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스즈키 미키사부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즈키 미키사부로는 1837년 시즈쿠 번에서 태어난 일본의 무사이다.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고 신선조에 가입하여 메츠케, 9번대 조장 등을 역임했다. 신선조를 탈퇴한 후 어릉위사에 합류하여 형의 복수를 시도했으며,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탄정대 순찰, 사법 및 경찰 관련 업무를 수행했으며, 1885년 퇴관 후 이시오카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9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적보대원 - 시노하라 다이노신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구루메번 출신의 무사로, 신센구미 감찰 및 유술 사범, 고료에이지 결성, 보신 전쟁 참여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하타 린신으로 개명하여 관료 및 실업가로 활동하다 만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
  • 일본의 경찰관 - 쓰다 산조
    쓰다 산조는 1891년 오쓰 사건으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 암살을 시도한 인물로, 사무라이 가문 출신 육군 및 경찰 근무 경력이 있으며, 암살 동기는 불분명하나 불평등 조약 및 니콜라이 2세의 행동에 대한 불만 등 여러 설이 존재하고, 무기징역 중 폐렴으로 사망하여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있으며,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러시아 외교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경찰관 - 사이토 하지메
    사이토 하지메는 신센구미의 핵심 인물이자 뛰어난 검객으로, 신센구미 부장 조근으로서 활약하고 보신 전쟁 이후에는 후지타 고로로 개명하여 경찰로 활동하는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았으며, 그의 삶과 업적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매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 고료에지 - 사이토 하지메
    사이토 하지메는 신센구미의 핵심 인물이자 뛰어난 검객으로, 신센구미 부장 조근으로서 활약하고 보신 전쟁 이후에는 후지타 고로로 개명하여 경찰로 활동하는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았으며, 그의 삶과 업적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매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 고료에지 - 도도 헤이스케
    도도 헤이스케는 막말 신선조의 대사로, 호쿠신 잇토류를 수련하고 부장 조킨, 8번대 조장 등을 역임했으나 이토 가시타로와 함께 신선조를 이탈하여 고료에이지를 결성,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암살당했으며, 신선조 사천왕으로도 불린다.
스즈키 미키사부로
기본 정보
스즈키 미키사부로
스즈키 미키사부로
이름스즈키 미키사부로
일본어 표기鈴木 三樹三郎
로마자 표기Suzuki Mikisaburō
다른 이름츠다 사부로 (津田 三郎)
나카지마 사부로 (中島 三郎)
출생
출생일분세이 12년 1월 13일 (1829년 2월 16일)
사망일게이오 4년 5월 17일 (1868년 7월 6일)
출생지일본 무사시국
신분
직업신센구미 대원
소속신센구미
직책감찰
가족 관계
아버지스즈키 간에몬 (鈴木 勘右衛門)
어머니이치카와 씨 (市川氏)
형제자매형: 스즈키 도라오 (鈴木 虎雄)
누나: 2명
아내미상
자녀미상

2. 생애

1837년(덴포 8년), 히타치 시즈쿠 번사 스즈키 센에몬 타다아키의 차남으로 시즈쿠에서 태어났다. 친형은 이토 가시타로이며, 사위는 영어 교사 오노 게이지로이다.

아버지 타다아키는 번에서 추방된 후 다카하마 마을(현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에서 사숙을 운영했다. 1852년 아버지 사망 후, 16세의 미키사부로가 사숙을 이어받았으나, 수업을 소홀히 하고 "구스노키 다몬마루"라고 크게 쓴 깃발을 내걸고 전투 흉내만 내어 학생이 줄어들어 폐쇄되었다. 이후 같은 번사 테라우치 마스에몬의 양자가 되어 '''테라우치 타몬'''으로 개명, 번의 산림 관리 및 경호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음주 등의 비행으로 파혼당한 후, '''미키 아라지로'''로 개명했다.

존왕양이 운동을 위해 탈번한 미키사부로는 에도 후카가와 나카가와초의 도장 주인이자 형인 이토 가시타로(고시타로)에게 의탁했다. 사쿠라다몬 외의 변 이후 낭인 단속이 엄격해진 에도를 떠나 수년간 히타치국 다가군에서 은거했다. 겐지 원년(1862년), 덴구당의 난 때 형의 수색 의뢰를 받고 시즈쿠로 돌아왔다. 도중에 쓰치우라 사쿠라이 여관에서 우연히 덴구당과 마주쳤지만, 서로 경계하여 말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1864년 10월, 도도 헤이스케의 신선조 대사 모집에 가츠라 고시타로, 시노하라 야스노신 등과 교토로 상경하여 신선조에 가입했다. 이때 '''미키 사부로'''로 개명하고 메츠케를 맡았다. 1865년 9번대 조장이 되었으나, 후에 강등되었다.

1867년 3월, 형 등과 신선조에서 분리, 어릉위사(고다이지당)에 합류하여 '''미키 사부로''' 또는 '''미키 이즈미'''라고 칭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형 가츠라 고시타로가 신선조에 암살당했다(아부라노코지 사건). 형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신선조와 난투를 벌였고, 가노 와시오, 도야마 야헤에와 함께 사쓰마 번 저택에 보호받았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사쓰마 번 나카무라 한지로의 지휘 아래 후시미 봉행소의 신선조와 싸웠다.

1869년 7월 탄정대 소순찰이 되었다. 폐번치현 후, '''충량'''으로 개명했다. 사법성, 이나현, 지바현, 야마가타현 등에서 사법, 경찰 관계에 봉직했으며, 1879년 쓰루오카 경찰경찰서장으로서 천황 행차를 지휘했다. 1885년 1월, 후쿠시마현이등속을 마지막으로 퇴관한 후,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정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9년, 노쇠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2. 1. 출생과 초기 이력

1837년(덴포 8년), 히타치 시즈쿠 번사 스즈키 센에몬 타다아키의 차남으로 시즈쿠에서 태어났다. 친형은 이토 가시타로이다. 사위로는 영어 교사인 오노 게이지로가 있다.

아버지 타다아키는 번에서 추방된 후 다카하마 마을(현: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에서 사숙을 운영했다. 1852년 아버지 타다아키가 사망하자, 미키사부로는 16세의 나이로 사숙을 운영했다. 그러나 수업을 소홀히 하고 "구스노키 다몬마루"라고 크게 쓴 깃발을 내걸고 전투 흉내만 낸 결과, 학생이 줄어들어 결국 사숙은 폐쇄되었다. 이후 같은 번사인 테라우치 마스에몬의 양자가 되어 '''테라우치 타몬'''으로 개명하고, 번의 산림 관리 및 경호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음주 등의 비행 때문에 파혼당한 후, '''미키 아라지로'''로 개명했다.

존왕양이 운동을 위해 탈번한 미키사부로는 에도 후카가와 나카가와초의 도장 주인이자 형인 이토 가시타로(고시타로)에게 의탁했다. 사쿠라다몬 외의 변 이후 낭인에 대한 단속이 엄격해진 에도를 떠나 수년 동안 히타치국 다가군에서 은거했다. 겐지 원년(1862년), 덴구당의 난 때 형의 수색 의뢰를 받고 시즈쿠로 돌아왔다. 도중에 쓰치우라의 사쿠라이 여관에서 우연히 덴구당과 마주쳤지만, 서로 경계하여 말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2. 2. 신선조와 어릉위사 시대

1864년 10월, 도도 헤이스케의 신선조 대사 모집 요청에 응하여, 가츠라 고시타로나 시노하라 야스노신 등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신선조에 가입했다. 이때, '''미키 사부로'''로 개명하고 메츠케를 맡았다. 1865년에는 9번대 조장이 되었으나, 후에 강등되었다.

1867년 3월, 형 등과 함께 신선조에서 분리되어, 어릉위사(고다이지당)에 합류하여 '''미키 사부로''' 또는 '''미키 이즈미'''라고 칭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형 가츠라 고시타로가 신선조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부라노코지 사건). 형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신선조와 난투를 벌였고, 가노 와시오·도야마 야헤에와 함께 사쓰마 번 저택에 보호받았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사쓰마 번의 나카무라 한지로의 지휘 아래에 들어가 후시미 봉행소의 신선조와 싸웠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7월 탄정대 소순찰이 되었다. 폐번치현 후, '''충량'''으로 개명했다. 사법성, 이나현, 지바현, 야마가타현 등에서 주로 사법·경찰 관계에 봉직했으며, 1879년에는 쓰루오카 경찰경찰서장으로서 천황의 행차를 지휘했다. 1885년 1월, 후쿠시마현이등속을 마지막으로 퇴관한 후, 이바라키현이시오카정에서 여생을 보냈다.

1919년, 노쇠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3. 평가 및 기타

학문과 변론에 뛰어났지만, 꼼꼼한 성격이 화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1867년 11월 곤도 이사미후시미 스미조메 주변에서 습격당했을 때, 미키사부로는 부재중이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