 세력이 삼십인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을 회복시켰다.

민주정 회복 후,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의 원인으로 알키비아데스와 삼십인 정권 지도자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아리스토파네스 등에 의해 고발당해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47]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지배자 지위는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폴리스로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를 지배하려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테네, 테바이, 코린토스 등 스파르타의 적대적인 폴리스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여러 폴리스들이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에 대항했다. (예: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기원전 379년, 스파르타가 그리스와 에게 해 패권을 장악했지만, 해상 교역으로 인한 부가 시민들 사이에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주로 자작농으로 구성된 병역 의무를 지는 자유민이 700명 정도까지 감소하면서 리쿠르고스 제도는 타격을 받았다.

기원전 357년 테바이와 아테네 사이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고, 기원전 356년에는 테바이를 중심으로 하는 암피크티온 동맹과 포키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 사이에 제3차 신성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355년 동맹시 전쟁은 동맹 도시들의 승리로 끝났고, 제2차 해상 동맹은 붕괴되었다. 기원전 346년 제3차 신성 전쟁도 암피크티온 동맹이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사망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고향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스승이 된 것도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테바이 연합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배하면서 마케도니아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이로써 그리스 세계는 마케도니아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96년 3월 12일, 현대 아테네스파르타 시장들은 상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오랜 전쟁의 종식을 기념했다.[46]

5. 1. 주요 인물


  • 아르키다모스 2세: 스파르타의 왕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했다.
  • 페리클레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아테네 시민들을 성벽 안으로 대피시키는 고성(籠城) 전략을 제안했다.
  • 칼리크라티다스: 스파르타의 장군으로,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이끌었다.
  • 리산드로스: 스파르타의 장군으로, 해군 전략에 능숙했으며,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뛰어난 외교관으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시칠리아 원정을 주도했으나, 이후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아테네로 복귀하여 활약했다. 기원전 404년, 리산드로스의 사주를 받은 페르시아 군인들에게 암살당했다.[38][39][40][41]
  • 코논: 아테네의 ''스트라테고스''(장군)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패배 후 키프로스로 피신했다.
  • 클레온: 아테네의 호전적인 지도자로, 스파크테리아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 브라시다스: 스파르타의 장군으로, 트라키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클레온과 함께 전사했다.
  • 트라슈불로스: 아테네의 장군으로, 스파르타의 삼십인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을 회복시켰다.
  • 크리티아스: 삼십인정권의 지도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나, 공포정치를 펼치다 트라슈불로스에게 제거되었다.
  • 소크라테스: 아테네의 철학자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으나, 그의 제자들이 전쟁과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47]
  • 파르나바조스 2세: 페르시아의 총독으로 알키비아데스의 암살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38][39][40][41]
  • 아뉴토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아테네의 정치가.
  • 투키디데스: 아테네의 역사가이자 장군으로,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 후 추방되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6. 역사적 사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주요 역사적 사료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기록을 시작했으며, 직접 목격한 사건과 증언을 바탕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이자 전쟁 초기 참전 군인이었던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23년에 망명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를 기록했다. 학자들은 투키디데스를 대체로 신뢰할 만하고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한다.[7] 다만, 그가 기록한 긴 연설들은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제시된 주장에 대한 그의 해석임을 인정한다. 투키디데스의 저술은 미완성으로, 전쟁이 끝나기 7년 전인 기원전 411년에 갑자기 끝난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동시대 인물인 크세노폰이 『헬레니카』 제1권에서 이어받았다. 크세노폰은 투키디데스의 마지막 문장에 바로 이어 전쟁의 결말과 그 이후의 역사를 기록했다. 아테네 출신인 크세노폰은 용병으로 군 생활을 했으며, 페르시아 제국과 스파르타를 위해 싸웠다. 이로 인해 아테네에서 추방된 그는 스파르타로 은퇴하여 전쟁이 끝난 지 약 40년 후에 『헬레니카』를 저술했다. 그의 기록은 대체로 스파르타에 우호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7]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 12권과 13권에서 전쟁 전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제공한다. 기원전 1세기에 쓰여진 이 책은 전쟁 후 한 세기에 에포로스가 쓴 통사(현재는 소실됨)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전쟁의 주요 지휘관 4명(페리클레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리산드로스)의 전기를 다루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들의 성격과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전쟁 진행에 대한 세부 사항도 제공한다. 1세기경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은 현재 소실된 이전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금석학고고학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제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세기에 발굴된 암피폴리스 성벽과 브라시다스 무덤 등이 그 예이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에렉테이온 신전과 헤게소의 묘비 같은 건물과 예술 작품도 남아 있다. 이것들은 군사 활동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전쟁 중 시민 생활을 반영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특히 『평화』와 『리시스트라타』)은 전쟁 중에 쓰여졌고 배경으로 설정되었지만, 역사적 가치는 거의 없는 희극 소설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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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hucydides and the Peloponnesian War https://academic.mu.[...] 2023-07-31
[3] 웹사이트 What History's Biggest Wars Teach Us About Leading in Peace http://hbswk.hbs.edu[...] 2021-02-24
[4]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5] 서적 The Ancient Greeks
[6]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7] 학술지 Review of: Xenophon and Sparta https://bmcr.brynmaw[...]
[8]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9] 서적 The Ancient Gr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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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20] 서적 The Ancient Greeks
[21] 서적 Aspects of Greek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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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https://www.perseus.[...]
[24]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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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백과사전 Peloponnesian War, The https://archive.org/[...] Encyclopædia Britannica 1929
[27]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8] 웹사이트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s://en.wikisourc[...]
[29] 서적 The Ancient History of the Egyptians, Carthaginians, Assyrians, Babylonians, Medes and Persians, Grecians, and Macedonians https://archive.org/[...] W. Tegg and Company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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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Numismatic Problems in the Achaemenid West: The Undue Modern Influence of 'Tissapherness' https://brill.com/vi[...] 2002
[33] 백과사전 Peloponnesian War EB1911
[34] 서적 Hellenica https://web.archive.[...]
[35] 서적 Anabasis http://www.gutenberg[...] Project Gutenberg
[36] 웹사이트 Lysander http://www.gutenberg[...] 1996
[37] 서적 Xenophon https://archive.org/[...]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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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적 Harper's Dictionary of Classical Antiquities https://www.perseus.[...]
[40] 서적 New Classical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41] 웹사이트 Alcibiades https://www.perseus.[...]
[42] 서적 Hellenica
[43] 서적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0
[44] 뉴스 Athens, Sparta sign peace pact https://www.upi.com/[...] 1996-03-12
[45] 서적 ヨーロッパがわかる 起源から統合への道のり 岩波書店 2013
[46] 뉴스 Athens, Sparta sign peace pact https://www.upi.com/[...] 2024-12-25
[47] 문서 크리티아스의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기록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48]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49] 서적 The Ancient Greeks
[50]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51]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2]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3] 서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4] 서적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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