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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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거는 동진 시대 촉군 강원현 출신의 학자이자 역사가로, 4세기 초 촉 지역의 농민 반란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성한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그는 이웅, 이기, 이수 시대를 거치며 『양익녕 삼주 지지』와 『촉한서』를 저술했고, 이후 동진의 환온이 촉을 침략하자 이세에게 항복을 권했다. 이후 그는 파와 촉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화양국지》를 저술하여 후대 지역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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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창거 |
본명 | 창취 |
한자 표기 | 常璩 |
자 | 도장 (道將) |
출생 | 291년 |
출생지 | 성도, 촉군, 익주, 서진 |
사망 | 361년 (70세) |
사망지 | 익주, 동진 |
![]() | |
관직 | |
임기 시작 | ? |
임기 종료 | 347년 |
군주 | 이세 |
가족 관계 | |
친척 | 상허 상기 상관 |
직업 | |
직업 | 역사가 |
2. 생애
상거(常璩)는 동진 시대 촉군 강원현(江原縣, 현재의 쓰촨성 청두) 출신이다. 상씨는 강원현의 유력한 가문으로, 상거의 종조부 상관(常寛)은 서진에서 관직을 지냈다.[13] 상거는 청두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14]
4세기 초, 촉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지방 귀족들은 추종자들과 가신들을 이끌고 멀리 이주했다. 상관(常寬중국어)이 이끄는 창씨 가문은 두도 등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형주와 상주로 이동했다. 상거는 이때 아직 어린 아이였고, 창씨의 작은 분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집안은 이주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가문에 합류하여 청성의 범창생에게 의탁하여 생존했다. 나중에는 이웅의 보호를 받았다.[1]
이웅이 양주와 익주를 장악한 후, 그는 교육과 문화를 크게 장려했다. 촉 지역은 당시 평화로웠고, 수확은 풍족했으며 세금은 가벼웠다. 상거는 창씨 가문의 후예로서, 이 안정된 환경에서 조상들이 남긴 책을 널리 읽을 기회를 얻었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2]
이후 상거는 영화 연간에 《화양국지》를 저술하였는데, 전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 촉, 한중 등 중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지리 등을 서술한 책이다. 이외에 성한의 역사를 서술한 《한지서(漢之書)》를 편찬하였으나, 후에 소실되었다.[17]
양쯔강 남쪽 사람들은 중원 출신의 옛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고 촉 사람들을 얕잡아 보았다. 이때 상거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관직을 추구하지 않고, 이전 작품을 수정하여 『화양국지』로 엮었다.[5] 그의 작품의 주된 목적은 파와 촉 지역의 오랜 역사를 홍보하고, 그들의 역사적 인물을 묘사하여 중원과 북방 사람들의 패권에 맞서 그들 자신의 문화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다른 남부 지역의 비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6]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증수탁현지』에 "상도장의 폐가는 치(治)의 남쪽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상거가 매우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1. 성한(成漢) 시기
이웅이 익주(益州)에 성한(成漢)을 일으키자, 상거의 종조부 상관(常寛)은 이에 항복하고 무평군(武平郡) 태수로 임명되었다. 상거는 성한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재직하였다.[15]형주와 상주로 이주한 촉 사람들은 두도가 통치하고 있었다. 상관은 창씨 가문을 이끌고 교지 지역을 통해 탈출했다. 이웅이 영주를 정복했을 때, 흩어진 사람들을 소환했다. 교지, 남중, 형/상으로 이주했던 촉 사람들은 창씨 가문을 포함하여 점차 돌아왔다. 이때 상거는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새로 돌아온 창씨 친척들은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3]
창거는 학문적이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돌아온 이주민 중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지식과 격동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창거는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 이기와 이수 재위 기간 동안 창거는 계속해서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는 이웅 시대의 지도와 기록을 사용하여 『양익녕 삼주 지지』(梁益寧三州地志|량익녕삼주지지|links=no중국어)와 『촉한서』(蜀漢書|촉한서|links=no중국어)를 저술했다. 이수는 양쯔강 남쪽 지역과의 관계를 끊었지만 북쪽과의 접촉은 유지했으며, 그 결과 창거의 책들은 황허강 지역에 처음으로 유통되었다.[4]
이세 재위 기간 동안 상거는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파서군의 공장(Gong Zhuang)의 견해를 존중하고 양쯔강 남쪽 지역을 선호했다. 347년, 환온이 촉을 침략하여 그의 군대가 청두에 이르렀을 때, 상거는 중서감 왕가(Wang Gu)와 함께 이세에게 진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했다.[5][10]
2. 2. 동진(東晉) 시기
이웅이 익주(益州)에 성한(成漢)을 일으키자, 상거의 종조부 상관(常寛)은 이에 항복하고 무평군(武平郡) 태수로 임명되었다.[1] 상거는 성한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재직하였다.[15]이기와 이수 재위 기간 동안 상거는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는 이웅 시대의 지도와 기록을 사용하여 『양익녕 삼주 지지』(梁益寧三州地志|양익녕삼주지지|links=no중국어)와 『촉한서』(蜀漢書|촉한서|links=no중국어)를 저술했다.[4]
이세 재위 기간 동안 상거는 산기상시를 지냈다.[5] 347년, 동진의 환온이 성한으로 침입해 오자, 상거는 이세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하였다.[15] 이때 상거는 중서감 왕가(Wang Gu)와 함께 이세에게 진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했고, 그와 함께 건강으로 이동했다.[5]
성한이 멸망하고, 환온이 촉에 머무르면서 인재를 포섭할 때, '촉의 인재(蜀之良)' 중 한 명으로 불리던 상거도 등용되어 참군(參軍)의 직에 임명되었다.[16]
3. 저술 활동
상거는 영화 연간에 《화양국지》를 저술하였고, 이외에 《한지서(漢之書)》를 편찬하였다고 전한다.[17] 《한지서》는 성한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나 나중에 소실되었다. 이기와 이수 재위 기간 동안 상거는 역사가로 활동하며, 이웅 시대의 지도와 기록을 사용하여 『양익녕 삼주 지지』(梁益寧三州地志|양익녕삼주지지|links=no중국어)와 『촉한서』(蜀漢書|촉한서|links=no중국어)를 저술했다.[4]
3. 1. 화양국지(華陽國志)
상거는 영화 연간에 《화양국지》를 저술하였는데, 전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파, 촉, 한중 등 중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지리 등을 서술한 책이다.[17] 이 책은 현존하는 중국의 지방지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화양국지》의 주된 목적은 파와 촉 지역의 오랜 역사를 홍보하고, 그들의 역사적 인물을 묘사하여 중원과 북방 사람들의 패권에 맞서 그들 자신의 문화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다른 남부 지역의 비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5] 자료가 가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술은 정당화되었고, 글쓰기는 우아하고 간결했다. 당시에, 그는 학자들과 박식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로, 그것은 지역 역사가들이 천 년 동안 따르는 모델로 채택되었다.[6]
상거는 이외에 《한지서(漢之書)》를 편찬하였다고 전한다.[17] 《한지서》는 성한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나 나중에 소실되었다. 이기와 이수 재위 기간 동안 상거는 계속해서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는 이웅 시대의 지도와 기록을 사용하여 『양익녕 삼주 지지』(梁益寧三州地志|양익녕삼주지지|links=no중국어)와 『촉한서』(蜀漢書|촉한서|links=no중국어)를 저술했다.[4]
4. 평가 및 영향
창거는 그의 저서 『화양국지』를 통해 파와 촉 지역의 오랜 역사와 인물들을 묘사하여 중원과 북방 사람들의 패권에 맞서 그들 자신의 문화를 재확인하고, 다른 남부 지역의 비판에 저항하고자 했다.[6] 그의 서술은 정당화되었고, 글쓰기는 우아하고 간결했으며, 당대 학자들과 박식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화양국지』는 이후 천 년 동안 지역 역사가들이 따르는 모델이 되었다.[6]
창거는 성한의 이기와 이수 재위 기간 동안 역사가로 활동하며, 이웅 시대의 지도와 기록을 사용하여 『양익녕삼주지지』(梁益寧三州地志|양익녕삼주지지중국어)와 『촉한서』(蜀漢書|촉한서중국어)를 저술했다.[4] 이수가 양쯔강 남쪽 지역과의 관계를 끊었지만 북쪽과의 접촉은 유지했기 때문에, 창거의 책들은 황허강 지역에 처음으로 유통되었다.[4]
이세 재위 기간 동안 창거는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347년 환온이 촉을 침략했을 때 이세에게 진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했다.[5] 이후 건강으로 이동한 창거는 더 이상 관직을 추구하지 않고 이전 작품을 수정하여 『화양국지』를 엮었다.[5]
『화양국지』는 현존하는 중국의 지방지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며,[12] 창거는 성한의 고사를 모은 『한지서』 10권도 저술했다.[12]
5. 가문
상거의 가문은 강원현(江原縣)을 대표하는 성씨였다.[13] 상거의 종조부(從祖父)인 상관(常寛)은 서진에서 주부(主簿)와 별가(別駕)를 지냈다.[1]
이웅이 익주(益州)에 성한을 세우자, 상관은 이에 항복하고 무평군(武平郡) 태수로 임명되었다.[1] 상거는 성한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15]
상관이 이끌던 상씨 가문은 두도 등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형주와 상주로 이동했다가, 이웅이 영주를 정복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이때 상거는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새로 돌아온 상씨 친척들은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3]
청나라 말기에 편찬된 『증수탁현지』에는 "상도장의 폐가는 치(治)의 남쪽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상거가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1]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2]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3]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4]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5]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6]
서적
Huayang Guozhi School Supplementary Illustration
[7]
문서
華陽国志序志
[8]
문서
華陽国志巻三、江原県の条
[9]
서적
十六国春秋
北魏
[10]
서적
晋書
[11]
서적
晋書
[12]
서적
隋書
[13]
문서
화양국지 권3, 촉지, "東方常氏為大姓"
[14]
서적
십육국춘추별록
[15]
서적
진서
[16]
서적
진서
[17]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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