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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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수(孫秀)는 중국 서진 시대의 인물로, 사마륜을 보좌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혜제를 폐위시킨 후 사마륜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다. 낭야군 출신으로 사마륜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가남풍 제거, 사마륜의 황제 등극을 위한 정적 제거 등 권력 획득에 앞장섰다. 사마륜이 황제가 된 후에는 중서령을 역임하며 전횡을 일삼았고, 결국 반란으로 인해 처형되었다. 손수의 횡포는 서진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팔왕의 난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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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1년 사망 - 사마륜
사마륜은 서진의 황족으로, 조카인 진 혜제를 폐위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반란으로 체포되어 자결하며 서진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서진의 중서령 - 왕융 (서진)
왕융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죽림칠현 중 한 명이며, 사마소의 초빙을 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고 혜제 시대에 요직을 역임했으나 사마륜의 난에 연루되어 면직된 후 사망했다. - 서진의 중서령 - 장화 (서진)
장화는 서진 시대의 문학가이자 정치가로, 오나라 정벌에 기여하여 광무후에 봉해졌으나 팔왕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손수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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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수 |
원어 이름 | 孫秀 |
자 | 준충(俊忠) |
출생지 | 린이시, 산둥성 |
사망일 | 301년 5월 30일 |
가족 관계 | |
친족 | 손기(孫旗) (양헌용의 외조부) 손은 (후손) 손태 (손은의 숙부) |
자녀 | 손훼이 (281년 - 301년) |
관직 | |
중서령 | 300년 - 301년 |
섬긴 군주 | 진 혜제 |
시중 | 300년 - 301년 |
섬긴 군주 | 진 혜제/사마륜 |
보국장군 | 300년 - 301년 |
섬긴 군주 | 진 혜제 |
상국사마 | 300년 - 301년 |
섬긴 군주 | 진 혜제 |
중서감 | 301년 |
섬긴 군주 | 사마륜 |
표기장군 | 301년 |
섬긴 군주 | 사마륜 |
기타 | |
특징 | 서진의 관리이자 사마륜의 심복 |
2. 생애
손수는 낭야군 출신으로, 가문 대대로 오두미도를 신봉했다. 젊은 시절 하급 관리로 일했으나,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상관에게 미움을 받았다.[6] 266년, 사마륜이 낭야왕으로 부임하자 그의 신임을 얻었고, 277년 사마륜이 조왕으로 전봉되자 호적을 조군으로 옮기고 시중(侍中)이 되었다.[7]
296년, 사마륜이 관중 지역을 다스릴 때 손수도 따라갔다. 옹주자사 해계와 갈등을 빚었고, 해계 형제가 손수를 모함하여 죽이려 했으나, 친구 신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8][9]
황후 가남풍의 전횡으로 태자 사마휼이 폐위되자, 사마륜은 가남풍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손수는 사마휼이 복위하면 사마륜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 여겨, 태자를 죽게 한 다음 황후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소문을 퍼뜨려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게 만들었다.[11][12]
300년 4월, 가황후 일당을 모두 죽이고, 사마륜은 황제가 되기를 꿈꿨다. 손수는 사마륜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걸림돌이 되거나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제거했다. 병권을 잡고 사마륜을 뜻대로 움직여 사람들은 사마륜보다 손수를 더 두려워했다.[14]
회남왕 사마윤이 반발하자, 손수는 사마윤을 태위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마윤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했으나 복윤에게 살해당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손수는 사마윤 일파 숙청 때 원한을 졌던 위위 석숭 등을 죽였다.[16][17] 이후 조정을 움직여 사마륜에게 구석(九錫)을 내리게 했다.
299년, 황태자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모함당해 폐위되자, 사마아 등과 함께 가남풍 제거를 계획했다. 손수는 사마휼이 복위되면 사마륜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가남풍이 사마휼을 살해하도록 유도했다.[11] 300년 4월, 사마륜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가남풍을 제거하고 가씨 일족을 처형했다.[12]
사마륜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자, 손수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301년, 손수는 사마륜의 찬탈을 주도하여 그를 황제 자리에 올렸다.[21] 손수는 시중(侍中), 중서감(中書監),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고, 의동삼사(儀同三司)의 특권을 받았다.[21] 사마륜이 내리는 조서를 마음대로 고치고, 관리 임용을 자기 뜻대로 행하여 조정을 어지럽혔다.[21]
301년, 사마륜이 강제로 사마충에게 선양하게 하고 황제가 되자, 손수는 더욱 교만해져 조정을 어지럽혔다.[21] 세 왕(사마경, 사마영, 사마옹)의 반발을 막기 위해 후하게 대우했으나, 이들은 군사를 모아 낙양을 공격해 왔다. 사마륜의 군사는 번번이 패했으나, 손수는 거짓으로 승리했다고 알렸다.
사마경은 감시역을 살해하고 거병하여 격문을 보냈고, 사마영, 사마예, 사마흠, 사마옹도 호응했다.[24]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마륜과 손수를 죽이려 했으며, 세 왕의 군사가 낙양을 위협하자 손수는 두려워 중서성에서 나오지 않았다.[24]
301년 4월 7일, 왕여와 사마최가 정변을 일으켰다. 손수는 도망치려 했으나, 좌위장군 조천에게 참수되었다.[25] 사마륜의 측근은 모두 주살되었고, 사마륜 또한 유폐된 후 살해되었다. 사마륜은 "손수가 나를 그릇되게 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27]
2. 1. 초기 생애와 출세
손수는 낭야군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오두미도를 신봉했다. 젊은 시절 낭야군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으나,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상관이었던 반악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매질을 당했다.[6]266년 2월, 사마륜이 낭야왕으로 부임하자, 손수는 아첨과 뛰어난 문서 작성 능력으로 그의 신임을 얻었다. 277년 10월, 사마륜이 조왕으로 전봉되자, 손수도 호적을 조군으로 옮기고 시중(侍中)이 되었다.[7]
2. 2. 사마륜의 측근 활동
296년, 사마륜이 진나라에 저항하는 저족과 강족을 진압하기 위해 관중(關中) 지역을 다스릴 때 손수도 그를 따라갔다. 이때 옹주자사(雍州刺史) 해계(解系)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해계와 그의 동생 해결(解結)은 저족과 강족의 저항을 손수의 탓으로 돌리고 죽여야 한다고 조정에 모함하였다. 이를 본 장화(張華)가 손수를 죽이려 하여 위기에 처했으나, 친구 신염(辛冉)의 구명활동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8][9]황후 가남풍(賈南風)의 전횡으로 태자 사마휼(司馬遹)이 폐위당하자, 사마륜은 가남풍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손수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손수는 사마휼이 복위하면 사마륜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 여겨 태자를 죽게 한 다음 황후까지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손수는 부하들을 통해 누군가가 황후를 폐위하고 태자를 복위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가남풍은 사마휼을 죽였다.[11][12]
사마아(司馬雅)를 장화에게 보내 거사에 협조를 청했으나 장화는 따르지 않았고, 거사 후 죽임을 당했다.[13]
300년 4월, 거사 후 가황후 일당을 모두 죽였다. 사마륜은 황제가 되기를 꿈꿨고, 손수는 사마륜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걸림돌이 되거나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제거하였다. 손수는 병권을 잡았으며, 사마륜이 총명하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뜻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마륜보다 손수를 더 두려워하였다.[14]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이 반발하자, 손수는 사마윤을 태위(大尉)로 삼았다. 사마윤이 병을 핑계로 받지 않자, 손수는 직접 조서를 써 사마윤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사마윤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공격해 수세에 몰렸으나, 복윤에게 살해당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손수는 사마윤 일파 숙청 때 원한을 졌던 위위(衛尉) 석숭(石崇) 등을 죽였다.[16][17] 이후 조정을 움직여 사마륜에게 구석(九錫)을 내리게 했다. 손회(孫會)를 사마충(司馬衷)의 딸 하동공주(河東公主)와 결혼시켰으며, 손기(孫旂)의 외손녀 양(羊)씨를 황후로 만들었다.
299년 12월, 황태자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모함당해 폐위되자, 사마아·허초 등은 사마휼의 복위와 가남풍의 폐위를 계획하고, 사마륜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손수는 사마륜에게 "사마휼을 위해 큰 공을 세워도, 주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협력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원망은 없어지더라도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과실을 구실로 주살될 위험이 있습니다. 가남풍이 사마휼을 해치도록 기다린 후, 사마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가남풍을 제거하면 후환을 제거하고 더 큰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권했고, 사마륜은 동의했다.
손수는 가남풍에게 사마아 등이 그녀를 폐하고 사마휼을 맞이하려 한다는 정보를 흘리며, "사마휼을 살해하여 기대를 끊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가남풍은 손려에게 명하여 사마휼을 살해하게 했다. 300년 4월 3일, 사마륜과 손수 등은 려화·사마동·사마경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가남풍을 폐위하고 건시전에 유폐시켰으며, 가씨 일족을 모두 처형했다. 사마륜은 제위 찬탈을 위해 손수와 모의하여 조정에서 명망 있는 자나 원한이 있는 자를 제거했다. 장화·배위·해계·해결 등이 체포되어 삼족이 몰살되었고, 유진·동맹·손려·정거 등도 처형되었으며, 장화·배위의 측근 다수가 파면되었다.
2. 3. 가남풍 제거와 권력 장악
299년, 황태자 사마휼이 가남풍에게 모함당해 폐위되자, 사마아 등과 함께 가남풍 제거를 계획했다. 손수는 사마휼이 복위되면 사마륜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가남풍이 사마휼을 살해하도록 유도했다.[11]300년 4월, 사마륜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가남풍을 제거하고 가씨 일족을 처형했다.[12] 사마륜이 상국에 오르자, 손수는 중서령에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사마륜은 문맹이었기에, 사실상 손수가 정치를 주도하며 백관을 움직였다.[14]
회남왕 사마윤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수는 사마윤을 태위로 삼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마윤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공격했으나, 복윤에게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16] 손수는 이 난을 계기로 석숭 등 수천 명을 연좌하여 처형했다.[17] 또한 사마경을 허창으로 보내 중앙에서 멀리 떨어뜨렸다.[18]
2. 4. 사마륜 찬탈과 횡포
사마륜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자, 손수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사마륜에게 구석(九錫)을 내리도록 혜제(惠帝)에게 압력을 가했다.[19] 이부상서 유송(劉頌)이 "주발·곽광은 공적이 지대한 신하였지만, 구석은 하사받지 못했습니다."라며 반대했지만,[19] 손수는 유송을 회유하고 결국 사마륜에게 구석을 하사하게 만들었다.[19][20]301년, 손수는 사마륜의 찬탈을 주도하여 그를 황제 자리에 올렸다.[21] 손수는 시중(侍中), 중서감(中書監),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고, 의동삼사(儀同三司)의 특권을 받았다.[21] 또한, 과거 사마소(司馬昭)가 살았던 내고(內庫)에 거주하며 모든 정사를 전횡했다.[21] 사마륜이 내리는 조서를 마음대로 고치고, 관리 임용을 자기 뜻대로 행하여 조정을 어지럽혔다.[21]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측근 장림(張林)을 제거했다.[21] 장림은 손수가 조정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고 태자 사마부(司馬荂)에게 손수를 처형하라고 요청했지만, 오히려 손수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했다.[21] 이후 손수는 세 왕, 즉 사마경, 사마영(司馬穎), 사마옹(司馬顒)을 견제하기 위해 감시역을 파견하고 회유책을 썼다.[21]
2. 5. 몰락과 최후
301년, 사마륜이 강제로 사마충에게 선양하게 하고 황제가 되자, 손수는 시중(侍中) 겸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한층 더 심해져 조서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치고 관리 임용을 자기 뜻대로 했기 때문에 조정이 어지러워졌다.[21]손수는 다른 왕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을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이 세 명은 군사를 모아 낙양을 공격해 왔다. 사마륜의 군사는 번번이 패했으나, 손수는 조정 대신들에게 진압군이 승리했다고 알리고 축하하게 했다.
사마경은 감시역으로 파견된 관습을 살해하고, 사마륜과 손수의 토벌을 내걸고 거병하여, 각지의 장군과 주군현국에도 격문을 보냈다. 격문에는 "역신 손수가 조왕을 그릇되게 했다. 함께 주벌하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고 적혀 있었다. 사마영, 사마예, 사마흠, 사마옹은 모두 이에 호응했다.[24]
그러나 실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사마륜과 손수를 죽이려 했으며, 세 왕의 군사가 낙양을 위협하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수는 이를 두려워하여 중서성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24]
황교 전투에서 사마영이 승리하고 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접근하면서 사마륜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수도의 관리들 또한 사마륜과 손수의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24]
301년 4월 7일, 좌위장군 왕여와 상서 광릉공 사마최가 영병 700여 명을 이끌고 남액문으로부터 궁중에 들어가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을 알게 된 손수는 중서성의 남문을 닫았으므로, 왕여는 병사들에게 담을 넘게 하고, 가옥을 불태웠다. 손수는 도망을 꾀했으나, 좌위장군 조천에게 참수되어 본보기로 삼아졌다.[25]
사마륜의 측근은 모두 주살되었고, 사마륜 또한 금용성에 유폐된 후 살해되었다. 사마륜은 최후에 "손수가 나를 그릇되게 했다! 손수가 나를 그릇되게 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27]
참조
[1]
문서
[2]
서적
Jin Shu
[3]
서적
Book of Jin
[4]
서적
Jin Shu
301-05-30
[5]
서적
Jin Shu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Shishuo Xinyu
[8]
문서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Book of Jin
[12]
서적
Book of Ji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Book of Jin
[15]
서적
Jin Shu
[16]
서적
Book of Ji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Jin Shu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Zizhi Tongjian
[21]
서적
Zizhi Tongjian
[22]
서적
Book of Jin
[23]
서적
Jin Shu
[24]
서적
Jin Shu
[25]
서적
Zizhi Tongjian
[26]
서적
Jin Shu
[27]
서적
Jin Shu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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