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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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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전기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번영했으며, 페르시아 전쟁, 델로스 동맹,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으며 폴리스 간의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발전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하면서 아테네의 패권은 쇠퇴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스파르타와 테베의 패권 다툼이 있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함께 고전 시대는 헬레니즘 시대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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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 그리스
개요
시기기원전 510년 ~ 기원전 323년
이전 시대그리스 고졸기
다음 시대헬레니즘 시대
역사
주요 사건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정치
주요 국가아테나이
스파르타
테바이
코린토스
마케도니아 왕국
정치 체제다양한 폴리스 체제 (민주정, 과두정, 군주정 등)
사회
주요 계층시민, 외국인, 노예
문화고대 그리스 문화
군사
주요 전쟁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주요 인물레오니다스 1세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알키비아데스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문화 및 예술
철학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문학호메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아리스토파네스
건축파르테논 신전
조각미론, 폴리클레이토스, 프락시텔레스, 리스িপ포스
기타
영향서양 문명의 토대 형성

2. 기원전 5세기

기원전 5세기에 건설이 시작된 파르테논


기원전 5세기는 아테네가 다른 고대 그리스 국가들보다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구된다. 이 시기 아테네 문화는 기원전 6세기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기원전 508년, 마지막 아테네 참주가 몰락하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기원전 500년 이오니아 반란은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의 침공을 유발했다.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 패배했다. 기원전 481–479년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침공이 있었으나,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 이후 그리스 대부분(코린트 지협 북쪽)을 유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2][3]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헤게모니를 강화했다. 아테네의 성공은 동맹 도시들의 반란을 야기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성장은 스파르타를 자극하여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짧은 평화 후 스파르타에게 유리하게 재개되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내부 혼란을 겪으며 기원전 5세기가 막을 내렸다.

스파르타는 과두정치 체제로, 아기아스 왕조와 유리폰티드 왕조 출신의 두 왕이 동시에 통치했다. 이들은 헤라클레스의 쌍둥이 후손인 유리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2. 1.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과 지연 중심의 사회 구조를 개혁하여 아테나이의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고자 했다.[4]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마련했다. 노예, 외국인, 여성을 제외한 모든 구민을 등록하고, 핏줄, 재산, 직업에 관계없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했다. 아티케를 3개의 지역 집단으로 나누고, 각 집단 내 행정구를 묶어 10개의 중간 행정 구역을 조직했다. 각 지역 집단에서 1개의 중간 행정 구역, 즉 3개의 중간 행정 구역을 선택하여 하나의 행정 부족을 구성했다. 그 결과 아테나이는 총 10개의 행정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20세 이상 성년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는 500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했다. 사법권은 500인회와 같은 방식으로 선출되는 시민 법원이 가졌다. 귀족 정치의 유산인 집정관과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는 존속했지만, 집정관은 보수가 없어 상위 두 계층에서 선출되었고 권한은 점차 축소되었다. 도편 추방 제도는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편(도자기 파편)에 적어 6000개 이상이면 해당 인물을 아테나이에서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치를 보완하는 제도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도시의 행정 구역을 재구성하여 혼합된 정치 집단을 만들었다. 이는 바다, 도시, 농업 등 지역적 이익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지리적 위치에 따라 결정(예: 전쟁 선포)되도록 했다. 도시 영토는 30개의 트리티에스로 나뉘었다.

  • 해안 지역(παρᾰλία|paraliagrc) 10개 트리티에스
  • 도시 중심부(ἄστυ|astugrc) 10개 트리티에스
  • 농촌 내륙 지역(μεσογεία|mesogiagrc) 10개 트리티에스


각 부족은 세 그룹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세 개의 트리티에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각 부족은 항상 세 부문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2. 2.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초기 단계 지도 (기원전 500–479년)


폴리스들은 서로 반목했기 때문에 소아시아의 강대국 뤼디아가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노렸으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참주 지배하의 이오니아 식민시들의 반란으로 본토 진출을 주춤하였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전투에 쳐들어왔다. 아테네와 적대적인 테바이와 같은 폴리스들은 이를 이용하려 하였고, 스파르타는 구원병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선전으로 아테네는 승리하게 된다. 가죽 갑옷 등이 등장하고 가벼운 헬멧의 사용으로 농촌이나 도시의 중산층에서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마라톤의 승리에서는 '달리는 중장보병'의 역할이 컸다.[2]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시 침입하였다. 적과 내통하는 자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도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는 대승을 거둔다. 다음 해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이간시키고 재차 아티케를 점령하여 아테네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에 스파르타도 많은 구원병을 파견하고 각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 페르시아를 대파함으로써 그리스는 승리를 얻게 된다.[3]

페르시아 전쟁은 동방의 전제정치에 대한 폴리스의 자유적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의 승리는 유럽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벌했다. 그는 승리하여 트라키아를 다시 복속시키고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지만,[5] 부상을 입고 소아시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마르도니우스와 함께 원정에 참여한 약 1,200척의 함대는 아토스 산 해안에서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장군 아르타페르네스다티스는 에게해 섬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대왕은 이오니아 도시들을 진압한 후, 그리스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페르시아 함대를 보냈다. 그들은 아테네를 점령하기 위해 아티카에 상륙했지만,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9,000명의 아테네 중장보병과 1,000명의 플라타이아 병사들로 구성된 그리스 군대에 의해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테네로 계속 진격했지만, 도시가 수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공격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의 후계자 크세르크세스 1세는 300,000명의 병력을 육로로, 그리고 1,207척의 함대를 지원하여, 헬레스폰트에 건설된 이중 부교를 건너 보냈다. 이 군대는 트라키아를 점령한 후 테살리아와 보이오티아로 진격했고, 페르시아 해군은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지상군을 지원했다. 한편,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미시온 곶을 막기 위해 돌진했다. 스파르타의 아기아스 왕조 왕인 레오니다스 1세에 의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지연된 후,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로 진격하여 아테네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그 후의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에우보이아를 점령하는 결과를 낳았고, 코린토스 지협 북쪽의 그리스 본토 대부분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2][3]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테르모필레 전투 전에 바다를 통해 아테네를 대피시켰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하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기원전 483년, 두 차례의 페르시아 침략 사이의 평화로운 기간 동안, 아테네 근처의 작은 산맥인 라우리온에서 은광맥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채굴된 수백 탈렌트의 은은 아이기나의 해적 행위에 맞서 싸우기 위해 200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1년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 후 그리스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다시는 침략을 시도하지 않았다.

아테네 함대는 그 후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인들을 추격하여 미칼레 해전에서 그들의 함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그리고 기원전 478년에 함대는 비잔티움을 점령했다. 그 당시 아테네는 모든 섬나라와 일부 본토 국가들을 델로스 동맹이라는 동맹에 가입시켰는데, 그 재무부가 델로스의 신성한 섬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스파르타는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후 고립을 선택하여 아테네가 확고한 해상 및 상업적 권력을 확립하도록 했다.

2. 3. 아테나이의 패권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나이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해상 제국을 건설하고, 경제적 번영과 함께 민주정치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점차 아테네 중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는 다른 폴리스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동방의 전제국가로 건재하였으며, 그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를 맹주로 하는 해상 동맹인 델로스 동맹이 탄생하였다.

규약에 의하면 동맹시는 일정한 병력과 함선을 제공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자금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자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나이는 동맹시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제국의 길을 택하였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아테나이 내부의 사회,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동맹을 해체하고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해상동맹의 공납금과 해상무역에서 아테나이의 패권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아테나이 경제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단결된 전선을 펼쳐야 할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기원전 481년,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또 다른 침략의 위험에 맞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려는 일련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7] 첫 번째 회의에서 결성된 연합은 "헬라스 동맹"으로 명명되었으며, 스파르타도 포함되었다. 크세르크세스 치하의 페르시아는 기원전 481년 9월에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아테네 해군은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480년에는 페르시아 육군이 300명의 스파르타인, 400명의 테베인, 그리고 보이오티아 테스피아이에서 온 700명의 소규모 병력에 의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지연되었다.[8] 페르시아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기원전 479년에 그리스를 떠났다.[9]

플라타이아 전투는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의 마지막 전투였다. 이 이후로 페르시아는 다시는 그리스를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헬라스 동맹의 단결된 전선에 균열이 나타났다.[10] 기원전 477년,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도시 국가 연합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연합은 델로스의 성지에서 만나 그들의 관계를 공식화했다.[11] 그리하여, 동맹은 "델로스 동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공식적인 목적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12] 그러나 델로스 동맹이 실제로 에게 해 전역에서 아테네의 헤게모니를 위한 전선이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13]

2. 4. 아테나이의 민주 정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기초가 마련된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더욱 발달하였다. 에피알테스는 귀족 회의인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후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57~429년경)에 아테네 민주정치는 완성된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민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500인회의 권한은 민회에 제출할 의안을 준비하고 민회 결정을 집행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반면 10명의 장군들의 권한은 확대되어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완전히 눌렀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나이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 거듭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수당제가 확대되고 국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한정하는 법을 만들었다. 철저한 추첨제와 1년 임기제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했다. 민회의 권한 강화는 시민 누구나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했다. 비록 많은 수가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평등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을 경우 혼란에 빠지고, 이른바 중우정치로 타락할 위험성도 있었다.

2. 5.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단순히 두 도시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니라,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전쟁이었다.[6]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은 외부의 페르시아 위협이 줄어들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이 연합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알려져 있지만, 헬라스 동맹이나 델로스 동맹과는 달리 외부 위협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다. 이 동맹은 스파르타의 안전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14]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잘못된 명칭으로, "동맹"이라 부르기 어렵고 회원 대부분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에 있었다.[14] "스파르타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현대 용어이며, 당시에는 "라케다이몬인과 그 동맹국"으로 불렸다.[14]

이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와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7세기에 아르고스는 반도를 지배했고, 기원전 6세기 초에도 반도 북동부를 통제하려 했다. 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가 부상하면서 아르고스와 갈등을 겪었으나, 기원전 550년 테게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546년 아르고스를 격파하며 스파르타의 지배력이 확장되었다.

두 동맹의 상반된 이해관계는 계속 충돌했다. 기원전 476년부터 427년까지 스파르타의 에우리폰티드 왕 아르키다무스 2세의 영향으로,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아테네와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기원전 445년 겨울에 발효되었다.[15] 이 조약으로 그리스는 두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었고,[16]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나, 전쟁은 불가피했다.[17]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마다 다르지만, 투키디데스플루타르코스는 세 가지 원인을 비교적 일관되게 언급한다. 기원전 435년, 코린토스와 그 식민 도시 코르키라(오늘날의 코르푸)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20] 스파르타는 중재를 통한 해결을 촉구했다.[21] 기원전 433년, 코르키라는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했고, 코르키라와의 우호 관계가 유용할 것이라 강조하며 해군 지원을 약속했다.[22] 아테네는 코르키라와 방어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32년, 코린토스와 아테네는 포티다이아(오늘날의 네아 포티다이아 근처)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고, 아테네는 포티다이아를 포위했다.[23] 기원전 434–433년 아테네는 메가라 칙령을 발표해 메가라 사람들에게 경제 제재를 가했다.[24]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가 30년 평화 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선전 포고를 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것들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리스 문제에 대한 아테네의 지배에 대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의 반감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은 27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아테네(해상 강국)와 스파르타(육상 군사 강국)가 서로를 제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초기 전략은 아티카 침공이었지만, 아테네인들은 성벽 뒤로 물러섰다. 역병으로 페리클레스를 포함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테네 함대는 펠로폰네소스에 병력을 상륙시켜 나우팍투스 (기원전 429년)와 필로스 (기원전 425년)에서 승리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다. 몇 년 후, 니키아스는 니키아스 평화 조약 (기원전 421년)을 체결했다.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동맹국 아르고스의 갈등으로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가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다.[25]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동맹군을 격파했다.

아테네는 멜로스 섬 원정을 통해 델로스 동맹 가입을 강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시라쿠사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으나, 시칠리아 원정은 완전히 실패했고, 원정군 전체가 궤멸되고 니키아스는 처형되었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의 고문이 되어 해군 건설을 조언했다. 뤼산드로스를 앞세운 스파르타는 헬레스폰토스를 점령해 아테네의 곡물 수입원을 차단했다.[35] 아테네는 아이 고스포타미 전투 (기원전 405년)에서 패배하고 함대를 잃어 파산 위기에 빠졌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평화를 간청했고, 스파르타는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했다. 아테네는 성벽, 함대, 해외 영토를 잃고, 30인 참주라 불리는 과두정이 통치하게 되었다.

3. 기원전 4세기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지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났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후원으로 아테나이에는 30인 참주 정치가 시행되었으나, 공포정치로 인해 반발이 일어나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제국들에게 과도한 공납금을 요구하고 소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이를 틈타 아테나이와 다른 제국들은 테바이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었다.

아테나이는 제2차 해상동맹을 결성하고 테바이와도 동맹을 맺었으나, 테바이의 급성장으로 동맹은 곧 깨졌다. 메세니아가 해방되고 스파르타는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테바이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테바이는 아테나이와 같은 재력이나 문명이 부족했고, 지도자가 전사하면서 곧 패권을 잃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나이, 테바이, 스파르타 간의 패권 다툼은 폴리스 상호 간의 대립과 분쟁을 격화시켜 그리스 정치 정세를 혼란에 빠뜨렸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는 발전하는 듯 보였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아테나이의 '올빼미 은화' 등 풍부한 화폐는 상업과 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는 자원이 부족하여 많은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했고, 인구 증가로 식량 수입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식민 도시와 외국의 농업 및 공업 발달로 해외 시장이 축소되면서 해상 무역이 위축되었고, 이는 실업자 증가와 빈민층 확대로 이어졌다. 폴리스 사회는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했고, 시민들은 공직과 군역을 기피하면서 용병 제도가 등장했다.

기원전 4세기 폴리스들은 본래의 시민 공동체라는 성격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고,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신흥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흡수된다.

트라세아스와 유안드리아의 무덤 조각 (아테네, 기원전 375–350년), 페르가몬 박물관(베를린)

3. 1. 스파르타와 테베의 패권 경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스파르타 전사들의 좁은 시야는 그들에게 이 역할에 적합하지 않았다.[37] 스파르타는 가혹한 통치와 공납금 요구로 다른 폴리스들의 반발을 샀다. 불과 몇 년 만에 아테네 등에서 민주정이 복구되었다. 기원전 395년, 스파르타는 해상 패권을 잃었고, 아테네, 아르고스, 테베, 코린토스는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섰으나, 이 전쟁은 기원전 387년에 뚜렷한 결론 없이 끝났다.

같은 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안탈키다스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이오니아와 키프로스의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넘겨주었다. 이는 100년간 페르시아를 상대로 거둔 그리스의 승리를 뒤집은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테베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고, 이는 테베가 아테네와 동맹을 맺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는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에서 스파르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스파르타의 지배는 끝나고 테베의 지배가 시작되었지만, 테베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고 아테네는 이전의 힘을 회복했다.[38] 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362년)에서 에파미논다스가 사망하면서 테베는 지도자를 잃었고, 후계자들은 포키스와의 전쟁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기원전 346년, 테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는 마케도니아가 처음으로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38]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여러 도시들이 패권을 차지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390년대에 주요 강국으로 재건되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05년에 스파르타는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세기말에는 자신의 도시조차 방어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는 범헬레니즘적 감정에 호소하여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성공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41] 그러나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지원하며 양측을 이용했다. 아게실라오스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기원전 394년 스파르타는 본토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42] 본토의 스파르타군은 코린트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았고, 할리아르투스 전투에서 테베군에게 패배했다.[43] 스파르타의 지도자 리산드로스는 전투 중 사망했다.[44] 이것이 코린토스 전쟁 (기원전 395-387년)의 시작이었다.[41]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394년)에서 아게실라오스는 테베군을 격파했지만, 전쟁이 게릴라전으로 바뀌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다.[45] 코린토스 전쟁은 안탈키다스의 평화로 종결되었고,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 평화 조약을 선포했다.

이 조약으로 보이오티아 동맹은 해체되었는데,[48] 이는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테베가 주도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테베를 점령했지만,[49] 378년 테베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스파르타 장군 스포드리아스가 피레아스를 공격하려다 실패하면서 아테네와 테베는 동맹을 맺었다.[50] 테베는 보이오티아 동맹을 재건하려 했고,[51] 테기라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52]

테베의 권위가 급성장하자 아테네는 테베를 불신하게 되었고, 제2차 아테네 동맹을 결성했다.[53] 테베가 포키스 문제에 간섭하고 플라타이아를 파괴하자,[54]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 군대는 스파르타 군대에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스파르타의 패권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테베의 패권으로 대체된 것은 아니었다.

테베는 이전에도 보이오티아 동맹을 통해 패권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5세기의 동맹은 11개 지구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구는 연방 치안 판사, 의회 의원, 중장 보병, 기병을 제공했다. 이 동맹은 11,000명의 보병과 1,100명의 기병, 소규모 함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왕의 평화 조약에 따라 보이오티아 동맹을 해산시켰다.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는 테베에 민주적 제도를 부여하고, 보이오타르크 칭호를 부활시켰다. 레욱트라 전투의 승리로 이들은 연맹 재건 목표를 달성했다. 에파미논다스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친 스파르타 과두 정치를 몰아내고 친 테베 민주주의를 세웠으며, 메세네 재건을 지원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주변에 작은 연맹들을 구성하여 아르카디아 연맹을 결성했다.

3. 2. 폴리스 사회의 변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 테바이, 스파르타 사이의 패권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주지 않고, 개별적인 폴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려는 분립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폴리스 상호간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어 그리스 정치 정세는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었다.[48]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는 계속 발전하는 듯 보였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고, 아테나이의 '올빼미 은화'와 각 폴리스의 풍부한 화폐는 상업과 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하지만 그리스는 자원이 부족하여 많은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했다. 기원전 5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식량 수입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식민 도시와 외국의 농업 및 공업 발달로 해외 시장이 축소되면서 해상 무역이 위축되었고, 이는 실업자 증가와 빈민층 확대로 이어졌다. 폴리스 사회는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했고, 시민들은 공직과 군역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용병 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48]

결국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폴리스는 본래의 시민 공동체라는 성격을 점차 잃어갔다.

3. 3. 마케도니아 왕국의 부상

필리포스 2세 (기원전 359–336년) 치하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은 파이오니아인,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의 영토로 확장되었다.[58] 필리포스 2세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그리스 폴리스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358년, 필리포스는 일리리아에 대한 원정에서 에피루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57년, 암피폴리스를 정복하면서 아테네와 직접적인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356년에는 피드나를 공격하여 정복했다.[59]

테살리아 기병, 기원전 4세기 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마케도니아 왕가의 전차병 벽화, 기원전 6세기 말, 베르기나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 2세의 팽창주의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59] 아테네는 "평화파"와 "전쟁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기원전 346년, 아테네와 필리포스 2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61]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352년 테르모필레에서 필리포스의 침공을 저지했지만, 필리포스는 크로커스 평원 전투에서 포키스인을 격파했다.

군사적으로 필리포스는 테베에서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가 사용했던 새로운 팔랑크스 전투 방식을 마케도니아 군대에 통합했다. 필리포스 2세는 테베의 군사 교관을 마케도니아로 데려와 미래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테베의 전투 방식을 가르쳤다.[63]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갈등은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62] 이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가 이끌던 마케도니아 군은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 세계를 통일했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56–323년)은 마케도니아의 펠라에서 태어났다. 필리포스 2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펠라로 데려와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쳤다.[64]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6년 암살당했고,[67]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69]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계획을 이어받아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려 했다. 테베를 정복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네를 방문하여 대중을 직접 만났고,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평화가 합의되었다.[71]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아시아로 진격했다.[72] 그는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인도 변경 지역까지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확장하고,[58]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다.[73]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했다.[74]

고전 시대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그의 제국 분열로 끝나며,[75]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참조

[1] 서적 Ancient Greece Yale University Press 1996
[2] 서적 Warfare in the Ancient World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2006-01-19
[3] 서적 The Complete Aeschylus: Volume II: Persians and Other Play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9-02-17
[4] 문서 isegoria
[5] 서적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1
[6]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New York 1969
[7]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8]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6
[9]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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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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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Penguin Books: New York 1980
[19]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20]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1]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22]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3]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24] 서적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25]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6
[26] 서적 The Peace of Nicias and the Sicilian Expedition Cornell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1
[27]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Book 5 Penguin Books: New York 1980
[28]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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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The Peace of Nicias and the Sicialian Expedition
[31] 서적 The Peace of Nicias and the Sicilian Expedition
[32]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33] 서적 The Peace of Nicias and the Sicilian Expedition
[34]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35] 서적 The Fall of the Athenian Empire Cornell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7
[36]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37]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38]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39] 서적 The Age of Alexander
[40]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6
[41]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42]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43]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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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적 The Age of Alexander: Nine Greek Lives
[61]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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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적 Alexander of Mace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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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적 Alexander of Macedon
[67] 서적 Alexander of Macedon
[68] 서적 Alexander of Macedon
[69] 서적 The Campaigns of Alexander Penguin books: New York 1979
[70] 서적 Alexander of Macedon
[71] 서적 The Campaigns of Alexander
[72] 서적 The Campaigns of Alexander
[73]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74] 서적 The Campaigns of Alexander
[75] 서적 The World of Ancient Times
[76] 서적 The Life of Greece Simon & Sch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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