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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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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현은 고려 시대의 승려로, 1048년 출가하여 해린의 제자가 되었다. 1061년 왕륜사 오교대선장에서 대덕의 법계를 받았으며, 중대사, 삼중대사를 거쳐 1079년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중창하고 광교원을 설치하여 경전 강독과 유식론 계통의 장소 교정 및 간행에 힘썼다. 1083년 승통이 되어 현화사에 머물렀으며, 금산사로 돌아가 후학을 지도하다가 1096년 봉천원에서 입적했다. 제자로는 도생승통 등이 있었으며, 금산사에는 혜덕왕사탑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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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 생애

1048년 11세에 출가하여 해린의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 1049년 복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1] 1061년(문종 15) 왕륜사(王輪寺)의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 응시하여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고, 1069년(문종 23) 중대사(重大師), 1071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1] 1079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중창하였는데 금산사의 역사상 이때가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또한 금산사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경전을 강독하는 한편, 사경(寫經)·인경(印經) 등 경전의 판각과 유포를 위한 간경장(刊經藏)으로도 이용하였다. 당시 규기의 저작인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를 비롯한 유식론 계통의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개간하였으며, 그 사본을 유통시켰다.[1] 1083년(선종 1)에는 개국사(開國寺)와 자운사(慈雲寺)에 선장(選場)을 마련하여 회주(會主)가 되었고, 그 해 승통(僧統)이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 뒤 다시 금산사로 돌아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096년 12월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1] 제자로는 도생승통 등 1,000여 인이 있었다. 금산사의 동쪽 부도전(浮屠殿)에 탑비가 남아 있다.[1]

2. 1. 출가와 수행

1048년 11세에 출가하여 해린의 제자가 되었고, 이듬해 1049년 복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1]

2. 2. 교학 연구와 전파

해린의 제자로 출가하여, 1049년 복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1] 1061년(문종 15) 왕륜사(王輪寺)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서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고, 1069년(문종 23) 중대사(重大師), 1071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1] 1079년에는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중창하고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 경전 강독과 판각, 유포를 위한 간경장(刊經藏)으로 활용하였다. 규기의 저작인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를 비롯한 유식론 계통의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개간하고 사본을 유통시켰다.[1]

2. 3. 금산사 주지와 중창

1079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중창하였는데 금산사의 역사상 이때가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1]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경전을 강독하고, 사경(寫經)·인경(印經) 등 경전의 판각과 유포를 위한 간경장(刊經藏)으로도 이용하였다.[1] 당시 규기의 저작인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를 비롯한 유식론 계통의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개간하여 그 사본을 유통시켰다.[1] 그 뒤 다시 금산사로 돌아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1]

2. 4. 승통과 입적

1083년(선종 1)에 개국사(開國寺)와 자운사(慈雲寺)에 선장(選場)을 마련하여 회주(會主)가 되었고, 그 해 승통(僧統)이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잠시 머물렀다.[1] 그 뒤 다시 금산사로 돌아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096년 12월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1]

3. 사후

3. 1. 제자

3. 2. 유물

4. 사진


4. 1.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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