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무라번 (무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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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무라번은 1787년 뇌물 정치로 실각한 다누마 오키쓰구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가 다스리면서 시작된 무쓰국의 번이다. 다누마 가문은 5대에 걸쳐 시모무라번을 통치했으며, 5대 번주 다누마 오키마사는 막부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823년, 다누마 오키마사가 옛 영지인 사가라로 복귀하면서 시모무라번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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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무라번 (무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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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육오쿠시모무라 번 (陸奥下村藩) |
별칭 | 시모무라 번 (下村藩) |
번 종류 | 존왕양이 파, 후에는 신정부군에 합류 |
통칭 | 무쓰시모무라 번 (陸奥下村藩) |
번 정보 | |
국가 | 일본 |
지방 | 동북 지방 |
위치 | 무쓰국 시모키타 군 (현재의 아오모리현 무쓰시 시모키타 반도) |
성 | 시모무라 진야 (下村陣屋) |
역사 | |
입번 | 겐나 원년 (1615년) |
번 성립 | 모리 오카즈가 히타치국에서 이봉 |
폐번 | 메이지 2년 (1869년) |
번 주 | 모리 가문 |
통치 | |
번주 가문 | 모리 가문 (森家) |
등급 | 후다이 |
석고 | 1만 석 |
지도 |
2. 번의 역사
1787년,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가 뇌물 정치로 실각하고 은거, 근신 처분을 받으면서 다누마 오키아키가 그 뒤를 이었다. 다누마 가문은 도토미노쿠니 사가라번의 5만 7천 석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처벌로 1만 석이 삭감되고 무쓰국 시모무라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후 5대에 걸쳐 통치가 이어졌다.
5대 번주 다누마 오키마사는 로주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미즈노의 실각으로 무산되었다. 1818년,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로주로 취임하면서 오키마사도 와카도시요리에 발탁되어 막부 정치에 참여하였다.
1823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미즈노 다다아키라의 도움으로 오키마사는 옛 영지인 사가라번으로 복귀했고, 시모무라번은 폐지되었다. 막부 각료들은 사가라 복귀에 반발했으나, 이에나리는 오키쓰구가 자신의 쇼군 취임에 협력한 점, 오키마사의 장래성을 고려하여 오키쓰구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복귀를 추진했다고 한다.
2. 1. 번의 성립
1787년, 뇌물 정치로 악명 높았던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고 은거하며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때 다누마 가문은 오키쓰구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가 계승하였는데, 원래 오키쓰구는 도토미노쿠니 사가라번의 5만 7천 석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처벌로 1만 석이 삭감되고 무쓰국 시모무라번으로 이봉되어 새로 번을 세우게 되었다.2. 2. 번주 교체와 막부 정치 참여
1787년, 뇌물 정치로 유명했던 로주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고 은거하여 근신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다누마 가문은 오키쓰구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가 계승하였는데, 처벌조로 1만 석 삭감을 당하고 이봉되어 무쓰노쿠니 시모무라번을 새로 세우게 되었다. 이후 5대에 걸친 통치가 이어졌다.5대 번주 다누마 오키마사는 원래 로주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가 되기로 하였으나 미즈노가 실각하면서 양자 약속이 깨졌다. 하지만 1818년, 다다토모의 새 양자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로주로 취임하면서 오키마사도 와카도시요리에 발탁되어 막부 정치에 참여하였다.
덴메이 7년(1787년) 10월,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한 후, 다누마 가문의 가독은 오키쓰구의 손자인 다누마 오키아키가 이었다. 처벌로 1만 석으로 감봉된 후, 시모무라 번을 입번하게 되었다. 다누마 가문은 그 후, 오키아키에서 동생인 오키카즈와 오키노부, 오키쓰구의 동생의 손자인 오키사다로 이어졌고, 분카 원년(1804년) 제5대 번주로서 오키토모의 동생인 다누마 오키마사가 취임했다. 오키마사는 과거에는 미즈노 타다노리라고 칭했고,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실각에 따라 그 양자 연을 해소했다. 그러나 분세이 원년(1818년)에 다다토모의 뒤를 이은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노중이 되자, 오키마사도 와카도시요리에 발탁되어 막정에 참여했다.
분세이 6년(1823년), 미즈노 다다아키라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배려로 오키마사는 다시 옛 영지인 사가라로 옮겨가게 되었고, 시모무라 번은 폐번되었다.
2. 3. 사가라번 복귀와 폐번
1823년 다누마 오키마사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로주 미즈노 다다아키라의 지원으로 사가라번으로 복귀했고, 시모무라번은 폐지되었다.다누마 오키쓰구 실각 후, 그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가 가문을 계승하여 사가라번에서 1만 석이 삭감된 시모무라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후 5대 번주 다누마 오키마사는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 1818년 다다토모의 양자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로주로 취임하면서 오키마사도 와카도시요리에 발탁되어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사가라 복귀에는 막부 각료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오키쓰구가 자신의 쇼군 취임에 협력한 점과 오키마사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여 오키쓰구의 명예회복 차원에서 복귀를 추진했다고 한다.
3. 역대 번주
시모무라번의 역대 번주는 다누마 가문이다.
3. 1. [[다누마 가문]] ({{lang|ja|田沼家}})
이름 | 재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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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마 오키아키 (田沼意明|다누마 오키아키일본어) | 1787년 ~ 1796년 |
다누마 오키카즈 (田沼意壱|다누마 오키카즈일본어) | 1796년 ~ 1800년 |
다누마 오키노부 (田沼意信|다누마 오키노부일본어) | 1800년 ~ 1803년 |
다누마 오키사다 (田沼意定|다누마 오키사다일본어) | 1803년 ~ 1804년 |
다누마 오키마사 (田沼意正|다누마 오키마사일본어) | 1804년 ~ 1823년 |
4. 평가
덴메이 7년(1787년) 10월, 노중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면서 다누마 가문은 엔슈 사가라 번 5만 7천 석에서 1만 석으로 감봉된 후 시모무라 번으로 옮겨졌다. 다누마 가문은 다누마 오키아키, 오키카즈, 오키노부, 오키사다를 거쳐, 분카 원년(1804년) 5대 번주로 다누마 오키마사가 취임했다. 오키마사는 와카도시요리에 발탁되어 막정에 참여했다.
분세이 6년(182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배려로 오키마사는 사가라 번으로 다시 옮겨졌고, 시모무라 번은 폐번되었다. 이에나리는 오키쓰구가 자신의 쇼군 취임에 협력한 점, 오키마사의 장래성, 오키쓰구의 명예 회복 등을 이유로 반대를 무릅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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