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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도시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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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마 도시타네는 게이초 시대의 무장으로, 아버지 소마 요시타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립을 지켜 영지가 몰수될 위기에 처하자, 직접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호소하여 영지를 보전했다. 이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와 결혼하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등 도쿠가와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소마 나카무라 성으로 거점을 옮기고, 조카마치를 정비하며 소마 코마야키의 기초를 다지는 등 뛰어난 정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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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도시타네
기본 정보
씨족환무 평씨(桓武平氏) 다이라노 사다모리류 지바 씨족 소마 씨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생년덴쇼 9년 (1581년)
사망일간에이 2년 9월 10일 (1625년 10월 11일)
개명미쓰타네 → 미쓰타네 → 도시타네
이명도라오(虎王), 손지로(孫次郎)
계급종4위하(従四位下), 대선대부(大膳大夫)
소마 도시타네
소마 도시타네
묘소도케이지(同慶寺) (후쿠시마현미나미소마시)
관직
관위종4위하(従四位下), 대선료(大膳亮)
가문
가신에도 막부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 이에미쓰
무쓰국소마 나카무라 번
가족 관계
아버지소마 요시타네
어머니불명
형제도시타네, 오키타네, 히사타네, 딸 (이와키 사다타카의 부인)
배우자정실: 아시나 요시히로의 딸 (실제로는 아시나 모리타카의 딸)・에도사키고젠(江戸崎御前)
계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쓰치야 다다나오의 이복 여동생이자, 오카다 모토쓰구의 딸)
자녀요시타네, 딸 (데라사와 가타타카의 계실)

2. 생애

소마 가문의 16대 당주 소마 요시타네의 맏아들로 무쓰국 나메카타 군 오다카 성에서 태어났다. 1596년 성인식을 치르며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에게서 이름 한 자를 받아 '''미쓰타네'''(三胤|미쓰타네일본어)라 이름 짓고, 아시나 모리타카의 딸과 혼인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요시타네가 중립을 지킨 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미쓰타네는 이름을 '''미쓰타네'''(蜜胤|미쓰타네일본어)로 고치고 직접 에도로 가 혼다 마사노부 등의 중재를 통해 영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로 아버지 요시타네는 은거하고 미쓰타네가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1601년 첫 부인이 사망한 후, 1602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선으로 하타모토 오카다 모토쓰구의 딸과 재혼했다. 이때 막부의 실력자 도이 도시카쓰에게서 이름 한 자를 받아 '''도시타네'''(利胤|도시타네일본어)로 다시 개명했다.

1611년 거점을 오다카 성에서 소마 나카무라 성으로 옮겼으며,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나카무라 성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소마 코마야키(相馬駒焼) 도자기 산업의 기초를 닦는 등 영지 경영에 힘썼다.

1625년 9월 10일, 아버지보다 먼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도케이사(同慶寺)에 있다.

2. 1. 청년기

소마 가문의 16대 당주 소마 요시타네의 맏아들로 무쓰국 나메카타 군 오다카 성에서 태어났다. 1596년 성인식을 치르고 당시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를 후견인으로 삼아 이름에 미쓰나리의 '미쓰(三)' 자를 받아 '''미쓰타네'''(三胤일본어)라 이름 지었다. 동시에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大膳亮)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아시나 모리타카의 딸 에도사키고젠(江戸崎御前일본어)과 혼인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소마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미쓰타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영지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요시타네는 은거하고 미쓰타네가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1601년 정실인 에도사키고젠이 사망하자, 1602년 12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라는 형식으로 하타모토 오카다 모토쓰구의 딸을 계실(繼室, 후처)로 맞이했다. 이때 막부의 실력자 도이 도시카쓰에게서 이름 한 자 '도시(利)'를 편휘(偏諱)로 받아 '''도시타네'''(利胤|도시타네일본어)로 개명하고, 같은 달 18일 종4위하(従四位下)에 서임되었다.

1611년 거성을 오다카성에서 소마 나카무라성으로 옮겼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활약했다. 이후 영주로서 나카무라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교토처럼 바둑판 모양으로 정비하여 현재 소마시의 기초를 닦았으며, 가신에게 도예 기술을 배우게 하여 소마 코마야키(相馬駒焼)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간에이 2년(1625년) 9월 10일, 아버지보다 먼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도케이사(同慶寺)에 있다.

2. 1. 1. 세키가하라 전투와 소마 가문의 위기

게이초 원년(1596년), 아버지 소마 요시타네가 사타케 요시노부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원복(元服, 성인식) 시 이시다 미쓰나리로부터 편휘(偏諱, 이름 한 자를 하사받는 것)로 '미쓰(三)' 자를 받아 '''미쓰타네'''(三胤|미쓰타네일본어)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시에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大膳亮)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아시나 모리타카의 딸(에도사키고젠, 江戸崎御前일본어)과 혼인하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아버지 요시타네는 사타케 요시노부와 함께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게 되어, 소마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개역(改易, 영지 몰수 및 지위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아키타로 영지를 옮기게 된 사타케 요시노부가 소마 가문에게 자신의 영지 일부를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요시타네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미쓰타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지금 당장의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사타케 가문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며, 차라리 자신이 직접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에게 직소(直訴, 직접 호소)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약간의 은혜라도 입어 하타모토로서 가문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며, 만약 실패한다면 가문이 멸망하는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호소했다.

요시타네는 아들의 결단을 받아들였다. 미쓰타네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서 받은 편휘인 '미쓰(三)' 자를 꺼려하여, 같은 발음의 '미쓰(密)' 자를 써서 '''미쓰타네'''(蜜胤|미쓰타네일본어)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얼마 안 되는 가신만을 데리고 직접 호소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막부에는 연줄이 전혀 없었으나, 아버지 요시타네의 옛 인연을 의지하여 거물 하타모토(旗本, 쇼군의 직속 가신) 시마다 시게쓰구에게 의탁했고, 그의 주선으로 막부의 실력자 혼다 마사노부의 중재를 얻는 데 성공했다. 혼다 마사노부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설득한 덕분에 미쓰타네는 영지를 보전받을 수 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저술한 『반한보』(藩翰譜)에는 이때 소마 가문의 숙적이었던 다테 마사무네의 중재도 있었다고 하지만, 소마 가문과 다테 가문의 동서(同誓, 화해 맹세) 성립은 100년 뒤의 일이므로, 이는 잘못된 정보라는 설도 있다.

이 일로 아버지 요시타네는 죄를 물어 은거하게 되었고, 미쓰타네가 소마 가문의 당주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게이초 6년(1601년), 정실인 에도사키고젠(아시나 요시히로의 양녀, 실제로는 아시나 모리타카의 딸)이 사망했다. 이듬해인 게이초 7년(1602년) 12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라는 형식으로 하타모토 오카다 모토쓰구의 딸을 계실(繼室, 후처)로 맞이했다. 이때 쇼군 히데타다를 대신하여 혼례에 참석했던 막부 실력자인 도이 도시카쓰에게 부탁하여, 도이 가문의 통자(通字, 대대로 이름에 쓰는 글자)인 '도시(利)'를 편휘(偏諱)로 받아 '''도시타네'''(利胤|도시타네일본어)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종4위하(従四位下)로 승진했다.

2. 2. 소마 나카무라 번주 시대

1596년 원복(元服) 때 아버지 소마 요시타네가 사타케 요시노부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와 가까웠던 관계로, 미쓰나리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미쓰타네'''(三胤)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시에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大膳亮)에 서임되었다. 정실로는 아시나 모리타카의 둘째 딸이자 아시나 요시히로의 양녀인 에도사키고젠(江戸崎御前)을 맞이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요시타네가 사타케 가문과 함께 중립을 지키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하고 개역될 위기에 처했다. 미쓰타네는 사타케 가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직접 막부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서 받은 이름자 '미쓰(三)'를 '미쓰(蜜)'로 고치고(읽는 법은 같음), 소수의 가신만 데리고 에도로 향했다. 막부에 연줄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옛 인연을 통해 하타모토 시마다 시게쓰구에게 의지하고 혼다 마사노부의 중재를 얻어 영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반한보』(藩翰譜)에는 소마 가문의 숙적이었던 다테 마사무네의 중재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라는 설도 있다.

1601년 음력 5월, 정실 에도사키고젠이 사망한 후, 1602년 12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선으로 하타모토 오카다 모토쓰구의 둘째 딸을 계실(継室)로 맞이했다. 이때 쇼군 히데타다를 대신해 혼례에 참석한 막부 실력자 도이 도시카쓰에게 그의 이름자 '도시(利)'를 받아 '''도시타네'''(利胤일본어)로 개명했다.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다.

이후 1611년 거점을 오다카 성에서 소마 나카무라 성으로 옮겼고,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또한 나카무라 성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정비하고 소마 코마야키(相馬駒焼일본어) 발전에 기여하는 등 번의 기틀을 다졌다.

1625년 9월 10일, 아버지보다 먼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소는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도케이사(同慶寺)에 있다.

2. 2. 1. 소마 나카무라 번의 발전과 도시타네의 역할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아버지 소마 요시타네가 사타케 요시노부와 함께 중립을 지키기로 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당시 미쓰타네(당시 이름 미쓰타네(三胤))는 사타케 가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던 아버지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직접 막부에 호소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서 받은 이름자 '미쓰(三)'를 '미쓰(蜜)'로 바꾸고 에도로 가 혼다 마사노부 등의 중재를 통해 결국 영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소마 가문의 존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행동이었다.

1601년 첫 번째 부인 에도사키고젠(아시나 모리타카의 딸, 아시나 요시히로의 양녀)이 사망한 후, 1602년 12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주선으로 하타모토 오카다 모토쓰구의 딸을 계실로 맞이하였다. 이때 히데타다를 대신해 혼례에 참석한 막부의 실력자 도이 도시카쓰에게 이름자 '도시(利)'를 받아 '''도시타네'''(利胤일본어)로 개명하며 막부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12월 18일에는 종4위하 관직에 올랐다.

1611년에는 거점을 오다카 성에서 소마 나카무라 성으로 옮겨 번의 중심지를 재정비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며 군사적 공적을 세웠다.

이후 도시타네는 나카무라 성의 조카마치(성 아랫마을)를 교토에도처럼 바둑판 모양으로 정비하여 오늘날 소마시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가신들에게 도예 기술을 배우게 하여 지역 특산품인 소마 코마야키(相馬駒焼일본어)가 발전하는 기반을 닦는 등, 번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간에이 2년(1625년) 9월 10일, 아버지보다 먼저 4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의 도케이사에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소마 요시타네
어머니나가에 모리카게의 딸
정실에도사키 고젠아시나 요시히로의 딸
계실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오카다 모토쓰구의 딸
장남소마 요시타네생모는 계실
테라자와 카타타카의 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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