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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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 목제(343년 ~ 361년)는 동진의 제7대 황제이다. 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저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며, 하충 등이 보좌했다. 환온의 북벌 시도와 실패, 사마욱과의 권력 다툼 등 복잡한 정치 상황을 겪었다. 19세에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어 사촌인 사마비를 황제로 옹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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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년 출생 - 부등
부등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황제로서, 부견의 일족으로 비수 대전 이후 세력을 키워 황제에 즉위, 후진을 공격하며 전진 부흥을 꾀했으나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 361년 사망 -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고 사산 제국과의 전쟁과 내전을 겪었으며,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 361년 사망 - 이세 (성한)
이세는 성한의 마지막 황제로, 폭정과 실정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진에 항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 동진의 황제 - 동진 원제
동진 원제는 서진 황족 출신으로 팔왕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와 세력을 키워 동진을 건국했으나, 왕도와 왕돈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왕돈의 난으로 병사한 동진의 초대 황제이다. - 동진의 황제 - 동진 강제
동진 강제는 진나라 명제의 아들이자 유문군의 아들로, 342년부터 344년까지 동진의 황제였으며, 유빙과 유익 형제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동진 목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사마담 |
자 | 팽자 |
시호 | 목황제 (穆皇帝) |
묘호 | 효종 (孝宗) |
신분 | |
작위 | 황제 |
왕조 | 동진 |
생애 | |
출생 | 343년 |
사망 | 361년 7월 10일 |
매장지 | 영평릉 (永平陵), 난징시, 장쑤성 |
아버지 | 강제 |
어머니 | 저산자 |
통치 | |
즉위 | 344년 11월 18일 |
퇴위 | 361년 7월 10일 |
섭정 | 저산자 |
연호 | 영화 (永和): 345년 – 356년 승평 (升平): 357년 – 361년 |
가족 | |
성 | 사마 |
배우자 | 하법니 |
후계자 | 애제 |
2. 생애
344년 강제가 사망하고 목제가 즉위한 후, 동진은 저태후의 섭정과 하충, 채모, 사마욱 등의 보좌를 받으며, 환온의 군사적 활약과 북방 정세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이 시기 중원은 후조와 염위가 멸망하고 전진과 전연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웠다. 환온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347년 성한을 멸망시키고 서촉 지방을 수복하며 큰 공을 세웠다. 354년에는 전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보급 문제로 철수해야 했다.[2] 환온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목제와 강남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2] 은호 등도 북벌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2]
357년 목제가 성인이 되면서 추태후의 섭정이 끝났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사마욱과 환온에게 있었다. 목제는 사마욱이 정사를 돌려주려 하자 이를 거절했다.[2]
361년 5월, 목제는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2. 1. 즉위 과정
343년 강제와 저산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4]344년 8월, 강제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여러 대신들은 성제의 맏아들 낭야왕 사마비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강제와 황후, 태후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중서감 유빙과 정서장군 유익 형제는 사도 회계왕 사마욱을 후사로 세우자고 주장했으나, 중서감 하충은 겨우 2살인 사마담을 태자로 봉할 것을 제안했다. 강제는 결국 어린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4] 9월, 강제가 사망하자 사마담이 황제로 즉위했고, 저태후가 섭정하고 하충이 보좌했다. 하충은 재능과 식견, 도량이 넓은 인물로, 친족이나 지인을 사사로이 돌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5]
2. 2. 섭정과 권력 다툼
344년 9월, 강제가 사망하자 황제가 되었는데, 저태후가 섭정하고 하충이 보좌했다.[2] 하충은 재능과 식견이 있고 도량이 넓었으며, 친족이나 지인을 사사로이 돌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346년 정월, 하충이 죽고 좌광록대부 채모와 사도인 회계왕 사마욱이 정사를 보좌했다.[2]이때 중원 지역은 혼란에 빠져 후조와 염위가 멸망하고 전진과 전연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 환온은 큰 공을 세우고 제위를 차지하려고 북벌을 감행했는데, 347년에 촉 땅의 성한을 멸망시키고 서촉 지방을 수복했다. 354년에는 전진을 쳐서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보급로가 끊겨 철수했다. 환온은 낙양으로 환도하자고 했지만, 목제와 강남 사대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북대장군 저곤, 중군장군 은호 등도 북벌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했다.[2]
진 목제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추태후가 섭정을 맡았지만, 주로 하충과 사마유의 조언을 따랐다.[2] 346년 하충이 사망한 후에는 채모가 그 역할을 맡았다.[2]
345년, 야심 찬 장군 환온이 서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346년 말, 환온은 성한 정복 원정을 시작하여 347년에 멸망시켰다. 사마유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고위 관리로 초청했다.[2]
349년, 후조의 혼란을 틈타 환온은 북방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사마유와 은호는 추포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2]
350년, 은호는 북방 원정을 준비했지만, 채모를 평민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더 많은 권력을 장악했다. 352년, 환온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도를 공격할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은호는 사마유에게 환온에게 중단을 설득하는 편지를 쓰도록 요청했다.[2]
352년 후반, 은호는 원정을 시작했지만, 전 후조 장군들의 반란으로 중단해야 했다. 전진 군대가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은호의 원정은 실패했다.[2]
352년 가을, 은호는 두 번째 원정을 준비했지만, 요상의 군대에 의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환온은 은호의 축출을 요구했고, 황실 정부는 은호를 유배했다. 이후 황실 정부는 사마유가 단독으로 운영했지만, 환온에게 많은 의사 결정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2]
354년, 환온은 전진에 대항하여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지만, 식량 보급이 떨어져 철수했다.[2]
356년, 환온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는 요상에 대항하여 원정을 수행하여 낙양 지역을 다시 장악하고, 수도 이전 제안을 다시 했지만, 황실 정부는 다시 거절했다. 그해 후반, 단간이 전연의 모용각에게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겼다.[2]
357년 봄, 진 목제가 성인식을 치르면서 추태후는 섭정을 종료했고, 진 목제가 공식적으로 의사 결정자가 되었지만, 사실상 사마유와 환온이 계속해서 결정을 내렸다.[2]
성인이 되자 정권을 잡고 있던 사도 사마욱이 정사를 돌려주었지만, 목제는 이를 거절했다.[2]
2. 3. 최후
361년 5월, 목제는 재위 18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5] 7월에 영평릉(永平陵)에 안장되었다. 목제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저태후는 그의 사촌인 사마비를 랑야왕으로 옹립하여 황제로 삼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사마비가 황제로 즉위하였다.[4]3. 환온의 북벌과 동진의 혼란
344년 강제가 사망하고 어린 목제가 즉위하면서 저태후가 섭정하고 하충이 보좌했다.[2] 하충은 인재 등용에 사사로움을 두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346년 사망하고 채모와 사마욱이 정사를 보좌하게 되었다.[2]
이 시기 중원은 후조, 염위가 멸망하고 전진, 전연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웠다.[2] 환온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347년 성한을 멸망시키고 서촉 지방을 수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2] 354년에는 전진을 공격해 낙양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보급 문제와 개인적인 의지 부족으로 철수했다.[2] 환온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목제와 강남 사대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
환온 외에도 저곤, 은호 등이 북벌에 나섰으나, 군사적 능력 부족과 치밀한 계획 부재로 실패했다.[2]
3. 1. 성한 정벌 (347년)
346년 말, 환온은 중앙 정부의 승인 없이 오늘날의 쓰촨과 충칭을 차지한 성한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2] 347년, 성한은 환온에게 멸망당했고, 이로써 진나라는 중국 남부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다.[2] 그러나 이때부터 환온은 서부 지역에 대한 결정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2]3. 2. 전진 공격과 좌절 (354년)
354년, 환온은 전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함락시키고 평승루에 올랐다. 이어서 강주자사 사마훈과 함께 장안을 수복하기 위해 관중을 공격했는데, 위연이 제안했던 자오곡 계책을 그대로 활용했다가 보급로가 끊겨 철수했다.[2] 환온은 장안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으나, 개인적인 의지 부족으로 시일을 끌었다. 이후 환온은 낙양을 영구히 영토로 지키기 위해 목제에게 낙양으로 환도할 것을 요청했지만, 목제는 무관심했고 강남에 뿌리를 박은 사대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했다.[2]3. 3. 기타 북벌 시도와 실패
349년, 후조가 황제 석호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 및 양손자 석민 사이의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후조의 남부 지역 다수가 진나라로 전향했고, 환온은 북방 원정을 준비했다. 사마유와 은호가 이끄는 황실 정부는 진 목제의 할아버지 추포를 파견했으나, 추포는 초기 실패 후 물러났고 이 원정으로 진나라로 귀순하려던 많은 백성이 사망했다. 장군 사마순이 수행한 소규모 원정도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2]352년 후반, 은호는 원정을 시작했지만, 허창과 낙양을 통제하던 전 후조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원정은 중단되었다. 이후, 장군 사상과 요상이 허창을 통제하는 장군 장우를 공격하려 하자 전진 군대가 장우를 지원하여 사상의 군대를 격파했다. 은호는 원정을 완전히 포기했다.[2]
같은 해 가을, 은호는 두 번째 원정을 준비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전진으로부터 허창을 회복했으나, 은호는 요상의 군사적 능력과 독립성에 의심을 품고 요상을 암살하려 했다. 요상은 이를 알아차리고 은호가 북쪽으로 향할 때 은호의 군대를 매복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요상은 수춘 지역을 장악했고, 백성들은 은호의 군사적 손실을 혐오했다. 환온은 은호의 축출을 요구하는 탄원을 제출했고, 황실 정부는 은호를 평민 신분으로 강등하고 유배했다.[2]
354년, 환온은 전진을 공격하여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후 강주자사 사마훈과 함께 장안을 수복하기 위해 관중을 쳤으나, 위연이 제안했던 자오곡 계책을 활용했다가 보급로가 끊겨 철수했다.[2] 환온은 장안을 함락할 수도 있었으나 개인 의지 부족으로 시일을 끌었다. 이후 환온은 낙양을 영구히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 목제에게 낙양으로 환도하자고 제안했지만, 목제의 무관심과 강남에 뿌리박은 사대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했다. 정북대장군 저곤, 중군장군 은호 등도 북벌에 뛰어들었으나 모두 실패했는데, 이들은 장군이라기보다는 청담가에 가까웠으며 국고가 비었고 치밀한 계획도 없었다.[2]
356년, 환온은 요상에 대항하여 원정을 수행하여 요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요상은 서쪽으로 진격하려다 전진에 격파되어 사망했다. 낙양 지역을 다시 장악한 환온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는 제안을 다시 했지만, 황실 정부는 거절했다. 같은 해 후반, 진나라의 신하인 단간이 전연의 장군 모용각에게 패배하여 영토를 전연에게 빼앗겼다.[2]
359년, 전연이 황하 남쪽의 진나라 영토에 압력을 가하자, 장군 사만, 제갈유, 희담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전연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사만이 전연군이 가까이 있다고 잘못 판단하여 퇴각을 명령한 후 병력이 붕괴되었다. 지원 없이 황하 남쪽의 진나라 영토는 전연의 손에 떨어지기 시작했다.[2]
4. 평가
진 목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추태후가 섭정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사마유와 하충 등의 대신들에게 있었다.[2] 하충이 사망한 후에는 채모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환온은 서부 지역 군사 지휘관으로서 성한을 정복하는 등 큰 공을 세웠지만,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사마유는 환온을 견제하고자 은호를 등용하였으나, 은호는 북벌에 실패하고 실각하는 등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결과적으로 환온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 황실 정부는 환온에게 많은 의사 결정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환온은 전진을 공격하고 낙양 지역을 회복하는 등 군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도 이전 문제는 황실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357년, 진 목제가 성인이 되면서 추태후의 섭정은 종료되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사마유와 환온에게 있었다.
5. 가계
- 배우자: 하법니(穆章皇后 廬江何氏|하법니중국어; 339–404) - 하충의 동생 하준의 딸
6. 연호
참조
[1]
서적
Sima Dan's biography in Book of Jin
Jin Shu
361-07-10
[2]
서적
Xie Shang was Empress Dowager Chu's uncle
Jin Shu
[3]
문서
1981年、南京市郊外の幕府山で永平陵と考えられる東晋時代の陵墓が発見された。
[4]
서적
何充伝
晋書
[5]
서적
穆帝紀
晋書
[6]
서적
桓温伝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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