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센이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쇼센이는 류큐 왕국의 제2 쇼씨 왕조의 인물로, 1477년 류큐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6개월 만에 퇴위했다. 그는 오키나와 영주 쇼엔의 남동생으로, 형 쇼엔이 류큐 왕국을 건국한 후 콧쿠라 왕자로 불렸다. 쇼센이는 쇼엔의 사후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과정에서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조카인 쇼신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쇼센이의 퇴위와 죽음을 쇼신의 어머니 오기야카의 쿠데타로 해석하기도 한다. 쇼센이는 14세기 삿토 이후 명실록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류큐 지도자이며, 그의 딸은 쇼신의 왕비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 파벌 갈등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77년 사망 - 정의공주
태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딸이자 세종의 동생인 정의공주는 1428년 안맹담에게 시집갔으며, 세조 즉위 후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사후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고 정인지, 한확 등과 혼인으로 복잡한 인척 관계를 맺은 4남 2녀를 두었다. - 1477년 사망 - 조석문
조석문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성종실록의 사신에게 천성이 요사스럽고 아첨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조효문, 조계문 형제와 민설의 딸을 어머니로 두고 안숭선과 채하정의 딸과 혼인했다. - 1430년 출생 - 조반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유화 기법을 통해 색채와 빛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사크라 콘베르사치오네' 구도의 작품으로 베네치아 회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1430년 출생 - 밀성군
밀성군 이침은 조선 세종의 아들로 밀성군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역임하고 공신에 책록되는 등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묘소는 하남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15세기 일본 사람 -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으로, 오닌의 난 발발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히가시야마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 15세기 일본 사람 - 고코마쓰 천황
고코마쓰 천황은 남북조 시대 혼란을 종식시키고 북조 황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남북조 교대 약속을 어기고 아들에게 양위하여 비판받은 일본 제100대 천황이다.
쇼센이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통치 정보 | |
생애 정보 | |
가문 정보 | |
기타 정보 |
2. 생애
쇼 센이는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의 제2대 국왕이다. 쇼엔 왕의 남동생으로, 1469년 형이 왕위에 오른 후 왕족이 되었다. 18세기 추잔 세이후|추잔 족보일본어에 따르면, 쇼엔 왕의 아들 쇼신 왕이 후계자로 지정되었으나, 쇼신 왕이 어려 왕국의 관리들이 센이를 대신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1]
그러나 쇼 센이의 통치는 짧았다.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르면, 즉위식 때 고위 여사제들이 잘못된 방향을 향하는 등 의식에 문제가 있어 저주가 내려졌다고 한다. 결국 6개월 만에 "하늘의 분노"를 샀다는 이유로 조카 쇼신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했으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쇼 센이는 오키나와 영주 카네마루(金丸)의 남동생이었다. 1650년의 연대기 추잔 세이칸|추잔의 반성일본어은 센이가 다섯 살 때 부모를 떠나 카네마루에게 길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다.[1] 1469년, 쇼 토쿠 왕의 죽음 이후, 카네마루는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추잔의 왕위에 임명되었고, 쇼 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류큐 왕국의 제2 쇼 왕조를 창건했다.쇼 엔의 출생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 섬 북쪽에 있는 작은 섬인 이즈나 섬이었다. 그는 물 문제로 이웃과 다툰 후 오키나와로 도망쳐 지역 영주가 되었다고 한다. 류큐 왕국의 공식 역사서에는 엔과 센이의 아버지를 쇼 쇼쿠라고 명시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16세기 오모로 소시|류큐의 노래 모음일본어에서 얻은 증거를 바탕으로, 역사가 그레고리 스미츠는 제2 쇼 왕조의 원래 근거지가 나키진 기원을 둔 니시하라, 오키나와의 우치마, 오키나와 마을이었으며, 류큐 열도와 일본 북부 섬에 더 깊은 가족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쇼엔 왕의 통치 기간 중 41세에 센이는 아마도 쇼 타이큐 왕의 원래 권력 기반이었던 고에쿠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타이큐와의 밀접한 관련 때문에, 이는 센이에 대한 정치적 호의를 보여주는 것이자 그가 왕위 계승자로 예상되었음을 나타내는 신호였을 것이다.
센이는 5세(만 나이) 때 부모를 여의고, 이후 형인 카네마루(후의 쇼엔)에게 양육되었다. 9세 때 형을 따라 슈리로 이주했다. 1453년(경태 4년), 가신 아카아타로 승격되었고, 1463년(천순 7년)에는 황관을 하사받았다. 형인 쇼엔 왕 즉위 후, 콧쿠라(현 오키나와시 콧쿠라 부근)를 영지로 하여 콧쿠라 왕자라고 칭했다.
2. 2. 즉위와 퇴위
쇼센이는 5세(만 나이) 때 부모를 여의고, 형인 카네마루(후의 쇼엔 왕)에게 양육되었다. 9세 때 형을 따라 슈리로 이주했다. 1453년(경태 4년), 가신 아카아타로 승격, 1463년(천순 7년), 황관을 하사받았다. 형인 쇼엔 왕 즉위 후, 콧쿠라(현 오키나와시 콧쿠라 부근)를 영지로 하여 콧쿠라 왕자라고 칭했다.쇼엔 왕이 1476년(성화 12년)에 훙거하자, 이듬해 세자인 쇼신 왕이 아직 어리다는 점도 있어 여러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해 2월, 양신 키미테즈리가 나타나 그 신탁에 의해 불과 반년 만에 퇴위했다. 신탁은 여관을 장악하고 있던 쇼신 왕의 어머니 우키야카가 꾸민 것으로 생각된다.[1]
퇴위 후 콧쿠라에 은둔하다가 곧 훙거했다. 콧쿠라의 땅은 아들인 쵸리(장남, 묘시 유카와 톤도노우치 1세)·쵸에키(차남, 유카와 톤도노우치 2세)의 영지가 되었다. 제2 쇼씨 왕조 제2대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묘는 쇼신 왕이 오기야카의 영향 하에 조영한 다마우둔이 아닌, 콧쿠라(현 오키나와시 카마라 3초메 부근: 학교 급식 센터 근처)에 있다.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르면 쇼센이의 즉위는 적절한 의식을 따르지 못해 그의 통치에 저주가 내려졌다고 한다. 즉위식에서 고위 여사제들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해, 참석자 모두(쇼센이 포함)가 정신이 멍해지고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쇼센이는 6개월 동안 통치한 후, 부적절한 통치로 인해 "하늘의 분노"를 샀다고 말하며 조카 쇼신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에쿠로 돌아갔으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스미츠와 高良倉吉|다카라 구라요시jp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 신화를 쇼신 왕(사건 당시 13세)을 위해 그의 어머니 오기야카가 쇼센이에게 가한 쿠데타로 추정하는데, 오기야카는 아들을 위해 왕위를 찬탈하고 쇼센이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 후 20년 동안, 정기적인 무역과 조공 관련 서신 외에는 추잔에서 기록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다. 이는 쿠데타 이후 집권 왕조 내부의 왕조 간의 전쟁과 폭력 때문일 수 있다.
2. 3. 사망과 유산
공식 역사 기록에 따르면, 쇼센이의 즉위식은 적절한 의식을 따르지 않아 그의 통치에 저주가 내려졌다고 한다. 즉위식에서 고위 여사제들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했고, 이로 인해 참석자 모두(쇼센이 포함)가 정신이 멍해지고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6개월 동안 통치한 후, 그는 부적절한 통치로 인해 "하늘의 분노"를 샀다고 말하며 조카 쇼 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에쿠로 돌아갔다.[1]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쇼센이는 사망했다.스미츠와 高良倉吉|다카라 구라요시일본어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 신화를 쇼 신(사건 당시 13세)을 위해 그의 어머니 오기야카가 쇼센이에게 가한 쿠데타로 보고 있는데, 오기야카는 아들을 위해 왕위를 찬탈하고 쇼센이를 살해했다. 그 후 20년 동안, 정기적인 무역과 조공 관련 서신 외에는 추잔에서 기록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쿠데타 이후 집권 왕조 내부의 왕조 간의 전쟁과 폭력 때문일 수 있다. 쇼센이는 사후 신성한 이름 니시노 유누누시(西之世主|니시노 유누누시일본어)를 받았다. 그의 치세는 ''추잔 세이칸''의 한 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후계자 쇼 신의 치세에 대해서는 그러한 장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통치 하에 많은 군사적, 정치적 갈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쇼센이는 14세기 왕 삿토 이후 명실록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류큐 지도자였다.
쇼 신은 쇼센이의 딸 교진을 첫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들은 쇼 이코 (1494–1540)라는 아들을 낳았다. 쇼 신의 왕실 묘소인 타마우둔의 비문에는 쇼 신의 셋째부터 일곱째 아들을 포함하여 후손이 묘소에 안장될 여덟 명의 인물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쇼센이의 후손인 쇼 신의 첫 두 아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쇼 이코와 쇼센이의 직계 후손인 쇼 네이는 1589년에 왕위에 올라 지속적인 파벌 갈등을 촉발했고 1592년에 그의 통치에 대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쇼센이의 후손이라는 점이 그의 왕위 정통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쇼센이의 묘는 쇼 신이 오기야카의 영향 하에 조영한 타마우둔이 아닌, 콧쿠라(현 오키나와시 가마라 3초메 부근: 학교 급식 센터 근처)에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쇼쇼쿠 | |
어머니 | 스이운(瑞雲) | |
왕비 | 미상 | |
자녀 | ||
장남 | 쇼툐(일본 이름: 고에쿠왕자 쵸리 越来王子朝理) | |
차남 | 쇼테이(일본 이름: 미사토왕자 쵸이 見里王子朝易) | |
장녀 | 쇼씨 쿄진(尚氏居仁) | 쇼신왕의 왕비 |
참조
[1]
서적
琉球・沖縄史
東洋企画
[2]
웹인용
http://ir.lib.u-ryuk[...]
2021-05-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