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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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의 민씨는 여흥 민씨 민효손의 딸로, 연산군의 후궁이다. 1503년(연산군 9년) 숙의로 불린 기록이 있으며, 연산군 재위 기간 동안 가옥을 하사받는 등 특혜를 받았다. 연산군 폐위 후 사가로 돌아갔으며, 아버지 민효손은 숙의의 아비라는 이유로 탄핵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었다. 1519년(중종 1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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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민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후궁 (숙의) |
배우자 | 연산군 |
자녀 | 없음 |
왕조 | 조선 |
가계 | |
아버지 | 민효손 |
어머니 | 윤지강의 딸 |
친척 | 윤금손(외숙부) 등 |
생애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조선 |
사망지 | 조선 |
사망일 | 1519년 음력 12월 이전 |
기타 | |
국적 | 조선 |
2. 생애
연산군의 후궁이다. 아버지는 여흥 민씨[1] 민효손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 윤지강의 딸이다.[2]
1503년(연산군 9년) 음력 6월 22일 민씨의 외숙부 윤금손을 가선대부에 제수한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릴 때 해당 내용을 기록한 《연산군일기》에서 숙의 민씨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숙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3]
이후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7월 26일 살던 가옥이 철거되어 연산군으로부터 집값으로 면포 2900필을 받았고,[6] 음력 8월 5일에는 귀양 간 봉안군(연산군의 이복동생)의 집을 하사받았다.[7] 그러나 1506년 음력 1월 21일 민씨의 집이 금표 안에 들자, 종실 열산정의 집을 하사받았다.[8]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족 출신 후궁들과 함께 사제로 돌아갔다.[9] 1519년(중종 14년) 음력 12월 17일 기록에 연산군의 숙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숙의 곽씨와 숙의 윤씨 뿐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12]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2. 1. 입궁 및 후궁 책봉
숙의 민씨가 언제 후궁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503년(연산군 9년) 음력 6월 22일, 민씨의 외숙부 윤금손을 가선대부에 제수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릴 때 해당 내용을 기록한 《연산군일기》에서 숙의 민씨로 칭하고 있다. 이를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숙의가 된 것으로 보인다.[3]당시 윤금손은 이미 두 품계를 뛰어넘어 당상관의 위치에 오른 상태에서 또 가선대부를 증직받은 것이었는데,[4] 윤금손이 가선대부에 오른 것이 민씨의 외숙이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던 듯하다.[3] 한편, 민씨의 아버지 민효손도 1506년(연산군 12년) 음력 2월 18일 다른 후궁들의 아버지와 함께 당상관에 제수되었다.[5]
2. 2. 연산군과의 관계
숙의 민씨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살던 집이 철거되면서 연산군에게서 집값으로 면포 2,900필을 받았다.[6] 같은 해 음력 8월 5일에는 귀양 간 봉안군(연산군의 이복 동생)의 집을 하사받았으나,[7] 1506년(연산군 12년) 음력 1월 21일 민씨의 집이 금표 안에 들자 종실 열산정의 집을 대신 하사받았다.[8] 이는 연산군의 사치와 총애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2. 3. 중종반정 이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민씨를 비롯한 사족 출신 후궁들은 모두 사제로 돌아갔다.[9] 1506년(중종 원년) 음력 9월 6일, 민씨의 아버지 민효손은 숙의의 아비라는 이유로 당상에 제수되었다 하여 탄핵되었으나,[10]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용되었다. 대간에서 다시 탄핵하였으나, 중종은 민효손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없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11]이후 민씨의 사망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519년(중종 14년) 음력 12월 17일 기록에 연산군의 숙의 중 생존자는 숙의 곽씨와 숙의 윤씨뿐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12]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민효손 |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윤지강의 딸 | |
남매 | 민세구(閔世球) | |
남매 | 민세류(閔世瑠) | |
남매 | 민세원(閔世瑗) | |
시아버지 | 성종 | 1457~1494, 재위: 1469~1494 |
시어머니 | 폐비 윤씨 | 1455~1482 |
남편 | 연산군 | 1476~1506, 재위: 1494~1506 |
3. 1. 친정
아버지는 민효손(생몰년 미상)이며, 어머니는 윤지강의 딸이다. 형제자매로는 민세구(閔世球), 민세류(閔世瑠), 민세원(閔世瑗)이 있다.3. 2. 시가
- 시아버지 : 제9대 성종(1457~1494, 재위:1469~1494)
- 시어머니 : 폐비 윤씨(1455~1482)
- 남편 : 제10대 연산군(1476~1506, 재위:1494~1506)
참조
[1]
웹사이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센터 《만가보》
http://kostma.net/Fa[...]
[2]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윤금손〉항목
http://people.aks.ac[...]
[3]
간행물
연산군일기 50권, 연산 9년 6월 22일 정사 2번째기사
[4]
간행물
연산군일기 50권, 연산 9년 6월 12일 정미 2번째기사
[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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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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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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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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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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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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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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