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혜제
1. 개요
서진의 혜제 사마충은 서진 무제의 아들이자 황제이다. 그는 지적 능력이 부족하여 황위에 오른 후에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고, 부인 가남풍의 전횡과 팔왕의 난으로 서진의 멸망을 초래했다. 그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일화는 《진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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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사마충(司馬衷) |
|---|---|
| 자 | 정도(正度) |
| 묘호 | 없음 |
| 시호 | 효혜황제(孝惠皇帝) |
| 풀 시호 | 효혜황제(孝惠皇帝, xiào huì huángdì) |
| 짧은 시호 | 혜(惠, huì) |
| 출생 | 259년 |
| 사망 | 307년 1월 8일 |
| 왕조 | 서진 |
|---|---|
| 재위 시작 | 290년 5월 16일 |
| 재위 종료 | 307년 1월 8일 |
| 선대 황제 | 무제 |
| 계승 황제 | 회제 |
| 연호 | 영희 : 290년 영평 : 291년 원강 : 291년 - 299년 영강 : 300년 - 301년 영녕 : 301년 - 302년 태안 : 302년 - 303년 영안 : 304년 건무 : 304년 영흥 : 304년 - 306년 광희 : 306년 |
| 부황 | 무제 |
|---|---|
| 모후 | 양원후 |
| 배우자 | 가황후 양헌용 |
| 자녀 | 사마휼 해동공주 임해공주 시평공주 홍농공주 애헌부인 |
| 즉위 전 | 진나라의 황태자 |
|---|---|
| 폐위 후 | 태상황 |
| 능묘 | 태양릉 |
-
259년 출생 -
무도황후
서진 무제 사마염의 황후 양지는 무원황후 양염의 사촌 동생으로, 양염의 유언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나 가남풍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폐위되고 굶어 죽은 뒤 회제 사마치에 의해 황후로 복권되었다. -
서진 무제의 황자 -
서진 회제
서진 회제는 혜제의 뒤를 이어 서진의 제4대 황제가 되었으나, 팔왕의 난과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사마월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흉노족 유연에게 포로로 잡혀 독살되었다. -
서진 무제의 황자 -
사마윤
사마윤은 서진 황족으로 혜제 때 가남풍 폐위와 사마륜 집권에 관여했으나, 사마륜과의 갈등으로 거병했다가 살해된 후 사도에 추증되고 회남충장왕으로 시호되었다. -
3세기 중국의 군주 -
가남풍
가남풍은 서진 혜제의 황후로서 권력을 장악하여 정치를 농단하고 팔왕의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
3세기 중국의 군주 -
사마염
사마염은 서진의 초대 황제로, 조위로부터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하고 삼국시대를 종식시켰으나, 통일 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서진 몰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사마 중은 259년에 사마염과 그의 아내 양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들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형인 사마궤(司馬軌)가 일찍 사망한 후, 생존한 장남이 되었다. 267년, 아버지 사마염이 조위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하자, 9세의 나이로 태자에 임명되었다.
태자 시절 사마 중은 스스로 논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등 발달 장애가 있었다. 한번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개구리는 울고 싶어서 우는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인가?"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272년, 13세가 된 태자 중은 가충의 딸 가남풍과 결혼했다. 가남풍은 2살 연상으로, 역사서에는 폭력적이고 질투심이 많은 인물로 묘사되지만, 태자 중을 통제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가남풍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태자 중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290년, 아버지 사마염이 사망하자 혜제는 32세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능력이 부족하여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고, 황후 가남풍의 세력만 커져 외척의 힘이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팔왕의 난이 발발하여 서진은 통일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혜제는 16년간 재위했지만, 여러 섭정과 실질적인 제후들의 통제를 받아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섭정과 실권자들은 다음과 같다.
306년, 사마월이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혜제는 빵을 먹다가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혜제의 치세 동안 진(晉) 왕조 체제가 붕괴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2.1. 사적
진나라의 연대기인 《진서》에는 혜제가 백성들이 쌀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째서 고기 육(肉)을 넣은 죽을 먹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무능함을 드러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구절과 유사하다.
혜제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동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304년 당음 전투에서 기소는 혜제 곁에 남아 싸운 시종이었다. 기소는 혜제를 화살 세례로부터 몸으로 보호하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피가 황제의 옷에 튀었다. 혜제는 업에서 깨어난 후, 시종들에게 "이것은 기소의 피다. 씻지 말라!"고 외치며 옷을 빨지 못하게 했다.
2.1.1. 어린 시절
259년 아버지 사마염과 어머니 양염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267년 음력 1월 18일 9세의 나이로 아버지인 황제 사마염에게 황태자로 임명되었다 (큰형 사마궤는 영아 시절에 요절하였다.).
278년 10월, 무제는 동궁의 관원들을 모아 상서의 업무에 대해 사마충에게 결재하게 하여, 태자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했다. 그러나 사마충은 이에 답하지 못했고, 가남풍은 급사 장굉에게 대필을 명했다. 장굉은 고사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 탄로날 수 있기에 학문에 약한 사마충도 쓸 수 있을 정도의 겨우 합격점을 넘는 내용의 문장을 만들게 했다. 사마충은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고쳐서 무제에게 제출했고, 무제는 이 답변에 만족하여 매우 기뻐하며 황태자 폐위를 취소했다. 같은 해, 측실 사구와의 사이에 사마휼을 낳았다. 사마휼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마염의 총애를 받았다. 사마염이 어리석다고 평가받는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은 배경에는, 사랑하는 손자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있었다고 한다.
2.1.2. 황제 즉위와 가남풍의 전횡
290년 아버지 사마염이 죽자 사마충은 32세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도 황제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해 국정 운영을 장악하지 못하고 부인인 가충의 딸 황후 가남풍의 실세만 확대되어 외척의 힘이 거대해졌다. 이로 인해 팔왕의 난까지 벌어져 서진은 통일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사마충은 본래 능력이 떨어지고 학문에 뜻이 없어 황제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아버지 사마염도 어느 정도 아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278년 10월 겨울에 상서령 위관의 건의를 계기로 사마충을 시험하기로 한다. 사마염은 우선 동궁(태자의 거처)의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태자와 떨어뜨려 놓은 뒤 태자 사마충에게는 상서대의 의심스러운 사건(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를 편지로 보내 스스로 풀도록 지시한다. 이에 태자비 가남풍은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 대리 답안지를 작성하게 만들었는데 급사(황태자의 수행원)였던 장홍이 대리답안지를 보고는 답안지가 사마충의 수준과 맞지 않게 너무 뛰어난 것을 지적하며 “태자께선 학문이 깊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조서에 대답하며 고의(고전서의 의미)를 많이 인용했으니, 필시 초고를 쓴 임자를 꾸짖고, 다시 더욱 처벌하실 겁니다. 글을 꾸미지 않고 대답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남풍은 장홍에게 지시해 사마충의 수준에 맞는 낮은 수준의 대리 답안지를 만들었고 아버지 사마염은 사마충의 대리답안지에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사마충은 자녀가 매우 적었는데 이는 태자비 가남풍의 전횡 때문이었다. 가남풍은 태자비가 된 직후부터 투기로 여러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사마충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에게 창을 던져서 사산한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아버지 사마염은 분노해 며느리 가남풍을 폐비시키려고 했다가 신하들의 만류로 폐비를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사마충은 후궁 사구 사이에서 장남인 사마휼을 얻게 되고 사마휼이 총명한 모습을 보여주자 아버지 사마염은 손자 사마휼을 믿고 사마충을 후계자로 남겨둔다.
태희 원년(290년) 4월, 무제가 붕어하자 사마충이 즉위했다. 혜제(사마충)는 대사령을 내려 영희로 개원하고, 황후 양지를 황태후로, 태자비 가남풍을 황후로 세웠다. 5월, 사마염을 준양릉에 매장했다. 8월, 사마유를 황태자로 세웠다. 혜제가 뒤를 이은 이후 양지의 아버지인 태부 양준이 조정의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모든 조서는 혜제가 재가한 후 양지가 확인한 다음 발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준은 실정을 연발하고 주변의 간언을 듣지 않아 크게 민심을 잃었다. 또한 양준은 명망 높은 여남왕 사마량을 경계하여 혜제에게 조서를 쓰게 하여 석감과 장소에게 사마량 주살을 명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10월, 화교가 알현하자 가남풍은 이전의 원한에서 혜제를 통해 "경은 전에 짐이 가문을 잇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추궁했다.
영평 원년(291년) 1월, 영평으로 개원했다. 3월, 양씨를 꺼리던 가남풍은 전중중랑 맹관·초왕 사마위 등과 정변을 일으켜 혜제에게 조서를 만들게 하여 양준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선언하게 했다. 이때 양준의 조카인 단광은 꿇어 혜제에게 "양준에게 후계가 없는데 어찌 모반하여 제위를 노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지만, 혜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양준과 그 일족은 모두 주살되었고, 양지는 유폐되어 후에 살해되었다. 게다가 양준의 아내인 팡부인도 처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혜제는 반대했지만, 여러 신하들이 여러 번 호소했기에 거역하지 못하고 재가했다. 한편, 양준의 부하는 모두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은 물리쳤다. 같은 달, 대사령을 내려 원강으로 개원했다.
2.1.3. 잇따른 권력 교체와 팔왕의 난
290년 아버지 사마염이 죽자 사마충은 32세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능력이 부족하여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고, 부인인 황후 가남풍의 세력만 커져 외척의 힘이 비대해졌다. 팔왕의 난까지 벌어져 서진은 통일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혜제의 16년간 재위 기간 동안, 혜제는 여러 섭정 및 실질적인 제후들의 통제를 받으며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섭정 및 실질적 제후의 대략적인 계승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양준: 290년 5월 – 291년 4월 23일
* 사마량/위관: 291년 5월 4일 ~ 7월
* 황후 가남풍: 291년 7월 – 300년 5월
* 사마륜: 300년 5월 – 301년 5월
* 사마경: 301년 6월 – 303년 1월
* 사마애: 303년 1월 – 304년 3월
* 사마영: 304년 4월 - 305년 2월
* 사마옹: 305년 2월 – 306년 6월
* 사마월: 306년 6월 – 307년 1월
양준은 독선적이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 많은 귀족과 관료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이 의지가 강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알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수도 낙양의 모든 방위군 지휘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가남풍은 정치 참여를 원했고, 양태후와 양준에게 계속 거절당해 분노했다. 그녀는 환관 동맹(董猛)과 장군 맹관(孟觀), 이조(李肇)와 함께 양씨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사마량을 음모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대신 혜제의 동생인 사마위 초왕을 설득해 계획에 참여시켰다. 291년 4월, 사마위가 형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온 후 쿠데타가 진행되었다.
가남풍은 남편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기에 양준이 죄를 저질렀으니 직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칙령을 내리도록 했다. 또한 사마위와 사마요 동안공에게 양씨의 군대를 공격하고 반격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양준은 곧 패배했고, 그의 일족은 학살당했다. 양태후는 폐위되어 투옥되었고 292년에 옥사했다. 사마량이 위관과 함께 섭정으로 소환되었다.
사마량은 음모에 참여한 사람들을 널리 승진시켰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사마량과 위관은 정부를 정상화시키려 노력했지만, 가후는 계속해서 정부 일에 간섭했다. 사마위의 보좌관 기성(岐盛)과 공손홍(公孫宏)은 가후에게 사마량과 위관이 황제를 폐위시키려 한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가후는 정부에 대한 더 직접적인 통제를 원했고,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291년 여름, 가후는 혜제에게 친히 사마위에게 칙서를 쓰도록 하여 사마량과 위관을 해임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그의 군대는 두 사람의 저택을 포위했고, 부하들은 저항을 권했지만 거절하고 쉽게 체포되었다. 둘 다 살해되었고, 사마량은 그의 후계자 사마거(司馬矩)와 함께, 위관은 그의 아홉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였다. 가후는 사마위가 칙서를 거짓으로 발포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사마위의 군대는 그를 버렸고, 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사마량과 위관은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다. 이 시점부터 가후는 수년간 왕위 뒤의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되었다.
황후 가씨는 남편 혜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리고 관리들의 상소와 청원에 답했다. 또한 장화, 배위, 가모(賈模), 가미(원래는 한미(韓謐)였지만, 가충의 아들 가려민(賈黎民)의 사후 입양됨)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먼 친척 곽장(郭彰), 여동생 가오(賈午), 무제의 후궁 조찬(趙粲)과도 긴밀하게 지냈다. 그녀는 자제력이 부족하고 난폭했지만, 장, 배, 가모는 정직한 사람들이었고 정치를 잘 유지했다. 그러나 그녀가 점점 더 방종한 행동을 하면서, 장, 배, 가모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태자 유의 어머니 사비(謝妃)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망설였다. 가모가 299년에 사망한 후, 그녀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296년에 적과 강족이 [[진(秦州, 현대 간쑤)]과 옹(雍州, 현대 [[산시]] 북부와 중부)에서 진나라에 대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적 추장 기만년을 황제로 옹립했다. 297년, 진나라 장군 주처는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기만년에게 패배했다. 전쟁으로 인한 기근으로 고통받는 많은 수의 난민들, 대부분 적족 출신이었으며, [[이주(益州, 현대 쓰촨과 충칭)]로 도망갔고, 이특이 그들을 이끌었다. 299년 2월 또는 3월에 맹관(孟觀)은 기만년을 격파할 수 있었지만, 기만년은 미래의 더 심각한 비한족 반란을 예고했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중간 관리인 강통(江統)은 황후 가씨에게 비한족 부족들을 제국 영토에서 제거하고 제국 외곽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청원했지만, 황후 가씨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후 가씨와 태자 유의 관계는 항상 불안했다. 황후 가씨의 어머니 곽회는 황후 가씨에게 태자 유를 잘 대하라고 조언했고, 가미의 여동생을 태자 유와 결혼시킬 것을 옹호했다. 그러나 황후 가씨와 가오는 이에 반대했고, 대신 관료 왕연의 딸을 태자 유와 결혼시켰다. 곽 부인의 사망 후, 황후 가씨와 태자 유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가오와 조비는 그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태자 유와 가미는 서로를 싫어했고, 그 결과 가미는 황후 가씨에게 태자 유를 폐위시킬 것을 조언했다. 300년 초, 황후 가씨는 동의하고 행동을 취했다. 태자 유가 아들 사마빈(司馬彬)을 왕자로 책봉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궁궐에 청원하러 왔을 때, 황후 가씨는 그에게 많은 양의 술을 마시게 했고, 그가 취하자 황제를 살해하고 황후를 옹립하여 황제가 되려는 의사를 선언하는 진술서를 쓰게 했다. 황후 가씨는 그 글을 관리들에게 제시했고 처음에는 태자 유를 처형하려 했지만, 약간의 반대에 부딪혀 그를 폐위시키고 2월에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태자 유의 어머니 사비는 처형되었고, 그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 강준(蔣俊)도 처형되었다.
300년 4월, 황후 가씨는 사마륜 조왕의 조언에 따라 태자 유를 위협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암살자를 보내 태자 유를 암살했다. 그러나 사마륜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후 가씨가 태자를 죽여 그 살인을 그녀를 전복하는 구실로 삼으려 했고, 그해 말에 쿠데타를 일으켜 가미, 장, 배, 그리고 황후 가씨의 다른 측근들을 살해했다. 황후 가씨는 폐위되었고 나중에 자살을 강요받았다. 사마륜과 그의 책략가 손수가 최고의 권력을 잡았다.
사마륜은 태자 유의 명성을 회복시키고 그의 아들 사마장(司馬臧)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사마륜 자신도 황위를 탐냈고, 그는 손수와 함께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권력에 앉히기 시작했다. 혜제의 이복동생인 사마윤(司馬允) 회남왕은 사마륜의 야심을 정확하게 간파했고, 그 결과 사마륜과 손수는 사마윤의 군사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다. 사마윤은 자신에게 군대를 넘기라는 조서를 읽고 손수의 글씨임을 확인한 뒤 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사마륜의 군대에 맞서 성공을 거두어 하루 만에 사마륜의 저택을 거의 함락할 수 있었다. 그날 늦게, 사마윤을 은밀히 지지했던 진준(陳準)은 혜제를 설득하여 황실의 지원을 보여주는 깃발을 사마윤에게 전달하도록 했지만, 그의 사자였던 사마륜의 아들 사마건(司馬虔)의 친구는 대신 사마윤을 속여 깃발을 받게 한 후 그의 목을 베었다. 그의 군대는 그가 죽은 후 흩어졌다.
사마윤을 격파한 후 사마륜은 더욱 황위를 찬탈하려는 의지를 굳혔다. 300년 말, 손수의 제안에 따라 사마륜은 구석(九錫)을 받았다. 그러나 사마륜과 그의 아들들은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했고, 손수가 실제로 정부를 장악했다. 12월에 손수는 그의 먼 친척이자 친구인 손기(孫旂)의 손녀 양현용을 혜제의 황후로 삼기 위해 그와 결혼시켰다.
또한 300년 겨울, 익주(益州)의 지사 조심(趙廞)은 가황후(賈皇后)의 친척으로 반란을 일으켜 익주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 했다. 그는 이특(李特)과 그의 형제 이상(李庠)과 연계했고, 곧 익주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씨 형제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상이 황제를 자칭하자 그를 죽였다. 이특은 분노하여 그의 군대를 이끌고 조심을 죽였다. 이특은 새로운 진(晉)의 지사 낙상(羅尚)을 수도인 성도(成都, 현재 청두시, 쓰촨성)로 맞이했지만, 낙상과 낙상의 주요 책략가였던 신연(辛冉)과 불안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신연은 그의 의도를 깊이 의심하는 이특의 이전 친구였다.
301년 봄, 사마륜은 혜제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혜제에게 태상황이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했다. 그의 찬탈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예를 수여했다. 특히 손수는 자신의 변덕에 따라 조서를 발행했다. 세 명의 핵심 왕자, 즉 혜제의 사촌이자 혜제의 숙부 사마유(司馬攸) 기왕(齊王)의 아들인 사마경(司馬冏), 혜제의 이복 동생인 사마영(司馬穎) 성도왕(成都王), 혜제의 증조부 사마부(司馬孚) 안평왕(安平王)의 손자인 사마옹(司馬雍) 하간왕(河間王)은 각각 강력한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손수는 그의 신뢰받는 부하들을 그들의 보좌관으로 보냈다. 경왕은 이를 거부하고 혜제를 복위시키기 위한 반란을 선포했다. 영왕, 혜제의 이복 동생인 사마애(司馬艾) 장사왕(長沙王) 및 사마신(司馬歆) 신야공(新野公)(혜제의 종조부 사마준의 아들) 모두 경왕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옹왕은 처음에 그의 장군 장방(張方)을 사마륜을 지원하기 위해 보냈지만, 경왕과 영왕이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반군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사마륜의 군대는 경왕과 영왕의 군대에게 쉽게 패배했고, 황제를 칭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사마륜은 반란을 지지하는 낙양(洛陽)의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혜제에게 황위를 돌려주는 조서를 발표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그 후 자살을 강요받았다. 손수와 사마륜의 다른 동료들은 처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제가 죽을 때 바랐던 권력 균형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왕과 영왕은 각각 섭정 칭호를 받았고(그리고 구석(九錫)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구석이 임박한 찬탈의 징조가 아니었던 드문 경우였지만, 영왕은 구석을 거부했다) 많은 유능한 관리들이 중요한 직책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왕과 영왕은 서로의 권력을 실제로 불안하게 생각했고, 영왕은 당시 중앙 정부 섭정을 경왕에게 양보하고 업성으로 돌아가 방어 임무를 맡기로 결정했다.
한편, 뤄 샹(羅尚)은 친(秦)/용(雍)의 난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조(趙)의 반란 기간 동안 약탈한 모든 재산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난민들에게 큰 부담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리 테(李特)는 1년 연장을 요청했다. 뤄 샹(羅尚)은 이에 동의했지만, 신 란(辛冉)과 뤄 샹(羅尚) 휘하의 다른 관리들은 불만을 품고 리 테(李特)를 공격할 계획을 몰래 세웠다. 리 테(李特)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준비했고, 신 란(辛冉)의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다.
수도에서는 사마 츙(司馬冏)이 자신의 업적을 바탕으로 오만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고, 황제를 거의 방문하지 않고 조정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으면서 사저에서 중앙 정부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을 궁궐만큼이나 크게 확장했으며, 측근들에게 업무를 위임했고, 정직한 동료들이 그의 행동을 바꾸려 해도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혜제(惠帝)의 손자 사마 장(司馬臧)과 사마 상(司馬尚)이 잇따라 어린 나이에 죽어 302년까지 혜제(惠帝)에게 남성 후손이 없게 되자, 사마 영(司馬穎)이 적절한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사마 츙(司馬冏)은 7살 된 사마 탄(청하왕(清河王), 혜제(惠帝)의 조카이자 그의 동생 사마 하(司馬遐)의 아들)을 태자로 추천하여 그를 제쳐두고 어린 태자 친(秦)을 쉽게 통제하려 했다.
사마 츙(司馬冏)은 하간왕(河間王) 사마 융(司馬顒)을 의심하게 되었다. 사마 융(司馬顒)은 처음에는 사마 륜(司馬倫)을 지지하려 했으나, 사마 륜(司馬倫)의 대의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사마 융(司馬顒)은 사마 츙(司馬冏)의 의심을 알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장사왕(長沙王) 사마 애(司馬乂)를 초청하여 사마 츙(司馬冏)을 타도하도록 하려 했는데, 이는 사마 애(司馬乂)가 실패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사마 영(司馬穎)과 연합하여 사마 츙(司馬冏)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승리하면 그는 혜제(惠帝)를 폐위하고 사마 영(司馬穎)을 황제로 만들고, 그런 다음 사마 영(司馬穎)의 재상이 되려 했다. 302년 겨울, 사마 융(司馬顒)은 반란을 선포했고, 사마 영(司馬穎)은 책사 로 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 합류했다. 사마 애(司馬乂)도 이 음모의 일부라는 소식을 들은 사마 츙(司馬冏)은 사마 애(司馬乂)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가했지만, 사마 애(司馬乂)는 준비하고 있었고 궁궐로 들어가 혜제(惠帝)를 장악했다. 시가전 끝에 사마 츙(司馬冏)의 군대는 붕괴되었고 그는 처형되었다. 사마 애(司馬乂)는 혜제(惠帝)와 낙양의 조정를 효과적으로 통제했지만, 반대를 줄이기 위해 모든 중요한 문제를 아직 예성(鄴城)에 주둔하고 있는 사마 영(司馬穎)에게 제출했다.
사마애는 제후들 중 유일하게 혜제를 공식적으로 존중하고 공정한 통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보였다. 그는 사마영과 권력을 나누려 계속 노력했다.
한편, 303년 익주(益州)에서 뤄샹(羅尚)은 휴전을 제안하여 이특(李特)을 방심시킨 후, 기습 공격을 가해 이특을 살해했다. 이특의 군대는 그의 동생 이류의 지휘 하에 놓였으나, 이류 역시 그 해 말에 사망했고, 그의 조카 이웅이 뒤를 이었다. 이웅의 지휘 아래 난민군은 뤄샹의 군대뿐만 아니라 형주(荊州, 현대 후베이성 및 후난성)에서 파견된 지원군까지 격파할 수 있었다. 이특의 성공과 동시에 제국 전역에서 많은 농민 반란이 시작되었으며, 그중 하나는 신야왕(新野王) 사마흔(司馬歆)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살해했다.
303년 가을, 사마옹은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지 않자 사마영을 설득하여 다시 사마애에 대항하도록 했다. 사마옹과 사마영은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마애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304년 봄, 사마옹의 군대가 철수하려 할 때, 혜제의 증조부의 손자인 사마월 동해왕(東海王)은 사마애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체포하여 사마옹의 장군 장방(張方)에게 넘겼다. 장방은 사마애를 불태워 잔혹하게 처형했다. 사마영은 실질적으로 정부를 장악했지만, 여전히 예성(鄴城)에서 원격으로 통치했다.
사마영이 실질적으로 정부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태자 였던 진(秦)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태자가 되었으며, 또한 황후 양씨(楊氏)를 폐위시켰는데, 이는 2년 동안 그녀가 겪게 될 4번의 폐위 중 첫 번째였다. 그는 오만하고 사치스러워졌고, 백성들은 실망했다. 이를 본 사마월은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황후 양씨와 태자 진을 다시 그들의 지위로 맞이하고, 혜제의 이름으로 사마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군대는 사마영에게 패배했고, 도주하여 혜제를 사마영의 수중에 둔 채 예성(鄴城)을 떠났다. 사마옹의 군대가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다시 황후 양씨와 태자 진을 폐위시켰다.
이때까지 사마영과 불안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유주(幽州, 현재의 베이징, 톈진, 북부 허베이)의 군사령관 왕준은 사마영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다양한 선비 및 오환 부족과 연합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사마영은 그들을 저항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부하 중 하나인 흉노 귀족 유연을 자신의 부족에게 보내 그들이 자신과 합류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유연이 떠나자 사마영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유연은 이 소식을 듣고 사마영을 돕기 위해 군대를 데려오는 대신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를 한왕(漢王)으로 칭하며, 한나라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는 흉노의 선우와 결혼한 한나라 공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한조를 건국했다. 한 달 전, 이웅(李雄)은 또한 스스로를 성도왕(成都王)으로 칭하며 진(晋)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성한을 건국했다. 이 두 국가는 십육국 시대의 첫 두 국가가 될 것이다.
사마영은 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도망쳤지만, 이제 그를 뒷받침할 군대는 없었다. 상황을 장악한 사마옹은 더 이상 사마영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통제하기로 결정했으며, 사마영은 태자 자리에서 해임되고 혜제의 또 다른 형제인 사마치 유장왕(豫章王)으로 대체되었는데, 그는 학구적이고 겸손하다고 여겨졌다. 사마옹은 또한 장방으로 하여금 혜제를 강제로 자신의 수중에 있는 장안(현재의 시안, 산시)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러나 낙양에는 많은 고위 관료들이 남아 사마옹과 부분적으로 동맹을 맺고 부분적으로 경쟁하는 별도의 정부를 구성했다.
사마옹은 주요 제후들과 군벌들을 승진시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달래려 했지만, 그의 승진은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했다. 한(漢)-조(趙)는 진(晉)의 통치에 실망한 한족과 비한족 농민 및 부족들을 끌어들여 세력과 권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晉) 내부의 내분은 계속되었다. 305년 가을, 사마월은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켜 사마옹이 혜제를 부당하게 강제로 수도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여러 지방의 총독과 군 지휘관들은 어느 한쪽 편에 서야 했다. 전쟁은 처음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306년 초, 사마월이 몇 차례 승리한 후, 사마옹은 두려움을 느껴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장(張)을 처형했지만, 사마월은 거부했다. 306년 여름, 사마옹은 장안(長安)과 혜제를 모두 포기해야 했고, 사마월의 군대는 혜제를 낙양(洛陽)으로 맞이하여 6월 28일에 양황후(楊皇后)를 복위시켰다.
또한 306년에, 이웅과 유연은 자신들을 황제로 칭하며 진으로부터 더욱 분명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광희 원년(306년) 11월, 혜제는 떡을 먹고 체하여 현양전(顯陽殿)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48세로, 태양릉(太陽陵)에 안장되었다. 일설에는 사마월이 독살한 것이라고도 한다.
2.1.4. 최후
혜제(惠帝)는 16년간 재위했지만, 여러 섭정과 실질적인 제후들의 통제를 받아 스스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307년 1월 8일, 혜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빵을 먹다가 독살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마월을 범인으로 여기지만,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이로써 혜제는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치세 동안 진(晉) 왕조 체제가 붕괴되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는 황제였다.
태자 사마치(司馬熾)가 뒤를 이어 즉위하여(회제(懷帝)) 제국을 재건하려 했지만, 이미 진나라는 늦어버렸다. 결국 북중국과 중원 지역을 한-조에게 잃고, 황족의 방계 혈통이 지배하는 남중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혜제는 현양전(顯陽殿)에서 麪餠중국어(곡분(穀粉)을 주재료로 한 경식류)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48세로 붕어했다. 유해는 태양릉에 매장되었다. 팔왕의 난은 혜제의 죽음 다음 달, 사마월이 혜제의 이복 동생인 회제를 신제로 옹립하면서 수습되었지만, 이미 서진의 쇠망을 막을 수 없었고, 건흥 4년(316년)에 멸망했다. 혜제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10년 후였다.
2.2. 일화
서진 혜제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 혜제는 화림원에 있을 때 청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측근에게 "이놈들은 공적으로 우는 것이냐, 사적으로 우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국유지에 있는 것들은 공적으로 울고, 사유지에 있는 것들은 사적으로 웁니다."라고 대답했다.
*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듣자 혜제는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이 일화는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혜제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7세기 중국 진나라의 연대기인 《진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프랑스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구절과 유사하다.
* 기소는 기강의 아들로, 304년 당음 전투에서 혜제를 보호하다가 전사했다. 혜제는 기절했다가 업에서 깨어났고, 시종들에게 옷을 빨지 못하게 하면서 "이것은 기소의 피다. 씻지 말라!"고 외쳤다.
* 사마휼(司馬遹)이 황자들과 놀고 있을 때, 당시 황태자였던 사마충(혜제)은 사마휼이 자신의 아들인 줄 모르고 그의 손을 잡았다. 사마염이 "그것은 너의 아들이다"라고 말하자, 사마충은 그제서야 깨닫고 손을 놓았다.
* 팔왕의 난 당시, 다수의 조서가 나왔지만 대부분 위조된 것이거나 가후 등 주변 인물들의 의향에 따라 쓰인 것이었다. 사마륜(司馬倫)이 작성시킨 위조 조서를 받들고 사마경(司馬冏)이 가후를 체포하러 왔을 때, 가후는 "조칙은 이 나에게서 나올 것이다.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어찌 조칙일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진서》는 혜제를 "재능 없는 아이"라고 평가했으며, 왕부지(王夫之)는 《독통감론》에서 "역대 황제 중 비교할 자가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혹평했다.
3. 가족 관계
; 황후
* 惠賈皇后 賈氏중국어 (257–300): 가남풍의 본명.
하동 공주 (河東公主중국어)
* 300년 10월경 손휴의 아들 손회와 결혼.
홍농 공주 (弘农公主중국어), 이름은 사마선화 (宣華중국어)
* 부지의 아들 부현과 결혼.
시평 공주 (始平公主중국어)
애헌 황녀, 이름은 사마여언 (女彥중국어})
* 獻文皇后 泰山羊氏중국어 (사망 322): 양헌용의 본명.
임해 공주 (臨海公主중국어)
* 조통과 결혼
; 후궁
* 숙원 淑媛 謝氏중국어 (사망 300): 사구의 본명.
** 사마휼, 愍懷皇太子 司馬遹중국어 (278–300): 서진 혜제의 유일한 아들.
4. 연표
| 연호 | 기간 | 햇수 | 간지 | 서력 |
|---|---|---|---|---|
| 영희 (永熙) | 290년 4월 - 12월 | 1년 | 경술(庚戌) | 290년 |
| 영평 (永平) | 291년 1월 - 3월 | 1년 | 신해(辛亥) | 291년 |
| 원강 (元康) | 291년 3월 - 299년 말 | 9년 | 신해(辛亥) ~ 기미(己未) | 291년 - 299년 |
| 영강 (永康) | 300년 - 301년 4월 | 2년 | 경신(庚申) - 신유(辛酉) | 300년 - 301년 |
| 영녕 (永寧) | 301년 4월 - 302년 11월 | 2년 | 신유(辛酉) - 임술(壬戌) | 301년 - 302년 |
| 태안 (太安) | 302년 12월 - 303년 말 | 2년 | 임술(壬戌) - 계해(癸亥) | 302년 - 303년 |
| 영안 (永安) | 304년 1월 - 7월 | 1년 | 갑자(甲子) | 304년 |
| 304년 11월 - 12월 | 갑자(甲子) | 304년 | ||
| 건무 (建武) | 304년 7월 - 11월 | 1년 | 갑자(甲子) | 304년 |
| 영흥 (永興) | 304년 12월 - 306년 6월 | 3년 | 갑자(甲子) - 병인(丙寅) | 304년 - 306년 |
| 광희 (光熙) | 306년 6월 - 12월붕어는 11월이지만, 다음 황제에 의한 개원은 다음 해 정월. | 1년 | 병인(丙寅) | 306년 |
5. 평가
무제는 사마궤가 요절했기 때문에 혜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태시 3년(267년) 1월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중신들 사이에서 혜제의 자질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화교는 "황태자는 매우 순수한 성격이지만, 지금 세상에는 거짓이 많아, 아마도 황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간언했고, 위관은 "이 자리가 아깝다"라며 황태자 폐위를 우회적으로 권했다。
함녕 4년(278년) 10월, 무제는 혜제의 능력을 시험했으나, 혜제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가남풍은 장굉에게 대필을 명했고, 무제는 이 답변에 만족하여 황태자 폐위를 취소했다. 같은 해, 혜제는 측실 사구와의 사이에서 사마휼을 낳았다. 사마휼은 총명하여 사마염의 총애를 받았으며, 혜제가 후계자로 지명된 배경에는 사마염의 손자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고 한다。
혜제 즉위 후, 여러 정책은 군신으로부터 나왔고, 팔왕의 난 당시 조서는 대부분 위조되거나 억지로 쓰여졌다. 기강 문란, 뇌물, 귀족들의 타인 멸시, 충성스럽고 현명한 자들의 길이 끊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참언과 사설을 하는 자들만 이득을 보았고, 천하 사람들은 이를 서로 시장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고평왕 사마침은 『석시론』, 남양 출신 노포는 『전신론』, 여강 출신 두숭은 『임씨춘추』를 저술하여 당시 정치 부패를 비판했다.
5.1. 부정적 평가
7세기 중국 진나라의 연대기인 《진서》에는 혜제가 백성들이 쌀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째서 고기 육(肉)을 넣은 죽을 먹지 않는가?"(何不食肉糜)라고 말하며 무능함을 드러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 문화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구절과 유사하다.
《진서》는 혜제를 어리석은 황제로 묘사하며, "재능 없는 아이"라고 평했다. 후에 왕부지(王夫之)는 《독통감론》에서 더욱 혹평하며 "역대 황제 중 비교할 자가 없는 어리석은 자", "토목 우인의 천주"(흙이나 나무 인형과 같은 조악한 황제)라고 깎아내렸다. 또한, 전처인 양헌용으로부터 "망국의 암부"라고 비난받았다.
사마충(司馬衷)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일화는 정사인 《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화림원(華林園)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고 측근에게 "이 개구리는 공적인 일 때문에 우는 것인가, 아니면 사적인 일 때문에 우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 천하가 황폐해져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어찌하여 육미(肉糜)를 먹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사마광은 혜소(嵆紹)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사실 사마충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척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옹호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마충이 즉위한 이후, 여러 정책은 모두 군신으로부터 나왔다. 팔왕의 난 당시 다수의 조서(詔書)가 내려졌지만, 그 대부분이 위조된 조서이거나 억지로 쓰여진 것이었다. 기강은 크게 문란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갔으며, 귀족들은 타인을 멸시하고, 충성스럽고 현명한 자들의 길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